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택시를 타고

W. 몸




“여기에요?”

“네.”

“정말... 이에요?”

“네. 여기가 정말 끝내준데요. 택시기사피셜.”

 

그 말에 민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택시기사피셜... 믿어보자. 성인 두 명이요. 자고 갈 거에요. 계산을 기다리며 지훈이 민규를 향해 웃었다. 든든했다.

 

*

 

“크흠. 이렇게 서로... 막 벗은 몸을 봐도 되는 거에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래도 좀...”

“싫으면 따로 주무시던가.”

지훈이 그대로 성큼 타올을 어깨에 걸치고 탕으로 들어갔다. 그런 지훈을 바라보다 민규가 수줍게 다리 사이를 가린 채 따라 걸었다. 으어어어... 뜨거운 물에 노곤한 몸을 뉘이니 절로 탄성이 나오는지 지훈이 더욱 깊이 몸을 담그며 소리냈다.

 

“아저씨 같아.”

“아저씨라고 하지 말라니까요?”

“아저씨 같아. 라고 했어요. 아저씨 아니고.”

 

그러면서 반 즈음 몸을 틀어 앉아있는 민규를 보고 지훈이 웃었다. 왜 그렇게 쑥스러움이 많아요? 어차피 남자 몸 다 거기서 거긴데. 대충 목욕을 끝낸 민규와 지훈이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표지판을 따라 걸었다.

 

“우와.”

“거 봐요. 택시기사피셜. 멋지죠?”

 

계단을 한 층 올라오니 눈 앞으로 통창이 펼쳐졌다. 내다보이는 드넓은 밤바다와 대교의 위상. 민규가 어느새 통창에 달라붙어 우와를 연신 내뱉었다.

 

“저, 그만. 그만 합시다. 부산 처음 온 거 티 냅니까?”

 

지훈이 바다가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민규를 앉혔다. 군데군데 낡은 찜질복을 입은 서로의 모습을 보고 웃었다. 왜 웃어요. 아니요, 멋있네요. 아닌 거 아는데? 투닥거림도 잠시 지훈이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자꾸만 어딜 그렇게 사라지나, 싶었는데 곧 두 손에 식혜와 달걀을 들고 돌아왔다.

 

“찜질방엔 역시 구운 달걀이죠.”

 

하면서 달걀 껍질을 까는데 또 풉, 하고 민규가 웃었다.

“아니 왜 또 웃어요.”

“아니... 달걀이... 달걀을 까고 있는 것 같아서요.”

“뭐요? ”

 

지훈이 성난 얼굴로 반 즈음 벗긴 달걀을 민규의 입 안으로 쑤셔넣었다.

 

“이거나 먹어.”

 

민규가 알맞게 구워진 탱탱한 달걀을 씹기 시작했다. 그리고 텁텁한 노란자위가 목 안으로 걸려들었다. 지훈도 어느새 입 안 가득 우물이다 민규에게 식혜를 건넸다. 서로 말 없이 달걀만 먹었다. 달걀만 먹으며 바라보기에는 예쁜 바다네요. 민규가 말하고 싶었지만 내뱉진 않았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수십 마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고요했다.

 

“갑시다.”

 

어깨를 흔드는 지훈의 손길에 일어난 민규가 눈을 부볐다. 옅은 햇살 아래 또 다시 펼쳐진 바다의 모습.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니었네. 매일 벗어나고 싶어서 꿈이라도 꾼 줄 알았어.

 

까치집을 하고 탕으로 내려온 민규와 지훈이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제 옷을 찾아입었다. 어제는 당장 옷을 벗고 쉬고 싶어 눈에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테면 민규의 허리와 손가락이 말린 옷감을 풀어내는 손길. 젖은 머리칼이 가리운 눈. 다부져 보이는 다리. 크흠. 지훈이 헛기침을 하고 반 즈음 몸을 돌아서 제 옷을 챙겨입었다.

 

“다 입었어요?”

“아... 아직요.”

“뭘 가려요. 어제는 볼 것도 없다고 하더니.”

“제가 뭘 가렸어요. 그냥 프라이버시죠. 프라이버시.”

 

지훈이 빠르게 팬츠를 올려입었다. 단잠에 빠졌던 민규와 지훈이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헝클이며 찜질방을 나온 것이 벌써 점심 때였다.

대충 국밥으로 점심을 떼우고 차를 세워뒀던 곳으로 돌아와 곧장 서울로 내달렸다. 서울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어쩐지 민규는 말이 없었다. 화가 났나.

 

“저기, 뒤로 가서 앉으세요.”

“왜요?”

“손님이잖아요. 뒤로 가세요.”

 

갑자기 앞으로 오랬다가, 또 뒤로 가랬다가. 민규는 고개를 갸웃였지만 말 없이 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서로 말이 없었다. 가끔 지훈이 백미러로 민규를 바라보면, 민규는 잠이 들어있었다. 잠에서 깬 민규가 가끔 지훈을 바라보면 지훈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휴게소도 들리지 않고 서울로 내달리니 이제 막 밤이 찾아들고 있었다. 신호등이 점멸했다.

 

“안녕히 계세요.”

“같이 가실래요? 택시비 드릴게요.”

“됐어요. 다음에 보면 줘요.”

“왜요. 바로 드릴게요.”

“그거 받으려고 남의 집까지 가고 싶진 않아요. 어차피 이 동네 계속 살 거잖아요? 받으러 올게요.”

 

지훈이 백미러도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민규가 백미러를 뚫어져라 쳐다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뭔가 화가 났나. 민규가 차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지 못했다.

 

“정말이에요?”

“아니, 정말이라니까요?”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이며 휙 뒤돌아 본 지훈의 얼굴 코 앞으로 민규의 얼굴이 맞닿아 있었다. 멈칫한 순간. 민규가 지훈의 입술을 눌렀다. 그리곤 천천히 콧날을 부볐다. 입술이 다시 닿을 듯 말 듯.

지훈이 그런 민규의 코 끝을 바라보고, 민규는 그런 지훈의 입술 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민규가 지훈의 어깨를 꽉 쥐어 당기고 지훈이 앞좌석을 밀쳐내며 뒷좌석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곤 와르르 무너졌다.

 

서로 다른 곳으로 무너지다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듯 서로의 입술을 물었다. 입술을 떼고 잠깐 눈이 마주쳤을 때 서로가 확신한 듯 웃었다.

평소 가볍게 이야기를 털어내고, 무겁게 웃으며 떨었던 손길이 아니다. 택시 안은 평소와는 다르게 무척 말이 없어진 민규와 무척 소란스러워진 지훈의 소리로 가득 찼다. 관계 내내 민규의 말이 너무 나직해서 지훈은 더 울고만 싶었다.

 

“좋아, 좋아요...”

“내가 그렇게 좋아요?”

 

민규가 지훈의 위로 무너졌다. 민규가 스륵 지훈의 다리 사이에서 빠져나오고 제 앞섬은 챙길 생각도 하지 않고, 지훈의 바지부터 올려주었다.

 

“고마웠어요.”

 

그리고는 제 바지를 챙겨입고 택시를 벗어났다. 아직 뒷좌석에 나른한 몸을 떨군 채 색색 숨을 몰아쉬는 지훈을 두고.

“또 와 줄 거죠?”

 

묻고는 택시 문을 닫았다. 쿵. 차체가 흔들리는 진동을 느끼며 지훈이 제 몸에 남은 감각을 털어냈다. 하아. 길게 숨만 쉬었다.

 

*

 

야, 지금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냐? 지훈이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죄송함다.”

“택시 반납도 안해, 사납금도 못 채워와. 아주 퇴사 의지가 강렬해?”

“죄송함다.”

 

아유. 손에 든 다이어리를 휙 지훈의 머리 위로 들었던 소장이 툭 떨구며 말을 삼켰다.

 

“니가 왜 또라이버냐?”

“모르겠습니다.”

“또라이라서 또라이버 아냐. 이 자식아. 잘 좀 하자, 잘 좀 해.”

“네, 죄송함다.”

 

꾸벅, 꾸벅. 몇 번을 조아리고 나서야 벗어난 지훈이 휴우, 숨을 돌렸다. 저 새끼 말도 안되는 말 지어내는 거 아주. 돌아버리겠다. 내가 돌아버릴 것 같아서 또라이버야, 이 아저씨야.

 

사납금 못 채운 벌로 일주일 정도를 평소보다 두어 시간 더 돌았다. 그래도 잘 채워지지 않았는데, 번화가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아서였다. 그 근처를 지나다니면 다시 신호등 앞을 서성이는 민규를 만나게 될까봐. 그럼 다시 택시를 태우고 소란스러운 이야기를 듣다가 택시 뒷좌석으로 무너져 버릴까봐 지훈은 그게 무서웠다. 애인도 있는 사람인데. 상도덕이 아니지. 지훈이 도리질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열심히 택시를 몰았고, 보름이 지나서야 누적됐던 사납금을 대충 채울 수 있었다.

 

“여기 백반 하나요.”

 

그제서야 여유를 돌리며 식사를 하러 온 식당. 걸레짝처럼 노곤해진 몸을 의자에 기대어 멍하니 티비를 보는데,

 

“월 말인데, 알지?”

“아, 네. 알죠. 얼마에요?”

“이번 달은 삼십 오만원.”

“네? 삼십... 얼마요?”

“삼십 오만워언~”

“아니, 제가 그렇게나 밥을 많이 먹었어요? 이모 계산 잘못 해 놓은 거 아니에요? 다른 기사들이 막 제 번호로 달아놓고 그런 거요.”
“아니이, 총각 친구가 와서 다 달아놓고 갔어.”

“친구 누구요!”

지훈이 두 눈을 부라리며 묻자 가게 주인이 후불 원장을 가져와 들이밀었다. 그 때 같이 왔었던 그 친구 있잖아. 빼곡이 적힌 기사들의 후불 내역 사이로, 1122번. 지훈의 차량 넘버 칸에 하루를 멀다하고 적힌 이름. 김민규.

 

“김민규?”

“응. 친구 맞지? 매일 와서 된장국 먹고 갔는데?”

“아씨, 진짜.”

 

가장 최근에 온 게 언젠지 주욱, 내역을 훑던 지훈은 어제 자로 이름 자리에 적힌 메모를 발견했다.


「 빚 늘어나기 싫으면 찾아오세요. 빚 갚아드릴게요. 」

 

지훈이 차려지는 백반상을 두고 벌떡 일어났다.

 

“총각! 어디가! 밥 나왔는데!”

진짜... 이러깁니까? 지훈이 중얼중얼, 그러다가 핸들을 탁탁 내리치며 번화가로 차를 몰았다.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올 거예요? 신호등 인근이 되자 속도를 줄인 지훈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 택시를 세우고 라이트를 껐다. 그리고는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터벅터벅 걸어나온 남자가 신호등 앞에 서 있었다. 곧장 택시 하나가 남자의 낌새를 보고 차를 세웠지만 타지 않았다. 민규였다.

어쩌지. 이를 어쩐다. 지훈이 고개를 내저으며 애꿎은 핸들을 내리쳤다.

그 때 달각, 차문이 열리고 스륵 민규가 지훈의 옆 좌석에 올라탔다. 화들짝 놀라는 지훈을 보며 민규가 매서운 눈길을 흘겼다. 지훈이 성급하게 입술을 벌였지만 말을 뱉지는 못했다. 뭐라고, 하지?

 

“인사도 안 해줘요?”

“아, 안녕하세요.”

 

그리고는 뚝, 민규가 눈물을 흘렸다.

 

“아니, 왜, 왜 울어요.”

 

푹 고개를 숙이고는 얼굴을 도리질했다. 보름만이에요, 보름. 왜 안 왔어요. 매일 같이 기다렸는데. 민규가 울음에 가득 잠긴, 물에 젖은 문자처럼 형체 없는 말을 내뱉었다. 지훈이 살며시 민규의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이자 민규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저, 너무 행복하지 않아요. 그 날, 진짜 행복했는데...”

“그 날은, 서로 좀. 취했었잖아요.”

“아니요, 하나도 안 취했는데. 운전도 했잖아요.”

“아니, 분위기에 취했잖아요. 부산도 갔다왔고...”

“전 그런 거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빚 안 갚아도 되니까, 이제 그러지 마요. 식당도 오지 마시고, 신호등에서... 기다리지도 마시고요.”

“저 도망치고 싶어요. 이거 보세요. 매일매일이 힘들어요.”

 

슥 올리는 소매 끝으로 푸르게 피어오른 멍자욱이 있었다. 제 허벅지를 감싸쥐고 입 맞춰주었던 기억. 지훈이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사랑 싸움을 그렇게 거칠게 해요? 얼른 들어가서 화해해요. 사랑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요.”

“정말이에요?”
“뭐가요.”

“진심이에요? 정말, 저 가요?”

“네.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민규를 지나친 손길로 차문을 열어주는 지훈. 민규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다시 고개를 내저은 지훈이 차에서 내려 민규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곤 민규의 팔을 내리끌었다.

 

“내려요.”

 

획 잡아 끈 손길에 민규가 마지못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지훈이 쥐었던, 손목을 꼭 감싸쥐었다. 아씨. 지훈이 낮게 읊조렸다.

 

“빨리 가세요.”

그 한 마디 남기고 다시 차에 올라 빠르게 택시를 출발시켰다. 바로 앞 신호에 걸려서야 지훈이 백미러로 뒤를 돌아봤다. 민규가 제 손목을 붙잡은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신호가 깜빡 깜빡. 정처 없이 점멸했다.

 

나의 골목에 미끄러져 들어오던 너. 좁고, 어둡고, 냄새 나는 삶의 흔적들만 배설하던 나의 골목으로. 너의 빛나는 기둥이 세워졌을 때. 아무도 발 들인 적 없던 곳으로 밝은 빛이 반짝, 하고 점멸할 때마다 나의 골목이 허름하던 제 살을 벗고 새로운 속내를 드러냈었다.

 

누추한, 고루하고 따분하게 늘어선 나의 기억들. 틈 없이 줄지어 있던 나의 분노들. 곳곳에 숨겨져있던 나의 감정들이 밝게 비춰질 때마다 몸서리 치던 나의 골목을 묵묵하게 내달렸던 너. 아무도 불러본 적 없던 나의 골목에서 다정함으로 나를 흔들고, 위로로 나를 뒤집어 세웠던, 그리하여 다시 쓰여진 좌표 위에 나는 나의 골목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골목을 무너뜨리려고 해.

 

*

 

띵동. 00동 사거리에서 대법원. 사납금 받으려면 콜도 받아야지. 좀 귀찮긴 해도, 틈이 없어지잖아. 선배 제안에 콜을 받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손님을 태우지 않은 택시가 불안해 온 힘으로 도로 위를 훑으며 달렸는데 이제는 휴대폰 알림만 신경 쓰면 되니 더 수월하다. 기다리면 계속 들어오는 콜.

...사거리? 항상 민규를 태우던, 신호등이 있는 곳이었다. 콜인데, 만날 일 없을 거야. 지훈이 유턴 신호에 맞춰 핸들을 크게 틀었다. 다행히도 민규는 아니었다.

 

“어서오세요.”

뒷문을 벌컥 여는 남자에게,

 

“아, 앞으로 앉아 주실래요? 뒷좌석은... 문제가 좀 있어서요.”

 

남자가 쿵, 뒷문을 닫고 벌컥 앞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대법원으로 가드리면 되죠?”

“아뇨. 바로 앞 사거리까지 가주세요.”

 

뭐야. 재수 없게. 기본료만 나오겠네. 지훈이 예약한 거리와는 다르게 코 앞까지 가달라는 남자의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힐끔. 남자가 뒷좌석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왠지, 싫어. 뒷좌석에는 가급적 앉히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백미러로 지켜보던 것이, 생각이 나서.

 

“네, 다 왔습니다.”

“이제 오른쪽으로.”

“네?”

“오른쪽으로 돌라고.”

 

아씨, 왜 반말이야. 지훈이 옆좌석의 남자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럼에도 꿈쩍 않는 남자. 지훈이 남자의 말대로 핸들을 틀었다.

 

“그 다음은요?”

“또 오른쪽으로.”

“손님, 가시는 데가 어디에요?”

 

말 없는 남자. 지훈이 낙담한 듯 핸들에 쥔 손을 풀었다.

 

“이렇게, 매일 돌았구나.”

남자가, 조용히 읊조렸다. 뭐지 싶어 돌아보니,

 

“얼마에요?”

“삼천... 육백원이요.”

 

순간적으로 휩싸인 불안한 예감. 하지만 오천원 한 장을 지훈의 눈 앞에 흘린 채 빠져나가는 남자의 속도에 지훈은 뒤이을 말을 잊었다. 잊자. 잊어. 이렇게 사거리 도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지. 지훈이 기사식당으로 차를 몰았다.

 

“이모. 백반 하나랑 소주 하나요.”

“잉? 오늘 영업 끝?”

“네. 끝내려구요. 소주부터 얼른 주세요.”

 

가게 주인이 냉장고를 뒤져 얼른 소주와 소주잔을 내왔다. 드득 소주 뚜껑을 잡아 돌리곤 괄괄 작은 잔에 술을 채운다.

 

“나 참, 세상이 무서워서.”

 

흘려오는 대화.

 

“무슨 일인데.”

“그 있잖아. 사거리에서 맨날 세 바퀴 돌아달라고 하는 남자.”

 

그 이야기에 지훈이 홀연히 귀를 빼앗겼다. 탁. 따르던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오늘 끌려가더라고.”

“어딜?”

“모르지, 나야. 손님이 돈 내고 내리려는데 갑자기 누가 문을 벌컥 열더니 냅다 손님을 잡아 끌어내리는 거야. 도망치다가 귀싸대기 한 대 더 맞더라니까.”

 

지훈이 땅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 나 돌아버리겠네.”

 

손에 쥔 술잔을 꾹 누르며 지훈이 내뱉었다. 술잔의 표면이 살살 흔들렸다. 그러다 이내 흔들리는 손길에 속절없이 흘려넘쳤다. 쾅. 지훈이 소주잔을 내려놓고 재빨리 식당을 빠져나왔다.

 

“총각! 어디가! 아구 밥 나왔는데. 또 나가네 그냥.”

 

그 무너지는 골목에서, 얼른 빠져 나와.

당신을 조금만 벗어나면 고장 난 나침반 처럼 흔들렸다. | 정수경, 슬픔의 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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