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ring: 클락켄트(슈퍼맨)/브루스 웨인(배트맨)
Rating: PG-13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사람을 돌아보았다. 텅 빈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은 그 남자와 그, 단 둘 뿐이다. 그 남자는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다른 손은 허리 옆으로 자연스럽게 늘어트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면창의 바깥으로 이제 막 노을이 내리깔리기 시작한 도시의 풍경이 고스란히 내려다 보였다. 오렌지색으로 물든 황혼이 남자의 어깨 위로 떨어져 긴 그림자를 만든다. 적막한 공기는 정지된 듯 고요했다. 남자는 마치 사색에라도 잠긴 양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남자의 뒷모습은 지나치게 익숙했다.

이런 순간이 오면 언제나 그렇듯 목 안 쪽에서 따끔한 아픔이 흘러나왔다. 익숙한 아픔이 숨통을 조인다. 그는 어렵게 침을 삼키면서도 그 남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요즘 언제나, 남자의 환영을 보았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분주한 일상 속에서 그는 남자를 발견하곤 했다. 지금처럼 뒷모습일 때도 있고 스쳐가는 옆모습일 때도 있었다. 때로는 차를 마시는 모습일 때도 있었고, 신문을 읽을 때도 있다. 환영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남자의 수많은 모습들을 현실 속에 투영 시켰다. 그건 마치 신기루 같았다. 한때는 존재하던 사람의 그림자뿐인 잔상. 그것은 아름답기에 오히려 더 잔혹했다.

남자의 환영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이 진짜 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놀랐고, 참을 수 없는 기쁨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가 상대를 붙잡았을 때 그를 돌아본 사람은 그가 기대하던 얼굴이 아니었다. 때로는 닮고, 때로는 전혀 닮지 않은 낯선 사람들. 그가 봤던 사람은 환상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엔 늘 타인들만 남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일은 반복되고 또 반복됐다. 길거리에서 낯선 이를 허겁지겁 따라잡았다 사과하는 일은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지만, 좌절과 실망이 반복되자 그의 발걸음은 차츰 느려졌다. 정신없이 뛰던 그는 어느 사이엔가 걷게 되었고, 걷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이후엔 그저 그 자리에 멈춰서기만 했다.

덕분에 그는 불신이라는 낯선 감정을 배웠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처 알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종류의 두려움. 하지만 그럼에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종종 그의 환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남자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발견할 때마다 눈을 돌리지 못했다.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남자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끝내 낯선 사람을 보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발걸음을 돌려 뒤돌아 서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애써 기대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음에도 그의 심장은 조금씩 두근거렸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남자는 더욱 그리운 사람을 닮아갔다. 가슴이 에일 만큼 익숙한 어깨선이 눈에 들어왔다. 몸을 타고 유려히 흐르는 맞춤 정장은 남자가 좋아하던 방식대로 재단되어 있고, 흰 와이셔츠의 소매 깃을 장식한 것은 눈에 익은 커프스단추다. 남자가 평상시 늘 뿌리곤 하던 향수의 그리운 내음까지 알아차렸을 땐, 작게 빨라지던 심장 박동은 이미 걷잡을 수 없게 된 후였다.

감히 이름을 부를 자신이 없어서, 천천히 손을 들어 상대의 어깨를 짚었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그의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눈보다 더 많이 감정을 보여주곤 하던 완고한 턱선이 보였다. 가끔씩 삐뚜름하게 휘곤 하던 단단한 입매와 날카로운 콧대도. 숨조차 쉬지 못하는 상태로 그는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확실하다. 이번에야말로 드디어 그다! 오랜 기다림의 보답처럼 남자가 돌아왔다고, 그는 생각했다. 기억 속의 남자와 완전히 같은 얼굴을 확인했을 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를 그토록 고조시킨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남자의 푸른 눈이 웃고 있었다. 미소 짓고 있는 시선은 일렁이는 물결처럼 따스했고, 그리운 입술에선 냉소적인 농담 대신 친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명백한 애정이 섞인 그 음성은, 슬플 정도로 다정히 그를 아는 체 했다. 

“어이, 보이스카웃. 오랜만이군. 그 동안 잘 지냈나?”

고조될 때와 마찬가지로 추락은 순식간이었다. 그의 기쁨은 날개 잃은 새처럼 빠르게 내동댕이쳐졌다. 여기까지 와서야 그는 깨달았다. 지금 그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이다. 그도, 남자도, 이 복도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지금 서 있는 장소는 현실이 아니다. 깊게 잠든 그의 꿈 속. 그 곳에 존재한 가장 간절한 소망의 한가운데다.

클락은 눈을 감았다.

그는 단 한 번도 남자가 저런 식으로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거의 웃지 않았고, 드물게 미소 지을 때조차도 언제나 짧게 입 꼬리를 휘는 게 전부였다. 남자는 종종 그를 보이스카웃이라고 불렀지만, 그 목소리는 언제나 비꼬는 듯 무뚝뚝했다.

클락은 남자에게 언젠가는 저렇듯 밝은 웃음을 주고 싶다고 소망했던 적이 있음을 기억해냈다. 주고 싶었던 것은 그 외에도 많았지만, 그보다 더 간절했던 소망은 달리 없었다. 눈앞의 존재는 남자처럼 보이지만 남자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의 그리움이 형상화된 것에 불과했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의 마지막 흔적이고, 망가진 꿈의 잔해다.

결국 그는 단 한번도, 남자에게 지금과 같은 미소를 짓게 해준 적이 없었다. 

“-브루스.”

브루스. 브루스 웨인. 그리운 나의 배트맨.

그는 잃어버린 친구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렀다. 잠긴 목울대가 다시금 꿀꺽 울렸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클락은 인사대신 조용히 눈앞의 존재를 끌어안았다. 그의 두 팔 안에, 형체를 갖춘 소망이 가만히 안긴다. 클락은 그를 안은 두 팔에 힘을 주며 감긴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아직 꿈에서 깰 준비가 되지 않았다.


 - fin -


가늘고 길게 덕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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