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비님, 온님과 함께 푼 썰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망 소재 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내쉬는 그의 인생에 오만한 지배자였던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내쉬 골드. 중간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쉬 골드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는 탓에 그 자신은 어릴 적부터 주니어라는 명칭을 달고 살았다. 심심찮게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부친을 타고난 탓이다. 

목사가 앞에서 기도를 하고, 유가족들이 흙을 뿌리는 시간이 되었다. 제일 먼저 흙을 덮은 건 내쉬 자신이었다. 

친아들인 자신 다음으로 나선 것은, 내쉬의 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부친이 죽기 전보다 5kg은 빠진 듯 사이즈가 맞지 않은 스스로의 옷을 입은, 아카시 세이쥬로였다. 아니, 지금은 세이쥬로 골드인가. 이 불쌍한 미망인은 직전까지 손수건으로 눈을 누르고 있었다. 내쉬는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부친의 의사로 가족만 모인 장례식에서 그의 인종은 매우 눈에 띄었다. 백인 상류층, 청교도, 아이비리그 출신. 친척들의 공통점에 들어맞는 것은 아이비리그 정도 밖에 없다. 그것도 사교클럽은 들어가 있지 않으니 공통점으로 보지 않을 사람도 있지 않을까.

예전 성을 아카시라고 하는 그는 슬픔에 찬 손길로 죽은 남편의 관 위로 흙을 뿌렸다. 목사가 젊은 미망인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된다. 내쉬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한번 골드 가에 들어왔으니, 쉽사리는 빠져나가지 못 한다. 내쉬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아니꼽지만, 부친의 허락도 있었다. 내쉬 골드 시니어는 외동아들에게 자신이 물려받은, 그리고 평생토록 이룩해낸 재산과 함께 그 자신의 젊은 처 또한 남겼다. 

내쉬는 그의 젊은 계모에게 다가갔다. 내쉬가 어깨에 손을 얹고 달래듯이 토닥거리자, 깜짝 놀라 내쉬를 쳐다보던 아카시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과거에 코트 위에서 내쉬를 무릎 꿇렸던 패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사촌이 놀란 눈길로 내쉬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스스로도 답지 않은 짓이란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달아나려는 사냥감을 잡는 것도 좋지만, 평생 함께 살건데 기왕이면 기꺼이 새장 안에 머물러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카시는 예상대로 내쉬의 팔을 쳐내지 않았다. 부친이 건네준 인장 반지가 내쉬의 엄지에서 둔하게 빛났다.

*

'오, 내 아들. 나는 네게 가지고 싶은 건 가지라고 교육했지.'

부친이 죽기 3일전의 일이었다. 부친이 쓰러져 3일째 일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내쉬는 재버워크 활동을 멈추고 급히 본가에서 내어준 자가용 비행기를 타 돌아왔다. 

숨 막히는 전통, 더러운 협잡꾼들의 모임. 내쉬가 본가에 돌아가지 않았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으나, 어쨌든 최저한의 예의는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재버워크가 쓰레기 모임인 건 유명했지만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건 내쉬의 그런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인 남성 사회를 비난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쓰레기짓 중에서도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흑백대립 만큼 그리 큰 파장을 일으키지 않는다. 사실 인종차별도 백인 사회에서는 그리 큰 파장 자체를 일으키지 않는다. 거기에 부친의 젊은 처는 동양인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내쉬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이미지를 어느정도 씻어낼 수 있었다.

'가지고 싶지?'

내쉬 골드. 내쉬의 부친이며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는 그렇게 말했다. 부자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에 자리를 비운 자신의 젊은 처가 나간 방향을 보면서. 아카시 세이쥬로. 세이쥬로 골드. 내쉬에게 패배를 안겨준 사람 중 하나이며 이후 부친과 결혼한 일본인. 그야말로 자식뻘인 부친의 새로운 결혼상대였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성인이 되자마자 부친과 결혼한 그는 이제껏 큰 풍파를 일으키지 않은 채 골드 가의 새로운 안주인으로 자리잡았었다. 아마 거기에는 늙은 남편에 대한 애정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카시는 남편이 쓰러지마자 그 간호를 도맡았고, 한번은 쓰러질 뻔하기도 했다. 

내쉬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부친의 곁에서 본 것은 시합 때와는 정 반대로 퀭해진 눈을 한 채 초췌해진 부친의 아내였다.

'….'

부친의 질문에 내쉬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자신을 패배시킨 남자. 그런 남자가 부친의 것이 되는 건 불쾌한 경험이었다. 그가 부친과 함께 썩 행복해보였던 것을 포함해서.

'가지고 싶다면 주마.'

'무슨 헛소리야.'

내쉬 골드 시니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엄지 손가락에 끼인 인장반지를 내보였다. 골드 가의 주인이라는 상징. 전통의 집합체. 그야말로 내쉬가 혐오하던 모든 것들.  

'어떠냐.'

내쉬 골드 시니어가 삐뚜룸하게 웃었다. 내쉬는 핫, 코웃음치며 반지를 받아들었다. 두 사람의 이름없는 조약이 체결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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