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귓가에 울리는 깜박이 소리가 시계에서 나는 초침소리 같았다. 백현은 늦은 시간이라 한적한 집 앞 도로에 덩그러니 대기 중인 자신의 차 안에서 그 소리에 맞춰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있었다. 네가 왜 성급하게 그런 표정을 지어버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운전석 옆에 놓아둔 담뱃갑을 습관처럼 찾는 손길을 자각한 백현이, 그 손을 다시 핸들로 올린 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성급한 건 자신이었다. 그런 식으로 박찬열을 자극하는 게 아니었다.

 

욕심 내지 않기로 스스로와 다짐한 뒤 시작한 게 이 일이였는데. 하지만 계획을 세웠을 때도, 지금 그 계획을 실행하는 중에도 자신은 어렸고 늘 서툴렀다. 사람들은 늘 물었다. 그래, 박찬열을 다시 올림픽에 내보내고, 금메달리스트를 만들고- 그래서 뭐? ?

 

초록빛 화살표가 켜졌다. 백현은 천천히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엑셀을 밟았다. 매끄럽게 커브를 돌아 아파트 입구로 진입하는 차의 번호판을 인식하고 입구를 막고 있던 바가 열린다. 백현의 차를 알아보고 가볍게 목례하는 경비아저씨가 다시 보고 있던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정된 칸에 주차한 백현이 조수석에 벗어 – 내팽개쳐 – 두었던 재킷을 챙겨 내린 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엔 여전히, 왜, 왜, 왜.

 

처음 만났던 날의 그를 기억한다. 수영하기에 최악은 아니지만 이도저도 아닌 몸이었던 자신과 달리, 타고나길 큰 키와 넓은 어깨, 그리고 커다란 손발까지 그에게 수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신체적 조건은 없었다. 기록도 출중했다. 거기다 당시 성인에 견줄 만큼 뛰어났던 잠영 실력까지 더해지자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그곳에서 그 누구도 없었다. 백현은 태어나서 그렇게 자신이 관심을 못 받는다고 생각할 만큼, 제가 받을 스포트라이트를 다 앗아가는 존재는 처음 봤다.

 

그래서였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백현은 신발을 한 쪽에 가지런히 벗어둔 채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무거운 철제문이 뒤에서 닫히며 잠기는 소리를 낸다. 고요함이 온 집안을 감고 있고, 자신의 머릿속엔 온통 박찬열 생각뿐일 때 그는 늘 이렇게- 맥주를 마시곤 했다. ‘안 어울려.’ 웃으며 말하는 박찬열이 또 떠오른다. ‘그럼 뭐가 어울리는데?’ ‘넌 도련님이잖아. 와인?’ 그 말에 되레 웃은 건 자신이었다. ‘난 와인 잘 못 마셔.’ ‘왜?’ ‘너무 써.’ 그 말에 또 와르르 웃던 너. 세상이 흔들릴 것 같았다. 아니, 이미 흔들리고 있었겠지. 적당히 차가운 맥주가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떡볶이 때문에 배가 터질 것 같았는데, 지금은 뱃속이 공허해 뭐라도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한 캔을 단숨에 비우고 두 번째 캔을 따는 백현의 시선이 멎은 곳은, 이제 그 자리에 없으면 허전해서 이상할 것 같은 액자였다. 필름을 인화한 오래된 사진이지만 잘 보관되어서 깨끗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소년이 있었다. 03년이라고 찍힌 주황색 날짜가 충분히 오래된 사진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병신.”

 

넓고 휑한 집에 조금 마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가 금세 사그라든다. 백현은 조금 웃었다. 진짜 병신은 난데, 왜 나는 네 사진을 보고 괜히 화풀이일까.

 

사진 속의 초등학생 박찬열은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작은 포디움 위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1이라고 쓰인 숫자 칸 위를 밟고 우뚝 선 그 웃음은 너무 당당해서 주변에 있는 모든 색들이 죽어버리는 것 같다고, 여태, 백현은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항상 아쉬웠던 건,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을 본 게 아니고 정면을 보고 찍은 거라 사진 속 찬열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다는 것이었다. 백현은 자신이 찍은 사진을 고이 넣어둔 액자 유리를 엄지로 한번 슥 쓸었다. 찬열의 얼굴이 있는 위치를 두 번, 세 번 매만지던 손가락은 힘없이 그를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둔다. 그것밖엔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디센딩

 

03

 

 

 

새로 출시된, 물속에서도 김 하나 서리지 않는다는 수경을 수모 위에 쓰는 것을 마지막으로 준비를 끝낸 백현은 한 번 더 준비운동을 했다. 스트레칭 여부와는 관계없이 대회 때 이렇게 심장이 많이 쿵쾅거린다는 걸 왜 아무도 말해 주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다들 키는 왜 이렇게 또 큰 걸까. 백현은 얼마 전 ‘신장’란에 기입한 139cm를 떠올렸다. 초등학교 5학년 치고는 좀 – 많이? - 작은 편이었다. 안 크는 걸 어떡해. 매번 걱정하는 아빠에게 볼멘소리를 하면 건강하게만 크라는 토닥임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 달램은 이 경기장에서 전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저 쪽 구석만 봐도 150은 거뜬히 넘는 것 같은 애들이 가득이었다.

 

“비켜!”

 

안내를 따라 순서를 대기하러 가는 중에 순간적으로 앞으로 떠미는 누군가의 거센 손길에 휘청거린 백현이 겨우 다시 중심을 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남색 수영복을 입은 꺽다리가 백현을 밀친 거였다. 뭐지, 난생 처음 겪어보는 당황스러움에 백현의 시선이 여기저기를 방황했다. 진로방해죄로 그를 당당하게 밀친 꺽다리는 백현을 지나쳐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그의 수영복 뒷부분엔 ‘진성’이라는 두 글자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진상인 것 같은데. 백현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몇 걸음 뒤에 떨어져 있던 수행원 중 하나가 조용히 그 꺽다리의 뒤를 좇는 걸 지켜본 백현은 다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꺽다리의 신상과 지금의 정황이 엄마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그곳엔 남색 수영복에 진성이라고 적힌 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더 많이 보였다. 그제야 특기수업, 그 중에서도 수영으로 꽤 유명한 진성초등학교 출신 선수들이라는 걸 깨달은 백현이었다.

 

호루라기 소리만 몇 번을 듣고 나서야 백현은 두 차례 뒤에 자신이 나갈 순서임을 알았다. 저 멀리 아빠가 앉은 자리를 쳐다보니 손을 가볍게 들기에 답례로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번 더 자신의 앞 차례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고, 백현은 그 때 자신의 부모에게 조용히 다가가는 수행원을 보았다. 아까 그 꺽다리를 따라갔던 사람이었다. 백현은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스타트 라인으로 걸어갔다. 조금 차분해지나 싶던 심장이 다시 쿵, 쿵, 쿵, 쿵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백현은 오른쪽에서 세 번째 라인이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야가, 스타트 준비를 하면서 순간적으로 트였다. 백현의 시선이 자신의 바로 왼쪽 라인에서 발을 가볍게 털던 소년에게 잠시 머물렀다.

 

“준비-”

 

수경을 쓰고 자연스럽게 준비 자세를 취하면서도 이상하게 눈앞에는 계속 그 소년의 잔상이 남았다.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뜨는 순간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나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백현이 그 경기에서 세 번째로 들어왔고, 그렇게 그 다음 예선까지 가볍게 통과했고, 휴식시간에 갑자기 찾아와 사과하는 진성초 꺽다리와 그 부모가 생각보다 너무 많이 굽실거렸고, 백현은 그 꺽다리의 분노한 눈빛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생각했으며, 그 꺽다리는 맨 끝 레인을 배정받고 조 5위로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만이 남아있었다. 사실 이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편이긴 했다.

 

백현이 그 날 급격히 컨디션이 악화되는 바람에 본선에서 거의 익사할 것 같다는 심정으로 경기를 치루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속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백현은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조금 먼저 나와서 수건을 챙기던 소년과 마주쳤었다.

 

“좋냐?”

 

뭐가? 뜬금없는 그 물음에 백현은 무슨 말이냐고 곧바로 되물을 힘도 없었다. 처음 보는– 아,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예선 첫 경기에서 바로 옆 레인에 섰었던 애였다. 아무튼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 애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이상했다.

 

“빽 그렇게 쓰니까 좋냐고.”

 

무슨 말이야, 백현이 작게 물었다. 겨우 짜낸 목소리였고, 저 멀리서 자신의 상태가 안 좋음을 알아챈 부모님이 이 쪽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시끄러운 경기장에 물 철벅거리는 소리, 사람들 소리치는 소리, 응원하는 소리, 모든 게 다 섞여 귓속을 파고들었다. ‘네가 민준이가 괴롭혔다고 다 일러바쳤다며?’ 민준이가 누구지. 아, 그 꺽다리인가. 백현이 느리게 눈을 꿈벅였다.

 

“너 실력 보니까 엄청 아깝다.”

 

소년의 말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빠르게 찌르는 그 가시는 아마 앞으로 빼지 못할 텐데. 눈으로 보는 그 얼굴은 이유를 알 수 없이 계속 보고 싶고 말을 걸고 싶은데, 자신을 향해 쏟아내는 그 말과 목소리는 자꾸 백현을 불편하게만 만들었다.

 

“니 돈, 그리고 빽.”

 

수건으로 상체를 휙 감싼 소년이 그대로 백현을 지나쳐 자신에게 다가오는 팀에게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 아, 쟤가 1등이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힘없이 쭈그리고 앉은 자신에게 달려와 연신 괜찮냐고 묻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저것 안내방송을 하고 장내 정리를 하느라 시끄러운 와중에 백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박찬열, 일등 축하해!’ ‘야, 너 개인기록 갱신이래.’ ‘대박이다!’ 멀리에서 1등을 한 소년의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백현은 그대로 의무실로 갔다. 스트레스성 뭐라뭐라 하는 의무실 선생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빠가 엄마에게 애들 사이 문제로 유난 좀 떨지 말라고 나무라고, 또 건강한 애 너무 걱정하지 좀 말라고 나무라는 것까지도 대충 흘려 들었다. 어느 정도 정리된 풀장 앞에서 간이 포디움이 세워지고, 시상식이 곧 진행된다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백현은 뭔가 결심한 듯 아직 조금 불편한 속을 이끌고 일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언쟁 중인 부모님을 슬쩍 뒤로하고 가까이 있던 수행원 중 하나에게 가서, 카메라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조용히 건네받은 카메라를 가지고 몰려든 사람들의 가장자리로 간 백현은 1등자리에 서서 활짝 웃고 있는, 재수 없는 개새끼를 한 번 찍었다. 저 자식을 영원히 기억하고 복수해야지. 야무진 열두 살의 다짐이었다.

 

 

*

 

 

“……복수는 무슨.”

 

맥주를 다 비운 캔을 살짝 찌그러뜨린 백현이 거실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둔다. 액자를 제자리에 가져다 둔 백현이 망설임 없이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소파 맞은편에 커다랗게 인화되어 있는, 아주 오래된 가족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무 오래 전에 찍은 거여서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고 경직된 자세로 웃고 있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런 자신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온화하게 웃고 있는 엄마가 있었다. 그렇게 원하던, 아들이 수영선수가 되는 것도, 국가대표가 되는 것도, 그 무엇도 볼 수 없었던 불쌍한 엄마가.

 

정적이 흐르는 집에서 얼마나 그렇게 우뚝 서 있었을까, 백현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 건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소리 때문이었다.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박찬열’ 세 글자가 뜬 화면은 야속할 정도로 반갑다. 백현은 잘 알았다. 항상 아닌 것처럼 선을 긋게 되는 자신임에도 박찬열은 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걸. 제일 먼저 손을 내민 건 변백현이었으나 끝내 그 손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 사람은 박찬열이라는 걸, 찬열 스스로가 제일 잘 알 것이었고.

 

“여보세요.”
‘어디야?’
“술 마셨어? 미쳤구나, 너?”
‘어디냐구.’

 

아주 조금 묻어나는 술기운이 느껴져 짜증이 난 걸까, 쉽게 나오지 않는 대답에 찬열이 언짢은 듯 볼멘소리를 덧붙인다. ‘많이 안 마셨어.’ 투정 같기까지 한 그 말투에 백현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도 ‘집이야.’ 하며 순순히 대답을 꺼내어 놓았다.

 

‘다행이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공동현관에서 비추는 찬열의 얼굴이 화면에 한가득 들어찼다. 열림 버튼을 누른 뒤 백현은 현관으로 나가 무거운 문을 다시 열었다. 조금 열어서 발을 내려 세워둔 뒤, 거실로 다시 들어와 액자가 잘 뒤집혀 있는지를 확인하고 버튼 하나를 눌렀다. 천장 가장자리에 설치되었던 얇은 우드 블라인드가 한 칸 내려와 가족사진이 있는 곳을 조용히 덮었다. 원래 블라인드가 시작되는 곳이 마치 그 곳인 것처럼.

 

“야- 변백현.”

 

주렁주렁 비닐봉지를 매달고 오는 걸 보니 나름 2차를 하겠답시고 캔맥주랑 안주거리를 사온 모양이었다.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두는 찬열의 뒤에서 문이 조용히 닫히며 잠금 소리를 낸다. 백현이 거실 입구에 서 있는 걸 발견한 찬열이 받아 달라는 듯 봉지를 든 손을 쭉 내밀었다.

 

“냉장고에 넣어 놔.”
“지금 마실 건데?”
“진짜 웃기지 마, 박찬열. 내일 너 연습 있어. 정신 나갔어? 왜 시즌 준비하면서 술을 처 마셔?”
“엄청 쪼끔 마셨는데?”

 

이거 너가 좋아하는 그 맥주야- 봐봐. 봉지를 열어 보여주곤 살짝 토라진 얼굴로 냉장고로 향하는 찬열은 아까 분식집에서 입었던 복장 그대로였다. 집에도 안 들어가고 어디 편의점 같은 데서 혼자 마시다가 바로 쫓아온 모양이었다. 담배까지 피웠으면 당장 서재에 있는 계약서 들고 나와서 찢어버리자고 할랬는데 다행히 담배는 안 피운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넌 얼마나 재수 없는 새끼길래- 사람을 혼자 길에 놔두고 집에 오냐?”
“니가 먼저 나보고 잘 꺼지라매.”
“내가 언제?”

 

잘 가라고 했지. 소파에 푹 주저앉은 찬열이 머리 뒤로 손깍지를 끼며 눈을 감았다. 백현은 잠시 찬열을 내려 보다 그가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 두어 캔을 꺼내와 테이블에 놓았다. 넌 그만 마셔. 조용한 백현의 말에 찬열이 눈도 뜨지 않고 피식 웃었다. 옅은 술 냄새가 공기 중에 퍼졌다.

 

“왜 거짓말했어?”

 

반 정도 마셨을까, 손등으로 입가를 닦던 백현에게 찬열이 물었다.

 

“무슨 거짓말?”
“데이트 한다며. 근데 그거 사촌동생이잖아.”
“거짓말 한 적 없어.”
“뭐?”


백현이 남아 있던 맥주를 마저 마셨다. 찬열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반쯤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모른 척 다음 캔으로 손을 뻗었다.

 

“데이트 한다고만 했지, 여자 친구라고는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네가 먼저 헛다리짚은 거지.”
“야!”
“넌 어떻게 알았어? 사촌동생인 거.”
“너 진짜 어이없는 자식이네?”

 

질문에 대답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이제 반쯤 몸을 일으켜 세운 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소리치는 찬열을 바라보는 백현이 피식 웃었다. 먼저 살짝 도발하긴 했지만 거기에 그대로 걸려서 오해할 거, 화낼 거 다 해놓고 이제 와서 어이없단 듯 구는 게 웃기다. 삐져가지고 차키를 손에 들려준 채 가라고 부루퉁한 채로 쿨한 척 터덜터덜 걸어가던 뒷모습이 자꾸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원망스러웠다.

 

“술은 왜 마셨어?”
“이제 세상에 나한테 관심 줄 사람이 없어져서, 슬퍼서 마셨다 왜.”

 

귀엽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서 슬쩍 떠보자 그대로 톡 쏘아붙이곤 아예 소파 반대편으로 드러눕는다.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넓어지고 탄탄해진 어깨가 웅크린다고 숨겨지는 게 아닐 텐데- 백현은 괜히 그 돌아 누운 발 언저리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찬열이 뭐라고 몇 마디를 혼자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며 다리를 조금 더 웅크렸다.

 

“그래서 알콜을 들이 부었어?”
“뭘 들이부어- 두 캔 마셨다, 두 캔.”
“그거 진짜 치명적인 거 알지. 너 자꾸 이러면-”
“아, 금메달 따면 되잖아.”

 

귀찮다는 듯 대꾸해오는 목소리가 조금은 피곤한 것 같아 백현은 입을 다물었다.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찬열은 자신이 말을 너무 심하게 받아쳤나, 하는 생각에 꾹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떠 보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몰래 눈만 돌리자, 시야 구석에 들어오는 백현은 거실 조명이 그리 밝지 않아 그림자처럼 얼핏 보일 뿐이었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살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이거 마시면 변백현이 화낼 텐데- 그러다가도 자꾸 무심한 표정으로 여자의 사진을 보여주던 게 괘씸해져서 결국 질러버렸다.


편의점 앞의 플라스틱 의자에 대충 걸터앉아 한 잔 마시다가 문득 변백현 정도면 열애 관련 기사가 나지 않을까 싶어서 검색을 해 봤었다. 스토킹인가 싶어 망설인 것은 아주 잠시였다. BH 그룹만 쳐도 온갖 관련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이틀 전 입국했다는 회장의 조카가 아까 그 사진 속 여자와 똑 닮아 있어서 찬열은 헛웃음을 쳤다. 날 멕이다니, 대단한데. 손에 들고 있던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찬열은 뒤로가기를 눌러 관련기사를 몇 개 더 봤었다. 사실 맥주도 두세 모금만 마시고 끝내려고 했고, 원하던 검색 결과도 얻었으니 나름의 일탈을 멈추려고 했었다. 그러나 찬열의 눈길을 잡은 건 의외로 다른 기사였다.

 

“백현아.”

 

백현이 찬열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각도가 애매해서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너무 금메달 따라고 몰아세운 걸까 하는 생각에 잠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는데, 생각보다 다정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금메달 딸게.”
“……내가 너무 금메달 소리만 했지, 속물같이. 미안.”
“아니, 진짜 딸라고.”

 

‘일그러진 영웅 박찬열, 언제 다시 국민영웅으로?’ ‘박찬열, 세 번째 올림픽 금메달 도전… 이번에는 성공?’ ‘BH스포츠 브랜드 새 수영복 모델로 수영선수 박찬열 물망… 한 번 더 금메달 노릴까’ ‘박찬열, 남자 혼영 200m 동메달에 그쳐… 올림픽 문제없나’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둘 다 굳이 무슨 말을 얹지 않아도 된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백현아, 너는 매일같이 이런 기사들을 확인하고 언론에서 나를 어떻게 몰아가는지 다 보고 들어야만 하겠지. 내가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세상에 나만 있는 것처럼 물속에 머무를 때, 너는 나를 그곳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 물 밖에서 겨우 숨을 쉴까.

 

‘BH 소속 박찬열, 이번에는 못 다한 기업의 숙원사업 해낼까’

 

악의적으로 물타기를 하는 기사에는 관심도 없었고 앞으로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주기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언론의 기사가 보인 건 순간적이어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찬열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 기사를 클릭했다.

 

……평소 하계종목 후원, 특히 수영에 큰 관심을 보였던 안주인 故김은선 이사의 뜻을 따라……변 회장의 애틋한 아들 사랑……한때 청소년수영 유망주로 떠올랐던 현재 BH 인터내셔널 산하 BH스포츠 소속 변백현 팀장…… 불의의 사고…… 대수술……트라우마…… 동년배의 반짝 빛나고 꺼져버린 별, 박찬열 지목…… 7년째 이렇다 할 성과 없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 내년 올림픽 티켓은 확보했으나…

 

“금메달 따서 네 목에 걸어줄 테니까…”

 

웃어주라.

 

“그렇게 잔소리 좀 그만 해.”

 

잠시 머뭇거리다 이어진 찬열의 말에 백현이 다시 조용히 웃었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보다. 근데 그거면 됐어. 네가 나를 전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네가 내 모든 것을 평생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천천히 네 자리를 잡아가면 됐어.

 

솜뭉치 같은 게 가슴 안에 가득 찬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를 기억한다. 언제부터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처음부터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명백했다. 돌고래처럼 매끄럽게 물 안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자신이 물에 들어가는 순간 펼쳐져서 잠영을 망쳐버리는 바람에 생각보다 빨리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부드럽게 킥을 하는 발끝에서 솟아나던 물거품을 쫓아 턴을 하고 호흡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박자를 놓쳐 물을 먹어버린 것도 기억난다. 그렇게 그의 뒤를 따라가자 2등을 했다. 기록을 확인하고 두 팔로 몸을 받쳐서 물 바깥으로 미끄러지듯 올라가는 소년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술이나 먹지 마.”

 

백현이 맥주캔을 잡지 않은 쪽 손을 찬열의 종아리 언저리에 가만히 올렸다. 알코올이 체내에서 완전히 빠지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 지 알아? 백현의 말에 ‘잔소리 좀 하지 말라니까’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본선에서는 그런데 네 발끝을 보고 쫓아가는 것조차 힘에 겹더라. 어린 나이지만 알 수 있었다. 나는 평생 저 발끝을 따라가거나, 아니면 이처럼 따라가는 것조차 힘들 거라는 사실을. 네가 일으키는 물보라는 곧고 아름다운데 내 것은 힘없이 쳐지기만 했다. 대회가 끝나고 내게 건네는 친근한 인사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네 친구를 곤란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적대심을 드러내던 네 모습을 나는 아직까지 잊지 못해.

 

“안 마실게. 안 마시면 되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에 들어찬 솜뭉치는 이미 너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던 모양이었다. 네가 추락했을 때, 나는 한때 네가 일으키던 경이로운 –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 물보라를, 그 수억 개의 물방울들을 잊을 수가 없어 너를 먼저 찾았다. 몇 년 사이에 훌쩍 큰 소년은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 있었다. 왜냐고, 왜 박찬열이냐고 물어 봤자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냥, 사랑밖엔,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러나 사랑이라곤 대답할 수 없어서.

 

피곤했던 건지 어느새 잠든 찬열의 가벼운 숨소리가 백현의 귓가에 들렸다. 백현은 방에서 얇은 이불을 가져와 그를 덮어주었다. 방에 들어가려던 발걸음이 머뭇거리더니, 찬열이 뒤돌아 누운 소파 옆 바닥에 잠시 앉은 백현이 조심조심 머리를 그의 어깨춤에 기대어 본다. 깰까 봐 무게를 싣지는 못하고,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아주 조심스럽게만. 그러나 묵직하게 쿵쿵 뛰는 심장 때문에 오래 기대어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한 번 더 최고가 되어 줘. 한 번 더 네 모습을 보게 해 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디센딩
수영에서, 같은 영법을 여러 차례 실시할 때마다 속도를 높이는 훈련 방법.



ⓒ2020, 로테


찬백쓰기 좋아하는 연성러입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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