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하얗고 늘씬하게 뻗은 목선을 따라 녹색 머리칼이 물결쳤다. 남자치곤 얇은 어깨를 감싸고 흘러내리는 머리칼의 풍성함에 토도는 짧게 혀를 찼다. 추운 겨울을 지나, 따스한 봄을 넘어 계절은 슬슬 더위에 찌드는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긴 머리칼이 더울 법도 한데 절대 머리를 묶지 않는 마키시마를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까지 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키짱, 마키짱.”

“또 왜 그러는 거니…”

책에 빠져들 것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책을 보던 마키시마가 정말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그것 또한 사랑스러워 토도는 냉큼 그의 등에 매달렸다.

“머리 묶을 생각 없어? 이제 여름이야~”

“별로 안 더운데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보는 내가 더워!”

목덜미로 바람을 휙휙 불어넣자 진저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머리카락 사이로 풍기는 마키시마 특유의 체향이 좋아서, 토도는 미끄러지는 몸을 추슬러 마키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뱀파이어라는 건, 이럴 때 좋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대로 중력을 무시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상대가 원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자신을 바라보게 할 수 있다는 점.

“마키짱… 머리 묶어주지 않으면 목 물어뜯을 거야.”

“오늘 따라 웬 헛소리를 이렇게 하는 거니…”

진심으로 귀찮았던 건지 힘을 사용하여 자신을 떨궈 놓으려는 마키시마의 기척을 읽자마자 토도는 망설임 없이 머리카락을 한 손에 그러잡고 창백한 마키시마의 목을 거침없이 물어뜯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얇은 피부를 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간혹 관계 중에 흥분해서 서로의 목을 물어뜯기도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전조도 없이 목을 물어뜯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인지 마키시마는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마키시마의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토도는 흐릿하게 웃었다.
여직 피가 흐르는 목을 한 손으로 감싸고 인상을 쓴 마키시마의 모습이 황홀하게 아름다워서 토도는 테이블 위에 꽃받침을 하고 그 모습을 감상했다. 목에서 흐른 붉은 피가 녹색 머리에 끈적하게 엉겨 붙었다. 붉은 브릿지와 어우러진 피가 달콤해서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 이게! 뭐하는 짓이니!”

“가끔, 이런 것도 좋지 않아? 마키짱의 피 냄새가 집 안 가득해~ 완전 향기로워.”

“넌, 미친 게 분명해, 토도.”

“뭘 새삼스럽게.”

한숨을 게워내는 마키시마의 모습이 나른해서, 토도는 얼른 동이 터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수면을 핑계로 침대로 갈 수 있도록.







감기 걸린 마키시마랑 데이트하는 토도

* 필라님(@FILANIM ) 그림(https://pbs.twimg.com/media/Bjh24kBCcAA__oi.png) 보고..







바람이 쌀쌀한 정도를 넘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서야 토도는 계절이 가을을 지나 겨울을 향해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하루가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지내다보면 계절에 대한 감각이란 무뎌지기 마련이라, 토도는 헛웃음을 지으며 져지의 앞을 여몄다. 바람이 차다고 인식을 하고 나자 괜히 더 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약속시간까지 5분. 곧 있으면 너무나 만나고 싶었던 상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찬바람조차 기분 좋게 느껴졌다.





“웬일이지…”

약속시간은 칼같이 지키는 남자가 나타나질 않는다. 분명 아까 출발한다고 연락도 왔는데, 왜일까. 설마 오다가 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지? 토도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안 좋은 생각들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붕붕 저었다.

“별 일 없을 거야. 무슨 일이 생겼으면 나한테 바로 연락 왔을 거야!!”

“왜 시끄럽게 소리는 지르고 난리니…”

“엣! 마키…쨩?”

“…왜 그러니 토도.”

머리를 쥐어뜯고 있으려니 익숙한 목소리가 한숨을 쉰다. 토도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확인하고는 냅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끌어안았다. 아무 일도 없다. 멀쩡하게 눈앞에 도착했다. 다행이다.

“늦어서… 마키쨩 답지 않게 늦어서 걱정을… 어라?”

“이번엔 또 무슨…”

“마키쨔아아아아아앙?!!!! 감기? 감기?? 감기나노?!!!!”

한겨울의 손난로마냥 뜨끈뜨끈한 몸은 시간에 늦었다고 달려온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토도는 얼른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마키시마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약간 젖은 머리, 발그레한 뺨과 지겹다는 표정. 축축한 머리칼을 만져보니 살짝 얼어붙은 것 같기도 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왜왜?? 어째서??? 내가 매일 케어해 주고 있는데!!”

“케…어?”

“도시떼 콘나 꼬라지니 낫탄다요, 마키쨩!!”

머리카락 때문에 더 추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토도는 냉큼 자신이 하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서 마키시마에게 둘둘 말아주었다. 감기에 잘 걸린다는 걸 알고는 일부러 꼼꼼하게 건강 체크를 해왔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오늘 거리를 돌아다니기로 한 건 취소다!

“이대로는 감기가 심해질 거야! 거리데이트는 취소야! 마키쨩! 마키쨩네 집으로 가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니. 내가 왜 널 우리 집에…”

“감기가 심해지면 연습도 못한다는 거라구우우웃!!! 안돼!!!”







토도는 마키시마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두손두발 다 들 때까지 거리 한 복판에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쳐다볼 만큼 난리를 치고 나서야 마키시마의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감기 기운이 심해진 듯하여 약을 사오다가 늦었다는 말을 듣고는 집으로 가는 길에 귤도 한봉지 샀다. 마키시마는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토도는 괜히 마음이 설렜다.

그렇게 마키시마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토도는 감기가 심해지면 안 된다는 핑계로 마키시마의 방 한가운데에 코타츠를 놓고 귤을 까먹기 시작했다.

“마키쨩, 마키쨩~ 입이 비었잖니~”

“실례잖니…”

“아아앙~”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도 귤을 까주는 하얀 손을 실눈을 하고 구경하는 것은 즐거웠다. 집이 따스해서 그런 건지 마키시마의 머리칼도 마른지 오래. 축축하게 늘어졌던 머리칼은 생기 있게 물결친다.

“이거 먹고 조용히 좀 하란 거잖니…”

입으로 들어오는 귤을 냉큼 받아먹고 토도는 그대로 팔을 뻗어 마키시마를 끌어안았다.

“마키쨩, 마키쨩~ 다이스키!!”






집착감금얀데레




이 남자에게 이런 면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는 언제나 밝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항상 다정했으니까. 마키시마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붉은 끈으로 질끈 묶여있는 매듭은 아무리 손목을 비틀어도 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얀 피부를 거칠게 쓸어 붉은 자국만 남겼을 뿐이다.

“아아, 마키쨩. 손목 비틀어 봐야 소용없다고 했잖아. 그거 쉽게 풀어지지 않아. 내가 묶었는걸.”

화사하게 웃는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어서 더 무섭게 느껴졌다. 마키시마는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워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본디 계획대로라면 자신은 지금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 남자는 분명, 공항에 도착한 자신에게 전화를 했고, 작별을 고했다. 울 것 같은 목소리를 하고 있긴 했지만 ‘몇 년이든 기다려줄 테니까!’라며 최대한 밝게 보내주겠다고 했었다. 바람피우지 말라는 말 같은 것도 해서, 내가 무슨 너와 연인 사이도 아니고 뭐라는 거니. 라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쩌다가.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마지막 기억은 공항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에 갔던 것이었다. 손을 씻고 다시 나오려는데 묘하게 조용하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눈앞이 까맣게 점멸되었던가. 그 다음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이 바로 이 공간이었다. 전등이 아니면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공간은 창문이 없는 방이거나 지하실쯤 되어 보였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토도 진파치.

- 일어났어? 생각보다 많이 잤네. 마키쨩, 피곤했어?

- 이게 무슨… 여긴 어디…?

평소처럼 화를 내려다가 팔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알았다. 누워있던 침대를 벗어나려고 움직이려다가 그제야 발목도 묶여있음을 알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마키시마는 패닉에 빠졌다. 귓가에 감도는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하고 사랑스러운데, 그게 왜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는지, 심장이 조여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있다 보니 며칠이나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졸려서 억지로 잠드는 날도 며칠 세다가 포기했다. 감각적으로는 며칠 안 흐른 것 같기도 했고,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한 오묘한 상태가 되었다. 마키시마는 그 사이 몇 번인가 탈출 시도를 했으며, 죽기 직전까지 가는 단식투쟁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탈출 시도는 몇 발자국 벗어나지도 못하고 금세 그에게 걸려 혹독하게 (그의 표현에 의하면) 조련을 당했으며, 단식투쟁은 링거를 비롯하여 그가 억지로 음식을 먹이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차라리 죽여주련?”

“에~? 마키쨩 왜 그런 무서운 말을 하고 그래.”

“…토도.”

“왜 마키쨩?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올까?”

말이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말 외에는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 그의 얼굴은 같이 산을 오를 때처럼 화사하다. 그 화사함이 비수가 되어 심장이 꽂혀 검붉은 피를 토해내고 있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너무나 무기력하다. 파란 하늘 아래, 푸르른 산을 함께 오르던 그를 사랑했던 것이지, 이런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해

아파



너도 날 사랑하지?

살려줘



제발 나 좀 놔주련…?

그건 안 될 것 같아, 마키쨩.




도망갈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 안에 갇혀 버렸다.





2D 2.5D 3D가 통합된 덕질의 망망대해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한 마리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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