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PAYA



쿠로코 테츠야는 작은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으며 키세를 기다리고 있었다. 5분, 30분, 1시간.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쿠로코와 같이 왔던 주변 사람들은 떠나고, 다시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를 반복하지만 정작 쿠로코가 기다리고 있는 키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으아, 다 젖었다!”

“아침 뉴스에 비 온다는 말 없었는데!”


쿠로코가 키세를 기다린 지 1시간 20분이 지나고 있을 무렵,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에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투덜거리며 카페로 들어왔다. 쿠로코는 책을 보던 시선을 문밖으로 옮겼다.


“소나기, 군요.”


쏴아아. 세찬 소리를 내며 힘차게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소나기가 내렸네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쿠로코는 놀랍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던 그 날을 회상했다.


-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일상이었다.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남들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학교에 도착해 다른 부원들보다 먼저와 연습을 하고, 아침연습 시간이 되면 아침에 연습을 하고, 연습이 끝나면 반으로 올라가 수업을 듣고, 또 방과 후에 연습하고, 1군 선수들끼리 연습이 끝나고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하는. 그런 평범한 일상.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거로 생각한 평범한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쿠로콧치, 쿠로콧치! 오늘은 저랑 단둘이 가요!”

“네. 알았으니까, 씻고 나오세요.”

“네, 네! 저 얼른 씻고 나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평소와 조금 다른, 살짝 어긋난 일상. 이런 일탈도 가끔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군요. 키세를 기다리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쿠로코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급히 나온 티가 분명한 키세가 쿠로코의 손을 잡아끌었다.


“쿠로콧치와 단둘이 하교라니, 꿈만 같아요.”

“그렇습니까.”

“네. 쿠로콧치도 좋죠?”


새색시 마냥 양 뺨을 붉히며 수줍게 묻는 키세를 힐끗 본 쿠로코가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나쁘지는 않네요.”


키세가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멈추었다. 무심히 길을 걷던 쿠로코가 옆에서 같이 오던 키세가 없어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 키세가 쿠로코를 끌어안았다.


“쿠로콧치! 저 엄청나게 기뻐요!”

“…덥습니다. 놓아주세요.”

“싫어요. 계속 끌어안고 있을래.”


고집스러운 키세의 대답에 쿠로코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여유로운 얼굴로 씩 웃은 키세가 쿠로코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저와 사귀어주면 놓아줄게요, 쿠로콧치.”

“그러죠.”


삼박하게 대답한 쿠로코의 오히려 당황한 키세가 쿠로코를 안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타이밍을 노려 얼빠진 키세를 살짝 밀친 쿠로코는 무사히 키세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쿠로콧치, 저 농담 아니었는데….”

“네. 저도 압니다.”


징징거리며 자신보다 작은 쿠로코에게 칭얼대는 키세와 그런 그를 덤덤한 얼굴로 응시하는 쿠로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쿠로코가 말을 이어 하려는데 툭,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앗. 하는 순간, 순식간에 내리는 소나기에 키세와 쿠로코는 비를 피하려고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 뛸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정류장에 사람은 없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쿠로코가 입을 열었다.


“저도 진심입니다, 키세군.”

“…쿠로콧치. 정말, 정말 좋아해요.”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백하는 키세가 귀엽다고 느껴진 쿠로코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던 것 같다.

그날, 평범하기만 하던 일상 속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


멍하니 과거를 회상한 쿠로코가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키세를 기다린 지 2시간이 되기 5분 전. 쿠로코는 책을 덮었다.


“쿠로콧치!”

“왔네요.”


마음속으로 5분을 세고 있던 쿠로코는 헐레벌떡 카페 문을 열고 다급하게 자신의 앞에 앉는 키세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카페 종업원을 불러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촬영이 잡혀서…. 많이 기다렸어요?”

“…일은 잘 끝냈습니까?”


키세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기 싫었던 쿠로코가 말을 돌리며 되물었다. 키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쿠로코가 주문한 아이스티가 나왔고, 쿠로코는 아이스티를 키세 앞에 놓았다.


“먹어요.”

“고맙습니다, 쿠로콧치.”


목이 탔는지 순식간에 아이스티를 마신 키세가 한숨 돌렸다는 듯 방긋 웃어 보인다. 쿠로코가 흘러가는 말투로 말했다.


“헤어지죠, 우리.”

“…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쿠로코가 가볍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세가 화들짝 놀라 쿠로코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 왜 갑자기….”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유를 묻는 키세를 지긋이 보던 쿠로코가 변함없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잖아요, 키세군.”


마치 둘만 빼놓고 공간이 멈춘 것 같다고, 쿠로코는 생각했다. 방금까지 울먹이던 표정은 어디 간 건지, 키세의 얼굴이 굳었다. 쿠로코는 키세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며 말을 이었다.


“오늘도 촬영이 아니라 그 사람과의 데이트 때문에 늦은 거 다 압니다. 어떤 이유에서 저에게 헤어지자고 하지 않는지 궁금하지만, 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계속해서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

“아니라는 변명도 하지 않는군요.”


쿠로코가 짧은 한숨을 뱉어냈다. 키세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다신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쿠로코는 미련 없이 카페를 나갔다. 홀로 남은 키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전히 밖은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


쿠로코는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무작정 걸었다. 목적지도 없이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완전히 카페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쿠로코는 걸음을 멈췄다.


“이런 이별도, 아플 때가 있네요.”


쿠로코는 아무도 없는 거리 귀퉁이에 쭈그려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식으로 끝날 줄은 아마 키세도, 또한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이별이,

이렇게 허무한 거군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쿠로코가 헛웃음을 지었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텅 빈 거리에 울렸다.

쿠로코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


키세는 본인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 있었다. 불안하거나, 심란할 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 같은 거였다.


「헤어지죠, 우리.」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아파져 왔다. 키세는 인상을 찌푸리며 숨을 토해냈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잖아요, 키세군.」


왜 자신은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걸까. 그래. 그의 말이 맞았으니까.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자신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최악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웃기게도 그럼에도 쿠로코와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바보 같은 소리지만, 정말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소리지만,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랐던 것 같다.


「다신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정신이었을까, 자신은. 상처받은 쿠로코의 눈동자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다정함을 담아 자신을 보던 옅은 하늘색 눈동자에 담긴 것은 체념과 경멸. 그렇게 만든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

정말, 최악이다. 최악이야, 키세 료타.

자신은 정말 최악이었다. 사람도 아니야. 넌 인간도 아니야.


“쿠로콧치….”


와작. 키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와 함께 그의 마음도 일그러졌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쿠로콧치….”


찰랑. 아이스티의 얼음이 컵과 부딪치며 부서졌다.

이제 그들의 관계는 녹아버린 얼음 같았다. 다시 얼 수 없는.


여전히,

소나기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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