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제창은 소장용입니다. 








즐거운 나의 집

;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




“제노는 성적이 좋아서 이대로 가면 서울권 학과는 거의 다 쓸 수 있을 텐데, 진로 칸이 비어 있네.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가고 싶은 학과라거나.”



선생님의 말씀에 제노는 계속 말없이 멋쩍은 웃음만 지어 보였다. 선생님은 그런 제노를 보며 털털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괜찮아, 이상한 거 아니야. 선생님은 고삼 내내 학과 어디 쓸지 고민하다가 담임선생님이 성적 되니까 사범대 넣어보라고 해서 지금 얼렁뚱땅 선생님하고 있는 거야.”

“정말요?”

“그럼. 지금 확고한 꿈이 있는 애들이 대단한 거지, 아직 하고 싶은 게 없다고 늦었다는 거 아니야.”



선생님은 부드럽게 웃으며 제 책상 서랍 아래에서 병에 담긴 주스 하나를 꺼내 건넸다.



“그래도, 뭘 하면 즐겁다거나 그런 거 없니?”

“그냥 애들이랑 얘기하는 것도 좋고, 자전거 타는 것도 재밌고, 같이 축구하는 것도 좋고, 책 읽는 것도 좋아해요, 게임도 좋아하고요. 근데, 그건 진로랑은 상관없어요. 그럴 능력도 없고, 이미 많이 늦었고요.”



계속 의대에 가야지,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터라 이제노는 다른 진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딱히 없었다. 파양되고 나서는 의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고 운 좋게 수석으로 입학하기야 했지만, 중간고사 때는 전교 10위 권에 겨우 들었으니까 지원을 하더라도 붙을 자신도 없었다.



“왜 늦었다고 생각해?”

“그야, 저는 열일곱 살이고 이제 새로 계획을 세우기엔 너무 늦은 게 맞잖아요.”



제노는 잠시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본 선생님을 힐끔 본 후 그냥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예전 엄마 아빠는 막 입양이 됐을 무렵부터 한참은 늦었다며 다른 애들 따라잡으려면 잠도 못 잘 거라고 으름장을 놓고선 과외를 다섯 개씩 다녔었는데. 선생님은 곧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노야, 선생님은 요새 글을 좀 쓰고 있어.”

“글이요?”

“응, 추리나 스릴러 같은? 틈틈이 글을 써서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기도 해, 꽤 반응이 좋아.”

“웹소설 뭐 그런 거요?”

“응, 작년부터 새로 생긴 선생님의 꿈이야.”

“…….”

“선생님은 말이야, 내 이름 석 자가 박힌 책을 출간하는 게 꿈이야. 어때, 선생님이 나이 서른에 꾼 꿈이 너무 늦고 철없어 보이니?”



그렇게 말한 선생님은 마냥 행복하고, 즐거워 보여서 제노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무척 멋있어요.”



정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은 정말 멋있어 보였다. 꿈이 있다는 건 이런 거구나. 선생님은 제노의 대답에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는 제노의 한쪽 어깨를 어루어만져주었다.



“그러니까, 제노는 늦은 거 아니야. 오히려 아직 어리고 이른걸.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어.”

“정말, 나는 늦지 않았을까요?”

“응, 그러니까 천천히 제노가 하고 싶은 걸 찾아봐. 너무 조바심내지 말고. 그게 조금 어렵다면, 롤모델을 만들어도 좋겠다. 제노가 생각하기에 가장 멋있는 사람을 찾아서.”



저를 흘끔 올려다보는 제노에게 선생님은 씨익 웃어주고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

 


“재민아, 너 담임 선생님이랑 진로 상담했지?”

“응, 저번 주에. 58번 고객님,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드릴게요.”



누나의 카페는 확실히 재민이 알바를 시작한 후에 사람이 많아졌다. 원래도 빵 종류를 사러 오는 단골손님은 꽤 있었지만, 오픈 시간도 휴무일도 모두 누나 맘대로라 들쭉날쭉했기 때문에 홀도 넓고 인테리어도 깔끔함에도 불구하고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었다. 그러나 재민이 주말 알바를 시작하며 평일은 몰라도 주말만큼은 오픈 시간도 일정해졌고, 말없이 쉬는 날도 없어져서 손님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물론 전직 아이돌 나재민의 얼굴 탓도 있는 듯했다) 재민이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보낸 후 젖은 손의 물기를 닦아내고 제노에게 물었다.



“제노 뭐 마실래?”

“응, 나 레몬차.”

“에이드 말고?”

“응, 난 그게 좋아.”

“알았어, 차게 해줘?”

“찬 것도 돼?”

“그냥 물 타고 얼음이나 좀 섞으면 되는데 뭘.”



재민이 쓱쓱 금방 플라스틱 컵에 레몬차를 담아 허브잎까지 꽂아 제노가 앉은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는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상담은 왜? 아, 너도 어제 상담받았지, 담임 선생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



제노는 그냥 축 테이블에 엎어져 웅얼거리면서 대답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모르겠어.”

“하고 싶은 거?”

“너는 진로란에 뭐 적어갔어?”

“진로? 나는 바리스타.”

“바리스타?”

“응, 카페 일 좀 해보니까 적성에 좀 맞는 것 같아.”



확실히 나재민은 그 거지 같은 곳에서도 일 좀 해봤다고 누나네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하고 나서도 일을 빨리 배웠다. 누나는 카페라고 격하게 주장했지만, 거의 빵집이라서 음료 레시피랄 것도 없어 당연한 일이었지만. 오히려 나재민이 알바를 시작하고 나서 비어있던 메뉴판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네, 이제 보니까 완전 천직이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너는 공부 잘하잖아.”



제노는 크게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인준이도, 동혁이도 다 꿈이 있는데 나만 없어.”

“응?”

“너는 10년 후에도 커피를 내릴 거고, 인준이는 그림을 그릴 거고, 동혁이는 춤을 추고 있겠지? 그럼 나는…, 그때도 공부만 하고 있을까? 함수를 풀고, 조선왕조를 달달 외우고, 관동별곡이나 읊고, 영어단어만 줄줄 외고….”

“제노야….”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



나는 그냥 이대로 공부를 하고, 그럭저럭 성적대로 대학을 가고, 취업하겠지. 거기에 만족을 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제노가 풀이 죽어서는 레몬차가 든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게?”

“응- 손님 온다, 재민아.”



제노가 사라진 자리 위로 누나가 쓱 나타났다.



“제노 왜 저래?”

“그냥 계속 자기만 꿈이 없다고….”



누나는 말없이 제노가 두고 간 진로상담계획서의 빈칸을 계속 바라보았다. 정말 너무 익숙하게 의사, 라고 적었다가 급하게 지우개로 지워낸 듯한 자국이 보였다.

 


◆◆◆


 

“꼬꼬마들, 일어나.”



열린 문틈으로 낮은 누나의 목소리와 쨍쨍쨍, 요란한 철이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눈이 번쩍 떠지는 게, 정신이 맑다.

누나가 왜 우리를 직접 깨우러 왔지. 설마 알람이 벌써 울렸나, 아닌데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제노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흐아암….”



반쯤 감긴 눈으로 머리맡의 시계를 확인했다. 8시 30분, 순간 이상함을 모르고 멍하니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



지각인 건가. 다급할 상황과 다르게 창밖에서는 여유롭게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잠만, 누나! 누나! 내 교복!!”

“너희 내 셔츠 봤어?”

“미친 오늘 나 우유 당번인데…!”



밖에서 들려오는 제 친구들의 앓는 소리가 그 생각에 확신을 주었다. 제노는 그냥 멍하니 창문만 바라봤다.



“날씨 좋네.”



오늘 1교시가 뭐였더라, 체육이었던 것 같은데.



“제노 일어났니? 천천히 옷 갈아입고 나와.”



누나는 조금의 서두름도 없이 느긋하게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누나, 우리 어디 가?”



다급하게 아침 먹을 새도 없이 옷부터 갈아입은 아이들을 누나는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들고서 제 검은색 벤츠 안에 밀어 넣었다. 영문도 모른 채 차에 탄 아이들의 질문에 운전대를 잡은 누나가 짧게 대꾸했다.



“꿈과 희망이 있는 곳.”

“어?”

“그게 어디야? 디즈니랜드…?”

“에버랜드인가?”

“그건 환상의 나라잖아.”

“그럼 우리 학교는…?”

“너네 담임 선생님이랑 연락해서 현장체험학습 썼어. 안전벨트나 매.”



그렇게 말하고는 조수석에 앉은 재민이를 보며 앞쪽 글로브 박스를 손짓하며 가리켰다.



“여기?”



현장체험학습 보고서라 쓰인 종이 몇 장을 확인한 재민은 익숙하게 뒷좌석의 제 친구들에게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그거 적어서 다음에 학교 갈 때 가져가.”



아니 도대체 어딜 가려고 학교까지 빼먹은 거지. 인준과 동혁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꿈과 희망이 있는 데가 어디지?”

“설마 롯데월드? 여기 롯데월드 가는 길이잖아.”

“누나가 학교까지 빼먹고 놀이공원을 간다고?”



제노는 가만히 그런 둘을 바라만 보다가 가방을 슬금슬금 앞으로 메고는 파일을 꺼내 현장체험학습 보고서를 반듯하게 집어넣었다.

 



 


“이게 말이 돼…?”

“꿈과 희망이 있는 곳 맞긴 하지.”

“우리 여기에 들어올 수 있나? 나이 제한 있잖아.”

“만 16세까진 괜찮아.”

“아, 아슬아슬했다.”





학교까지 빠지고 두 시간가량을 출근 시간대에 달려 도착한 곳은, 자신들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작은 초등학생이 될까 싶은 어린아이들이 바글바글한 어린이 직업체험 테마파크였다.



“근데 누나, 나이가 된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조금 그렇지 않나….”



고만고만한 아이들 사이, 넷만 우뚝 솟아 있었다. 누나는 그런 동혁의 소리를 들은 척도 안 하고 팔찌와 돈(키조라고 부른댔다), 입장권 같은 걸 꼼꼼히 챙겨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받아, 잃어버리면 귀찮아지니까 조심하고.”

“하아….”



누나는 절대 그냥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인준이 마른세수했다.



“누나, 나 좀 부끄러워….”

“뭘-, 어차피 너희 아는 애들 없어.”



그래도 다행인 건 평일이라 사람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거였다. 가끔가다 단체로 온 초등학생 정도만 체험관을 샅샅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먼저 뭐부터 할래?”

“돈을 쓰는 건 뭐고 버는 건 뭐야?”

“몰라, 일하면 돈을 받잖아. 그런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 그럼 쓰는 건 뭐야?”

“이 장사꾼 놈들, 보아하니 먹는 거만 돈 쓰게 해놨네. 진짜 쩨쩨하게.”



그렇게 부끄러워했으면서 첫 번째는 신중해야 한다며 지도를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넷의 앞에 삐용삐용,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나가는 빨간 자동차 한 대가 나타났다.



“으엉?”



주황색 겉옷을 입은 아이들이 황급히 내려 물줄기를 빨간 조명이 비추는 건물로 쏘고 있었다.



“헐 대박 멋있어….”



홀린 듯이 바라보던 넷이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누나만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말을 건넸다.



“소방관인가 봐, 저거부터 한번 해보든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짧은 고민도 없었다. 그냥 앞에 보이는 게 있으면 족족 들어가고 봤다. 직원들은 머리가 하나는 더 큰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보고 당황하는 눈치였으나 금세 적응해 같이 인증샷 찍자는 요구에도 응해주었다.

빵집 가서 빵 만들어서 우적우적 씹어먹고, 항공사에 가서 승무원 옷 입고 사진도 찍고, 법원에도 가서 법정 체험도 하고, 수술실까지 들어갔다. 모두 초등학생을 주력 대상으로 한 탓에 조금 유치하긴 했으나 이상하게도 17살 소년들의 취향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누나는 뻔뻔하게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여기저기 뽈뽈 쏘다니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계속 보고서용 사진까지 찍어주었다.



“나 진짜 기대도 안 했는데, 너무 재밌다….”

“와, 이런 걸 어린 애들만 할 수 있는 건 너무 하는 거 아니냐.”

“우리 내년부턴 여기 못 와.”

“아, 여기 마스코트 생일이 제노랑 똑같던데.”

“너는 언제 그런 걸 봤냐.”



제노는 밥을 넘기면서도 제 앞에 앉은 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너도 우동 먹고 싶어?”

“아니, 그냥….”

 



 


처음에야 멋쩍었지, 시간이 흘러 흘러 여기 고등학생이 왔대! 소문이 났는지 모든 직원의 환대 속에 관세청도 들렸다.

동화작가를 체험하며 간단하게 삽화를 만들어놓으랬더니 미술천재 황인준이 ‘내 사전에 대충은 없어!!’ 라며 갑자기 필 받아 예술의 혼을 불태워 진짜 현직 삽화가처럼 그림을 그려놓은 거나, 엔터테인먼트에 갔다가 전직 아이돌 재민과 현직 댄스팀 단원 이동혁이 신들린 공연을 해 작은 초등학생들의 무수한 사인 요청을 받은 거나, 라디오국에서 이제노가 ‘잘 자요’ 를 시전해 보호자로 온 어머니들의 마음을 훔친 걸 뺀다면 이상한 일은 없었다. 그랬다, 넷은 평화롭고 지극히 고요했던 체험장 안을 파란으로 물들여버렸다. 누나는 그런 넷을 보며 질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민망하다더니, 애들 놀이에 쓸데없이 진심이네….”



결국, 쿠킹클래스에 가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는 입가심을 하고 싶다는 재민의 주장에 마지막으로 배스킨라빈스까지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고 (나재민이 애교를 부려 누나의 것까지 하나 더 받아왔다) 1부를 마치고 유유히 빠져나왔다.



“재밌었다.”

“와, 나 아까 이제노가 잘 자요 했을 때 웃겨 죽을 뻔.”

“인준아, 내 사전에 대충은 없다던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응, 거기서 웨이브한 우리가 할 말도 아닌 것 같아. 동혁아.”

“내가 봤을 땐 너희 넷 다 똑같아.”



어느덧 오후 3시였다. 밥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우리 이제 집으로 가?”

“응, 집에 가야지.”

“이대로 가긴 아쉬운데….”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긴 아쉽다는 주장에 누나는 고민 없이 말을 하나 흘렸다.

“그럼 옆에 롯데월드 있으니까 좀 놀다 갈까.”

“헐, 너무 좋아….”

“와, 나 놀이공원 처음 가 봐!”

“헐, 나도!”

“나도 처음이야.”



동혁과 인준, 제노의 잇따른 말에 셋은 멀뚱히 재민을 바라보았다. 마치 너도 처음이지? 당연하게 생각하는 듯한 표정에 재민은 쿨하게 대답했다.



“미안해서 어쩌지.”

“응?”

“나는 가본 적 많은데.”

“엥?”

“언제!“

“정말?!”

“우리 회사 외국에서 새 연습생 오면 롯데월드 가는 게 전통이거든.”



외국인 연습생이 오면 서울 관광은 한 번쯤 시켜줘야 하는데 연습생 신분으로는 멀리까지 가지는 못하니 기껏해야 한강, 근처인 롯데월드가 다였다. 요즘과 같은 다국적그룹을 선호하는 시대에 해외시장을 잡을 수 있는 외국인 연습생들을 회사에서는 꽤 자주 데려왔었다. 그때마다 롯데월드에 데려갔었지. 한 열 번은 넘게 갔었던가, 아마….



“너 인마, 너 배신이야!”

“배신자!”

“재민이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아니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재민이 어이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입장부터 두 갈래로 나뉘었다. 자유이용권 뽕을 뽑을 때까지 놀이기구를 타야 한다는 인준과 동혁과 대충 느긋하게 구경 좀 하다가 되는대로 정말 굳이 타고 싶은 거 몇 개만 타겠다는 재민과 제노. 누나는 이리저리 팔딱대는 인준과 동혁을 감당할 체력이 없다며 자연스레 제노와 재민과 함께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기로 했다.



“전화하면 째깍째깍 받고, 특히 이동혁 너.”

“네엥.”



짧은 대답과 동시에 둘이 신나서는 튀어 나가고 셋은 놀이기구 주변을 빙빙 둘러보다가 결국 주위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평일이라 사람이 많이 없네.”

“그러니까, 동혁이랑 인준이 신났겠다.”



시험 끝났을 때부터 놀이공원 놀이공원 노래를 불렀었지. 기말 끝나고 같이 가자고 합의 봤었는데.



“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나 잠깐 물이라도 사 오게.”



그렇게 내뱉은 누나가 사라지고, 멍하니 제 앞쪽에 돌아가던 회전목마를 바라보던 재민이 씩 웃었다.



“가만 보면 신기한 것 같아.”

“응? 뭐가?”

“저 회전목마, 다른 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못 탔고 딱 저것만 멤버들이랑 탔던 거거든. 그래서 나한테 회전목마는 우리 멤버들이야.”



재민의 멤버들이란, 사고로 죽었다던 형들을 말하는 거겠지. 제노는 속으로는 조금 놀란 마음으로 재민의 눈치를 살폈다. 재민은 입가에 작은 미소까지 지은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다시 보면, 꽤 슬플 줄 알았는데. 그냥 좋았던 거밖에 기억이 안 나네.”

“아….”



재민은 활짝 웃는 낯으로 제노를 돌아보며 말했다.



“참 신기하지 않아? 얼마 전에는 죽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웃기까지 하는 게.”

“다행인 거지.”

“그치, 누나랑 너희한테 그냥 고마워서 그래.”

“우리한테도?”

“응, 너희. 누나뿐만이 아니야. 너도, 동혁이도, 인준이도 다.”



너희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죽어버렸을지도 몰라.


 



 

결국, 퍼레이드까지 다 보고 폐장시간이 다 되어서야 다시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마침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내일 피곤해서 죽을 뻔했다.

그렇게 빨빨대며 돌아다니더니 모두 피곤한지 차에 올라타자마자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오로지 조수석에 앉은 제노와 운전 중인 누나만이 하품을 두어 번 하며 멀뚱히 눈을 깜빡거렸다.



“졸리면 자도 돼.”

“괜찮아, 별로 졸리지도 않은걸.”



두 눈이 감겨오는 걸 꾹 참으려 허벅지를 꼬집으면서도 제노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괜찮다니까, 좀 자둬.”

“으응, 안 잘래.”

“순하게 생겨서는 고집도 세네.”



제노는 그 말에 그냥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래서, 오늘 하고 싶은 건 찾았어?”

“역시 나 때문에 온 거였구나.”

“꼭 그거 때문만은 아니고, 그냥 겸사겸사.”

“누가 고등학생 장래 희망 찾자고 키자니아를 와-”



분명 어디서 얘기 듣고 왔던 거겠지. 진짜, 우리가 한 살이라도 많았으면 어떡할 뻔했어. 누나는 늘 야무진 듯하면서도 뭔가 하나가 서툴렀다. 저번에도 엽떡을 하나에 1인분으로 착각했었지. 그날 애들 다 배불러 가지고 먹다 남은 거 싸서 갔었는데. 그래도, 제노는 그 서툶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 차갑고 딱딱해 보이는 부잣집 아가씨가 저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게 눈에 여실히 보여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찾았니?”



제노의 표정은 희미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누나의 물음에 제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찾았어.”

“뭔데?”

“그건 비밀.”

“치사하기는-.”


 



 

온통 어두운 하늘, 달만이 높이 떠 있는 밤이었다.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불을 켜 놓고, 제노는 두툼한 일기장에 글을 끄적이고 있었다.

 

 


◆◆◆

 


「희망 학과 - 초등교육과」



“초등교육과? 제노 교육대 가려고?”



제노는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 교대 가고 싶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물어봐도 될까?”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멋있는 사람을 찾으라고요.”

“응, 그랬었지.”

“그래서 꽤 오래 생각을 좀 해봤어요.”

“그래서 제노의 답은 좀 나왔을까?”

“네, 너무 명확했어요.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계속 같더라고요.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은….”

“멋진 사람은?”

“우리 누나였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은 누나였다.



“사실 저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어른이 된 저를 깊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 제가 아는 어른들은 늘 제멋대로에 자기 잇속만 챙기기 바빴거든요.”

“…….”

“그렇게 생각했어요, 제 생각은 전혀 바뀔 일 없을 줄 알았어요. 근데, 누나를 만난 거예요. 우리 누나는 멋지지 않은 구석이 없었어요.”



반듯한 얼굴과 엄청난 재력, 생각하기만 한 걸 실현할 수 있는 권력도 멋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건 누나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모르는 아이에게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 수 있는 배포도,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분위기도, 어떤 상황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는 모습도 다 너무 멋졌다.



“그래서 꼭 어른이 되어야 한다면, 어차피 어른이 될 거라면 저는-”



그래서 이제노는,



“누나 같은 어른이 되고 싶어요.”



누나처럼 되고 싶었다.



“저는 이 세상에 막 홀로서기를 시작한 아이들이 처음 맞는 어른은 우리 누나 같은 사람이었으면 해요. 저는 늘 생각하거든요, 누나를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이제노는 결국 선생님을 보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이 되어보려고요.”



그게 이제노의 사소하고도 커다란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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