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이제는 말을 할 때 상대방의 기분을 좀 생각하게 됐다. 사실 나는 예의를 갖추게 된 것이 아니라 겁이 많아진 것이다. 타인에게 주었던 상처가 나에게 돌아와 꽂히는 장면을 상상하면 자연히 입을 다물게 된다. 이전에는 멍청한 소리를 하는 사람과 거리를 둔 다음 '멍청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 팻말이 붙은 울타리에 가뒀는데, 언젠가부터 주변의 생겨난 수많은 울타리가 무섭다. 내가 사람들을 가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울타리 사이에 갇히게 된 것일까? 분명 ‘갇힌 건 님이죠;;’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대답을 미루기 바쁘다.

스스로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숨 넘어가기 직전에 스탠스를 바꾸는 것보다 한 살이라도 젊은 지금 바꾸는 것이 조금이나마 낫지 않나. 임종 직전 온유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결심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더러 천국행 티켓을 위한 밑밥이 될 뿐인데, 생의 중간 지점조차 도달하지 못한 젊은이가 태도를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은 진정성 있는 반성의 증거가 된다. (죄송)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일은 중요한 만큼 어렵다. 삶은 내정된 정답을 고르는 시험이 아니다. 오히려 토론에 가깝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른 후 선택지의 타당함을 증명해야 한다. 토론은 눈 앞의 사람과 하는 게임이 아니다. 토론은 장내의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신뢰를 얻어야 하는 게임이기에 삶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 신뢰를 얻고 싶다면 명확한 입장을 먼저 세워야 한다. 신뢰는 설득력을 갖춘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금과 같고, 설득력은 분명한 태도 위에서만 자라난다.

삶에 대한 입장을 선택해야 했을 때 나는 스스로를 살피는 대신 시야를 밖으로 돌렸다. 그는 단단했고 나는 아니었다. 그가 어쩌다 선택하는 차선은 나의 최선으로도 불가능할 만큼 높았다. 그 때 나의 최선이란 무심한 성격을 방패로 삼고 그 뒤에 숨어 견고한 인간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아주 긴 시간을 그렇게 지냈다. 오랜 몰입의 결과로 나는 스스로 단단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했다. 타고난 무심이 나를 보호하고 있다고 깊이 확신했다.

무심한 성격이 매력으로 작용하던 시기가 있었으나 이제는 끝났다. 무심한 성격을 앞세우고 뒤로 숨어버리는 것을 반복할 때마다 그저 신뢰를 조금씩 잃을 뿐이다. 나는 이제 방패를 부수려고 한다. 사람을 대할 때, 느낀 것을 솔직하게 말한 다음 합의점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공중에 부유하며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남는 것이 싫다. 문득 삶을 관망하는 것처럼 보일 뿐, 두 발조차 닿을 곳 없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투명한 사람이 되는 것만큼 슬픈 일이다.

01 보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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