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 覺 夢

별루




자각몽

[自覺夢, Lucid dream]


꿈을 꾸는 중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는 상태에서 꾸는 꿈.

 

 











































20XX. XX. XX

 

던전이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대로 혹은 예상과는 다르게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평화였다.



















自覺夢

자각몽











때 이른 눈이 내렸다.

이상 기후로 인해 기온이 갑작스레 뚝 떨어진다고 하긴 했지만 10월에 눈이라니. 일찍 찾아온 겨울이 벌써부터 혹독했다. 유진은 붉어진 코를 그보다 더 붉은 빛깔의 머플러에 묻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실크 카펫마냥 얇게 깔린 눈이 운동화 아래로 서걱서걱 밟혔다.

해도 금방 지니 돌아올 땐 분명 더 추울 것이다. 게다가 그땐 빈손도 아닐 텐데.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그냥 장갑도 챙겨올 걸 그랬나. 유진은 잠깐 스쳐 지나간 생각을 얼른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아무리 개인주의가 만연한 타국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눈에 띄는 건 사양이었다. 지금도 목에 두르고 있는 핫핑크 털실 머플러와, 마찬가지로 같은 색과 재질의 비니 덕에 충분히 행인의 이목을 끌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플러스 핫핑크색 벙어리 털장갑이라…….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모습에 유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차라리 얼어 죽는 게 낫지. 유진은 툴툴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하여간 취향 한번 고상했다. 뜨개질이 취향인 남자라니. 그것도 쨍한 진분홍색 털실로. 그 취향의 원인제공자가 다름 아닌 본인이었기에 누굴 원망할 계제도 아니었다. 재수 없게도 솜씨 또한 훌륭해서 눈 깜짝할 새 목도리며, 장갑, 양말, 스웨터를 금방금방 만들어내곤 했다. 요즘 뜨고 있는 건 카디건이랬나. 은근 집착 기질이 있는 남자는 유진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핫핑크로 도배를 해놓아야 만족할 듯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의 유동인구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가 핫핑크 털실을 온몸에 칭칭 감고 다니든 발가벗고 다니든 작은 마을은 그저 조용하고 또 조용할 것이다. 물론 그런 미친 짓 따윈 하지 않을 거지만.

위도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한 이 나라는 여름엔 선선하고 겨울엔 비교적 온난한 편이었다. 다만 일교차가 크고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게 흠이었다. 해가 쨍쨍하다가도 갑작스레 안개가 깔리며 느닷없이 비가 쏟아지는 곳이 바로 이곳, 영국이었다. 거기에 기상이변까지 가미되어 벌써부터 눈이 내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한국보다 따뜻하다고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될 터였다.

영국 캔터베리(Canterbury)는 인구수가 그리 많지 않은 작은 도시였다. 최종 거주지로 이곳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동양인이 드문 곳이니까. 그 중에서도 한국인은 우연히도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한국을 떠나온 지 대략 반년쯤 되었다. 유진이 백수가 된 지도 반년이 조금 넘은 셈이다. 그 전에도 이렇다 할 직업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헌터 딱지는 붙이고 있었으니 백수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명칭뿐이었지만 소장이라는 직책도 있었고 아무튼 마수를 키워내느라 바쁘지 않았던가. 할 일은 넘쳐났고 시간과 체력은 늘 부족했다. 동생의 그림자 뒤에서 꿀을 빨 거라는 불순한 의도와는 달리, 유진은 회귀 후 이전보다도 훨씬 바쁘고 치열하게 지냈다. 그래서일까. 눈앞에 반강제로 들이밀어진 휴식이 영 어색하기만 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산책하듯 걷다 보니 어느새 작은 건물 앞에 다다라 있었다. 유진은 삐걱거리는 낡은 문을 손바닥으로 살짝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좋은 오후입니다.”

딸랑, 경쾌한 방울 소리가 유진의 발걸음에 맞춰 짧게 공명했다. 인상이 푸근한 노부부가 운영하는 조그마한 베이커리는 합리적인 가격에 환상적인 맛을 자랑하는 이 동네 명물이었다. 특히 크로와상과 에그타르트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같이 찾았더니 노부부도 젊은 동양인 청년을 기억하고 오는 시간에 맞춰 따끈한 빵들을 내어주곤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서 와요. 오늘은 조금 늦었네요.”

머리가 희끗한 노부인이 반가운 듯 환하게 웃으며 미리 준비해둔 빵들을 내밀었다. 묵직한 종이봉투를 받아 품에 안으니 따뜻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갓 구운 빵들이었다. 먹물처럼 까만 눈동자가 봉투를 내려다보며 반짝 즐거운 기색을 내비쳤다. 늘 사가던 크로와상과 다양한 종류의 타르트들은 물론이고 바게트와 초코 머핀도 끼어있었다. 유독 단내가 풍기는 이유가 이거였나. 먹음직스러운 빵들을 보며 침을 꼴깍 삼키던 유진은 뒤늦게 아차, 하며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건넨 인사말이 질문에 가까운 뉘앙스였다는 게 그제서야 떠오른 탓이었다.

“아, 그게, 낮잠을… 조금 오래 잤거든요.”

유진은 더듬더듬 말을 꺼내놓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영어는 여전히 입에 붙지 않았다. 말을 하기 전에 한참을 생각해야 했고 이따금씩 단어를 몰라 헤매기도 했다. 가방 끈도 짧고, 이전엔 통역 아이템에 절대적으로 의존했기에 직접 외국어를 구사하는 데엔 크고 작은 어려움이 따랐다.

처음엔 누군가의 도움 없이 홀로 소통을 하는 것이 불가능 할 것이라 여겼는데, 하다 보니 또 할만은 했다. 이게 바로 생존본능인가. 먹고 살려면 해야만 했으니. 사실 원한다면 굳이 나설 필요도 없이 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떠넘기면 편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완벽하고 근사한 남자는 유진의 손끝 하나, 말 한마디에 즉각적으로 반응했기에.

하지만 유진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성벽같이 넓고 단단한 남자의 등 뒤에 숨어있으면 안락했지만 그 돌봄에 너무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이곳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다들 친절하고 여유가 넘쳤다. 그들은 말이 서투른 유진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줬고, 그 덕에 유진은 조금씩이나마 말을 틀 수 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일상 대화까지는 가능했다. 가끔 알아듣지 못할 땐 그저 웃으면 된다. 그러면 그들도 마주 웃으며 넘어가곤 했다. 실로 안온했다. 서로 무언가를 재고 따지지 않는 다는 건.

유진은 이곳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친절하고, 따뜻하고.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휘감았다. 얼른 돌아가서 나눠먹어야지. 지금쯤이면 남자도 집에 돌아왔을 것이다. 어쩌면 유진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차를 끓여놓았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새로 들인 기계로 원두를 내리고 있거나. 누군가가 집에서 자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건 꽤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부드러운 미소가 절로 입에 걸렸다. 그런 유진을 귀엽다는 듯이 응시하며 노부인이 그를 향해 느릿하게 말했다.

“넉넉하게 넣었으니까 애인이랑 같이 먹어요.”

“애, 애인 아니에요!”

애인이라는 단어에 유진이 화들짝 놀라며 부정했지만 노부인은 다 안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유진의 양 귓바퀴가 순식간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망할 성현제……. 부끄러움은 항상 다 내 몫이지. 뻔뻔한 낯짝을 떠올리자마자 손끝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옆에 있었다면 멱살이라도 쥐고 짤짤 흔들었을 것이다.

이 동네로 처음 이사 왔을 때, 그가 유진을 데리고 다니며 <나의 사랑스러운 허니팟> 따위의 말을 지껄인 덕에 그들은 근방에서 제법 유명한 커플이 되어있었다. 부부로 오해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정말이지 편견 없는 세상이라니까……. 유진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게 아니라 사정상 당분간 같이 지내는 것뿐이라며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구구절절 설명을 하기엔 아쉽게도 영어가 짧았다.

“내일도 오나요? 내일은 스콘을 구울 건데.”

유진이 값을 치를 동안 여자가 자연스럽게 화두를 돌렸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와야죠.”

“좋아요. 길이 많이 미끄러울 텐데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봐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가게 밖은 어느덧 어둑해져 있었다. 사방에 흩날리는 눈발도 조금 더 굵직했고. 확실히 아까보다 훨씬 추워 보였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따끈한 봉투를 품에 꼭 끌어안고 가게를 나섰다. 익숙한 방울 소리와 함께 걱정스러운 시선이 등 뒤로 따라붙었다. 상냥한 만큼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문득 이곳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유진은 다시 한 번 가게에 시선을 두었다. 크진 않았지만 오래된 목조 건물은 그 자체로도 눈길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기자기한 외관도 얼마 없는 관광객들에게 꽤 괜찮은 셀링 포인트가 된다고 들었다. 오래오래 잘 되면 좋겠다. 유진은 솔직한 마음을 담아 중얼거리곤 어느새 바뀐 신호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베이커리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따로 운동을 하지 않는 그로서는 베이커리나 마트에 다녀오는 일정이 유일한 운동인 셈이다. 게으르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움직이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었다. 유진의 주변엔 늘 유진을 쉬게 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만 넘쳐났으므로.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가 뭐라고. 습관처럼 떠오른 자학에 가까운 의문은 목구멍 너머로 꾹꾹 눌러 삼켰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을 챙기는 사람들은 뭐가 된단 말인가.

스스로를 깎아 내리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은 하고 있다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자신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분에 넘치는 스킬을 얻어 헌터로서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니까. 회귀를 하지 않았더라면, 동생에게 방해만 되는 골칫거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 자체를 바꾸어보려는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이미 의식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은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자신을 붙잡아준 손들이 아니었다면 이미 진작 망가지고 무너져 내려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다.

유진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우울감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털어냈다. 생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아직 살날은 두 손을 가득 꼽고도 남았다. 그리고…….

‘형이 회귀를 했든 뭘 했든 나한텐 그냥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 형일 뿐이야.’

‘잘 키웠어. 나는 한유진이 한유현을 잘 키웠다고 생각한다네.’

‘아저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주위엔 이토록 좋은 사람들만 한 가득한데.

그저 좋고만 싶었다. 그토록 원하던 평화가 드디어 찾아왔는데 원껏 즐기지 못하면 억울하잖아. 혹시 모를 또 다른 불행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마치 스스로를 향해 주문이라도 외듯 중얼거린 유진은 봉투를 고쳐 들었다. 제법 묵직한 것이 아무래도 노부인이 또 잼을 챙겨주신 듯 했다. 지난번에도 봉투가 너무 무거워서 확인해보니 살구잼이 들어있었다. 그 전에는 딸기잼이었고. 원래도 이렇게 인심이 후한가? 아니면 내가 잘 못 챙겨먹게 생겼나. 유진은 고개를 살풋 기울이다 이내 어깨를 작게 으쓱했다. 그래,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손등의 살갗이 추위에 벌겋게 얼어있었다.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이제 다리 하나면 건너면 주택가였다. 기찻길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 위로 막 발을 내디딘 순간, 옆으로 길게 늘어진 울타리 사이로 까만 물체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튀어나왔다.

- 냐앙!

깜짝 놀란 유진의 다리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눈앞에 갑작스레 나타난 것이 새끼고양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덜컹거리던 심장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양이를 향해 몸을 낮추었다.

“너였구나.”

요즘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귀여운 이웃이었다. 이어 치즈빛깔의 털을 가진 덩치 큰 고양이도 모습을 드러냈다. 근처에 터를 잡은 녀석들이었다. 일정 거리를 두고 슬슬 다가오는 게, 아무래도 그들의 목적은 유진이 품에 소중히 안고 있는 빵 봉투인 듯 했다. 유진은 짐짓 단호하게 엄포를 놓았다.

“안 돼. 너네 먹을 건 없어.”

본래는 고양이 간식거리를 들고 다니는데 오늘은 자다가 급히 나오느라 깜빡하고 말았다. 말뜻을 알아들은 건지 본능적으로 얻어먹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건지 녀석들이 애처롭게 울기 시작했다.

- 애우웅, 애웅.

“아이구, 배고파요. 미안해. 근데 지금은 정말로 줄게 없어. 너네는 설탕이랑 밀가루 먹으면 몸에 안 좋단 말이야.”

- 냐아아!

이걸 어쩐다……. 아침마다 밥을 챙겨주는데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잔뜩 난감해하는 유진의 뒤로 또 다른 한 마리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여러 색이 다양하게 섞인 조그마한 새끼고양이였다. 못 보던 녀석인데. 새끼가 있다면 근처에 어미도 있을 터. 아무래도 새로운 가족이 또 생긴 듯했다. 유진은 다리를 접고 앉아 녀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길에서 자란 티가 역력한 작은 짐승은 경계를 하면서도 살금살금 다가와 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회색에 가까운 투명한 눈동자가 가감 없이 유진을 담아냈다. 유독 온순한 눈빛이었다. 유진은 팔을 뻗어 고양이의 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보드랍고 따끈했다.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가자 새끼고양이가 몸을 웅크리며 작게 떨었다. 이렇게 약한 녀석이 겨울을 버틸 수 있을까? 얇은 얼룩무늬 털과 유진의 손등 위를 짓누르는 공기는 상당히 차가웠다.

옥상정원에라도 들여놓아야 하나. 한두 마리도 아니고 길고양이들을 전부 데려오면 기껏 가꾸어놓은 정원이 망가지겠지만…, 정원이야 또 꾸미면 되니까. 그래도 일단은 집 주인과 상의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오른쪽다리가 무릎부터 시작해 찌르르 울려왔다.

“윽-.”

또 시작이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아주 익숙하고, 평범한 일이었다. 신체의 어딘가가 이따금씩 고장이 나는 것은. 다리 한쪽 정도면 이렇다 할 감상조차 불러오지 못했다. 어차피 잠깐 이러다 말 테니 조금만 참으면 되었다. 끙, 신음을 삼킨 유진은 오른쪽 다리에 힘을 싣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회귀한 이후로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다. 다른 것보다도 정신적으로 지쳐갔다. 유진의 손에 쥐어진 일은 그의 역량 밖이었다. 내가 무슨 히어로도 아니고. 세상을 구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사명감도 마찬가지.

하지만 동생을 살리려면,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으려면 세상을 삼키려는 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억지로 수명을 늘리고 스탯이 현저하게 딸리는 몸을 한계치까지 굴리고 굴렸다. 그 결과, 현재 몸담고 있는 세상엔 몇 백 년이라는 유예기간이 주어졌다. 고작해야 몇 백 년이지만, 수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얻어낸 귀한 시간이었다.

던전이 사라지고, 시스템이 사라지고, 세상을 위협하는 근원적 존재들은 더는 이쪽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힘들게 되었다. 당연히 헌터들에게 주어진 능력은 모조리 사라졌고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바라던 바였지만 갑작스레 모든 것이 사라지자 약간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가장 타격이 큰 건 저항 패시브들이었다. 공포저항이 제거된 유진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놀라고 예민해지곤 했다. 그럴 만 했다. 무려 L급 방어막에 겹겹이 둘러싸여 거세된 공포에 익숙해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정신력이었으니까.

몸이라고 멀쩡할 리 없었다. 하루는 눈이 안보이기도 했고 하루는 귀가 안 들리기도 했다. 갑작스레 온몸에 열이 오르거나, 드물게 사지가 마비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얻게 된 것에 비해 이 정도 패널티는 양호한 편 아닌가. 유진은 이것이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희생이라고 하기엔 그는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었으니까. 일단은 말이다.

다리를 미세하게 절며 느려진 걸음으로 한참을 걸어 마침내 자택으로 통하는 거대한 대문을 통과했다. 유진은 고급스러운 조경 사이를 익숙하게 가로질러 걸어갔다. 앞마당은 그리 넓지 않았다. 대신 뒷마당과 옥상정원의 공간을 넓게 뺐다. 그 편이 시선에서 훨씬 자유로웠으니까. 둘이 살기엔 지나치게 넓은 2층짜리 자택이 고고하게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실내는 딱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머금고 있었다. 따뜻한 색감의 조명이 유진을 감쌌다. 현관에서 슬리퍼로 갈아 신고 부드러운 러그 위로 발을 올렸다. 그러자 안쪽에서부터 붉은 빛깔의 털뭉치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피스야, 아빠 왔다.”

- 끼앙!

유체화 상태의 화염뿔사자였다. 유진은 빵 봉투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자신의 다리에 몸을 부비적거리는 피스를 품에 안아 올렸다. 익숙한 무게감이 팔에 실리자 마음에 스르르 안정감이 찾아왔다.

- 끄우웅.

던전이 사라지면서 위협적인 몬스터들 또한 원래부터 없었던 양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테이밍 된 몬스터들은 예외였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위험성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테이밍으로 인해 이쪽 세상에 본래부터 존재했던 생명체로 인식이 된 건지 감화된 마수들은 유진의 곁에 남게 되었다. 능력과 스탯을 모두 잃고 그저 평범한 동물로서. 유진의 입장에서는 몹시도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마수라 한들 정을 주어버린 것들과의 이별은 그에겐 너무도 버거운 일이었으므로.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몇몇 얼굴들이 뇌리를 짧게 스쳐갔다. 순간 흐트러진 호흡을 기민하게 눈치 챈 작은 짐승이 그릉거리며 유진의 가슴팍에 제 얼굴을 부볐다. 유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부드러운 털을 한차례 쓰다듬었다.

“……괜찮아.”

속삭이듯 중얼거린 말은 피스에게 하는 말인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도 헷갈렸다.

괜찮다. 이제 정말로 다 끝났으니까. 괜찮은 일만 남았으니까. 그리도 바라던 평화가 아니던가. 이미 반년이 넘도록 몇 번이고 반복되고 반복된, 평화로운 일상.

평화로운…, 일상.

무언가 어긋난 기분이 듦과 동시에 발밑이 정체불명의 수렁으로 잠겨 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시야가 얕은 물결처럼 일렁였다. 이마저도 종종 겪는 현상이었다. 확실히 정신계통 스킬들이 몸에 후유증이 오래 남았다. 적당히 좀 쓸걸. 진심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후회를 마음에 담는 사이, 주방으로 이어진 복도를 통해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길다란 그림자였다. 곧이어, 이완된 동공에 맺힌 상은 언제 보아도 감탄이 나올 만큼 완벽한 피조물이었다.

“유진아.”

그만큼 비현실적이라는 뜻이다. 남자의 입술이 느릿하게 호선을 그렸다. 아무래도 또 멍청한 표정을 지었나 보다. 유진은 입술 끄트머리를 꾹 깨물었다. 이쯤 되면 저 얼굴에 면역이 생길 법도 한데, 같이 살게 된 이후로 오히려 더 심해지기만 하니 이상할 노릇이었다. 가까운 거리에 멈춰 선 남자의 눈엔 다감한 빛이 어려있었다.

“내가 마중 나와주길 기다리고 있었나 보군.”

“…그런 거 아니거든요.”

“유진 군의 어리광은 언제나 환영이네만.”

“그럴 나이 한참 전에 지났습니다.”

유진은 투덜거리듯 말하며, 남자를 경계하듯 바라보는 피스를 달래어 옆에 내려두고 빵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남자를 지나쳐 주방 쪽으로 향했다. 멀쩡하게 걷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면서.

“식기 전에 얼른 먹죠. 밖이 추워서 이미 많이 식은 것 같지만.”

“장갑은 왜 안 끼고 갔지.”

“댁 같으면 끼겠습니까? 색이라도 좀 다른 걸로 떠주던가.”

“원하는 색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게.”

“그 요란한 핫핑크 색만 아니면 뭐든지요.”

웃는 소리가 따라붙을 법도 한데, 뒤따라오는 남자에게선 침묵만이 돌아왔다. 유진의 걸음걸이 속도에 맞추어 울리는 발소리가 묵직했다. 혹시 벌써 다리 상태를 눈치 챈 건가? 최대한 신경 써서 걸었는데. 유진은 괜스레 마른침을 삼키곤 생각나는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오늘 아침부터 하루 종일 눈이 내리네요.”

“영국에서 맞는 첫눈이로군.”

“한국보다 덜 춥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속은 것 같아요. 한국은 아직 가을 날씨라던데.”

“확실히 이례적이긴 하지. 조만간 폭설이 내릴지도 모른다더군.”

주방이 가까워질수록 달달한 레몬차의 향이 강해졌다. 떫은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유진 탓에 집에는 잎 종류의 차보다는 과일차가 많았다. 그 중에 유진이 가장 선호하는 건 짙게 우려낸 허니 레몬티였다. 환하게 밝혀둔 공간으로 들어서자 어쩐지 조금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유진은 남자를 돌아보며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맞다. 그리고 길고양이가 한 마리 더 늘었더라고요. 아무래도 사료를 조금 더 사두어야-.”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다소 급하게 맞물린 입술 새로 먹힌 탓이다. 애매하게 고개를 꺾자마자 곧장 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겨 들었다. 날카로운 혀끝이 순식간에 입안을 파고들고 그 속을 낱낱이 파헤쳤다.

“읏….”

초점마저 잡히지 않는 밀접한 거리에서 보이는 건 오로지 형형한 두 눈동자뿐이었다. 금빛 이채가 도는 눈동자와 똑바로 향해지는 시선. 생략된 말들을 목구멍으로 직접 쏟아내는 혀.

그리하여 유진은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모조리 알고 있었구나. 다리의 통증도, 애써 내리누르고 있던 불안감도, 그걸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아니, 사실 들키고 싶지 않다는 건 진심이 아니었다.

자신의 상태를 숨기고 싶을 때 말이 많아지는 건 유진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걸 남자가 모를 리 없었다. 유진은 가까스로 그를 밀어내고 숨을 헐떡였다. 입술은 떨어졌지만 여전히 몸은 바짝 맞붙은 채였다. 유진은 얼굴 위로 쏟아지는 구속구같은 눈빛을 가만히 받아내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성현…제 씨.”

사실 당신이 내 불안감을 눈치 채줬으면 좋겠어. 그래서 이 불안함을 거두어가고 텅 비어버린 마음을 채워주었으면 좋겠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요구를 검푸르게 가라앉은 시선에 담아냈다. 이런 어리광은 질이 나빴다. 어차피 상대방이 전부 받아줄 것을 안다는 점에서 더더욱.

“응, 유진아.”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라면, 이름 자체로도 다정한 언어였다. 코끝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전류가 흐르기라도 한 양 유진이 몸을 떨었다. 달싹이는 입술 새로 빠져 나오는 말은 없었다. 유진은 말 대신 한쪽 팔을 뻗어 남자의 목을 감쌌다.

유진은 남자가 다음에 취할 행동을 알고 있었다. 손에 들린 봉투를 부드럽게 앗아가 테이블에 올려둔 뒤 유진을 가볍게 안아들 것이다. 그리고 계단을 느긋하게 올라가 2층의 침실로 향하는 것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남자는 유진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두터운 겨울용 솜이불 위로 몸이 길게 눕혀졌다. 이어 남자 또한 위로 올라오자 매트리스가 한껏 출렁였다. 그 반동으로 침대 끄트머리에 매달아놓은 깃털 가득한 장신구가 아슬하게 흔들렸다. 뒤집힌 시야에 맺힌 그 모습은 마치 깃털들이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코트가 벗겨지고 안에 입고 있던 호박색 터틀넥 니트가 목 끝까지 말려 올라갔다. 차가운 손이 맨 허리에 닿자 유진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늑골을 하나하나 짚어 올라가며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매만졌다. 핏줄이 툭툭 불거진 남자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치며 유진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빵이랑 차…. 식기 전에 먹어야 하는데.”

조악한 만류에 남자가 눈매를 가늘게 접었다. 별걸 다 걱정한다는 듯이. 유진도 딱히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긴장한 것을 티내고 싶지 않아 잠깐 남자를 멈춰 세우기 위해 꺼낸 말에 불과했다.

기껏 사온 빵과 알맞게 우려낸 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유진아.”

어차피 이건 전부 꿈이니까.

“여기도 식기 전에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유진의 아랫사정을 눈짓으로 알렸다. 더는 핑계를 댈 이유도 없었다. 유진은 남자의 목덜미에 양 팔을 감아 제 쪽으로 당겼다. 시선이 닿았다. 먼저 눈을 감아버린 건 유진이었다. 다시금 혀가 얽혀왔다. 섞여 드는 타액이 달콤했다. 아래층에 두고 온 갖가지 빵과 허니레몬티 만큼.

이곳은 한유진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상이었다.

빈틈없이, 완벽한.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54,861 공백 제외
15,0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