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부딪힌 검이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났다. 두 장정이 몸을 날리고 부딪힐때마다 묵직한 바람 소리가 났고, 바닥에 깔린 돌들이 희미하게 삐걱거렸다. 린신의 옆구리를 노린 공격은 곧바로 휘둘러지는 검에 막히고, 동시에 비어있는 허점에 린신이 발을 날렸다. 소경염은 그대로 허리를 뒤로 젖혀 공격을 피하고는 한번 뒷구르기를 했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린신이 달려들었고, 소경염은 힘겹게 린신의 다음 공격을 막아냈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도포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멀찍이서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며 임수는 참외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달고 시원할 것이 분명한 과육이 입안에서 사각거리며 부서졌지만 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경염의 검법은 거침이 없고 묵직했다. 반대로 린신의 움직임은 화려하여 두 사람이 한데 얽혀 대련을 하면 꽤나 보는 재미가 있었다. 지나가던 적염군 장교 몇이 멀찍이서 두 사람의 대련을 구경하기까지 했다. 경염의 검을 피하며 린신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바람에 흔들렸다. 순간 집중하여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의기양양한 얼굴로 손을 뻗는 린신의 얼굴을 임수는 하나 하나 놓치지 않았다. 겨우 한 살 연상이면서 임수와 경염을 어린애처럼 대하던 예전의 린신과는 달랐다. 쓰린 슬픔이 가슴팍을 짓눌렀다.

계속해서 이어지던 대련의 승자가 결정됐다. 린신이 검을 갈무리하고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소경염에게 손을 내밀었다. 경염이 그의 손을 붙잡자 린신이 단번에 힘을 주어 그를 일으킨다. 소경염은 일어난 후에도 몇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린신이 거추장스런 머리카락을 손으로 그러쥐며 물었다.

"뭐가 그리 이상해서 그러나?"

처음엔 황자란 신분을 밝히자 처음 만난 사람처럼 정중하게 굴던 린신은, 소경염이 '예전처럼' 편히 대하라 허락하자 곧바로 말을 놓았다. 경염은 별로 놀라워하거나 다시 임가 저택으로 돌아온 린신을 어색해하지도 않았다. 임가 저택에 놀러올때 자연스럽게 린신을 불러, 같이 간식을 먹거나 대련을 하거나 했다. 기억이 없는 당사자인 린신보다도 이 젊은 군왕이 더 적응력이 빠른 듯 보였다.

"예전보다 많이 둔해진 것 같네."
".....놀리는 거 아니고?"
"그래 1년 전 대련했을 때는 날 더 빨리 이겼거든. 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기 보단, 자네가 감이 떨어진 것 같은데."
"......"
"아무래도 우리랑 떨어져 지내 그런 모양이지. 좀 더 수련하면 예전 수준으로 돌아올 걸세."

경염이 린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맑게 웃었다. 린신은 이 황자가 욕을 하는 것인지 덕담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편히 대하라 하지만 상대는 황자이니 한대 때려줄 수 없다는 게 아쉽다. 또한 그와는 변개로 경염의 말이 사실이라면, 린신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하다. 현재 자신의 실력은 기억을 잃기 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1년 전, 그러니까 2년 동안 금릉에 있던 린신의 무공 실력은 현재보다 훨씬 상향하였다는 뜻이다. 기억만 잃은 줄 알았더니, 강호에서도 따라갈 자가 드물다 자신했던 무공까지 퇴보하였다니 이리 손해일 수가. 그 2년간 자신은 무엇을 했길래 실력이 는 것일까. 정말 임수와 소경염과 함께 있었기 때문일까?

린신이 입술을 툭 내민채 뭐라무라 중얼거리자 임수는 남은 참외를 한번에 입안에 밀어넣고는 계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날렵하게 착지한 그가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러자 린신이 거짓말처럼 입을 다문다. 임수는 방금 전 땀을 빼서 건강하게 혈색이 오른 린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임수의 방에서 한번 신경전을 벌인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가끔 소경염이 놀러와 두 사람을 부를 때에야 함께 어울릴 뿐이었다. 임수는 린신에게 거리를 두었고, 린신 역시 그와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외동아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상대와 금릉으로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울적해하자, 임섭 장군과 진양 장공주 역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기억을 잃었다 하여도, 두 사람은 본디 안면이 있었고 임수야 워낙 밝고 활달한 아이이니 금방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관여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으나 임수가 점점 더 침울해하자 걱정이 더욱 커졌다.

경염 역시 임수가 점점 침울해하자 짬이 날 때마다 임씨 가문을 방문했다. 따스한 햇빛같은 친우의 보살핌과 배려에도 임수는 그저 피식 웃고는 경염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애써 평소와 다를 바 없다는 양 연기를 했다. 오늘 역시 임수를 보러 온 것이었지만 다른 목적도 있었다.

"위쟁은 요새 바쁘겠어."
"위쟁이 준비할게 뭐 있어. 어머니가 바빠지셨지."

임수는 진양 장공주가 머무는 안채 쪽을 눈짓하며 말했다. 위쟁과 운표료의 혼례날이 정해졌고, 혼인단자를 교환하고 심양과 금릉 사이에 예물을 가득 진 수레와 마차가 오고갔다. 위쟁은 조실부모하여 진양 장공주가 혼례 대소사 대부분을 책임지고 맡았다. 위쟁은 임수의 부관이었기에 장공주는 더욱 세심하게 신경을 썼고, 위쟁과 오래도록 알아온 경염과 경염의 부관인 열전영은 위쟁에게 선물을 건내주러 임씨 가문을 방문했다.

새신랑이 될 예정인데다 랑야방 미인방 1위인 낭자와 혼인한 천하의 행운아가 되어 적염군 전체의 부러움을 삼과 동시에 잦은 놀림의 대상이 된 위쟁은 현재 열전영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고, 경염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는 시종이 건내주는 잔을 건내받아 찬 물을 들이켰다.

"신이, 자네도 내년 봄까진 여기 있겠군. 혼례가 사월이니.."

경염이 부드럽게 웃어보였지만 린신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 답을 하진 않았다. 임수의 시선이 다시금 린신에게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 날 밤, 머물고 있는 별채 응접실에 홀로 앉아 서신을 쓰던 린신은 별채 문 근처에 인기척을 느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늦은 시간이라 그를 찾는 이가 있을리 없었다. 두어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누구요?' 하고 묻자, 곧바로 대답하는 목소리는 의외의 것이라, 잠시 망설였지만 곧 문을 열어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잠자리에 들려던 참인지 임수는 평소보다 편안한 복색이었고 동곳도 관도 착용하지 않아 긴 머리카락을 끈으로 질끈 묶어올린 채였다. 평소보다 어리고 부드러운 인상의 임수는 린신이 손짓하는 대로 방석에 앉았다. 똑바로 허리를 세우고 앉은 그는 린신이 차를 내어주자 한동안 차향을 음미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결국 린신이 먼저 질문을 던져야 했다.

"무슨 일인가? 안색을 보니 의원이 필요한 일은 아닌 듯 하고."

임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단호한 입매가 깊이 패이고, 잠시 망설이던 그는 시선을 위로 두어 린신을 똑바로 응시했다. 유달리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천하의 랑야각 소각주도 잠시 기가 죽을 정도였다. 임수는 주도권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완벽히 잡은 상황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사과하러 왔어."
"사과라니?"

임수의 방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자세한 영문을 알 길이 없어 린신은 눈쌀을 찌푸렸다. 임수는 그저 잔잔한 눈빛으로 린신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저돌적이고 혈기왕성한 소년 장수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린신은 임수가 뛰어난 장수이자 양나라 최고의 학자인 여숭 선생의 수제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임수는 누구보다 호전적으로 행동할 때도 있었지만, 유학을 토론하고 정치와 왕도를 논할 적에는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해박하며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독선을 부리기 보다는 표용력이 깊다는 평을 들었다. 그것이 린신이 기억을 찾겠다며 랑야산을 나와 강호를 떠도는 사이 노각주가 임수를 공자방에 올린 가장 큰 이유였다.

"그동안, 자네가 떠난 이후 난 참 많이 힘들었어.."

쓰게 웃으며 동시에 한숨을 흘려보냈다. 그 깊은 고통과 외로움, 애잔한 상사병의 흔적을 젊은 의원은 빠르게 읽어냈다. 그로선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을, 임수는 당연하다는 듯 품고 있었다. 린신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운표료의 순정처럼.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표출하기도 전 임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편치 못하다면 자네 마음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는데, 내 생각이 짧았어. 기억을 되찾으라고 자넬 윽박지르기만 했지, 사실 그것을 결정할 권한은 오로지 자네한테만 있는데 말야. 자네가 저번에 내게 화를 낸 것도 이해하네. 자네에게 사과하겠어.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네."

이리 담백하게 제 속내를 고백하며 사과를 해 올 줄은 몰랐다. 사실 임수가 그 일을 다시 입에 담아 린신을 비난하거나 몰아붙인다면 린신은 독사처럼 혀를 낼름거리며 받아칠 용의가 충분했다. 그러나 린신보다 한 살 어린 이 청년은 제 잘못을 사과했다. 강호의 호탕하고 가식 없는 대협들에게서도 쉽사리 보기 어려운 태도에 린신은 괜시리 부끄러워져 귓바퀴를 긁적였다. 임수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 말이 맞아. 나와 함께 지낸 시절의 자네와 지금의 자네는 다른 사람일 수 밖에 없지. 그래서 그동안 마음 정리를 한 것도 맞고, 자네에게 가진 미련이 어리석은 것일 수 있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자네에게 정이 떨어진건 아니야."
"..허참.."
"그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임수의 흔들림 없는 시선은 린신을 세게 옥좨였다. 린신은 입안이 팽팽하게 당기는 듯한 착각이 들어 절로 힘이 들어가는 턱에 힘을 풀었다. 저 시선을 느낄 때마다 불쾌하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묘해졌다. 저리 노골적인 시선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러니 위쟁과 운낭자의 혼례까지라도..이 곳에 머물러주면 좋겠네. 운낭자는 자네 친우인데, 나로 인해 친우의 혼례를 보지 못하면 아쉽지 않겠어? 자네에게 그런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

경염의 질문에 얼버무린 건 사실이지만, 임수가 거기까지 기억하고 배려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온갖 예상이 뒤엎어지고 홀라당 알몸뚱이로 남은 듯한 기분에 린신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마른 목을 차로 축였다.

"폐라니, 그리고 자네가 뭐 허락한다면야..여기서 료아가 혼인할때까진.."

능글능글 혀에 기름칠을 했냐며 랑야각의 노각주도 기가 막혀하던 린신의 입이 이번엔 고장이 났는지 영 시원칠 못했다. 그제야 임수가 조금 안심이 됐는지 시원스럽게 웃어 보인다. 심양의 장터에서 그를 만났을 때도, 웃는 얼굴이 참 근사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역시나 린신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너보다 어리고, 천방지축으로 보여도 도량과 베포는 너보다 배는 뛰어나느니라.'

얄밉게 말하며 어린 임수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얼굴이 오늘따라 선명했다. 하여튼 그런 말만 떠오를 건 또 뭐야, 린신은 투덜거리며 임수의 빈 찻잔에 다시 차를 따라 주었다.



검은 검으로, 계책은 계책으로. 얼척없는 답을 구하는 자는 그만큼의 은자를 요구하여 입을 틀어막았고, 하룻밤의 불장난 이상을 원한다면 조금의 희망도 얻지 못하도록 옷자락을 물리고 돌아서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저리 당당하고 곧게, 망설임없이 제 속내를 보이고 다가온다면? 랑야각 소각주도 도통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날 이후 임수는 다시 린신을 찾기 시작했다. 적염군 훈련과 더불어 여숭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빴지만 짬이 날때마다 린신이 머무는 별채에서 함께 차를 마시거나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정도로는 발전했다. 임수가 한번 그리 나오자 린신 역시 그를 매몰차게 거절하기 어려워졌다. 린신이 그를 조롱한 것은 기억을 잃은 린신을 대하듯 현재의 린신을 여인 대하듯 하는 임수의 태도를 겨냥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리 평범한 지기처럼 구는 임수를 거절할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 임수와의 시간이 점점 덜 불편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한 몫 했다.

물론 모든 것이 명쾌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임수는 린신을 만지거나 입을 맞추려 들지 않았으나 애매하게 정체되어 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입 밖에 내어 정의내리려 하지 않았다. 친우도라기에도 과거의 연인이라기에도 애매한 사이. 린신은 임수마저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쉬이 접근하기 어려워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러기는 린신도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은 모두 현재의 위치에 머물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했다.

'저 녀석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2년 동안 사라진 기억을 찾지 않기로 결정했으면서도 이따금씩 그런 궁금증이 샘솟았다.

'정말 내 취향이 아닌데.'

선이 곱고 자세가 반듯하며 웃을 때는 단정하면서도 화사하여야 하고 고결함과 애수가 어우러진 그런 미인이 취향인데. 옥처럼 고운 얼굴, 매화처럼 고운 향과 자태를 뽐내는 그런 수려한 미인.

하지만 임수는 그 미인상에 비하면 참으로 건강하고 활기가 넘쳤다. 린신의 섬세한 미인도보단 청동상으로 그 기백을 담아내야 마땅할 듯한 인물이다. 커다란 활을 들고 연무장에서 시범을 보일 때나, 훈련을 지도할 때에 우렁차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 녀석은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린신은 제 외모와 능력에 매우 만족했고, 긍지도 높았으나 임수와 자신이 정 반대 성향이란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린시절 만났을때도 서로 데면데면하지 않았던가.

임수는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자주 향을 맡으려 들었었다. 내 향 때문인가. 린신은 두 팔을 들어 번갈아 코를 문댔다. 킁킁, 소리를 내어 향을 맡아 보았다. 아직은 제 향보단 약초 냄새가 더 강하게 났다. 린신은 제 향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자부심을 느낄 만큼 좋아하지도 않았다. 강호인이야 향을 숨기는 법이 없어 린신 역시 한번도 제 향을 숨기려 든 적이 없었지만 가끔 호승심 높은 자들이 랑야각의 소각주를 도발할 때 사내답지 못한 향이라 시비를 건 적이 여러번 있었다.

'아이같은 향이라 좋아하는건가. 그럼 임공자 취향이 진짜 이상한데..'

린신이 임수의 취향을 의심하게 된 일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임수는 좀 더 노골적으로 화해하고 싶었던 듯 린신을 먼저 제 방에 초대했다. 두 사람이 한바탕 신경전을 벌였던 방은, 이전에 몰래 들어갔을 때에 비하면 한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책상에 놓여져 있던 불경은 치워졌고 산더미같이 쌓여있던 책들도 정리되었다.

임수가 준비된 다과가 담긴 접시를 밀어주고 차를 따라주는 사이 린신은 가만히 시선을 두는 척 하며 몰래 방 안을 훔쳐보았다. 서랍장에 있던 미인도 역시 보이지 않았다. 린신은 미인도의 얼굴 부분을 보지 못한 것이 새삼 아쉬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임수의 잠옷이 반듯하게 개어져 놓여있는 함에 분홍색 비단으로 감싼 향낭이 눈에 띄었다. 복숭아 무늬가 수놓아진 향낭이었다. 린신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향낭을 쥐었다.

어..임수가 보기 드물게 당황했지만, 린신은 그런 임수를 바라보는 대신 향낭에 얼굴을 가까이 하여 향을 맡았다. 역시 복숭아향이었다. 큼, 크흠..임수가 헛기침을 하며 린신에게 손을 내밀었고 린신은 향낭을 그에게 건내주었다.

"잘 만든 향낭이네, 역시 임가 사람들은 솜씨도 좋은가보이."

약초와 복숭아꽃 말린 것을 잘 배합하여 만든 수면향이니 린신의 말이 틀리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더 어색해진 것 같아 린신은 속으로 제게 욕을 퍼부었다. 임수는 조금 민망해하는 린신의 태도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는 기본적으로 능글맞고 뻔뻔한 면이 있어, 임수가 몸으로 달려들었을때는 당황하거나 화를 내곤 했지만 기본적으론 속에 구렁이를 10마리는 삼킨듯 굴었기 때문이다. 보기 드문 반응에 임수의 입 역시 평소와는 다른 낯 간지러운 말을 내보냈다.

"자네 향보단 못하지."

린신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그 나이대보단 조금 어려보이기도 했다. 임수는 괜시리 귓불이 붉어져 향낭을 등 뒤로 숨겼다. 린신은 잠시 입을 벌리며 무엇인가를 발음하려 하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차를 마시는 자태가 평소보단 소심하고 수줍은 듯 하여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2부 8







날씨는 점점 추워졌고 적염군의 군사훈련은 날이 궂어도 날씨가 추워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린신은 피풍의 하나 제대로 걸치지 않고 훌쩍 나갔다 별채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강인한 임가 사람들마저도 혀를 내둘렀다. 열혈남아라 불리는 임수만이 얇은 옷 하나 걸치고 추위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린신과 어울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겉옷 하나만 걸친 채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정원을 거닐거나 술 한잔씩을 나누며 마루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임가 사람들은 가주를 닮아 무척 강건하여 병을 앓는 사람은 드물었고 가끔 훈련중에 다치거나 출병에서 돌아온 후 부상을 채 치료하지 못한 이들이 전부였다. 린신은 그들이 눈에 띌 때마다 손목을 잡아 끌어 별채로 데려가거나 근처 아무곳에나 앉혀놓고 치료해주었다. 군의보다 실력이 월등히 좋은 린신에게 임섭 장군은 매우 고마워했다.

능글맞으면서도 묘하게 사람에게 벽을 치는 구석이 있는 린신은 의원으로서 행동할 때만은 무척이나 사려깊고 다정했다. 물론 마냥 살갑게 구는 것은 아니었다.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환자의 상태를 살폈고 처방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그의 아버지 뻘인 장교 앞에서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반대로 챙겨주는 약을 잘 먹으면 칭찬을 더러 하기도 했다. 린신이 한 사병의 팔에 감겨있던 붕대를 벗기고 거의 아물어가는 상처에 고약을 발라주며 웃었다. 긴 눈꼬리가 살풋 접히며 그림같이 근사한 미소가 스쳐갔다.

한참 멀찍이서 린신을 지켜보던 임수는 조용히 다가가 린신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뜨거워 델 듯한 거친 손이 어깨를 부드럽게 누르고 쓸어내리자 린신은 살짝 어깨를 움츠려 임수의 손을 떨꿔냈다. 거침없고 당당한 금릉의 공자는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린신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좁히곤 했다. 린신이 임수의 방에서 복숭아향 향낭을 발견한 이후 임수는 조금씩 더 린신과의 관계에 진전을 꾀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린신은 그가 당길때마다 그에 맞춰 밀어내기 일쑤였다.
일반적으로 강호의 사람은 감정을 드러낼 때 직설적인 고백이나 표현을 즐겨 했고 반대로 금릉의 우아하면서도 부자연스런 분위기는 절제된 감정의 표현 혹은 암묵적인 절차와 에둘러 비유함으로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의 배경과는 정 반대되는 반응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병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인사를 하고 물러난 후, 임수가 '신아.' 하고 린신의 이름을 불렀다. 린신은 임수가 그리 자신을 부를 때마다 꽤나 낯간지러워 귓바퀴가 간질거렸다.

"임공자."

여전히 임수는 린신이 그를 임공자라 칭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린신은 임수가 오만상을 찌푸려도 꿋꿋하게 그를 임공자라 불렀다.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린신은 조금 의아한 듯 임수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어디 아픈가? 하고 묻는 얼굴은 왠지 모르게 맑고 어려보여 임수는 살짝 메마른 아랫입술을 축였다. 약한 감기 기운이 든 것마냥 몸에 미열이 났고 머리는 조금 몽롱했다.

"갑자기 주기가 앞당겨져서..주기에 먹을 약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음의원님은 바빠 보여서 말야, 임수가 재빨리 덧붙였다. 린신은 임수의 말을 납득했는지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알았으니, 기다려. 내 약을 달여서 자네 방에 가져다주겠네."
"고맙네."

임수는 다시 한번 린신의 어깨를 토닥이곤 돌아섰다. 린신은 델듯이 뜨거운 체온의 여운이 남은 어깨를 쓸며 뭐라뭐라 투덜거렸다. 어쩐지 체온이 높더라니.



임수의 주기는 일년에 한번, 봄에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번엔 갑작스레 초겨울에 찾아와 그를 당혹스럽게 했다. 대부분 양인과 음인의 희락기는 일년에 한번 미열을 동반하며 평소보다 조금 강한 성욕을 느끼게 되는 정도로, 계절 감기처럼 찾아왔다 며칠 정도 자연스레 해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도 약으로서 달아오르는 몸을 다스릴 수 있어서, 임수는 매년 약으로서 주기를 해결해 왔다.

임수에게 말했던대로 린신은 약을 달여 임수의 방을 찾았다. 약을 요청한 것은 임수 자신인데도, 막상 린신이 들어오자 영 마뜩찮은 표정이다. 화살에 관통당하고 칼을 맞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대장부도 약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양인으로 발현한 후 거의 매년마다 챙겨먹는 약이었지만 먹을 때마다 맛이 영 좋질 못해 임수는 약그릇에 가득 담긴 짙은 갈색 액체를 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어허, 린신이 팔짱을 낀채 엄하게 부르자 임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망설인 주제에 임수가 결심을 한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곤 약을 한번에 들이켰다. 낄낄거리며 그가 약을 전부 마실때까지 지켜보던 린신은 임수가 빈 그릇을 내려놓자 자연스럽게 임수의 손목을 붙잡고 진맥을 했다. 잠시 눈을 감고 맥을 짚으며 상태를 살피다, 눈을 뜨고는 임수를 바라본다. 평범한 의원의 시선에도 주기에 들어서인지 왠지 모르게 뒷목에 열이 올랐다.

"..작년에 출정 나가서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했었지?"
"음. 무슨 문제라도 있는건가?"
"부상은 완벽하게 회복됐지만, 내상이 있었던지라 아무래도 주기가 빨라진 것 같아. 그리고..약이 크게 효과가 없을지도 모르네. 아, 이건 내 자존심이 상할 문제인데."

투덜대는 얼굴이 우스워 임수는 대놓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린신이 샐쭉하게 임수를 흘겨보고는 손목을 놓아주었다.

"크게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해. 주기 때는 면역력이 떨어져서 자네같은 강골이라도 주기가 끝나자마자 거하게 고뿔을 앓을수도 있거든.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너무 과하게 훈련하지 말고. 약으로 주기를 다스려도 희락기의 양인이 돌아다니면 양인들이 본능적으로 거슬려하는건 자네도 알지?"
"당연히 알지."

임수는 눈쌀을 찌푸렸다. 양인도 음인도 희락기때는 가급적이면 바깥 출입을 자제하고 몸 상태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임수는 약으로 제 주기를 다스렸지만, 린신은 2년간 한번도 희락기때 약을 먹지 않은 듯 했다. 평소에도 제 향을 조금도 숨기지 않던 그는, 희락기인 것으로 짐작되는 며칠간 유달리 진한 복숭아향을 폴폴 풍기며 평소처럼 돌아다녔고 그를 거슬려하는 음인들의 시선과 양인들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었다.

'그러면서 나한텐 신신당부를 하고 본인은 나가 놀기나 하고..'

당시에도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어차피 며칠간 바깥 출입은 안할테니, 며칠간만 향을 조금만 풀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아. 주기를 보내는데 도움이 될 걸세."

몇년 전에도 린신은 임수에게 그리 충고했었다. 임수처럼 신체 건강한 소년은 제 향을 숨기는 것에야 별 어려움도 느끼지 못하고 실제 그의 몸에 아무 지장도 없었지만 주기일때 만큼은 제 향을 자연스레 풀어놓는 것이 몸엔 좋을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주 어릴때부터 제 향을 철저하게 숨겼던 임수는 이제와서 제 향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기에 린신의 조언은 따르지 않았었다.

"그러고보니 자네 양인이지? 자네 향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린신은 피식 웃으며 빈 약 그릇을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임수는 가만히 그런 린신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린신은 향을 풀어놓으라 충고는 했지만, 임수가 거절하자 두번 그 얘길 언급하지 않았고 임수의 향 역시 궁금해하지 않았다. 임수가 그의 향을 풀어냈을 때에도, 린신은 울면서 제 품에 안겼을지언정..

"궁금해?"

수년간의 절제는 다시 한 사람만을 예외로 두어 그 잠금새를 풀기 시작했다.

"..안 궁금하다면 거짓말이고."

임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고, 린신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임수는 잠시동안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린신을 바라보다 조금씩 제 향을 풀기 시작했다. 린신은 탕약의 희미한 쓴내와 섞인 달큰한 향을 몰아내는 아련하고 고아한 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임수는 그 소년같은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린신은 한참 집중하여 임수의 향을 맡았다. 감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긁어모은다는 랑야각의 소각주다운 기색도 엿보이고, 호기심 많은 청년다운 서투른 모습도 섞여있다. 그리고 린신은 눈치채지 못한 듯 하지만, 임수의 향에 반응하여 린신의 복숭아향이 좀 더 짙어지는 것만 같았다. 주기에 다다른데다 오랜만에 향을 풀고 있는 임수에게, 일상이다시피한 달달한 복숭아향은 자연스레 자극제로 바뀌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린신은 몽롱해진 얼굴로 중얼거린다.

"흰 옷의 장수라서 매화향인가.."

절개 높은 선비를 상징하는 매화라지만, 무척 어울리는구나.

강호의 어떤 인재도 저런 향을 갖고 있진 않았다. 린신은 절로 감탄하여 임수의 향을 들이마시듯 느끼며 속삭였다. 랑야각 린신의 처소 근처 정원에도 아름다운 매화 정원이 있다. 린신은 본디 홍매화를 사랑했다.쌓여있던 눈이 점차 녹기 시작하고, 겨울동안 찬 바람과 눈 속에서도 꿋꿋하게 절개를 품고 살아남은 가지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흰 눈과 어우러진 홍매화의 붉은 꽃잎과 향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그러나 화사한 홍매화보다 수수하면서도 우아한 백매화 역시..

한참 그 향을 느끼며 자연스레 평을 읊던 린신은 가까워진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임수가 어느새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주기 탓에 평소보다 체온이 좀 더 높은 손이 린신의 뺨을,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임수의 눈동자에 투명하게 담긴 제 얼굴에 낯설었다. 열기오른 그 눈이 가늘어지며 점점 더 가까워져 왔다. 서로의 속눈썹이 스칠만큼 근접했을 때, 임수는 살짝 고개를 비껴 린신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세번째 입맞춤, 뜨거운 입술이 도장을 찍듯 린신의 입술을 눌렀다. 향긋한 매화향이 훅 끼쳐와 린신은 순간 아찔하여 자기도 모르게 임수의 팔을 붙잡았다. 으음..린신의 입술 사이로 달게 흘러나온 신음을 듣자 순간 열이 훅 끼쳐왔다. 임수는 참지 못하고 와락 린신의 허리를 안았다. 맞닿은 가슴 사이로 서로의 심장박동이 선명히 들렸다.

살짝 입술을 뗀 후, 임수는 달아오른 린신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신아.."

그리고 린신은 임수가 부르는 제 이름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신아?"

이 상황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는 양 자신을 끌어안고 다루는 임수의 반응을 확인한 순간 린신의 얼굴은 격렬한 분노와 굴욕감으로 얼룩져 일그러졌다. 임수가 놀라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것이 신호인것마냥 린신은 온 힘을 다해 임수의 가슴을 떠밀었다. 평소였다면 자연스레 그를 제압하거나 막아냈겠지만, 긴장을 풀고 있던 임수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몸을 물렸다. 린신이 벌떡 일어나 임수를 지나 방을 뛰쳐나갔다.

신아! 임수가 재빨리 일어나 린신을 쫒았지만, 효기 장군마저도 작정하고 도망가는 강호인을 붙잡긴 힘들었다. 린신의 푸른 옷자락이 찬 바람을 맞아 요란하게 휘날렸다.
 



린신은 다음날 새벽에 임가 저택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머무는 별채가 아닌 임가에서 모셔온 음의원의 방에 머물렀다. 별채로 돌아온 후에도 린신은 임수를 만나길 거부했다. 몇개월간 꾸준히 줄여온 거리가 다시 한번에 원 상태로 돌아왔고, 운표료가 그녀의 양친과 금릉에 당도한 그 날까지도 임수는 린신과 말 한마디 제대로 섞지 못했다.





@eiosoluno1

힘껏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