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혈, 폭력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날 밤은 내일모레 벌어질 일에 두려움을 느낀 내가 그에게 조용한 곳으로 데려다 달라 부탁한 날이었다.

그가 내 손을 이끌고 온 곳은 그의 사무실이었다. 이전에 몇 번 와서 나에게도 익숙한 장소였다.

‘당일 대출’, ‘급전’, ‘떼인 돈’ 따위의 스티커가 붙은 창문. 창틀은 다 녹슬어 제대로 닫히지도 않고 시들어가는 난 화분 여러 개가 창가를 따라 늘어져 있다. 오래된 책상과 의자. 알아들을 수도 없는 정보가 적힌 화이트보드. 앉으면 끊임없이 꺼지는 손님용 가죽 소파에 누워 내 허리를 껴안는 그의 손길을 느꼈다. 냉골 같은 사무실 안, 그의 체온만이 뜨겁게 내 등을 타고 전해진다. 뭐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는 한참이나 나를 껴안고 누워있기만 했다.


“...냄새 나.”


다 뜯어진 가죽 소파 등받이에 얼굴을 대고 누워있자니 역한 담배 냄새와 가죽 냄새 따위가 올라왔다. 그 뜻을 이해했는지 정혜솔은 살짝 웃었다.


“어제 청소하긴 했는데... 아니면 일어나실래요?”


그가 슬며시 손을 빼려 한다. 따듯해서 좋았는데. 나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려 그와 마주보고 누웠다.


“이러면 괜찮아.”

“똑같이 누워있는 건데 왜...”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대고 숨을 들이마시고 나서야 입을 다문다. 싸구려 향수와 연한 담배 냄새. 똑같이 역겹긴 한데 나쁘지 않다. 내가 팔을 뻗어 그의 등을 끌어안으니 그 역시 왼손으로는 내 허리를, 오른손으로는 내 머리를 감쌌다. 아까보다 심장박동이 더 세게 전해진다.


“정혜솔.”

“네, 아가씨.”

“너는 내 편이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정혜솔은 품에서 잠시 나를 놓아주었다. 어둠 사이로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돋보였다. 그는 한참이고 나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내 손을 잡아 제 입 근처로 가져갔다.


“...뭐하러 그런 걸 물으시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내 손바닥 위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사포와 모래가 뒤섞인 듯 거칠다.


“저는 아가씨가 감옥에 간다면 같이 가고 싶어서 안달 날 인물인걸요.”


그 어떤 곳이든 나와 함께 갈 거라는 말이 왜 이렇게 위로가 되는 건지. 그는 하염없이 건조한 입술을 내 손바닥에 댔다 떼기를 반복했다.


“...네가 잡히면 사람들은 나부터 의심할 거야.”

“그런 일 없도록 할게요.”


그의 입술이 이번에는 내 손목 안쪽에 와 닿았다. 내 맥박이 뛰는 속도에 맞춰 그도 숨을 쉬었다.


“저를 믿으세요.”


믿어달라고. 누구보다도 신뢰하기 어려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듣고 나서도 조금은 무서워서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칼을 꽂아 넣고,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 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달아난 모습을 보자 아이러니하게도 미소가 지어졌다.


언니. 정말 억울하겠다.

그런데 어쩌겠어. 인과응보지.

이번에야말로 어디 한 번 날뛰어 봐.


피투성이가 된 언니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참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어째서인지 피비린내가 역하지 않았다.



**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지켜야 할 선이 있기 마련이다. 각기 다른 기준을 갖고 선을 긋지만 공통되게 모두가 지켜야 할 선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규칙과 규율이라 부른다.

하지만 맹정우는 방금 그 선을 넘어버렸다.


“여러분. 일단 진정하시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지하 1층 대합실로 이동해 주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임에도 어머니는 사람들을 모아 지하 1층으로 이동시켰다. 직원들에게 인원을 체크하고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을 확인하라 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홍빛 피에, 역한 비린내까지.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하니 그새 다가온 그 애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괜찮아요?”


내 손에 묻은 피가 그 애의 손까지 번진다. 나는 손을 쳐내고 세면대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에 손을 비벼가며 지워지지도 않는 피를 닦고 있으니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물 온도를 낮추어 주었다.


“설명해 봐.”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 주변이 조용해지자 어머니가 물었다. 나는 미지근한 물을 얼굴에 한 번 끼얹고 나서야 대답했다.


“맞은 편 흡연실에 있다가 이상한 소리가 나서 와 보니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네 옷에 피는?”

“처음 발견 했을 땐 아직 살아있어서 지혈을 하려 했어요. 그런데 죽었고요.”


세면대 위에 올려둔 손이 떨렸다. 아무리 회의 중 나와 시비가 붙었다 해도 무고한 사람이 죽는 건 충격이 컸다. 심지어 모두의 심증이 나를 향해 있을 거다. 정작 내 심증은 내가 아니라,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실 칸막이를 오가며 무언가를 찾는 저 어린 여자애인데.


“어머니. 보셔야 할 게 있어요.”


그가 손짓한 곳은 화장실 마지막 칸막이였다. 어머니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까스로 시체와 피 웅덩이를 피해 맹정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사이, 나는 벼리에게 속삭였다.


“맹정우가 직접 죽였을 리 없어.”

“그러면요?”

“아직 못 빠져나갔을 거야. 미희랑 같이 여기 좀 뒤져봐. 찾으면 지하 3층으로 데려오고.”


통하는 출입구는 오직 하나. 어머니 성격에 환풍구를 사람 지나갈 정도로 크게 만드셨을 리도 없고. 도망칠 길은 몇 개 없다. 살해 후 불과 10분조차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이곳에 남아있을 거다.


“하다못해 한가림이라도 데려와.”


한가림을 의심하고 싶지 않지만 최악의 상황도 배재할 수 없었다. 내 말에 벼리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곤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는 사이 맹정우가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손잡이를 휴지 부분으로 싼 등산용 단검 하나를 가져왔다. 선명한 혈흔이 달라붙어 있는 그 명백한 증거물에 어머니는 이까지 가셨다.


“솔직히 말해야 한다.”

“뭐를요?”

“네가 한 짓이냐?”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나를 불신하고, 맹정우를 신뢰하길 바란 건 맞았다. 그러다가 맹정우가 제 발에 제가 넘어지는 순간이 오면 그 틈새를 내가 비집고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어머니는 맹정우를 내칠거고, 맹정우의 분노는 나와 어머니를 동시에 향하겠지.

그 분노를 다른 사람들까지도 인지했을 때. 맹정길을 죽인 사람이 맹정우가 되도록 하려 했다. 여차하면 내가 맹정길을 죽이고 맹정우에게 뒤집어 씌울 작정이었다. 그전까지는 맹정우 손에 일부러 놀아나며 그가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고 착각하게 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해서 싸움을 걸어온다고.

그래. 내가 너를 얕봤구나. 이번엔 내가 졌어.


하지만 사람을 얕보는 것도 정도껏이었다.

숨이 차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리니 그새 굳은 피가 머리카락 곳곳에 눌어붙는다.


“몇 번을 말해야 아실까요. 아니라고요.”

“널 책망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려는 거다. 너 혼자서 이 정도의 일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머니가 보란 듯이 시신을 가리키며 역정을 내셨다. 날 돕는다기보단 본인을 위해 덮고 싶다는 거겠지. 하긴. 어머니 입장에서는 애써서 범인을 찾기보다는 사고로 위장해 시신을 처리하고 이걸 빌미로 내게 족쇄 하나를 더 채워 넣는 게 이득이었다.

이제 만족하니?

미동조차 없는 최성혜가 물었다.

그의 시신이, 맹정길의 남편으로 바뀌고.

이곳은 지하실이 아니라 그때 그 날의 나무계단 위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때문에 숨 쉬기도 버거웠다.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짚으니 맹정길은 마침내 내 약점을 잡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섰다.

아니야.

이번에는 내 손으로 벌인 짓이 아니야.

그 애라면 어떻게 말 해 줬을까. 언니 잘못이 아니에요. 아직 시간은 충분해요. 늦지 않았으니까.

후회없이 행동해요.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박동이 가라앉는 게 느껴진다. 나는 똑바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기다려요.”

“뭐?”

“이번엔 내가 해결할 테니까. 1시간만 기다리라고요.”


맹정길은 기가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나는 입고 있던 정장 자켓을 벗어던지고 바닥에 무릎을 꿇어 시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최성혜가 찔린 곳은 복부나 등이 아닌 가슴이었다. 그것도 목 바로 아랫부분. 최성혜의 키가 작지 않다는 걸 고려하면 칼을 역으로 쥐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상처 역시 삼각형 모양인 것을 보아 군용 단검일 게 뻔했다.

칼을 역으로 쥐고, 맹정우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다 할 인물. 너무 선명해서 웃음이 다 나왔다. 드디어 미친 거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맹정길과 맹정우를 무시하고 화장실 밖으로 나섰다. 다들 지하 1층으로 이동한 건지 지하 2층 복도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선 1층에 누가 있는지부터 파악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갔다.

살인 사건이 있었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로 1층 대합실은 평온했다. 각자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의자에 앉아 있는가 하면 간단한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 이상한 광경을 대충 눈으로 쭉 훑어보는데 갑자기 직원 한 명이 쭈뼛대며 내게 다가왔다. 갈색 단발머리에 아담한 체구를 지닌 여자였다.


“저. 이사님.”


나는 순식간에 눈을 흘겨 직원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확인했다. 박희주 팀장. 손에 서류가 한가득 들린 거로 봐선 맹정길이 시킨 대로 인원을 체크하는 중이었나 보다.


“무슨 일이죠?”

“방문객 리스트를 확인해 봤는데... 1층 대합실에 전부 계신 거, 맞죠?”


잔뜩 불안해하며 속삭이는 모습에 촉이 왔다. 뭔가가 있구나.


“문제라도 있나요?”

“1명이 비어요.”


내 예상대로였다. 박희주 팀장은 주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희 직원들은 방문하실 분들 얼굴과 이름을 전부 외워 놔요. 어느 분이 누구와 함께 오는 지도 사전에 다 체크하고요.”

“잠깐 화장실나 흡연실에 갔을 수도 있잖아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관계자에게 보고 후 2인 1조로 갔다 오는 걸 부탁드렸어요. 그렇게 자리 비우신 분들 제외한 인원이에요.”


내가 경청하자 그는 지하실 약도까지 보여주며 출입구와 직원들이 배치된 위치를 하나하나 손가락을 짚었다.


“출입구는 하나밖에 없고, 길목마다 직원들이 있어요. 당연히 방문객들 얼굴과 이름을 전부 외운 직원들이고요. 만약 직원들이 모르는 손님이 계신다면 저지하죠. 애초에 입구에서 검문을 거쳐서 모르는 손님이 들어올 확률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 그게 누구인가요?”

“아. 이분인데...”


그는 방문객의 얼굴 사진과 이름, 나이 따위가 적힌 서류를 넘기다가 한 곳에 멈춰 섰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내 예상대로 정혜솔이었다.


“입구에 있는 직원 말로는 맹정우 아가씨와 함께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잠깐 자리 비우신 걸 저희가 놓친 걸 수도 있지만...”


여기 직원들이 이런 일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놓칠 리가 있나. 함께 들어왔다가 회의실에는 출입하지 않고, 화장실에 숨어있다가 최성혜를 살해하는 정혜솔. 이후 사라진 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등장할 작정이었나.

내가 한참이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자 박희주는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혹시 아시는 분인가요?”

“그것보다는... 일단 제 직원들 시켜서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길을 잃은 걸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되러 그를 안심시키니 그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그래요.”


이제 미희와 벼리가 잘 해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이왕 찾는 거 나도 찾아볼까 싶어서 비상계단부터 뒤져보기로 했다. 1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비상계단은 어둡고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센서등만이 계단참마다 불을 밝혀주었는데 으슥한 분위기와 지하실 특유의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였다. 결국 2층에서 3층으로 내려가다 말고 계단에 주저앉고 말았다.

꽤 넓고 복잡한 구조인데. 심지어 3층 창고에 작정하고 숨었다면 찾기 더 어려울 거다. 아니, 이미 다 처리하고 지하 1층 대합실에 있다면? 일이 꼬여만 간다. 결국 헛구역질을 하는데 지하 2층 비상계단으로 누군가가 걸어들어왔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비상계단 안에 울렸다.


“언니. 등이라도 두드려줄까? 괜찮아?”


다정하게 비아냥 거리는 그 말투만 들어도 맹정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옆에 앉더니 가만히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는 강 실장님이랑 같이 주변 정리좀 하러 가셨어. 나도 잠깐 쉬려고 나왔고.”


그 친절하고 정성스러운 손길이 더 역겨웠다. 나는 어지럼증까지 느껴져 비상계단 벽에 머리를 툭 기댔다.


“많이 힘들어?”


시선을 돌려 맹정우를 바라봤다. 희미한 센서등과 비상계단 입구 틈새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비친 그의 표정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정혜솔. 어디에 있어?”


그 말에 맹정우는 눈썹을 치켜떴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파악하고 말을 이었다.


“나야 모르지. 어디 숨으라고는 딱히 말 안 해 줬거든. 그냥 잘 숨어있다가 잠잠해 지면 나오라 했어.”


역시 네 짓이었구나. 허탈함에 웃음이 나온다. 매번 이런 식이다. 족쇄를 만드는 건 맹정길이고, 그 족쇄를 내 발목에 채우는 건 맹정우다.


“참고로 잡히더라도 자백은 못 들을 거야. 나랑 약속했거든.”


의기양양한 태도다. 나는 허공을 바라본 채 말했다.


“그거야 해 봐야 아는 거지.”

“글쎄.”


그가 속삭였다.


“언니는 죽은 사람이 말하는 것도 봤나 봐.”


살풋 웃으며 내 어깨에 기대오는 그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내가 말 했지.”


그는 내 팔을 껴안은 채 몸을 더 가까이 했다. 얇은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가슴팍의 심장박동이 지나치게 빠르다.


“난 언니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지. 피는 안 섞였지만 어쨌든 내 동생이고, 자칫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아이다. 애증이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사랑과 증오. 둘 중 어느 쪽의 비율이 더 높은지조차 모르겠다.


“...어떡하려고 일을 이렇게까지 벌려?”

“응?”

“아무리 치밀하게 했다 해도 흔적은 남을 텐데. 그러다 잡히면 어머니가 널 보호해 주실 것 같아? 지금 당장 여기 있는 직원들만 해도 정혜솔이 사라진 건 다 알고 있어.”


걱정과 두려움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왜 어머니가 이 일에 나설 거라 생각하는데?”

“뭐?”

“본인이 불법으로 지으신 지하실에서 생긴 일이야. 심지어 살인이라고.”


그가 내 팔을 놓아주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말을 이었다.


“최성혜한테 남은 가족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최희숙 하나밖에 없는데. 그 미친 여자 속이고 사고로 위장하는 것쯤은 어머니한테 일도 아니야. 언니도 알잖아.”


여기까지는 참았다. 하지만 그 다음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긴 기분이었다.


“심지어 경험자면서...”


눈이 몰아치는 밤. 눈앞에 비치는 헤드라이트. 모든 게 다 어지럽게 겹치고 뒤섞인다. 나는 그의 멱살을 붙잡고 뒤로 넘겨버렸다. 계단참에 그를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니 그는 그제야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네가. 감히. 누구를 입에 올려?”


그의 멱살을 잡고 주먹에 힘을 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비참했다. 더 비참한 건, 망언을 지껄인 그에게 주먹 한 번 휘두르지도 못하는 나다. 결국 주먹을 내리고 멱살만 붙잡으니 그는 숨을 컥컥대면서도 웃으며 말했다.


“지금 언니는 내 멱살 잡을 게 아니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할 텐데.”

“너...”


아랫입술이 떨렸다. 욕을 퍼붓고 소리라도 지르려는데 비상계단 문이 열리며 밝은 빛이 서서히, 더 많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빛을 등지고 2층 비상계단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나의 어머니, 맹정길이었다.


“이게 다 무슨...”

“아... 마, 마침 잘 왔어요. 저 좀 도와...”


맹정우가 도와달라 말하려다가 말문이 막힌 듯 맹정길의 표정만 살폈다. 나 역시 고개를 들어 그를 보니 아무래도 나와 맹정우의 대화를 다 들은 것 같았다.


“내가 방금 들은 게... 맹소연 네가 아니라, 정우가 벌인 짓이라는 거냐?”


웃음이 터졌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허탈함과 성취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어쩌겠어.

인과응보는 모두의 삶에서 공평하게 일어나는 것을.


“그러면... 잠깐... 설마...”


맹정길이 비틀대며 문턱에 기댔다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는 미간을 구긴 채 맹정우에게 물었다.


“저번 거래 망친 것도. 네 짓이었어?”

“뭐? 아니, 아니에요! 어머니도 봤잖아요. 그 물건 언니 집에서 나왔어! 뻔히 알면서 왜...”


맹정우가 다급히 나를 밀치고 거의 기다시피 하며 맹정길에게 다가갔다. 그는 급기야 맹정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언니. 말해! 내가 곱게 돌려주기까지 했는데. 작정하고 빼돌린 건 결국 언니였잖아!”


궁지에 몰려 아무 소리나 지껄이던 맹정우는 흠칫 놀라 숨을 멈췄다. 그는 맹정길의 바지 끝을 붙잡았다.


“아니, 내 말은... 어머니. 들어보세요. 네? 아니야! 내가 한 짓 아니라고!”

“그래. 그건 아니라고 치자. 그러면 이번 일도 아니라 할 거니?”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맹정우의 뒤통수를 바라볼 때까지도,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대답이 없지?”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계속 아니라며, 내 말 좀 들어보라며 중얼거리는 맹정우의 모습에 맹정길은 거의 확신한 것 같았다. 그는 제 딸의 손을 쳐내고 몸을 돌렸다.


“가지. 시체는 알아서 처리하라 했고... 사람들 입단속도... 알아서 처리해 줄 거고...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자. 머리가 아파서 더는 못 있겠다.”


맹정우를 내버려 둔 채 자리를 뜨는 그의 뒷모습이 유독 휘청였다. 나는 급히 그를 부축해 주었다. 내 부축을 받으며 복도를 지나는 그는 이마를 싸맨 채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의심이 되면 말을 해야지. 입 다물고 혼자 해결하겠다 하면 일이 풀려? 미련한 놈이.”


제대로 들어줄 생각도 없으셨잖아요. 라고 말하려다가 쓴웃음만 남겼다.


“찌른 놈은? 찾았어?”

“안그래도 제 직원들에게 부탁해 놓았으니 걱정마세요.”


그는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다가도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내내 제 딸에 대한 걱정을 드러냈다.


“대체 어쩌려고... 내가 잘못 키웠나보다. 벌을 받는 거지. 이 정도 사고를 칠 줄은... 너도 마찬가지야. 네 동생 잘 챙길 생각은 죽어도 안 하지? 애가 오죽했으면 저렇게까지...”


그 한탄을 듣다가 결국 끼어들고 말았다.


“어머니.”

“응?”

“진짜 제가 죽인 거였으면 어머니는 어떻게 하셨을 거예요?”


나름 가시를 담은 말이었는데 그는 미간만 구겼다.


“뭐? 헛소리를... 빨리 올라가서 다른 분들 에스코트나 해 드려.”


한 치의 애정이 쌓일 시간조차 주지 않는구나. 나는 짧게 소리 내 웃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변수가 생겼으니. 다시 계획을 세워야겠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고 모든 걸 예측할 필요가 있겠다. 반드시. 반드시 이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려야지.

 

하지만 누누이 말해도 모자란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인생이 예측 불가능한 변수의 연속이라는 점이다.

 

복도에 울리는 구둣발 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반응해야 했다. 뒤를 돌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하지만 표정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머리칼을 헝클인 채 달려온 맹정우가 칼을 빼든 채 휘두를 거라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거다.

 

피 묻은 단검의 붉은 빛이 조명에 번뜩인 것이

내가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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