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L소설
* 일드 <옷상즈러브/아재s러브> 마키하루 커플링
* 마키하루 합작에 참여한 글입니다 https://sm8130.wixsite.com/mkhrhoneymo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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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하루) So sweet




 깨끗하게 닦인 창 안으로 볕이 새어 들어 따뜻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지금은 타는 듯 뜨거운 정오를 간신히 넘기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오후. 부드럽게 스치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루타가 부채질을 멈추고 마키를 향해 손짓했다. 여름을 알리는 그 정다운 소리가 듣기 좋았던지, 마키를 바라보는 하루타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마키, 봐. 바람 분다.”

 딸랑, 딸랑.
기분이 상쾌해지는 맑은 유리 풍경 소리에 마키 역시 빙긋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에도 청소를 게을리 하지 않는 그의 손에는 분홍색 창문닦이 수건이 들려 있었다.

 “네, 소리 좋네요.”

 며칠 전 함께 장보고 돌아오는 길에 구입했던 풍경이었다. 가게도 아닌, 길 한 쪽 비스듬히 세워둔 가판 위에 주르르 놓여있는 아기자기한 풍경들을 발견한 하루타는
‘여름이야, 여름. 마키, 우리도 여름 기분 좀 내야지.’
 라며 신이 나 소리쳤다. 마키에게 한참을 매달려 구입을 종용한 그는 결국 원하는 녀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타네 집에 오게 된, 어수룩한 고양이 그림이 새겨진 작은 유리 풍경은 제 자태보다 고운 소리를 낼 줄 알았다.

 “하루타 씨 말... 듣기를 잘했네요.”
 “그렇지? 나도 가끔 맞는 말 한다구.”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흔드는 하루타의 목 언저리에서 땀방울이 데구르르 흘러내렸다. 평소에도 몸이 촉촉한 편인 하루타는 땀이 제법 잘 나는 타입이었다. 연신 부채질을 하는데도 미처 마르지 못한 땀이 쇄골을 타고 티셔츠 안쪽으로 흐르며 자취를 감췄다.
어찌 보면 더운 여름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마키는 하루타의 물기어린 목덜미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고작 흐르는 땀방울에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심각한 건가. 아냐, 저 사람이 내 연인이니 당연한 거지? 이상한 게 아니라고.’
 입을 내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마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팔을 감싸며 스스로를 도닥였다. 마키의 필사적인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루타는 이제 손가락으로 티셔츠의 목 부분을 펄럭이며 더위를 쫒아내려 하고 있었다. 마키의 시선 안으로 균형 잡힌 근육이 예쁘게 자리한 하루타의 가슴이 슬쩍슬쩍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젓던 마키는 문득 ‘유난히 더위 타는 하루타 씨’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는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하루타 씨, 우리 가는 곳은 더 더울 텐데 괜찮겠어요?”
 

 
____
 
 마키와 하루타는 적어도, 회사 내에서는 공인된 연인 사이였다.
전부터 함께 살아오긴 했지만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삶이 그들 앞에 펼쳐질 것이었다. 다르지 않은 듯 다른 내일, 언젠가 큰 울림으로 다가올 우리의 작은 변화.
 연미복 차림으로 한바탕 난리를 치룬 그 날, 둘은 사이좋게 입을 맞춘 뒤 기분 좋은 떨림을 서로에게 전하듯 손을 꼭 맞잡았다.
두 사람의 결합을 축하하며 소중한 사람들과 즐거운 한 잔을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둘은 따로 식을 올리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마키는 작게 웃으며
'저는 부장님처럼 화려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라고 미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을 가만히 듣던 하루타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식은 바라지 않는다고 답했다. 마키는 놀랐다. 제 앞에 있는 하루타의 표정은 아리송하기만 했다. 무슨 뜻일까. 그는 단 몇 초 만에 불안해졌다.
 우유부단한 하루타가 분위기에 휩쓸려 부장님과 식장까지 가게 된 정황은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서, 착해 빠진 사람이라서 좋아진 것이니까. 그러나 그동안 부장님께 받아온 게 있으니 하루타의 눈이 높아진 건 아닐까 내심 걱정했던 마키였다.
 나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어떡하지.
 나 때문에 하루타 씨의 행복이 먼 곳으로 달아나 버리면 어떡하지.
예상은 했지만 단칼에 예식을 거절 당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자존심에 타격이 심했다. 마키는 엉망진창으로 구겨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붙들어 잡고 어물어물 말을 이었다.
 
 “아... 저 그렇다곤 해도. 하루타 씨가 원한다면 웬만큼 구색 갖춘 식 정도는...”

 마키의 한 톤 낮아진 대답에 까맣고 맑은 눈을 깜빡이며 상대를 바라보던 하루타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마키... 혼자 불행 회로 돌리는 그 버릇 정말 고쳐야겠다. 그게 아니야. 식은 정말 필요 없다구. 네가 원한다면 모르겠지만.”
 “... 저랑 식 올리고 싶지 않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마키랑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단 거야. 그런 난리 법석은 부장님과 한 것만으로 충분했어.”
“....”
 
 마키가 여전히 묵묵부답이자 하루타는 숱 많은 검은 머리칼을 벅벅 긁적이더니, 미간에 살짝 힘까지 주며 열심히 대답을 이어갔다.
 
 “머리도 똑똑한 애가 가끔 왜 이러는지... 그날 말했잖아, 너랑 함께한다면 나는 분명 행복할 거라고. 나는 이미 인생 최고의 선물을 받은 거야, 마키. ”
 “아...”

 그는 어리숙하지만 항상 좋은 답을 찾아내곤 했다.
서투르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진심이 있어. 그래서 사람들은 하루타 씨를 좋아한다.
그리고 저 역시 이런 점 때문에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키를 바라보는 하루타의 눈은 곧고 진솔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따뜻한 마음이 곧바로 상대에게 전해진다.
 마키는 그제서야 미소를 되찾고는 어물어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도 하루타 씨만 있으면...”
 “음, 그래도 여행은 가자! 기분은 내야지. 마키랑 나랑 단둘이. 아! 신! 혼! 여! 행!”

 감상에 젖은 마키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제 하고픈 말만 소리치는 하루타였다.
마주 보는 사람을 녹일 듯 진지했던 눈빛은 어디로 가고, 어느새 온 몸을 흔들며 넘치는 흥을 표현하고 있었다. 덕분에 소파에 얹혀있던 쿠션들이 모두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대체 신혼여행을 뭘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마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____

 “원래 신혼여행은 더운 데로 가는 거 아닌가? 아니야, 마키?”

 언제나와 같이 똑 떨어지지 못하고 어설픈 하루타의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마키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신혼여행이라니,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단어였다. 남자를 좋아하는 저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평범하고 평범하기만 한 날들, 일에 파묻혀 애써 걷던 지겨운 날들의 연속이었는데. 어느덧 그런 삶 속에 단비처럼 내려온 한 사람이 있었다.
 ‘사람을 정말 이렇게 사랑해도 되는 걸까?’
 스스로 끝없이 되물을 만큼, 제 행복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그리고 이젠 그 사람과 단둘이 여행을 간다.
마키의 인생을 통틀어 상상조차 못했던 엄청난 일이었다. 삶을 의미 있도록 만들어준 사람, 마키에게 하루타는 그런 존재였다.
 
 어쩌면 부장님의 결혼식 소동 덕분에 이런 행복을 떠안게 된 것 같기도 했다.
지난 일 년 동안 하루타가 부장님과 함께 생활했다는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이른바 나비효과라는 것이 아닌가. 마키는 그저 감사하기로 했다.
떠밀어주듯 불어온 따뜻한 미풍에 어렵사리 껍질을 깨고 나온, 서툰 둘이었다.
보통의 상식 안에 살던 하루타가 마키라는 동성의 반려를 만나 함께 사는 것을 결심하고, 나아가 ‘신혼여행’까지 스스럼없이 요구하게 된 것은 마키의 눈엔 기적과도 같아 보였다.
 ‘이 이상의 욕심은 곤란해. 아직 곤란하다고, 마키 료타.’
 그는 머리를 스치는 수많은 생각들을 삼키듯 목을 가다듬고는 질문에 대답했다.

 “신혼여행이라면 가고 싶은 데 가는 거죠. 어디서 배운 거예요, 그 엉터리 상식은?”

 쿡쿡거리며 하루타에게 핀잔을 주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마키에겐 깨질까 두려울 만큼 소중한 시간이었다.
마키가 저를 놀리며 작게 웃을 때마다 하루타는 발간 볼을 부비며 안겨오곤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마키는 그 일련의 일들이 무척 기뻤다.
사랑스러운 사람,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제 연인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지도를 보고 결정한 더운 나라, 하지만 우리 둘이 함께라면 그 어디라도 좋을 거야.
 
 신혼여행을 결심한 다음날 두 사람은 사이좋게 며칠간의 휴가를 냈다.
약속의 날은 한 주 뒤였기에, 그 날이 올 때까지 둘은 퇴근만 하면 머리를 맞대고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투두리스트를 작성하고, 맛집을 검색하고, 분위기 좋은 관광명소를 찾고, 멋진 호텔을 예약했다.
마지막으로 캐리어에 옷가지와 물건들도 빠짐없이 담았다. 물론 마무리는 마키가 해야만 했다. ‘정리’라든가 ‘청소’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하루타 덕에 두 배로 피곤하긴 했지만, 싫은 내색을 할 생각조차 못할 만큼 행복했다.
 

 
____

  마침내 신혼여행의 막이 올랐다.
시간이 아깝다며 밤 비행기를 탄 두 사람은 비행기 밖의 아른아른 반짝이는 별들을 구경하며 조잘거렸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두 사람이 함께 떠나는 첫 여행이었다.
하루타는 마키의 손을 덥썩 잡아 나름의 애정을 표현했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약간 높은 체온이 여행으로 인한 들뜸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키는 그런 하루타가 귀여워서 동그란 이마에 쪽 하고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어주었다.
 그러나 피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창밖의 별들이 깜빡이며 꿈결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시야가 천천히 흐려졌고, 둘은 얼굴을 맞댄 채 잠에 빠져들었다. 서로의 머리칼이 부드럽게 이마를 간질였다. 기내는 고요했다.
 묵직하게 찾아드는 수마에 서서히 눈을 감던 마키는 생각했다.
서로를 기대어 가는 이 길, 앞으로 함께 걷게 될 멀고 먼 길 또한 이와 같기를.
 
 
 
____

 기체가 흔들리는 느낌에 서서히 눈을 뜬 마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비행기가 도착지 공항 내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는 곤히 잠든 하루타를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하루타 씨, 도착! 일어나요.”
 “음... 음?”

 도착이란 소리에 눈이 번쩍 뜨인 하루타는 싱글벙글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두 사람 모두 머리를 맞댄 방향의 머리카락이 부스스했다. 창밖을 보던 하루타는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발견하고는 마키를 돌아봤다. 무엇이 그리 웃긴지 한참을 킥킥대던 그는 손을 뻗어 헝클어진 마키의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졌다.

 “우리 쌍둥이처럼 머리에 까치집 지었어. 나는 이쪽, 마키는 저쪽.”
 “숙소 들어가면 좀 매만져야겠어요. 명색에 우리 첫 여행인데 멋지게 하고 다녀야죠.”

 마키가 하루타의 코를 장난스레 꼬집곤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특유의 성격 탓에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 역시 단둘이 온 신혼여행이란 생각에 자꾸 웃음이 나려 했다. 하루타는 그런 마키가 귀여워 실실거리며 웃었다. 마키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하루타는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작게 속삭였다.

 “비-밀.”

 곧잘 표정을 숨기는 마키.
저 때문에 매사에 참는 것이 버릇이 된 그에게 항상 미안한 하루타였다. 그렇기에 종종 드러나는 마키의 생생한 감정과 반응들이 몹시 소중했다.
 ‘내가 좀 더 듬직하고 멋진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에 잠시 울적해진 그였다. 하지만 이내 긍정적인 마인드를 소환해냈다.
 ‘뭐, 이제부터 누구보다 멋진 남자친구, 아니다. 이제 남편인가. 아내인가? 아무튼 멋진 사람이 되어주면 되지. 마키, 나 분발할게!’
 갑자기 의욕 가득한 표정으로 콧김을 내뿜는 하루타 때문에, 마키는 저 사람이 그새 또 무슨 생각을 했기에 저러나 궁금해졌다. 그러나 새삼 묻지는 않았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 저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____

 “와우, 완전 덥네.”

 도착하자마자 후끈하게 와닿는 더운 공기에 하루타가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그들의 앞에 시원하게 놓인 바닷가 풍경과 달리 여행지의 기온은 확실히 높았다. 마키도 더운 모양인지 이마에 맺힌 땀을 천천히 손으로 닦아냈다.
 
 “저, 해외여행 처음이에요.”

 신난 표정을 감추려 무던히 애쓰던 마키가 결국 흥분된 목소리로 툭 던져 말했다.
밖에서는 강단 있네, 쿨하네, 이러니저러니 말들이 많지만, 역시 하루타가 보기엔 저보다 나이도 어리고 은근히 여린 구석이 있는 마키였다.
 ‘어른인 척하는 아이란 말이지. 귀여울 수밖에 없다구.’
 하루타는 안 그래도 크고 둥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마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폭신한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와락 껴안았다. 평소에도 마키가 솔직한 반응을 보일 때마다 저도 몰래 꼬옥 안아주던 그였다.
기척도 없이 안겨오는 하루타 때문에 마키는 놀랐지만, 이내 초승달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남은 두 팔로는 폭 안겨온 하루타를 좀 더 꽉 끌어안아 제 품 안에 가두어본다. 촉촉한 피부가 느껴졌다.
 ‘...끈적여, 하루타 씨. 그새 땀났네. 하지만 이 느낌이 좋아.’
 얼마간 포옹을 나눈 두 사람은 천천히 팔을 풀고 서로를 보며 싱긋 웃었다. 첫 여행이라는 흥분감과 함께 한다는 기쁨이 표정을 숨길 수 없을 만큼, 가슴 어딘가를 장난스럽게 간질이고 있었다.

 “나도 일 말고는 처음이야. 우리 촌놈이네. 그래도 신난다, 그치?”
 “네, 신나요. 하루타 씨가 있으니까.”
 “그래. 나도 마키랑 와서 더 신난다!”

 마키는 호들갑 떠는 하루타를 보며, 이러다간 ‘사랑스러움’이란 것에 빠져 죽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공중에서 파닥거리는 하루타의 팔을 잡아 쓱 팔짱을 끼었다.
여행이란 건 이렇게 사람을 더욱 솔직하게 만들어주는 걸까.
 하루타는 마키의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팔에 얽힌 연인의 팔을 쳐다보았다. 집 안에서라면 몰라도 밖에서 마키가 먼저 몸을 붙여오는 경우는 적었다. 아마도 저를 배려하는 터였겠지만, 마음 한 쪽이 애틋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타는 어쩐지 그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변을 쓱 한번 살펴보곤 얽혀진 팔을 들어 마키 손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었다. 제 손에 보드랍게 닿는 감촉에 마키가 쿡쿡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고, 하루타는 연신 윙크를 하며 애교 아닌 애교를 부렸다.
 이제 겨우 공항 문을 나섰을 뿐인데도 이렇게 행복하다니.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지 불안할 정도로 즐거운 시작이었다.
 
 

____

 신혼여행이라고 해도 엄청난 준비나 기대를 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별 생각 없이 정한 행선지였다. 둘만의 여행, 둘만을 위한 휴식,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말하자면 편안함이 모토인 신혼여행이었다.
준비물은 두 사람. 단 두 사람뿐인 따뜻하고 단란한 여행.

 부스스해진 머리도 손질할 겸 숙소로 들어선 둘은 후끈한 날씨에 맞게 옷을 갈아입었다.
해외여행 패션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선글라스도 끼었다.

 “우리 선글라스 낀 모습 보는 거, 처음이지?”
 “네. 하루타 씨... 웃기긴 한데 잘 어울리네요. 쓸데없이 옷걸이만 좋다니까.”
 “너도거든? 마키, 너 선글라스 끼니까 너무 잘 생겨 보여서 짜증 나려고 한다.”
 “무슨 소리예요? 전 원래 잘 생겼는데요.”

 선글라스 낀 모습에 서로에게 다시 한 번 반한 채, 장난 섞인 말다툼을 하는 두 사람이었다.
 화려한 꽃무늬 난방을 고집 부려 챙겨온 하루타는 즉석 1인 패션쇼를 시작했고, 마키는 한동안 배를 잡고 굴러야만 했다. 옷은 모두 마키가 골라준 것이라 안전했지만, 상대를 웃기기로 작정한 하루타의 이상한 표정과 몸짓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잘생긴 얼굴을 이렇게 쓰다니, 신이 보면 노할 것이라고 마키는 생각했다.
게다가 하루타가 옷 갈아입는 도중이나 가만히 있는 순간 드러나는 그 본연의 얼굴과 몸은 확실히 문제였다. 너무나도 마키의 취향이었기에, 그는 이것이 정말 재미를 위한 쇼일까 고민을 해야 했다. 웃음과 불끈거림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통 받는 그였다. 자신의 흑심이 문제인건지, 남심을 자극하는 하루타의 어벙함이 문제인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설마 하루타 씨가 노릴...리는 없지. 저 순수함에 괜히 미안해지는군.’
 침을 꿀꺽 삼키며 쓴웃음을 짓는 마키였다.

 하루타의 아수라와 같은 패션쇼 이후 둘은 호텔 바로 앞에 있는 바닷가로 걸어 나갔다.
밤 비행기를 타며 서두른 덕분에 아직도 하늘엔 태양이 한가로이 떠 있었다. 하얀 모래사장은 발이 닿는 곳마다 바삭바삭 정겨운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은 햇살을 받으며 조금 더 걷다가 알록달록한 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았다.
약간의 여독과 내리쬐는 햇볕 탓에 하루타는 잠이 솔솔 오는지, 금새 노곤한 표정으로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마키는 그런 그를 보며 싱긋 웃고는 마실 음료를 사오겠다며 저 멀리 보이는 가판대를 가리켰다.

 “고마워, 마키!”

 언제나처럼 저를 챙기기 시작한 마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하루타는 가져온 타올 두 개를 나란히 펼치곤 구운 찰떡 마냥 누워 쉬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제 앞을 스쳐지나가는 많은 관광객들의 웃통이 시원하게 벗겨져 있었다. 일대를 잠식하는 열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워낙 시원하게 입고 다녀서 그런 건지, 하루타는 어쩐지 점점 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키 말대로 덥긴 더운 걸. 그래도 신혼여행은 더운 게 어울리지. 암, 후회란 없다.”

 괜찮다며 혼자 중얼거리던 그였지만 결국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꽃무늬 난방을 벗어던졌다.
송골송골 가슴과 등에 맺혔던 땀이 바닷바람과 함께 날아가자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루타는 이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 편해진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고, 바다 풍경도 감상했다. 이따금 마키가 걸어간 방향을 눈으로 쫓기도 했다. 잔잔하게 치는 파도 소리는 자장가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하루타는 또다시 쏟아지는 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서히 눈을 감았다.
 


____

 한편 마키는 가판대에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당황하던 참이었다.
적어도 10분 이상은 뙤약볕 아래 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덧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너무도 아까운 그였지만, 더위를 타는 하루타를 생각하며 꿋꿋하게 버티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익숙한 듯 서로를 품에 안은 채 해변을 걷고 있었다.
 ‘우리도 저렇게 행복한 커플로 보일 수 있을까, 하루타 씨는 어떨까. 나는 정말 행복한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죽이던 마키는 마침내 양 손에 시원한 음료를 들 수 있었다.
빨대에는 귀여운 우산이 꽂혀 있었는데,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하루타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나는 마키였다.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두 사람의 자리로 향하던 마키의 눈에 누워있는 하루타의 모습이 들어왔다. 얹어진 선글라스 때문에 다른 사람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마키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하루타 소이치가 곤히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여행 간다고 신나서 며칠 밤을 설치더니. 결국 여기서 자는군.’
 어렵게 쟁취한 귀여운 음료수를 흘끗 바라본 마키는 살짝 김이 빠졌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죄인이지.'라며 혼잣말을 하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루타 옆에 앉아 한가로이 바닷가 풍경을 바라보던 마키는 어느 순간 신경에 거슬리는 점을 하나 발견했다. 가만 보니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 누워 자고 있는 하루타의 몸을 흘끗흘끗 쳐다보며 가는 것이었다.
 그렇다. 유난히 예쁘게 생긴 몸이긴 했다.
해외라 동양인이 드물기도 했고, 무엇보다 남자치고 너무도 매끈하고 깨끗한 살결을 가진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적당하게 잡힌 근육,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보드라운 살결, 땀이 맺혀 촉촉하게 젖은 피부...

 “...쓸데없이 몸만 좋아가지고.”

 마키는 왠지 열이 올라 제 앞에 놓인 모래를 푹푹 파기 시작했다.
남에게 보여주기 싫다. 깨워서 옷을 입히고 싶다. 그것도 안 되면 내 옷을 벗어다 위에 얹어주고 싶다. 마키는 제 머리 속을 울리는 수많은 생각에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 중 어떠한 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잠든 하루타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저의 이 못난 욕심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멈출 수 없게 돼. 이 목줄은 꼭 잡고 있어야 해. 드러내지 말자. 하루타 씨가 겁먹고 도망칠지도 몰라. 싫어할지도 몰라.’
 이미 제 손에 들어온 사람인데도 이렇게 질투가 날 수 있는 걸까.
그래도 되는 걸까.
자꾸만 커져가는 하루타를 향한 제 집착과 욕심이 싫어 마키는 살짝 우울해졌다.



____

 한참 뜨거운 볕을 쬐고 있으니 마키도 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이 거슬려진 그는 천천히 입고 있던 후드 지퍼를 내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슴 안에도 땀이 맺혀 있었다. 평소 더운 걸 잘 모르는 저인데도 이렇게 땀이 나는 걸 보면 확실히 무더운 날씨였다.
 ‘하루타 씨가 웃통만 벗은 걸 다행으로 여겼어야 했을지도.' 라며 새삼 이해심을 발휘하는 마키였다.
 후드를 벗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하루타가 천천히 눈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에...? 마키, 나 잠깐 잤나봐?”

 저도 모르게 잠들었단 사실이 놀라운지 선글라스를 벗으며 하루타가 눈을 깜빡였다.
마키는 옅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그와 동시에 시원한 음료 잔을 들어 하루타의 볼에 가져다 댔다.

 “읏, 츠거!”

 갑자기 느껴진 냉기에 하루타가 움찔하더니 강아지마냥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새카만 눈동자를 굴려 음료를 발견한 그는
 “오, 마키! 고마워. 너 밖에 없다니까.”
 능청스레 인사를 하고는, 헤헤 웃으며 두 손으로 잔을 건네받았다. 이윽고 하루타는 마키의 예상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음료 위에 둥실 떠 있는 작은 우산 모형을 가리켰다.

 “이거, 무지하게 귀엽잖아. 작다.”

 마키가 보기엔 별 것 아닌 장식용 모형을 보며 한참을 즐거워하던 하루타는 엄청 목이 말랐던 모양인지 음료를 쭉쭉 들이켰다. 빨대 대신 직접 입으로 잔을 가져가 시원스레 마셔대는 그의 입술 새로 채 삼키지 못한 음료가 흘러내렸다. 빠르게 오르내리는 목젖을 스치는 파란색 물줄기에 마키는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좀...’
 참을 인을 세 번 가슴에 새기며 마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음료와 함께 가져왔던 티슈를 서둘러 찾아 들었다.
 
 "흘릴 줄 알았어요. 예지력이 있는 마키 료타는 티슈를 챙겨왔죠."
 
 마키는 하루타의 쇄골까지 내려온 파란 방울들을 조심조심 닦아냈다.
부드럽게 닿는 감촉에 하루타가 씨익 웃으며 마키의 이마에 머리를 콩 부딪쳤다.
 음료 한 잔을 말끔하게 비운 하루타는 그제서야 후드를 벗고 민소매 티셔츠만 걸친 마키를 발견했다.
 새하얀 살결에 다부진 어깨가 도드라져 보였다. 새삼 놀랍다는 듯 마키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루타는 속사포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와, 밖에서 보니까 더 하얗네. 마키, 너 진짜 하얗구나.”

 말로는 부족한지 드러난 마키의 살결을 손으로 쓱쓱 비비며 신기해하는 그였다. 하루타의 손에 닿는 마키의 피부는 혈관이 비칠 듯 맑았고 촉감 또한 부드러웠다. 햇살 아래서는 더욱 유난스레 뽀얀 빛을 내는 터라 쉽게 눈을 떼기 힘들었다.
 마키는 제 피부를 스스럼없이 만지작대는 하루타가 귀여우면서도 어딘지 답답한 마음이 들어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만 매일 안달나 있는 것 같은 억울함,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만큼 나날이 좋아지는 하루타. 같은 속도로 걸을 수 있기를 바라는 속절없는 마음.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도 같은 이 감정.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맨 살을 드러낸 채로 앉아있는 하루타가 여전히 못마땅했다.
 잘생긴 입가에 음료 잔을 댄 채 천천히 기울이던 마키는 반쯤 눈을 감은 채 맛을 음미했다. 달콤하게 다가온 음료는 어느새 혀를 톡 쏘며 제 본연의 맛을 알아달라는 듯 탄산의 매력을 마구 뽐냈다. 그 따가운 촉감에 눈을 뜬 마키는 하루타의 손을 살며시 잡아 내리며 조용하게 대꾸했다.

 “살이 타면 아픈 타입이라 거의 가리고 있어서 그런가 봐요.”

 하루타는 차분히 제 손을 끌어내리는 마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만히 무릎을 감싼 채 먼 곳을 응시하는 제 연인의 분위기는 어쩐지 조금 차가워진 것 같았다.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렸지만 차마 이유를 묻지 못했다.
 ‘혹시나 내 착각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건 싫어. 마키가 화날 리 없는데.’
 아니겠지, 아닐거야. 하루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도 까만 편은 아닌데 마키는 정말 안 탔네. 근데 잘 어울려. 예뻐.”

 어색하게 웃던 그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마키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곤 여행을 왔는데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 우리 뭐 하는 거냐고 방방 뛰기 시작했다. 마키는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았지만, 저를 힘차게 당기는 하루타에게 이끌려 결국 바다에 발을 담갔다.
날이 더운 만큼 물속은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미 담가버린 발, 찜찜했던 감정은 뒤로 한 채 반갑고도 달콤한 바다의 품 안에서 둘은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연인이니, 집착이니, 욕심이니, 그 모든 복잡한 것들을 뒤로 한 채 아이처럼 마구 물을 뿌려대며 놀았다.
거의 전쟁 수준으로 물을 퍼붓는 하루타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봐달라는 마키의 애원에도 엄숙한 표정으로 '디스 이즈 워.' 라고 말하며 까부는 하루타였다. 쏟아지는 물벼락에 쫄딱 젖은 마키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한 시간 가량을 물속에서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어느덧 해는 저물고 젖은 몸에 슬슬 찬기가 올라왔다. 추워진 하루타는 머리를 탈탈 털며 마키의 손을 잡았다. 마키는 들고 있던 타올을 하루타 어깨에 감싸곤, 제 어깨에도 감았다.

 “으, 이제 해도 꺼지는 것 같고. 슬슬 들어갈까? 배도 고파.”
 “그래요. 더운 날씨여도 감기는 조심해야죠. 하루타 씨의 죽은 두 번 먹을 맛은 아니거든요.”

 쿡쿡 웃으며 마키가 장난스럽게 대답하자, 하루타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주먹으로 마키의 어깨를 살짝 쳤다. 마키 역시 단단한 어깨로 하루타를 밀어댔고, 둘은 어느새 또다시 장난을 치며 모래사장을 걷게 되었다.

 “일단은 호텔 들어가서 옷 좀 갈아입죠. 춥잖아요.”
 “엉, 그러자. 게다가 우리에겐 오늘을 위해 준비한 비장의 아이템이 있지.”

 해변 안에는 수많은 인파가 있었고 다양한 소리로 가득 차 있었지만, 둘의 귓가엔 서로의 사랑스러운 말소리와 웃음소리만 들렸다.
자연스레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조용히 길가를 걸었다. 물에 젖어 오들오들 떨리는 몸이었지만 꼭 그러쥔 손에서는 은근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멍하니 길을 걷던 하루타는 문득 이 상황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연인과 외딴 타국에 여행 와서, 해가 질 때까지 물 속에서 놀다가, 지는 석양을 등지며 손을 잡고 걷고 있다니.
 ‘이거, 엄청 낭만적이잖아... 드라마에서만 봤는데...’
 가슴을 간질이는 뭉근하고 따뜻한 감각에 하루타는 눈을 꼬옥 감으며 감상에 젖었다. 제 손을 가만히 그러쥐고 있는 마키의 손이 무척 정답게 느껴져서 살포시 힘을 더 주었다.
하루타는 말없이 눈동자만 굴려 마키를 응시했고, 시선을 느낀 마키 역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루타를 바라봤다.
 
 그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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