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선배는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다. 저번 겨울, 선배가 김범주 과장과 함께 인주로 내려가버린 후부터 나는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선배가 돌아오는 날을 달력에 표시해놓고 기다렸으나 저편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던 것도 잠시, 풀죽은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러나 대놓고 비교 할 것도 없이 이쪽과 그쪽의 마음은 판이하게 달랐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는 내가 그걸 인정하면서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그 초조함은 결국 밤마다 내 손에 펜을 들렸고 펜을 든 내 손은 지나간 오늘 날짜에 가위표를 치는 사명을 띠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산타를 기다리는지 선배를 기다리는지, 크리스마스 즈음 선배가 돌아오기로 기약된 날을 점차 줄여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곧 그만 두게되었는데, 이유인 즉슨 달력에 가위표 치는 날이 늘어가는만큼 선배를 보고싶은 마음도 자꾸 늘어가는 것이었다. 해서 나는 달력에 가위표 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나는 언제쯤이면 선배 생각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까. 중독성이 강한 담배나 술도 독하게 마음 먹고 눈꼽만큼씩 줄여나가면 언젠가부터는 점차 줄기도 한다는데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선배, 당신 생각을 오늘 조금 적게 했다는 기분이 들면 다음날은 반드시 당신으로 하루가 물들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때쯤 선배 생각에 지치는 밤이면 나에게는 버릇처럼 자주하는 행동이 하나 생겼는데 침대 맡, 선배 닮은 곰인형을 끌어안고 침대 위를 뒹구는 것이었다. 그렇게 누워 폭신한 곰인형 온몸으로 끌어안고 당신이 이렇게 나를 안았으면 하는 유치한 상상들을 하곤 했다. 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 선배가 인주에서 돌아오기로 기약된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전에 관할이 복잡하게 엉겨버린 탓에 들려야했던 근처 서에서 당신을 아는 형사를 만난 적이 있었다. 형기대 강력 1팀이면 이재한하고도 잘 알겠네. 뜻하지 않게 들은 선배 이름 하나에도 나는 가슴이 뛰었다. 낯선 사람 임에도 공통 분모가 선배였다면 나는 쓸개라도 빼줄 수 있을만큼 살가워졌다. 나는 그때 선배 소식에 목마른 사슴이나 다름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신이 나서 그 형사에게 선배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캐묻다시피 했는데 대개 선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으레 칭찬 비스무레한 말들이 쏟아졌기에 왠지 모를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져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선배 과거를 듣는 값을 지불하듯이 나는 그 형사에게 간단하게 요깃거리를 사다주었고 거래는 쉬이 성사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때 왜 하필 나는 선배의 무전기에 대해서 물었던 걸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물어볼 것이 한 백 서른 두 개쯤 더 있었는데.



"무전기? 뭔 무전기? 아아. 재한이가 그, 계속 끼고다니던 그거?"



고장나서 되지도 않는다는 고물 무전기를 가슴 안주머니에 넣어놓고 다니던 선배 생각이 났다. 도대체 무슨 종류의 부적일까 궁금했었다. 짐작한 바로는, 범인이 흉기를 가지고 선배에게 덤벼들었는데 때마침 선배의 가슴팍에 있던 무전기 때문에 선배가 무사했다느니 하는 그런 류일 거라 지레 짐작했었다. 그러나 면발을 입에 넣던 형사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것이 튀어나왔다.



"그거 재한이 첫사랑이랑 관련있는 물건이라 그러더라고."



첫사랑. 그 단어가 내 귀에 들어와 머리로 퍼지는 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주파수 잘못 맞춘 라디오처럼 나는 지직거렸다. 그때의 내 뇌는 컴퓨터 중앙처리장치가 과부하에라도 걸린 듯 오류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첫사…랑이요?"


"그 첫사랑이 죽었다는데, 그거 때문에 계속 가지고 다닌다고 그러더라고. 하여간 등치도 산만한 놈이 어울리지 않게 순정파야. 걔 요즘도 영화관 안 가지? 그 여자가 남긴 유품이 영화표였대."



컵라면과 음료수 값이 생각보다 후하게 먹혀들어간 걸까. 묻지도 않은 정보가 줄줄 새나왔다. 선배에게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은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명명된 시점을 기점으로 하여 내 머리는 엉켜버린 카세트 테이프가 되었다. 그 테이프의 마지막 장면은 그거였다. 지난 해 크리스마스, 선배가 지금처럼 좋아지기 이전에. 지금보다 조금 덜 좋아하고 있었을 때에 나는 선배에게 영화표 두 장을 내밀었다. 딴에는 도움 준 사람에게 반드시 보답해야한다고 배운 가정교육의 실천이었고 손윗사람인 선배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더러있었기에 생각해낸 좋은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그건 선배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는데,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나 영화 안 본다 하는 소리를 내뱉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터라 나는 좋은 일 하려다 되려 혼난 불쌍한 아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첫사랑과 선배. 선배와 그 단어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삐까번쩍한 차림으로 나타난 귀족이 실은 내가 옛날에 거지였었는데 말야, 하는 소리와도 비슷한 거였다. 아주 이질적인 두 가지가 한 데 섞여 나를 늪으로 끌어내리는 기분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나는 늪에 빠져 엉망진창이 되었다. 멀쩡하다가도 어느 순간 전력을 잃은 기계처럼 동작이 멎었고 온 정신이 현실을 벗어나 머나먼 우주에라도 있는 것처럼 멍 때리는 일이 잦았다. 해서 나는 동료 선배들에게 '고장났다'라는 우스갯소리를 듣곤 했는데 그 즈음 내가 제출한 보고서에서는 뜻모를 자음이 쭈욱 남발된 이상한 페이지가 더러 끼어있기도 했다. 그 일로 나는 자그마치 3개월이나 이름 앞에 '고장난'이라는 수식어가 붙여진 놀림감이 되기도 했었다.


어떤 사람이었을까. 예뻤을까. 어떤 사람이길래 연애, 사랑, 뭐 이런 거하고는 지구와 화성만큼이나 한참 떨어진 선배가 좋아했을까. 호기심으로 시작된 생각은 시간에 지남에 따라 곰팡이 슬듯 변해 어느순간 질투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깨달은 시점에, 나는 아주 의기소침해졌다. 이미 세상에 없는 망자를 질투해야하는 내 심정은 찬 바닥 기어다니는 밤귀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선배를 보면 항상 설레기만 했는데 이제는 바라보고있으면 괜시리 눈시울이 뜨겁고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아 억지로 피하기 시작했다. 눈으로 좇으려 하지 않았고 신경쓰려고 하지 않았다. 해서 종종 선배와 둘이 남겨졌을 때엔 나는 평소보다 더 크게 오바하곤 했다. 평소에 갈아끼워본 적 없는 정수기 물통을 갈아끼우는 것도 오바하는, 그런 축에 속했다. 선배들은 아무렇지 않게 번쩍번쩍 다들 잘만 들던데 나도 이 정도쯤은 들어야지. 호기롭게 정수기에 갈아끼울 물통을 번쩍 들자마자 나는 내 발등 위로 물통을 콱 놓치고 말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찧인 발등이 순식간에 불에라도 덴 듯 화끈거렸고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샜다. 야! 허겁지겁 달려온 선배 때문에 당황한 나는 창피한 것도 잊고 다시 하겠다는 말을 했는데 선배는 그런 나를 부축해 옆에 놓은 의자에 앉혔다. 나를 의자에 앉혀놓고 내 찧은 발을 들어올리고 신발을 벗기는 선배를 보면서 나는 설렘보다 불안함을 먼저 느꼈다. 부은 거 같은데 괜찮겠냐. 걱정 어린 표정, 나를 보는 시선, 조심스레 내 발을 잡은 손까지. 분명 선배는 내 앞에 있었는데도 나는 어쩐지, 누군지도 모르는 선배의 첫사랑에게 선배를 완전히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는 시선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던 선배가 옛날에는 나랑 똑같은 마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게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 선배를 보듯이, 선배는 다른 사람을 바라봤을 거라니. 폭발한 화산에서부터 용암이 흘러내려 부글거리듯 내 속이 탔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선배는 괜찮냐고 묻는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봐도 괜찮을 리가 없는데. 치기 어린 마음에 괜찮습니다 하고 무뚝뚝하게 답하니 선배의 걱정스레 구겨진 얼굴이 다른 빛을 띠었다. 나를 타박할 때 늘 짓는 그런 표정으로.



"너 요즘 왜 그러냐. 그렇게 정신머리 놓고 현장은 어떻게 나갈래." 



나는 옹졸했다. 뿐만 아니라 치졸하기까지 했다. 알고있음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때문에 생각지 않은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으리라.



"아직두… 못잊으셨어요?"


"뭐?"


"선배님 첫사랑이요. 돌아가셨다는 그 분……."



아직도 그 외투 안에 고장난 무전기가 있느냐고. 해서 이쪽은 바라봐주지도 않는 거냐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선배 부적이라길래 거기에 속없이 스티커까지 붙여놓았다고.


선배의 입에서는 긍정과도 같은 한숨이 나왔다. 헛소리 하는 거 보니까 크게 안 다쳤나보네. 혹시 모르니까 냉찜질 꼭 해라. 그리고 선배는 무거운 물통을 내 대신 정수기 위에 올려놓고 자리를 피했다. 내 마음만큼이나 무거운 물통에서 그르륵 하고 기포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가 나가버리고나서야 내내 참아둔 눈물이 정수기 물처럼 쪼로록 흘렀다. 나는 그때 부은 발등보다 속이 더 아파서, 냉찜질은 발이 아니라 속에 해야할 것 같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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