새벽까지 셋이 뒹굴다가 눈을 떴을 땐 요한 혼자였다. 널찍한 침대 위에 요한은 홀로 체액에 절어 눅눅해진 이불을 끌어안고 있었다.

정원이야 없든 말든 알 바 아니지만, 지우는?

요한은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주울 정신도 없이 허겁지겁 방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곧장 정원의 방문을 열자 곱게 누운 지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정원이 옮긴 모양이었다.

이를 득득 간 요한이 중얼거렸다. 개 씹새끼.

인기척이 전혀 없는 거실 쪽으로 날 선 시선을 던진 요한이 지우 혼자뿐인 방안으로 한발 내디뎠다. 제가 들어간 걸 알면 정원이 또 집을 엎을 테지만 뭐 어떤가. 도둑 새끼 없는 사이에 내가 내 거 찾아가는 건데.

한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않는 자신을 탓하며 요한은 지우에게 다가섰다. 일단 제 방으로 데려가야겠다 생각하며 목과 무릎 뒤로 살며시 손을 넣던 그때, 지우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팔에 선 근육이 움찔하며 살짝 뜬 몸을 도로 침대에 내렸다.

"깼어? 몸은 어때?"

얼마나 울었는지 붕어처럼 퉁퉁 부은 눈은 반도 채 뜨기 힘들어 보였다. 그 위로 쪽, 쪽 입술을 내린 요한이 고개를 모로 하며 입술을 삼키려 했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돌리는 지우에게 막혔다.

"왜 그래, 자기야. 아침부터."

"…꺼져."

"같이 욕실로 꺼질까? 씻겨줄-,"

탁!

다시금 안아 들려던 팔이 지우의 손에 내쳐졌다. 힘이 다 빠져 매섭긴커녕 밀리지도 않았지만, 의도만큼은 명확했다.

"또 뭐에 삐지셨나."

답 없이 돌아누우려던 지우는 그 작은 몸짓에도 하얗게 질려 끙끙댔다.

어제 너무 무리한 건가.

"많이 안 좋아? 의사 부를까?"

"하, 왜? 또 의사한테 지랄하려고? 이렇게, 윽, 하아…. 됐어."

이미 몇 차례 지우의 아래를 확인하려는 의사에게 난리를 친 전적이 있는 터라 이렇다 할 변명도 못 하고 요한은 말을 돌렸다.

"어디가 아픈데? 응? 말이라도 좀 해 봐."

"네가 꺼져주면 나을 것 같아."

꼴도 보기 싫다고 중얼거리는 지우는 이제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젯밤 제가 심하긴 심했나보다 싶어 미안해졌지만, 한편으론 억울했다. 같이 넣고 쑤신 정원도 있는데 왜 저에게만 꺼지라는 건가. 그것도 정원의 침대에 곱게 누워선.

하지만 저 상태의 지우에게 이 말을 했다간 본전도 못 건질 게 분명했기에 요한은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너 나을 때까지 안 건드릴게. 그러니까 일단 팔 좀 줘봐. 씻으러 가자."

이래선 답이 없겠다 싶어 일부러 지우가 좋아할 만한 말을 꺼내도 통하지 않았다. '특별한 날'의 '특별한 관계' 후에는 늘 예민의 정점을 찍는 지우였기에 두 사람도 마음의 준비를 철저히 하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심했다.

"그냥 두라고."

"너 계속 두면 배 아프잖아."

그렇게 말하며 이불을 걷던 요한이 이내 드러난 처참한 아래에 경악했다. 힘없이 너부러진 다리 사이로 분홍빛을 띠는 체액이 시트를 적시고 있었다.

가느다란 다리가 파들거리며 흔적을 숨기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뭔가 해야겠다는 건 알겠는데 너무 놀라 말문마저 막혀버린 요한을 두고 지우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퍼뜩 정신을 차린 요한이 핸드폰을 찾아 방을 뛰쳐나가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에 겨우 닿은 미약한 손길을 느끼곤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

"그래도…."

"넌 나 위해주는 척하면서 맨날 내 말 무시하지?"

벌겋게 익은 얼굴로 악을 쓰는 지우를 보는 요한은 요한대로 속이 탔다. 일단 처치부터 하면 그 뒤엔 얼마든지 들어주고 사과할 텐데. 어젯밤 아프다고 울부짖는 지우의 반응에도 으레 하는 거겠거니 했는데 정말 아팠던 건가 보다.

죄책감과 안쓰러움, 자신에 대한 분노에 가슴이 새까맣게 타는 듯했다.

"미안해. 그러니까 일단 치료부터 하자."

"됐으니까 꺼지라고! 아니, 됐어. 그냥 나 좀 놔 줘."

"뭐?"

평소 지우가 입버릇처럼 하던 내버려 두라는 말과는 달랐다.

"이쯤 했으면 되잖아! 십 년이야. 대체 언제까지 할 건데?"

"…의사 부를게. 너 이대로 두면 안 돼. 나중에 다 들어줄 테니까 일단 기다려."

당연히 화를 내리라 생각했지만, 지우에게서 나온 말은 단순 화가 아니었다. 요한은 제가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그 말을 듣자마자 자신은 지우를 가둬두고 평생 옆에 옭아매려 했던 그 날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의사의 방문이 싫다는 지우를 억지로 재우게 한 요한은 치료가 끝난 지우 곁을 지켰다. 잠든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많이 아픈 건지 잠든 중에도 끙끙댄다.

한참을 여기저기 주무르던 요한이 착잡한 얼굴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집에선 어지간하면 피우지 않는데 오늘은 이거라도 피우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조용히 문을 닫고 정원으로 나간 요한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멋대로 집어온 지우의 핸드폰엔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나갔다는 정원의 메시지가 있었다. 그 뒤로도 부재중과 깨면 연락하라는 메시지가 있었지만, 요한은 무시했다.

차라리 나도 나갈걸. 그럼 그런 말은 듣지 않았으려나. 아냐, 그럼 지우 혼자 아파했을 거잖아.

십 년간 저들 사이에서 지우가 많이 지치고 힘들어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적응해가는 줄 알았다. 저들이 서로에게 적응해가듯이. 물론 그것과는 결이 다르지만 그래도.

요한이 그 자리에서 몇 대를 더 태우고 집에 들어섰을 때였다.

"지우? 왜 일어났-,"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벌써 깼나 싶어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캐리어를 꺼내 든 지우였다.

제가 들어선 것을 알면서도 지우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닥치는 대로 옷을 쑤셔 넣고 있었다. 언제 드레스룸까지 가서 들고 온 건지 모를 옷들과 너부러진 물건들을 보던 요한이 한달음에 달려가 지우의 팔을 저지했다. 바늘을 멋대로 잡아뺀 건지 핏자국이 말라붙은 팔이 앙상했다.

"뭐 하는 거야?"

"놔! 말했잖아. 나갈 거야."

"뭐?"

몰라서 물은 게 아니었다. 당황해 눈만 깜빡이는 요한을 두고 지우는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새파랗게 질려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면서도 이 집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건지 손길엔 거침이 없었다.

"윤지우!"

참지 못하고 소리치자 미친 듯이 캐리어에 짐을 쑤셔 넣던 지우의 움직임이 멎었다.

"뭐 하는 짓이야! 너, 지금… 가겠다고?"

"……."

"헤어지자고? 윤지우, 나 봐. 여기서 나간다고? 어?"

"우리가 언제 사귀기나 했어?"

차갑게 되돌아온 말에 다시금 요한의 입술이 딱 달라붙었다. 그런 요한을 차가운 눈이 한 번 훑은 뒤 멀어졌다. 요한은 그 시선이라도 제게 닿길 간절히 바랐지만,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 달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갑자기, 난…. 윤지우. 일단 멈춰 봐, 응? 내가 잘못했어. 많이 아팠지? 나 때려. 다 맞아줄게. 그러니까 잠깐만. 너 몸도 아픈데!"

"아니. 난 이제 안 되겠어. 언제까지 이래야 해? 입으로는 사랑한다, 미안하다 하면서 막무가내로 구는 너희도 짜증나고… 대체 내 인생 언제까지 멋대로 휘두를 건데? 진짜 나한테 미안하면, 이제 좀 놔 줘."

셋이 같이 살게 된 이후부터 지우는 한 번도 먼저 떠나겠다고 한 적이 없었다. 가끔가다 언제쯤 자신을 버려 줄 거냐는 질문을 던지긴 했어도 이렇듯 단호하게 나오는 건 요한도 오랜만이었다. 옛날엔 도망가려는 지우와 붙잡는 자신이 매일같이 실랑이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너무 오래돼 그 느낌을 잊었었다. 익숙함에 젖어 방심하고 있던 대가는 컸다.

금방이라도 멎을 듯한 가슴의 통증에 이를 악문 요한이 말했다.

"안 돼. 못 가."

"내가 죽어야 놔 줄 거야?"

지친 듯한 음성이 덤덤하게 죽음을 담았다. 자살 시도로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지우를 옆에서 지킨 게 자신이었다. 지우를 잃을 뻔했던 생각도 하기 싫은 그 날이 당사자의 입에서 빠져나오자, 요한은 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 말 하지 마. 지우야, 제발…! 내가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제발, 어? 왜 그래. 내가 그동안 너무 아프게 했지? 이제 네가 싫다 하면 건드리지도 않을 게.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마…."

마음 같아서는 지우의 온몸을 구속해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 떠나게 가둬두고 싶었다. 하지만 요한은 그렇게 하는 게 지우를 영원히 잃는 것임을 이제 안다. 지금은 한껏 몸을 낮추고 빌 때였다.

이 생활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간혹 지우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을 내비칠 때마다 요한은 그를 살살 구슬려왔으니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몸이 아프기도 하고 예민해진 신경에 스트레스받아 더 세게 나오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만약 그래도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어쩌지.

치미는 불안감에 요한이 하얗게 변한 손끝을 꽉 쥐었다.

오랜 시간 쌓인 무기력함으로 어지간하면 행동에 옮기는 일 없던 지우가 이럴 정도면 사실 예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요한의 머릿속에 오래전 틈만 나면 제 손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던 지우가 떠올랐다. 지치지도 않는지 걸핏하면 도망치고, 마음을 돌린 척하다 서슴없이 뒤통수를 치던 지우. 그중 가장 요한을 아프게 했던 건 당연히 그날이었다. 말만 안 했을 뿐 온몸으로 저에게 마음을 드러내던 그때, 드디어 웃어주던 지우에게 감동한 자신은 그게 거짓인 줄도 모르고 행복해했다. 그때 얻은 불안증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또.

"지우야, 지우야…. 제발, 제발 나 좀 살려 줘. 한 번만 믿어 줘."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했다. 하물며 지우와 저는 목숨까지 바칠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 못해 옆에 있는 사람의 관계이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은 무슨 수를 써서든 지우의 마음을 되돌려야 했다. 살기 위해.

무릎을 꿇은 요한이 우두커니 선 지우의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다신 네가 싫어하는 짓 안 할 테니까…."

머리 위로 작은 한숨이 떨어졌다. 언제든 명령이 떨어지면 멎을 준비가 된 것처럼 느리고 낮게 박동하던 심장이 쿵, 자극에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요한은 이 느낌을 잘 알았다. 지우는 지금 망설이고 있는 거다.

십 년 넘게 자신이 지우를 낱낱이 알게 됐듯,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 해도 그 긴 시간 동안 살을 맞대다 보면 조금이라도 정이 들 수밖에 없다. 요한은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지금으로선 제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니까.

"사랑해. 나보다 더, 아니 너 없으면 난, 안 돼."

너 없으면 죽을 거라는 말은 겨우 삼켰다. 행여나 지우가 그 말에 자극을 받아 또다시 죽음을 입에 담을까 겁도 났고 이미 자신은 몇 번이나 이 말을 해 지우에게 그럼 죽으라는 말을 들은 바 있다.

"나가. 혼자 있고 싶어."

어떻게든 확답을 받고 싶었지만, 요한은 이번만큼은 제 불안감을 누르고 몸을 일으켰다. 나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시름 덜었다. 방범창에 막힌 창문으로는 나갈 수 없으니 문만 지킨다면 지우가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닫힌 문 앞에 주저앉은 요한은 몇 시간 사이 까슬해진 얼굴을 문질렀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림 뿐이다.


조각조각땃땃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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