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본 작품은 동성끼리도 임신이 가능한 세계, 즉 양성구유(후타나리) 설정을 바탕으로 합니다.

해당 설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성적인 장면들은 읽지 않고 넘겨도 지장 없는 성인글로 따로 뺄 예정이지만, 본편에서도 약간의 언급이 존재하므로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의 주의를 요합니다.


* 1편: https://posty.pe/4h3v69

* 2편: https://posty.pe/fufr1x

* 2.5편: https://posty.pe/ew9nas (성인인증 필요)

* 3편: https://posty.pe/ch6xw3

* 4편: https://posty.pe/khv07w

* 현성희원 요소 있음










놀랍게도 시간은 오전 6시 42분이었다. 6시 42분이 뭐가 놀랍냐고? 내가 이 시간에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놀랍다.


대충 7시간 조금 안 되게 잤으니 적게 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보통 나의 하루는 유상아가 깨우러 오는 7시 20분에 간신히 시작된다. 유상아가 날 내버려 두는 날이면 그보다 더 늦게. 그 성실한 녀석은 나보다 1시간은 더 일찍 일어나서 가벼운 아침 운동을 한 후 샤워까지 하고 날 찾아온다. 지금쯤이면 아직 운동하고 있겠지. 좀 놀라게 해줄까. 나는 이불을 걷었다.


식탁 앞에서 미리 대기 타고 있을 생각이었는데, 집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누구야? 혹시 도둑? 예상치 못한 인기척에 긴장했으나, 곧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임을 알았다. 아주머니 역시 이른 아침에 날 봐서 놀란 듯했으나 금세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음……, 사모님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식사는 물론이요 넓은 집안이 상시 깨끗하게 관리되는 걸 보면 매번 분주히 일하는 듯한데, 아주머니는 나와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적지 않은데도 그랬다. 혹시 호그와트 집요정에게 관련 스킬을 배워온 건 아닌지.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맛있게 드시라며 다시 인사를 하고 물러선다. 식탁에는 보기만 해도 따뜻한 게 느껴지는 음식들이 예쁘게 올라와 있다. 오늘 반찬은 뭔가 구경하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도 감사합니다.’하는, 멋쩍게 꾸벅이고 마는 나와는 달리 사교성 넘치는 인사말이 들려온다. 뒤돌아서자 운동복을 입은 유상아가 들어오다 말고 나를 발견하고선 딱 멈춰 선다. 눈이 커진다. 리액션 참 좋군.


유상아는 우뚝 선 채 커진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좀 민망할 정도로 나를 훑던 유상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 어디 아파?”

“그 정도는 아니지 않냐.”



자식이 리액션이 좋다 못해 과하군. 운동하고 왔음 물부터 찾겠지 싶어 물 한 잔 따라서 건네주었다. 고마워. 내 예상이 맞았는지 유상아는 받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나 깜짝 놀랐어.”

“그냥 눈이 일찍 떠졌어.”

“너도 이제 익숙해지나 보다. 이참에 나랑 같이 아침마다 운동할래?”

“이 이상 새 나라의 어린이가 되는 건 싫다.”



이번에는 제대로 거절했다. 유상아 때문에 바뀐 건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 말고도 또 있다. 내가 하는 운동이라곤 찌뿌드드할 때 잠깐 하는 스트레칭 정도가 다였는데, 얘랑 산 이후로 가끔씩 홈트도 하게 됐다. 기상 시간처럼 계약서에 쓰여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30대가 되니 체력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마침 상황이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나에게 운동이란 하루하루 깎여가는 체력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연명해줄 구명줄일 뿐 그 이상으로 친밀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과연 유상아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지 그래 알았어 하고 만다. 내가 홈트 같이 한다고 했을 때도 의외란 표정을 숨기지 않던 유상아다. 기대를 안 하는 게 당연하지. 빈 컵을 식탁 위에 내려놓은 유상아가 식탁 한 번, 나 한 번 쳐다보더니 눈썹 끝을 살짝 늘어트린다.



“나 얼른 씻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줄래? 같이 먹고 싶어.”

“오냐.”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유상아가 밝아진 표정으로 샤워하러 간 동안 나는 식탁 앞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둘러봤다. 유상아 흉내를 내는 건 아니다. 다만 어제저녁에 봤던 기사가 신경 쓰였다. 헤드라인이 뭐였더라. ‘화운 일가 장녀 유상아 11월 결혼… “상대는 가시버시례 상대 A씨”’라는 심플한 제목이었지.


결혼이 한 달 남짓 남았으니 이젠 소식이 날 때가 됐긴 하다. 어제 유상아에게 물어보니 아예 화운 측에서 직접 뿌린 보도자료인 듯했다. 뉴스에 나오리란 걸 알고 있었음에도 진짜 내 결혼 소식이 뉴스에 뜨니 좀 신기하더라. 혹시나 뭐가 더 떴나 찾아보니까 그새 자잘한 것들이 더 풀리긴 했다. 초등학교 동창 사이라거나, 내가 소설 작가라거나. 뉴스엔 딱 그 정도였는데 댓글이 더 눈에 들어왔다.


‘A씨 웹소 <SSSSS급 무한 회귀자> 작가라고 함’. 그 밑에 대댓글로 화운이 웹소 작가랑 결혼을 왜 하느냐 시비를 거는 질문과 저거 사실이라고 말하는 댓글들이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밝혀질 사실이긴 했지만 하루 만에 알려지다니. 분명 같이 일하는 사람들 쪽에서 얘기가 샌 거겠지. 내 직업이 알려졌을 때의 반응은 참 예상 그대로다. 사람들 참 뻔하군.


혹시나 해서 내 작품의 댓글창에도 들어가 봤다. 역시나 벌써 싸움판이 났다. 어쩐지 엄청 밀어준다 싶더니 재벌 빽이 있어서 이렇게 뜬 거다, 확실치도 않은 일로 왈가왈부하지 말라, 밀어준다고 이렇게 다 잘나가는 줄 아냐 등등. 완결 난 지 다섯 달이 넘어가는 작품 댓글란에 안티, 어그로, 팬, 구경꾼들이 바글바글 시장통을 이뤘다. 이 자식들 이럴 줄 알았다. 조만간 또 한 번 고소 준비를 해야겠군.



“많이 기다렸어?”

“아니.”



유상아는 정말로 금방 씻고 나왔다. 다만 머리카락은 속만 말리고 왔는지 젖은 머리가 옷을 적시지 않게 어깨 위에 수건을 얹혀 놓았다.



“뭐 보니?”

“결혼 기사 반응.”

“뭔가 더 떴어?”

“그냥 내 신상 좀 더 밝혀진 정도……?”



혹시 과하다 싶은 거 있으면 내려달라고 요청할게. 유상아의 제안에 나는 그 정돈 아니고, 하고 대답했다. 오히려 기사들은 무난한데 다른 데서 난리네. 내 작품이 화운 빽으로 성공한 거란다. 같이 어그로들이나 까달라는 의미로 한탄한 건데 유상아는 아무 말이 없다. 액정을 쳐다보던 고개를 들자, 어느새 몸을 반쯤 일으킨 유상아가 내 쪽으로 팔을 뻗더니 스마트폰을 빼앗아가려는 듯 꾹 쥐었다.



“그런 말 굳이 보지 마.”



나를 살피는 눈빛이 가벼이 맞받아치기엔 너무 진중해서 나도 덩달아 엄숙해졌다.



“마음 쓰는 거 아냐. 내 작품 잘난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아무리 홍보를 많이 해봤자 작품이 재미없으면 그렇게 성공 못해. 게다가 너하고 내가 제대로 만난 건 두어 달 전부터……,”

“글쎄 그거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



악플 받은 건 난데 왜 지가 더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난리람. 괜찮다는 의미로 스마트폰을 움켜쥔 손을 툭툭 두드려주자 그제야 자리에 앉는다. 여전히 기죽은 리트리버 같은 얼굴이지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

“원래 이 판에 정신병자가 좀 많아. 걔네들이 모여서 악 지르는 거지 실제로 작품 판매량 같은 거엔 영향 없어. 내가 잘 쓰면 결국 다들 읽어.”

“그래도 그런 말 들으면 슬프잖아…….”

“넌 내가 그런 새끼들 가만 놔둘 거 같냐? 싹 다 고소할 거야.”



그러자 유상아가 제법 결연하게 말한다. 도와줄까? 우리 회사 법무팀 일 잘해. 흐음,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다. 회사 소속 법무팀을 사적으로 마구 쓸 수야 없겠지만 조언만 구해도 훨씬 더 많은 수의 바퀴벌레들을 훨씬 더 화끈한 방법으로 불태울 수 있겠지. 그거 괜찮네, 나중에 도와주라. 라고 말하자 유상아는 그제야 겨우 마음을 놓는 듯했다.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깔아뭉개려는지 모르겠어.”

“글이라 그런가, 타자기만 두드리면 다 되는 줄 안다니까. 자기들도 나 정도는 쓸 수 있다 이거지.”

“그럼 왜 너처럼 못 쓰는데?”

“내 말이 그 말이다.”



조금 뒤늦게나마 내가 원했던 분위기, 그러니까 한심한 놈들을 함께 까 내리는 소소한 시간이 찾아왔다. 누가 유상아 아니랄까 봐 이런 분위기에서도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른다든가 선 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남의 성과를 함부로 평가절하하는 놈들 중에 제대로 된 놈 없다는 거엔 무난히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네가 그런 헛소리에 큰 신경 쓰지 않는다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네 말대로 널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아. 나도 그렇고.”



화제가 마무리될 때쯤 흘러나온 유상아의 한마디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진짜?”

“응.”

“너보다 더?”

“나보다 더.”



대답에 막힘이 없다. 나는 스마트폰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그럼 내가 너보다 세상에 영향력도 크고 가진 것도 더 많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그건 당연히 나고.”



이것도 또 막힘없이 부정한다. 뭐야 장난하냐. 생각을 소리로 옮기기 직전 유상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처음부터 많이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랑 자기 힘으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 중에 누가 더 대단하다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잖아.”



나는 물끄러미 유상아를 탐색했다. 하지만 열심히 센서를 돌려봐도 유상아에게 열등감이나 허례허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상아가 대단한 연기파가 아니라면, 진짜로 순수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 확실히 재벌의 대단함과 자수성가의 대단함은 종류가 다르다. 물론 나도 흙수저나 개천 용까지는 아니다만, 아무튼 유상아는 나를 후자라고 생각하고, 자수성가 쪽에 더 점수를 주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어떻게 본인이 나보다 덜 대단하다고 한 점 티끌도 없이, 열등감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듯 말할 수 있지? 아무리 유상아라도……, 음……, 유상아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 그럴 수도 있지 유상아는.



“야 너는 가끔 도덕책보다 더 도덕책 같아.”

“진부해?”

“……듣기 싫지는 않네.”



나도 솔직하게 대답하자 유상아는 완벽히 풀어진 미소를 보였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유상아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좀 뿌듯하달까. 만약 유상아가 자기를 깎아내리며 열등감에 기반한 칭찬을 건넸으면 이렇게 산뜻하게 기분이 좋진 않았겠지. 왜냐하면, 유상아는 객관적으로 존나 잘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는 자기대로 잘났지만 너는 너대로 더 잘난 점이 있다고 얘기해줘서 찜찜함 없이 기뻤다.


짧은 대화 끝에 아침 식사가 시작됐다. 유상아는 예상대로 노릇하게 잘 구워진 생선 뼈부터 발랐다. 지정맞선 첫날부터 갈치 뼈 잘 바른다고 자랑하던 유상아는 밥상에 생선이 나오는 날이면 종종 이렇게 생선 해체 쇼를 재연하곤 했다. 나로선 나쁠 게 없어서 넙죽넙죽 잘 받아먹고 있다. 오늘도 유상아가 흰 살만 남겨놓은 생선을 한입 해봤다. 좀 짜긴 한데 그래도 맛있군. 이거 무슨 생선이지. 갈치나 고등어는 아닌데.



“맞다, 나 오늘은 오전에 나가서 밤에 들어온다. 아마 술까지 먹고 올 거야.”

“약속 있어?”

“응. 오늘도 청첩장 돌리러 가려고.”



유서 깊은 귀차니즘 덕에 나는 결혼식 관련 업무를 대부분 유상아에게 위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유상아 역시 대부분 자기가 알아서 일을 처리했지만 종종 나에게 의견 정도는 물었고, 내가 직접 해야만 하는 일이면 주저 없이 나를 닦달했다. 그리고 유상아가 나를 닦달할 정도의 일이면 진짜로 유상아가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긴 해서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청첩장 건도 그렇다. 내 하객들에게 유상아가 청첩장을 돌릴 순 없는 노릇이다.


청첩장을 들고 제일 먼저 고민했던 건 ‘누구에게까지’ 청첩장을 주느냐, 그거였다. 특히 결혼 상대의 하객석에 정·재계 인사들이 가득할 게 확정적이니까 더 고민이었다. 근데 고민해보니 그런 인사들은 내 부모가 알아서 수금하랴 인맥 자랑하랴 불러모을 테니 굳이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되받아야 할 게 있는 사람들이나 지인들을 마음 놓고 고를 수 있었다.


유씨 성을 가진 사회 부적응자랑 김씨 성을 가진 자발적 아싸 놈에겐 이미 나눠 줬고, 편집자를 비롯한 일 관련으로 만난 사람들한테도 돌렸다. 이제는 진짜 친구들만 남았다. 특히 오늘은 점심 저녁은 물론 그 이후까지 약속으로 가득 찼다.



“수영아, 너 얼굴에 뭐 묻었어.”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유상아가 불러 세운다. 반사적으로 왼쪽 뺨을 훔쳤더니 그쪽이 아니라면서 손을 뻗는다. 곧이어 엄지가 뺨을 훑는 감촉이 난다. 거기까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유상아의 손이 영 떨어져 나가지를 않는다.



“…….”

“……?”



얼굴을 붙든 채로 날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뭔데? 묻기 직전, 유상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

“그거 다시 할 때가 된 거 같아.”

“그거……?”



다소 짓궂은 표정으로 씩 웃는다.



“임신테스트기 말이야.”



나는 갑작스러운 임신 공격에 당황했다. 아니 그걸 이렇게 분위기 잡고 말할 일이야? 물론 다시 해볼 때가 됐긴 했다. 지난번에 한 줄 뜨는 거 확인하긴 했지만 그땐 꽃잠식으로부터 시간이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라. 그동안 생리를 한 번도 안 하긴 했는데 난 원래 좀 불규칙한 편이라 두 달쯤 지나면 다시 한번 확인해보자 말은 해둔 상태였다.


어 그래…, 해볼게……. 근데 손 좀 치워라. 당황 속에서 할 말을 겨우 쥐어짜 내자 유상아가 드디어 손을 물렸다. 본인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다.



“오늘 많이 늦니?”

“빨라야 10시에나 들어올 거 같긴 한데…….”

“너무 늦게 되면 연락해. 데리러 갈게.”



다행히도 유상아는 달갑지 않은 주제를 오래 끌진 않았다. 나도 서둘러 원래의 태도를 불러 모았다.



“내가 애냐.”

“애는 아니지만 내 아내니까.”



……겨우 되찾은 페이스가 무너졌다. 이번에야말로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머리만 긁적이다 방에 돌아왔다. 오늘 만나기로 한 친구들이 보낸 약속 확인 메시지를 다 읽고 나서야 ‘아직 결혼 안 했거든’이라든지 ‘느끼하게 왜 이러냐’라고 쏘아붙일걸 싶었다. 그러나 조금 더 앉아서 생각해보자 그런 대꾸들이 당시에 떠올랐다 하더라도 유상아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땐 말 못했겠구나 하는 확신도 들었다.


음……, 좋지 않다. 이런 기분 좋지 않고, 쟤가 요즘 부쩍 저러는 것도 문제 있다. 유상아 같은 스타일이 좀 유죄 인간의 전형이긴 하지만, 그 마수가 나에게까지 뻗쳐오면 그건 정말 곤란하다. 언제 한 번 선을 그어야겠는데. 근데 뭐라고 말해야 하지? 대놓고 작업 걸지 말라고 할 순 없는 거잖아. 작업 걸리고 있다는 걸 고백하는 꼴이라서.


채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로 집을 나섰다. 그리고 온종일 사람 만나고 얘기하느라 다시 고민해볼 시간도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도 있고, 꾸준히 만난 친구도 있고. 아무튼 여럿이서 밥 먹고 카페 가고를 점심 저녁 두 번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후딱 갔다.



“너 어렸을 땐 상아 안 좋아했잖아. 어쩌다 결혼까지 갔냐.”

“뭐 그냥…, 교류회 같은 데서 계속 만나다가 가시버시례 하게 돼서.”

“혹시 옛날부터 좋아했던 거 아냐? 그 왜, 우리 수학여행 갈 때도 너랑 같이 방 쓰겠다고 했었잖아.”

“그거 그냥 6명씩 방 써야 하는데 친한 무리는 9명 10명 이러니까 남은 애들끼리 방 꾸린 거 아니었냐.”



초중고 전부 같이 나온 친구가 있어서 과거 이야기가 좀 나왔다. 사실은 계약으로 맺어진 위장 결혼이란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더니 다들 로맨틱한 상상으로 나와 유상아의 결혼을 멋대로 덧칠한다. 아쉽게도 그런 핑크빛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모노톤이다만. 수학여행 얘기도, 대꾸했듯이 그냥 유상아랑 친하던 애들이 6명보다 많아서 필연적으로 몇 명은 방이 갈라져야 하니 다들 눈치 게임 하던 도중 착한 유상아가 먼저 자원했을 뿐이다. 내 사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다른 애들을 위해 나름의 희생을 자처한 유상아와는 다르게 나는 그냥 눈치 보는 꼴이 보기 싫어서 그런 거지만.


그 외에는 뭐, 먼저 결혼한 친구들의 경험담이나 재벌 가족 되는 게 부럽다는 말 몇 마디 나누고, 재벌가 며느리 생활 빡세지 않느냔 걱정이 나오고…… 다른 사람들 만났을 때랑 비슷비슷했다. 하긴 나였어도 비슷한 말을 했을 거 같다.


저녁 약속까지 끝내고 나오니 어느새 8시다. 아무리 친구들이랑 수다 떠는 거라도 내 성격상 이렇게 종일 밖에 나와 있으면 체력도 기도 좍좍 빨린다. 빨렸지만, 그래도 남은 약속이 있어 발을 옮겼다. 목적지는 한남동 쪽에 있는 칵테일 바 ‘JUSTICE’다. 거기 바텐더이자 사장인 정희원이 나 기다린다고 오늘 휴일인데도 문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다.


야, 나 왔다. 인사를 하며 문을 열자 컨템포러리와 네오클래시컬 그 사이 어디 즈음에 있는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엄청 악취미적인 디자인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손님들한텐 인기가 좋은 모양이다. 손님들이 좋아한단 이유로 내부가 점점 더 괴랄해지는 걸 보면. 벽 장식이 좀 달라진 거 같은데…….



“우리 몇 달 만이지?”

“넉 달인가 다섯 달인가.”



오늘 쉬는 날이라 했으면서 정희원은 번듯한 바텐더 복장까지 차려입고 날 맞이한다. 이번엔 너도 손님 입장으로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에 가자 했는데 자기는 자기 업장에서 바텐더로서 얘기하는 게 제일 편하다나 뭐라나.


정희원과 나는 친구 사이이면서 사장과 단골 사이다. 친해지게 된 계기는 좀 어처구니없는데, 정희원은 유중혁 군대 후임의 애인이다. 그 애인은 덩치만 크고 좀 순박한 남자인데, 유중혁에게 가혹한 짓을 당하진 않았어도 그 무뚝뚝한 싹퉁머리를 선임으로 만나게 되자 좀 무서워한 모양이다. 그런데 정희원이 그걸 잘못 알아듣고 군내 가학행위가 벌어졌다고 착각해서는 제대한 유중혁을 찾아왔다. 거기까진 뭐 그러려니 하는데 그러는 도중 쟤가 나를 유중혁 애인으로 착각해서 나까지 휘말려버렸다. 그땐 꽤 살벌하게 싸웠지. 나중엔 오해가 풀렸고 미안하다고 술 마시며 대화하던 중에 어영부영 친해졌다.



“뭐 마실래? 스칼렛 오하라? 벨리니?”

“여기서 제일 비싼 거.”

“오?”

“안주도 제일 비싸고 맛있는 거 내놓고.”

“오오?”



정희원은 굉장히 놀란 듯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그 몸과 손은 프로 바텐더다운 우아함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희원은 셰이커 쇼도 잘하고 조주기능사로도 아주 뛰어난 편이다. 솔직히 둘 중 하나만 좀 딸렸어도 내가 정희원의 사과를 그렇게 쉽게 받아주진 않았겠지.


보는 사람이라곤 손님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나밖에 없는데도 정희원은 셰이커를 열심히 흔들고 던지더니 멋있게 잔에 좌르륵 따라서 나에게 건네줬다. 재료가 많이 들어간 거 같진 않았는데.



“이게 제일 비싼 칵테일이야?”

“아니. 그치만 그런 주문을 하는 한수영 씨에게 딱 어울리는 칵테일이야. 안주는 좀 기다려.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비싼 걸 내올 테니.”



그러고 보니 음식은 쟤 말고 주방 담당이 따로 있었지. 이름이 뭐였더라, 외국인이었는데……. 그나저나 밥 사는 대신 비싼 거 먹으면서 청첩장 주려고 했는데 썩 만족스럽지가 않다. 나중에 제대로 밖으로 불러내서 밥 사줘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정희원이 내온 칵테일을 한 모금 했다. 맛있다. 달콤하면서도 입안에 퍼지는 화한 감각이 풍미를 더해주는 게, 꼭 유상아가 발정기에 내는 향이랑 비슷하다. 아 시발 내가 지금 무슨 비유를……. 하여튼, 아무래도 여기서 제일 비싼 칵테일은 내 입맛엔 안 맞는 모양이다. 프로 바텐더 정희원 씨는 돈보다는 고객의 만족이 중요하셨던 모양이고.



“그래서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만 오냐. 그냥 술 마시고 싶으면 오는 거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는데.”



정희원은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내온 안주는 과일 몇 개랑 치즈, 에그인헬이다. 술은 맛있게 만들어도 음식엔 소질이 없어 미안하단다.


정희원은 둔한 사람이 아니다. 내 연락에서 평소랑 다른 기색을 읽어내는 거야 어렵지 않았겠지. 나는 더 둘러대지 않고 청첩장을 꺼냈다. 정희원은 광택 나는 봉투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뭐야? 설마 데스 게임으로의 초대장?”

“쇼하지 말고 열어 봐.”



둔한 사람이 아닌데도 이 상황에 튀어나오는 반지르르한 편지 봉투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하다니. 아마 나를 잘 알기 때문일 거다. 봉투를 뜯어 그 내용물을 확인한 정희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겉면의 꽃무늬 가득한 장식부터가 나 청첩장이요 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나의 결혼을 예상 못했다 하더라도 저게 뭔지 못 알아볼 리는 없겠지.



“……잠깐. 잠깐 잠깐……, 이거 진짜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그거가 뭔데.”

“말도 안 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애인의 ㅇ자도 만들 생각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사이에 결혼까지?”



맞다. 결혼은커녕 이젠 연애도 귀찮다고 얘기했었지. 나는 가타부타 말을 얹는 대신 그냥 씩 웃었다. 정희원도 거기서 더 시간 끌지 않고 안을 읽었다. 분명 내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고 있으리라.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청첩장에 처박았던 얼굴을 든 정희원이 조심스레 물었기 때문이다. 설마…… 화운 그룹 유상아?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부모 이름에 화운 그룹 회장과 그 사모님 이름이 적혀있는데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하긴 힘들겠지. 청첩장을 받은 사람들 거의 전부가 이름을 읽자마자 내 결혼 상대를 알아보았듯, 정희원도 마찬가지였다.



“어지버시 극혐하신다던 분은 어디 가고 어지버시 중의 어지버시랑 결혼을 하시나.”

“걔가 어지버시라서 결혼하는 거 아니거든?”



사실은 맞다. 걔가 어지버시고, 나는 가실매고. 그 외 서로에게 필요한 기타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서 하게 됐지. 정희원은 내 말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했는지 ‘오~ 한수영이 이런 달달한 말도 하고!’하며 낄낄댔다. 그렇게 오해하라고 던져준 말이긴 하지만 진짜 대차게 오해를 하니 그것도 또 뒷맛이 좋지 않군.


내가 가실매인 것도 알고, 유상아랑 동창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던 정희원이라 그런지 놀라는 게 오래 가진 않는다. 내가 유상아랑 동창인 건 물론이요 가실매인 것조차 모르던 출판사 사람들은 기절초풍하던데. 정희원이 다시 청첩장 안을 확인한다. 이번엔 날짜와 예식장을 확인하는 듯하다.



“별로 안 머네. 참석할게.”

“그래, 알았어.”

“야, 근데 결혼식이면 내가 얻어먹긴 해야겠는데? 심지어 재벌이랑 결혼식이라니.”

“그니까 비싼 것들 가져오라니까.”



다음에 또 만나기로 했다. 구체적인 날짜는 서로 일정 보고 맞추기로 하고. 그사이 정희원이 이건 그냥 쏘는 거라며 칵테일을 한 잔 더 만들어왔다. 이름이 허니문이란다. 결혼 소식을 들었는데 이걸 안 만들 수는 없다면서. 누가 보면 결혼식 당일인 줄 알겠다고 이죽거리자 결혼식 당일엔 못 마시니까 지금 마셔두라고 태연히 맞받아친다.


그런 식으로 몇 마디 잡담을 나누다가 다시 결혼 이야기로 화제가 돌아왔다. 와 진짜 안 믿기네. 한수영이 결혼, 그것도 어지버시랑 결혼이라니. 정희원은 내 결혼 상대보단 내가 결혼한단 사실 자체가 더 신기한 듯하다. 그럴 만도 하지. 물론 유상아와 결혼한 경위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납득하겠지만, 그건 진짜 둘만의 비밀이라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다. 그래서 이번에도 다른 사람에게 그랬듯 ‘뭐 그렇게 됐다’하고 두루뭉술하게 흘려보냈다. 그런데 청첩장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만지작거리던 정희원에게서 의외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하긴 유상아 씨 좋은 사람이긴 하지.”

“네가 유상아를 어떻게 안다고.”
“왜 몰라, 서너 번쯤 여기에 혼자 마시러 왔었어. 좀만 얘기해도 좋은 사람인 거 알겠던데.”

“어? 그래?”



전혀 몰랐다. 근데 뭐, 집안 답답해서 커피에 후추 털고 상견례 자리에서 록 틀고 그 청순조신 모범생 같은 얼굴로 피시방이나 오락실도 기웃기웃하는 앤데 혼자서 술집 찾아가는 게 뭐 대수랴. 정희원네 바는 나름 단골손님도 많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곳이니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거다. 바에 혼자 앉아 잔을 기울이는 유상아를 그려보니 클리셰적일 만큼 괜찮은 작품이 된다.


어쩌면 유중혁한테 들었을지도 모른다. 유상아랑 유중혁은 안 그럴 거 같은데 은근히 꾸준하게 연락을 한다. 둘이 친하다기보다는 유상아가 유미아를 잘 챙겨주니까 유중혁도 그리 경계는 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하여튼 내가 놀라자 정희원도 고개를 갸웃한다.



“유상아 씨한테 못 들었어?”

“걔랑 네 이야기를 할 일이 뭐가 있어.”



사실 우리 둘은 제대로 이야기 나눈 지 두어 달 남짓밖에 안 됐다. 아직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을 텐데. 정희원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그냥 넘겼다. 쟤는 속사정을 모르니까.


그다음으로 정희원이 궁금해 한 건 웨딩 사진이었다. 안 그래도 사진 속 내 표정을 보고 낄낄대던 정희원은, 내가 촬영이 좀만 더 길어졌으면 근육 경직으로 하회탈 됐을 거란 이야기를 하자 더 크게 웃었다.



“그러니까 가시버시례에서 만난 걸 계기로 결혼하게 됐다는 거지? 원랜 그냥 동창 사이였는데?”

“어.”

“바로 그거야. 가시버시례를 무료 패키지여행쯤으로 알던 인간이 갑자기 맘을 바꾼 계기가 뭔데.”



내 연애사를 묻는 눈이 참으로 초롱초롱하다. 남의 연애 이야긴 왜 다들 이리 궁금해하는 건지. 그게 뭐 그리 궁금하냐 물었더니 그 한수영을 어떻게 몇 달 만에 홀랑 넘어가게 만들었는지가 너무 궁금하단다. 아쉽지만 정말 해줄 이야기가 없다. 왜냐하면 연애를 안 했으니까. 나는 미리 만들어둔 두루뭉술한 레퍼토리를 또다시 끄집어냈다.



“조건 괜찮고 사람 괜찮아서 결혼해도 되겠다 싶었지.”

“와, 유상아 씨쯤 되어야 조건도 사람도 ‘괜찮다’라는 평이 나오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그쯤에서 적당히 넘어가 줬으면 했지만 정희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딱 마음을 먹은 결정적인 계기가 있을 거 아냐. 혹시 지정맞선에서 유상아 씨가 너 꼬신 거야? 꼬시긴 뭘 꼬셔…… 라고 하려다가, 걔가 나한테 이 조건 저 조건 들이밀며 위장 결혼 제안한 것도 꼬신 건 맞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에겐 하늘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킬 연애담이 없다. 그러니까 적당히 상상이나 부추기자.



“그러면 유상아 씨는 그 전부터 널 좋아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가시버시례라는 이벤트를 틈타 꼬신 거지.”

“글쎄다…….”



정희원의 상상력도 다른 사람들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저 비슷한 얘길 불과 몇 시간 전에도 들었지.



“아 반응이 왜 이리 뜨뜻미지근해? 초등학교 때부터 동창이라며. 뭐 짚이는 거 없어? 만났을 때 유독 잘해줬다든지 그런 거.”



아무래도 정희원이 해석한 ‘동창 사이’는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친구인가보다. 유감이게도, 나랑 유상아의 ‘동창 사이’는 말 그대로 ‘같은 학교를 나왔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그래도 정희원이 저렇게 설레하는 건 또 처음 본다. 저렇게까지 소꿉친구 재벌 로맨스를 원한다면야,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자. 독자를 만족시킬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건 내 전문이니까. 어떻게 해야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정희원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을까. 칵테일을 머금으며 잠깐 시간을 버는 사이, 정희원이 대화의 공백을 채웠다.



“나중에 만나서 너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물어봐. 내 촉엔 예전부터 너 마음에 둔 게 확실하다니까. 여기 왔을 때도 네 이야기만 잔뜩 하던걸.”



머금은 칵테일이 불쾌한 감각으로 넘어간다. 자꾸만 겉도는 이야기를 필라멘트 삼아 의심이라는 전구에 반짝 불이 들어온다. 이건 내가 소설가여서 생긴 버릇인데, 나는 내 상상력을 건드리는 얘기를 들으면 거기에 살을 붙여 여러 갈래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곤 한다. 대부분은 당연히 사실과 먼 허구다. 심지어 몇 개는 판타지의 영역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은 사실과 매우 근접한, ‘성공적인 추론’이 튀어나올 때도 있다.


‘여기 왔을 때도 네 이야기만 하던걸’……. 그 말이 신호탄이 되어, 결론이 다른 여러 이야기가 복잡한 갈림길이 되어 내 선택을 기다렸다.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직감이 사실이라고 가리키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몇몇 이야기에도 ‘논리성’이라는 가로등은 켜져 있었고, 그래서 나는 가지치기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걔가 언제 언제 왔었는데?”



최대한 일상적인 어조로 물었다. 정희원이 치즈 하나를 집어 먹으며 회상하는 얼굴을 한다.



“처음 왔던 건 거의 5~6년 전쯤. 그 뒤로도 한 1년 간격으로 두세 번 더 왔고.”



5~6년 전. 그렇게 오래전이라면 위장 결혼 상대의 물색을 위해 내 정보를 물으러 다닌 건 아닐 테다. 정희원이 말해준 사실과 어긋나는 이야기들의 가로등이 탁 꺼졌다.



“근데 진짜 유상아 씨가 아무 얘기 안 했어? 네 추천으로 왔다고 했는데.”



내 추천으로 왔다고 했다 이거지……. 내가 유상아와 자기 얘기를 한 적이 없다 했을 때 정희원이 보인 반응이 이제야 완벽히 이해가 간다. 내 추천으로 찾아온 사람이 내 이야기를 잔뜩 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그걸 나한테는 이야길 안 했다? 심지어 결혼까지 하는 사이에? 납득 안 될 만도 하지.


나는 나대로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정희원이 말해준 정보의 괴리에서 고민에 잠겼다. 나는 유상아에게 저스티스를 추천해준 적이 없다. 추천해준 적이 없는 걸 넘어 6년 전쯤엔 유상아랑 몇 달에 한 번 교류회에서 만나 안부만 나누던 게 다였다. 그마저도 유상아의 일방통행이라 봐도 무방했고. 모순된 정보에 그나마 남아있던 몇 가지 가능성의 길목마저 무너져내렸다. 남은 것은 현실적으로 터무니없는 이야기와, 직감이 처음부터 가리키던 길 뿐이었다.



“딱히 들은 건 없는데. 근데 걔가 와서 무슨 이야기 했냐? 내 이야기 했다니까 궁금하네.”

“그냥 너 여기 자주 오냐, 누구랑 오냐, 무슨 술 좋아하냐, 뭐 그런 이야기?”



아직 알고 싶은 게 더 남았던 나는 계속해서 장단을 맞춰주었다. 유상아가 물어본 내용들은 다들 대수롭지 않은 것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심증을 더욱더 단단하게 굳혔다. 야 근데 유상아 씨 술 잘 마시더라. 안주빨도 거의 안 세우고……, 별로 알 필요 없는 이야기가 앞을 막아서서 나는 얼른 방향을 우회했다. 맞아, 걔 안 그렇게 생겨서 완전 주당이야. 근데 너 설마 걔랑 내 뒷담 깐 건 아니지? 장난 반 우려 반을 꾸며내자 정희원은 별 의심 없이 내 말을 받았다.



“딱 봐도 누구 뒷담 하고 다닐 사람 아니던데 진심으로 묻는 거?”

“아니 내 얘길 했다니까 궁금하잖아.”

“진짜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했다니까. 너 단 거 좋아한다든지, 한 번 꽂힌 노래는 질릴 때까지 돌려 듣는다든지…….”



또다시 직감이 번쩍 빛났다. 마시고 있던 칵테일을 심장에 들이부은 듯 가슴께가 차가워진다. 나는 초조하게 마티니 글라스의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도 목소리만은 태연함을 유지했다.



“노래?”

“그때 너 맨날 듣던 거 있었잖아. 그……, 이름이 뭐더라. 푸르딩딩해서 애기가 수영하고 있는 커버.”

“Nevermind?”

“맞아 그거! 들어보고 싶으니 틀어달라고 해서 틀어줬던 기억 난다.”



순순히 대답하는 정희원에게서 유상아를 향한 의심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뭐 그럴 만도 하지. 그 선량한 얼굴을 보면 없던 신뢰도 생겨날 테니. 문뜩, 그 선한 얼굴이 내게 보여주었던 모든 친절과 호의가 목구멍을 답답하리만치 꽉 메웠다. 내가 뭘 하든 관대하고, 대수롭지 않은 불평마저 진지하게 들어주며, 사소한 일에도 쉽게 웃던 유상아.



“한수영, 왜 그래?”

“뭐?”



정희원이 기겁을 하며 칵테일 잔을 다시 세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내가 칵테일 잔을 엎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칵테일을 엎지른 건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란 것도 조금 늦게나마 인식했다. 테이블 위로 번지는 칵테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말했다. 나 이만 갈게. 행주로 흐르는 액체를 닦아내던 정희원이 얼굴을 들었다. 드디어 그 눈에 희미한 의혹이 떠올랐다.



“나 뭐 잘못 말했어?”

“아니. 덕분에 좋은 거 알아가.”



뒤에서 정희원이 무어라 외치는 소리를 무시하고, 나는 그대로 칵테일 바를 뛰쳐나왔다.


밤의 어둠과 네온사인의 빛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밤거리를 달리듯 나아갔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걸음은 제법 선선해진 바람이 머리를 식힐 때쯤 우뚝 멎었다. 정희원의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군데군데 더 채워 넣어야 할 구석은 있지만, 1000피스 퍼즐에서 대여섯 조각 빠졌다고 전체적인 그림을 못 알아보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 딱 한 조각만 더 끼워보자.


핸드폰을 꺼낸 나는 연락처를 뒤적였다. 곧 현실이라면 옅게 먼지가 쌓였을 번호 하나를 발견했다. 몇 번의 통화음이 지나자 연결이 됐다. 여보세요.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도 입을 열었다.



“아저씨 나야. 한수영.”

- 엉? 무슨 일이냐. 생전 먼저 연락 안 하던 애가.

“전화 돼?”

- 전화는 되는데……, 너 언제까지 나한테 아저씨라 할 거냐.

“결혼하고 배 나오기 시작했으면 빼도 박도 못하게 아저씨지 뭐.”

- 이 기집애가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하는 말이라곤. 나 아저씨인 거 강조하려고 전화했냐?

“당연히 물어볼 거 있어서 전화했지.”



전화 상대는 내가 자주 가던 피시방 주인아저씨다. 고등학생 때부터 피시방이 망할 때까지 꾸준히 갔던, 얼마 전 유상아와 오락실에 갈 때도 잠깐 언급됐던 그 피시방. 유중혁이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도록 지원도 많이 해줬고 얘기도 잘 통하는 사람이라 많이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만난다. 지금 연락한 건 친목 도모 때문이 아니지만.



“아저씨 피시방에서 한창 롤 엄청 했던 때 기억나? 나랑 유중혁이랑 김독자, 이렇게 셋이서.”

- 그걸 기억하니까 니놈들이랑 계속 연락하는 거 아녀.

“혹시 그때 찾아오던 여자애 없었어?”

- 여자애?

“왜 그, 갈색 머리에 예쁘게 생긴…….”

- 아, 유상아?



더 깊이 찔러볼 것도 없이 원하는 이름이 바로 튀어나온다. 그것만으로도 유상아의 방문이 어쩌다 한 번 찾아간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주 찾아왔었어?”

- 아주 자주까진 아닌데, 너네 한창 죽치고 살았을 땐 종종 왔었지. 유중혁 사촌동생이라며. 사촌오빠가 게임만 하는 거 같아서 걱정돼서 왔다던데. 그러더니 나중엔 오히려 지가 롤을 배워가더라고.

“……걔가 내 얘기도 했었어?”

- 뭐? 그야 당연하지. 너희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라며?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나는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든 손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추가된 퍼즐 조각이 그림의 의미를 바꾸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림에 더욱 선명한 전달력을 가져다주었을 뿐.


깊게 심호흡을 한 나는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들이마신 공기에서는 매캐한 거짓의 냄새가 났다.










“왔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현관문을 열자마자 유상아가 나를 맞았다. 진작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게 분명한 태도다. 피곤하지는 않아? 아, 나 오늘 결혼 축하 선물로 와인 한 병 받았어. 되게 귀한 와인이래. 언제 한번 같이……. 뭐라고 자꾸 떠들어대는 유상아를 무시하고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두 계단씩 뛰어올랐다.


내 방으로 뛰쳐 들어온 나는 일단 문을 닫고 기대어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선 조금 진정되자마자 캐리어와 백팩을 끄집어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가지며 필요한 물건들을 집어처넣고선 다시 방을 나섰다. 조심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자 캐리어 바퀴가 계단 턱에 걸리며 와당탕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야단법석도 내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시간에 어딜 가? 짐은 또 뭐고…….”



유상아는 아까 나를 맞이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한가득 묻어나왔지만 나는 눈길도 주지 않고 유상아를 지나쳤다. 수영아? 제법 다급해진 부름을 계속 무시하려다가, 갑자기 뱃속에서 아니꼬움이 치밀어올라서 홱 뒤돌아섰다. 그리고 멀거니 선 유상아에게 들이대듯 다가섰다.



“야, 나 오늘 정희원 만났어.”



나를 내려다보는 눈에 당황스러움이 한층 더 진해진다. 그러나 그 당황은 내가 예상한 종류는 아니었다. 나는 유상아가 정희원이 누구의 이름인지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 아, 그래. 내가 어딜 자주 가는진 알아냈어도 바텐더의 이름까진 몰랐나 보지. 내 입가에 어쩔 수 없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저스티스에서 일하는 바텐더 말이야.”



유상아는 그제야 내가 원하던 당황을 내비쳤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내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걔가 그러는데 네가 5년도 더 전에 나랑 친하다느니 추천을 받아서 왔다느니 하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등등을 캐갔대. 단골 피시방 아저씨한테도 연락해봤는데 그때도 네가 유중혁 핑계 대면서 내 이야기 물은 거 같더라.”



빈정거림을 숨기지 않고 말을 마쳤다. 어디, 뭐라 변명하는지 보자. 유상아가 그 좋은 머리로 어떤 핑계를 만들어 낼지 궁금했으나, 당황을 밀어낸 자리를 채운 것은 올 게 왔다는 체념이었다. 하! 나는 비웃음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가 다시 유상아를 노려보았다.



“왜 그랬는데.”

“다 눈치챈 거 아냐?”

“말해.”

“널 좋아해.”



유상아의 어조는 담담했으나 그 눈만은 서글픈 빛으로 찰랑였다. 이내 그 빛이 점차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 입술에는 우는 것과 닮은 미소로 나타났다. 정말 이런 식으로는 전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유상아가 흘리듯 내보낸 그 감정의 이유를 애써 무시했다.



“날 좋아한다 이거지.”

“그래. 네가 나에게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준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좋아했어.”



내가 유상아에게 언제 그런 말을……, 했었다. 또렷하진 않지만 그래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건 초등학생 때 허세 섞어서 했던 말이고, 심지어 별로 좋은 의도로 나온 말도 아니었다. 고작 그런 일로……? 기억을 더듬느라 내가 잠시 말을 멈춘 사이, 유상아의 희고 긴 손이 떨어지는 고개를 지탱하듯 얼굴을 반쯤 가렸다.



“20년이야.”



손가락의 틈새에서 더 이상 미소조차 가장하지 못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난 널 20년을 좋아했고, 너는 너에게 다가가려는 내 모든 노력을 20년 동안 무시했어. 내가 뭘 더 할 수 있었다는 거니?”



드디어 유상아가 변명 비슷한 것을 내놓았다. 그 내용이 무어냐는 상관없다. 나에게 필요한 건 내가 마음 놓고 맞받아칠 수 있는 행위였으니까. 나는 유상아가 내놓은 변명을 연료로 잠시 시들해졌던 분노를 지폈다.



“그래서 뒤를 캤다? 너 뭐 도청 장치 설치하고 사람 붙이고 그런 짓도 했냐?”

“그런 일 안 했어!”



내 비아냥을 다급하게 부정한다. 목소리를 높인 게 신경 쓰였는지 잠시 입술을 감쳐물던 유상아가 시선을 떨어트렸다.



“난 그저……, 널 더 알고 싶어서……, 그래서 널 잘 아는 사람들을 찾아갔을 뿐이야.”

“친한 친구라느니 내 추천을 받았다느니 거짓말 치면서 말이지. 대단히 깨끗한 방법이시네.”



유상아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을 질끈 감는다. 내가 뭘 물어도 답변을 술술 늘어놓던 그 인간 맞나 싶은 모습이다. 내가 짚어주지 않아도 이미 자신의 잘못을 잘 아는 듯한 모습이 오히려 더 큰 배신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두어 발짝 뒷걸음쳐 유상아에게서 멀어졌다. 유상아는 내가 멀어진 만큼 다가오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으나,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알면 알수록 괜찮은 녀석이라 생각했고, 함께 한 몇 달간의 시간은 부정할 수 없이 제법 즐거웠다. 나에게 보여준 모습에 거짓보다 진실이 더 많을 거라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그걸 알아도, 아니, 그렇기에 더욱더.



“기분 나빠.”



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내 두 발이 문턱을 넘을 때까지 유상아가 나를 다시 부르는 일은 없었다. 매섭게 떠나는 나의 등 뒤로 철문이 무겁게 닫혔다.

















클리셰 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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