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C.C (2/2)

(@bany)


이찬영 CC 설 확산 그 후, 정성찬은 나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 중이다. 성찬이라고 사건의 전말이 궁금하지 않을 리 없다. 그냥 궁금한 수준이 아니라 이찬영이 대동제에서 구준표 빙의해 공연 무대 난입한 뒤 ‘오늘부터 이 아이는 이찬영의 여자친구임.’ 공개 선언하는 악몽 꿀 정도로 온 신경 바짝 섰다. 이미 이찬영 여자친구의 존재를 기정사실화 한 과의 주변인들이 정성찬 볼 때마다 심문 들어가는 것도 그를 심란케 했다.

그러나 막상 찬영과 함께 있으면 밀가루 같은 얼굴에 뽁뽁뽁 찍힌 점 개수 세거나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 빤히 보는 일이 재미났지 물어봤자 갑분싸될 게 뻔한 여자친구 얘기 꺼내서 뭐하나 싶었다. 거기까지 참견하는 것도 좀 웃기고. 내가 뭐라고. 아니, 아니지. 이찬영에게 정성찬은 확실히 ‘뭐’ 정도 되지 않나? 자아분열만 몇 번 짼지 모르겠다. 이런 아버지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래 자식들은 부모님 맘 몰라주긴 한다.― 이찬영은 여느 때처럼 정성찬 바운더리 내 콕 붙어 야무지게 형 쫓아다녔다.


심지어 성찬이 아르바이트를 가는 날에도 찬영은 열에 일곱, 그가 일하는 카페 한쪽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찬영이 처음으로 카페에 놀러 왔던 날, 여기서 형 보고 있으라며 포스기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혀뒀으나 찬영은 굳이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에도 쭉 같은 자리 고집하는 탓에 몰래 이찬영 지정석 앉아본 날도 있다. 찬영의 자리에선 포스기 대신 에스프레소 머신이 보였다. 주문받는 정성찬 앞모습은 안 보이지만 커피 내리는 그의 옆모습 넋 놓고 감상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찬영은 성찬의 갈색 머리칼과, 머신기 만진다고 살짝 내리 깐 속눈썹, 조금 벌어진 입술 선이 햇빛 받아 산란하는 때가 좋았다. 유달리 아름다운 사람이 주변과 무리 없이 섞여든다. 어느 사람이 안 그러겠냐마는 찬영은 아름다운 것들에 물렀다. 이찬영 인생에서 봐온 수많은 그림, 사진, 음악, 풍경을 통틀어 머신기 앞 정성찬은 손꼽히게 아름다운 존재였고. 그를 보면 어떤 미적쾌감까지 일었으니 말 다했다.


물론 정성찬이 그런 이찬영 속내를 다 알 리 없다. 그래도 대충 커피 내리는 자기 모습 보려 이 자리 앉았구나 짐작할 순 있었다. 주인을 닮은, 소리 없는 그 애의 애정이 좀 간지럽다고 생각했었다.

그 사실 안 날부터 성찬은 일하다 쉬는 틈 생기면 포스기 앞 의자 마다하고 머신기 근처 알짱거렸다. 그럼 과제 중이든, 책 읽던 중이든, 넷플릭스 보던 중이든, 이찬영은 금세 하던 일 스톱하고 눈으로 정성찬 졸졸 쫓았다. 고요하고 열렬한 시선은 멋대로 입술을 달싹이게 만들었다.


오늘도 이찬영은 정성찬 카페에 있다. 중간고사 끝나고 서울숲 다녀온 날, 그다음 날, 그 다다음 날에도 정성찬과 함께였다. 아메리카노 내리다 흘끗 곁눈질하니 어김없이 이쪽 보고 있던 이찬영과 정면으로 눈이 맞았다. 헉. 부러 눈 땡그랗게 말아 깜짝 놀란 표정 짓던 찬영은 이내 아랫입술 깨물어 가며 입꼬리 밀어 올린다. 성찬의 얼굴도 찬영을 따라 속없이 무너졌다. 퇴근까진 두 시간 좀 넘게 남았다. 케이크라도 하나 꺼내다 줄까. 망설일 틈도 없이 쇼케이스로 한 발 내딛는데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


“저기요.”

“네?”

“저 아까부터……”


이찬영 부르는 소리 주워듣고 곧장 백스텝, 저기 주문할게요! 시도하려다 실패. 내내 손님 없다 꼭 이런 순간에 일 생기고 난리다. 영업용 미소 장착하고 포스기 앞에 서지만 정신은 온통 다른 쪽 향해있다. 웅얼웅얼. 애석하게도 찬영의 목소리는 매장 음악 소리에 힘없이 묻히고 만다. 송은석이 이찬영 목소리 작다고 놀려도 꿋꿋하게 본인 귀 가져다 대기 바빴던 정성찬은 처음으로 그 행동 후회했다. 아, 찬영이한테 조금만 크게 말하는 연습 해 보라고 할 걸.

그러나 목소리 안 들려도 풍기는 분위기 살피면 대화 견적 금방 뽑았다. 서두가 ‘저 아까부터…….’로 시작했음 ‘계속 지켜봤는데, 여자친구 있으세요?’로 이어지는 게 인지상정. 주머니에 손 넣는 거 보니 핸드폰 꺼내려는 것 같고, 곧 ‘없으시면 번호 알려주실 수 있나요?’ 나오겠구나. 정성찬도 허다하게 겪어 본 상황이라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다. 별안간 포스기 누르는 손가락 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 왜 이렇게 덥지. 왜 열이 받지. 가능하다면 핸드폰 번호 대신 주기 흑기사라도 출마하고 싶은 심정이다.


“포인트 번호 있으세요?”

“네.”

“번호 눌러주세요.”


잘 훈련된 기계마냥 찍어낸 답 출력하는 와중에도 본인이 뱉은 포인트 ‘번호’ 소리가 거슬린다. 진짜 번호 준 건가? 이찬영 성격에 어색한 사람에게 번호 넘기기와 처음 보는 사람 부탁 거절하기 중 무엇이 더 힘들지 생각해 본다. 이찬영은 의외의 구석에서 똑 부러졌으므로, 상대방 기분 안 나쁘게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뭐라고 거절했지? 정성찬의 경우 대부분 ‘여자친구 있어서요.’ 소리 하곤 했다. 아. 여자친구. 그제야 이 악물고 모른 척한 이찬영 CC 설이 뒤통수 빡 치고 간다. 찬영이 정말 CC라면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여자친구 있어요.’ 하면서. 그건 정성찬이 쓰던 수법처럼 허울 좋은 거짓말도 아니었다.

덕분에 정성찬 기분은 걷잡을 수 없이 땅 파고든다. 이대로면 지하 암반수 굴착도 가능했다. 샷 내리러 가서 내내 미간 찌푸리고 서 있으니 찬영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코앞까지 와놓고 일하는 데 방해될까 봐 ‘형’ 소리 한 번 않는다. 평소 같으면 신경 쓰인 정성찬이 먼저 말 붙였겠지만 오늘은 별로 그래 주고 싶지 않았다. 한 번 삐딱선 타기 시작한 성찬은 고집스러울 때가 있었다.


퇴근 시간 가까워지도록 두 사람 사이엔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 다음 타임 알바 들어오는 거 보고 교대 준비하던 정성찬 시야에 휴지 한 뭉텅이 주워가는 이찬영만 안 보였어도 둘이 말 안 하고 버틴 최장 시간 돌파했을 거다. 그러나 하필 정성찬 눈 돌린 곳에 휴지 챙기는 이찬영이 보였고, 이찬영치고 어딘가 다급한 몸짓에 어라? 싶었고, 멀리서 확인한 그 애 눈 밑이 유독 반질반질했다. 그길로 앞치마 벗어서 아무렇게나 걸쳐 놓은 성찬이 이찬영 어깨 잡아 세운다.


“이찬영, 나 봐봐.”


얼굴 확인했더니 정말로 운 모양새라 심장이 덜그럭거렸다. 찬영아? 성찬의 부름에도 찬영은 휴지 문대기 바쁘다. 어디 아픈가? 이렇게 갑자기? 많이 안 좋은가? 머리 굴려봤으나 이찬영 우는 이유 짐작은 안 가고. 정성찬 얼굴도 덩달아 새하얗게 질려 가는데 얼굴에 휴지 쪼가리 붙인 이찬영이 조용히 노트북 가리킨다. 왜? 저게 뭔데? 화면 보면 코코 틀어놨다. 환장. 허탈함에 온몸에 힘이 확 풀렸다. 주저앉듯 털썩, 이찬영 맞은 편에 자리한 정성찬이 그대로 손 뻗어 관자놀이에 붙은 휴지 조각 살살 떼준다.


“코코 슬프지.”

“그니까요.”

“깜짝 놀랐잖아.”

“저도 형 땜에 놀랐어요.”

“왜?”

“형 화나서.”

“내가?”

“기분 안 좋았잖아요.”

“아닌데.”

“맞는데.”


째깐한 소리로 말대꾸는 지지 않고 꼬박꼬박. 심리 간파당한 정성찬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기분 상했던 건 맞지만 뭐에 기분 나빴냐고 물으면 할 말 없었다. 네가 모르는 사람에게 번호 따이는 거 보기 싫었다는 것도 웃기고, 네가 여자친구 있다고 그 부탁 거절하는 게 별로였다는 것도 웃겼다. 애초에 정성찬 본인도 자신이 왜 기분 나쁜지 정확한 이유를 꼽기 어려웠다. 이찬영 아니라 송은석에게 이런 일 생겼으면 놀릴 생각부터 하지 마음 상해하진 않았을 거다.

끝까지 자긴 모르는 소리라는 듯,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앉아있던 성찬이 그만 일어나자며 찬영을 보챘다. 여기부턴 이찬영이 삐딱선 모드 돌입한다. 정성찬은 대답하기 애매한 순간엔 꼭 저랬다. 차라리 말하기 싫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덜 서운할 텐데. 아닌 척, 모르는 척. 멀끔한 웃음으로 알 수 없는 속내 포장하는 성찬을 보면 찬영은 본인이 그의 선 밖으로 밀려난 것만 같았다.


“말하기 싫음 말고요.”


평소 같았으면 정성찬이 이찬영 짐 한두 개 대신 챙겨줄 때까지 느릿느릿, 가방 안에 들어갈 물건 끌어모았을 찬영은 짐 정리 3분 컷으로 끝낸다. 그것도 모자라 자기 우는 꼴 보고 튀어나오느라 대충 던져뒀던 앞치마 정리하는 정성찬 두고 먼저 카페 문 열고 나섰다. 성찬도 이찬영 기분 어긋난 걸 미묘하게 느꼈다. 맘 상한 지점이 어디인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따지고 보면 정성찬도 할 말 많았다. 이찬영 때문에―정확히는 짐작도 가지 않는 그의 여자친구 때문에―돌돌 말린 심사 그래도 형이라고 혼자 풀어보려 내내 고군분투했다. 혼자 오해하고 혼자 토라지고 혼자 서운해하는 거 멋없어 보여 티 내기 싫었다. 일언반구 없이 애인 만들어 온 거 당연 섭섭했다. 그 소식을 제게 먼저 알린 것도 아니고, 남 귀 통해 듣게 된 것 역시 열 받았다. 그러나 연애가 죄도 아니고, 이찬영이 정성찬에게 모든 일 구구절절 보고해야 할 의무도 없다. 무엇보다 제 맘 상했다고 이찬영까지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정성찬 표정 좀만 변해도 금방 눈치채는 애에게 굳이 너 때문에 서운하단 말 꺼내서 짐 얹어줄 필요가 뭐란 말인가.

둘 중 속상할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속상한 게 나았다. 정성찬도 성인군자는 아니라 오늘처럼 삐딱하게 굴고픈 날 더러 생겼지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말해주겠거니 머리론 이해 안 돼도 그냥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평소 정성찬을 아는 사람이면 기함할 소리였다. 성찬은 보기와 달리 단호한 구석이 있었다. 궁금한 건 바로 묻고, 오해도 바로 풀고, 받아줄 건 받아주되 아닌 건 아니라고 그때그때 선 그었다. 그러나 이찬영 앞에선 늘 너그럽고 여유 있고 아량 넓은 형의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저 애가 어디까지 뻗댈 수 있는지 두 팔 벌린 채 지켜봐 줄 의향 만만했다.

게다가 기껏 먼저 나가놓고 밖에서 얌전히 자기 기다리고 있는 모습 봐 버리면 뒤통수 얼얼해지는 거다. 고작 저게 다라니. 이찬영이 못되게 굴 수 있는 최대치가 저 정도라니. 캔버스 코 땅에 툭툭 문대며 땅바닥만 째리는 옆태 멍하니 보다가 코끝 시큰거리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골 때리게 순하고, 귀엽고, 기꺼운 찬영이. 이찬영이 저렇게 구니까 정성찬은 매번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다.


“찬영이 저녁 뭐 먹을래?”

“몰라요.”

“형이 서운하게 해서 미안.”

“됐어요.”

“근데 내 기분 안 좋은 거 너한테 말하면 너도 안 좋아지잖아. 괜히 너까지 맘 쓰게 하기 싫어. 슬픈 거 나눠봤자 슬픈 사람 둘 되는 건데. 뭐 하러 그래?”

“혹시 나 때문에 기분 안 좋은 거면 말해줘야 알죠.”

“그런 기특한 생각도 했어? 내가 너 때문에 기분 상할 일이 뭐 있어. 걱정 안 해도 돼.”


분명 아슬아슬, 터지기 직전의 폭탄이 묻혀있단 걸 안다. 덮어놓고 모른 척한다고 될 일 아니란 것도 알았고. 그러나 성찬은 그 위에 흙 덮고, 또 덮고, 다시 또 덮고, 아주 정성스레 애를 썼다. 굳이 들추고 싶지 않았다. 파고들수록 복잡해질 거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대로 이찬영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른다. 느낌이 그랬다. 때문에 되도록 오래오래 묻어두고 싶었다. 잘 묻어두면 폭탄 터져도 속만 좀 곪고 덮어둔 흙 위는 말짱하지 않을까.

그러나 곪을 상처는 언제고 곪기 마련이고, 터질 일들은 언제고 터지기 마련이다. 드라마만 봐도 그랬다. ‘제발 이런 전개만은 아니길.’ 하면 꼭 그런 전개대로 흘러가서 누구는 아프고, 누구는 이별하고, 누구는 죽었다. 모든 인생은 미니 시리즈의 확장판이므로, 정성찬과 이찬영에게도 우유 준비 못 했는데 고구마 군단 맞닥뜨리는 고구마 농사 풍년의 시기가 오고야 만다.


대동제 시작되고 두 사람은 여기저기 끌려다니기 바빴다.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과의 차은우이자 얼굴마담이었던 정성찬은 승주에게 목덜미 잡혀 삼일 내내 주점 서빙으로 갈려 나갔다. 마찬가지로 이찬영 역시 승주가 점찍은 서빙 인재였으나, 차라리 주방일 하겠다며 생에 쓸 수 있는 고집을 다 쓴 덕에 감자튀김 담당으로 차출됐다. 대학 축제 주점은 모두 오픈형 주방이란 사실을 간과한 유학생 이찬영의 실수였다. 센터 자리 배정받은 감자튀김 담당은 주목받는 정도가 서빙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지 않았다. 정성찬 보고 가던 걸음 돌려 들어온 사람들은 이찬영의 튀김 쑈까지 코스로 구경했다. 이찬영이 미컴과 남상미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10월이라지만 요리하다 보면 불 땜에 열나기 십상이고, 가뜩이나 열 많은 이찬영이 입고 있던 과잠 벗어둔 채 흰 반팔 차림으로 감자튀김 튀기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감자튀김 주문량이 폭주했다. 그때부턴 밖에 웨이팅 인파도 배로 늘었다. 안주 서빙하는 정성찬은 제 손에 들린 안주들이 죄다 감자튀김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쯤 슬쩍 승주 붙잡고 ‘찬영이 좀 쉬어야 되지 않아?’ 소리 해댔으나 번번이 묵살당했다. 승주는 정성찬이 악덕 업주라고 욕을 하든 말든, 축제 삼일동안 빨간 마스크처럼 찢어지는 입 주체 못했다. 마지막 날엔 줄곧 도망 다니던 송은석까지 잡혀 와 서빙 투입되는 바람에 새내기 시절 이름 날렸던 차은우 강동원 콤비 다시 보겠다고 몰린 인파로 올해 대동제 최고 매출 찍었다.


“차은우, 강동원, 남상미는 뒤풀이 필참.”

“꼰대세요?”

“너네 덕에 오른 매출이라 맛있는 거 먹여주겠다는데도 난리야.”


정성찬과 송은석이 퀭한 눈덩이 매만지며 앓는 소리 낼 때, 이찬영은 조용히 짐 챙겼다. 물론 챙길 짐 워낙 많아 다 챙기기 전에 승주에게 붙잡혔지만. 그래 놓고 한다는 말이 ‘누나가 남상미 남으라면서요. ㅠㅠ’란다. 하긴, 유학생 이찬영이 롯데리아 알바생 남상미 밈을 이해할 리 없었다. 고민하던 승주는 호칭을 정정했다.


“남상미 말고 레이첼 맥아담스 뒤풀이 필참.”

“그게 저예요?”

“어. 맥도날드 알바 몰라?”

“아아.”


어느새 이찬영 옆에 달라붙은 정성찬은 아까 대신 챙겼던 이찬영 립밤 그의 과잠 주머니에 넣어주고 있었다. 셋 다 피곤에 지쳐서 뒤풀이고 뭐고 집으로 돌아가 눈이나 감고 싶었으나 올 대동제 최고 매출 찍은 주점이란 영광에 취한 사람들 사이 찬물 끼얹을 만큼 사회성 없진 않았다. 결국 딱 한 시간만 앉아있다 오자는 맘으로 꾸역꾸역 걸음을 옮겼다. ―다시 생각하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승주야, 진짜 우리한테 고마우면 비싼 안주고 뭐고 그냥 빨리 보내줘라.”

“내 말이, 난 술도 잘 못 먹는데.”

“송은석 쟤 거의 렘수면 상태거든? 나랑 찬영이도 피곤하고.”

“아, 알았어. 한 시간만 있다가 가. 다들 너네도 뒤풀이 오는 거냐고 묻는데 안 온다고 하면 김새잖아. 밥은 내가 나중에 따로 살게.”


협상 성공. 이제 정말로 한 시간만 대충 때우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마무리되면 좋았으련만. 언제나 변수는 생기는 법. 약속한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사건 발발한다.


“찬영아 너 여자친구는 안 만나? 축제 때 우리 주점 안 놀러 오셨어?”

변수 하나, 같은 테이블에 앉은 동기 및 선배의 최근 관심사가 ‘이찬영 CC 사건’이었단 점.


“여자친구요?”

“너 CC라매.”

변수 둘, 정성찬이 평소 바지폭에 이찬영 끌어안고 다닌지라 이렇게 얼굴 보는 게 아니면 이찬영에게 사실 여부 물을 기회가 없다는 걸 그들이 잘 알고 있었다는 점.


“아, CC. 근데 그게 여자친구랑 무슨 상관? 이에요?”

변수 셋, 이찬영이 알고 있는 C.C(sungChan and Chanyoung)와 통상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C.C(Campus Couple)가 다르다는 점.


여기서부터 다들 입 닫고 강냉이 집어먹기 시작했다. 정작 이찬영 얼굴은 평온한데, 물어본 사람들만 허옇게 질린 채로 시선 둘 곳을 못 찾았다. 지금 쟤 뭔 소리? CC라는 건 인정한 거 맞지? 여자친구가 아니면? 우리 실수한 거냐? 아, 왜 당연히 여자친구라 생각했을까. 찬영이 유학생인데! 저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조용히 관전하던 송은석과 내심 관심 보였던 강승주는 동시에 정성찬 눈치 살폈고, 정성찬은 자기도 모르게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허.”


덕분에 공기는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굳이 다행인 점 하나를 찾자면 각자 술 먹기에 바쁜 데다가 뒤풀이 현장이 워낙 시끄러운지라, 이 대화에 참여 중이던 사람 여섯―이찬영과 정성찬, 송은석, 강승주, 그리고 이찬영 동기 하나와 선배 하나.―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대화에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내용을 듣지도 못했다는 것 정도였다.


“그, 너네 너무 피, 피곤해 보인다? 한 시간 거의 다 되지 않았나? 힘들면 먼저 가도…….”


승주가 혼신의 힘을 다해 상황을 수습하려 애썼다. 정성찬은 강승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났다. 겉옷 챙긴 성찬이 찬영을 살폈다. 이찬영은 정성찬 따라 나갈 준비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새 주머니에서 꺼냈는지, 성찬이 챙겨줬던 찬영의 립밤이 굴러다녔다. 못내 신경 쓰였지만 모른 척 자리 박차고 나섰다.

그대로 술집 밖 나온 정성찬은 뒤 한 번 안 돌아본 채 골목길 빠져나간다. 당연히 성찬이 자신을 기다릴 거라 생각했던 찬영은 정성찬 멀어지는 모습에 남은 짐 대충 챙겨 들고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벌써 가는 거냐며 붙잡는 사람들 밀어내고 문밖에 서면, 정성찬은 이미 사라진 뒤다.


와, 진짜 갔네.

허무하게 중얼거린 찬영이 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커다란 몸 착실하게 구긴 채 아스팔트 노려봤다. 생각이 생각을 잡아먹는다. 머리가 아팠다. 최근 성찬의 태도가 묘하게 날이 서 있다는 생각은 했다. 성찬과 마주할 때면 제가 밟고 선 땅이 살얼음판처럼 느껴졌다. 혹여나 본인 때문에 그런가 싶어 신경이 쓰였다. 큰맘 먹고 문 두드려도 안 열어준 건 정성찬이었고. 둘 사이 그어진 선 코앞까지 다가가면, 금세 선 뒤로 물리는 것도 정성찬이었다. 가만히 있던 이찬영 데려가 제 옆에 붙여둔 게 누군데, 찬영이 금만 좀 밟아도 그렇게 벽을 쳐댔다.

이찬영에게 먼저 말 붙인 것도 정성찬이고, 이찬영에게 목소리 작다는 말 대신 본인 귀 가까이 대준 사람도 정성찬이 처음이었고, 이찬영이 짐 챙길 동안 재촉 한 번 않고 심지어는 찬영의 짐 대신 챙겨준 이도 정성찬뿐이었다. 부러 늦장 부리고 나면 꼭 그의 손에서 나타나는 자신의 립밤이 좋아서 언젠가부터 테이블 위에 립밤 꺼내놓는 버릇도 생겼다.

그래서 귀찮았나? 손이 많이 가서? 챙겨줄 게 많아서? 그런 거치고는 정성찬이 먼저 이찬영 찾아다녔다. 백번 양보해 정말로 찬영이 귀찮았다면 일전에 찬영이 물었을 때 솔직히 답했어야 했다. 이제 와 이럴 게 아니라.


이찬영이 뭐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었다. 이찬영 기준에선 그랬다. 찬영이 그에게 정말 원하는 것들에 비하면 립밤 대신 챙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서울 숲에 같이 가주길 바라는 것은 비교적 쉽고 사소한 일이었다.

이찬영은 얼마든지 정성찬을 ‘다른’ 의미로 좋아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으므로.

그러니까, 나를 좋아해달라는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는데. 나 때문에 기분 상할 일 없다 해놓고. 진짜면 나 여기 두고 가면 안 되지. 난 형이 서운하게 해도 형 기다렸다 같이 갔는데.

차마 못 뱉은 말들 푸념처럼 외다가 무심코 주머니 안에 립밤 없는 걸 깨닫는다. 매번 정성찬이 챙겨주던 것. 그러길 바랐던 것. 이찬영이 그에게 바란 건 딱 그 정도의 다정이었다. 자라나는 마음의 잔가지들 가차 없이 쳐내며 그 정도면 충분하다 되뇌었다. 틀어진 마음은 어쩜 단번에 티가 나는지. 정성찬이 안 챙겨줬다고 립밤도 이찬영 품 탈출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좀 전까진 억울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서러웠다. 립밤 찾으러 도로 들어갈지 말지 고민 중인데, 두 사람 눈치보다 이제야 탈출한 송은석이 이찬영 보고 흠칫한다.


“찬영.”

“형도 가게요?”

“엉. 근데 너 CC가 뭔지 알아?”

“갑자기 뭔 소리. 다들 왜 자꾸 CC 타령이에요?”

“그거 캠퍼스 커플 말하는 거야.”

“…저랑 성찬이 형이 커플이에요?”

“제발, 왜 이러세요. 너랑 정성찬이 왜 나와. 너네 둘이 커플인지, 앞으로 그렇게 될지, 아닌지는 내 알 바 아니고요. ‘campus couple’, 그거 약자가 C.C라고. 영어도 잘하면서 왜 이럴까?”


술 먹다 커밍아웃 한 것도 모자라 느닷없이 정성찬과의 커플 선언까지 하고 있는 이찬영이 웃기지도 않는다. 그럼 그렇지. 어째 아까부터 이상하다 싶더라. 애초에 CC가 뭔지도 모르는 놈 붙잡고 무슨 얘길 했던 건지. 얘도 얘지만 이찬영에게 제대로 물어볼 생각도 않고 냅다 파라오의 분노 찍은 정성찬이 더 웃겼다. 사랑 처음 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오바를 떤대? 좋아한다고 동네방네 광고를 해도 유분수였다.

그러다 송은석은 문득, 이찬영이 왜 ‘CC’가 본인과 정성찬을 칭하는 말이라고 오해했는지 궁금해졌다. 물어보면 곧장 후회할 걸 알면서도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누가 너한테 CC가 너랑 정성찬이래?”

“성찬이 형이 그랬는데.”

“정성찬이?”

“CC가 뭐냐고 물어보니까 너랑 나라고.”

“아이유 나셨네. 그거 미친놈 아니야?”

“왜 형한테 뭐라고 해요.”

“얼씨구? 됐다. 난 할 만큼 했다.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결과는 굳이 알려줄 필요 없고.”


제 친한 친구와 나름 아끼는 후배의 사랑 삽질 궐기 대회에 이 이상 개입할 맘 없는―솔직히는 이만큼도 알고 싶지 않았다.― 송은석, 이찬영 어깨 두어 번 두드리고 당부의 말까지 잊지 않은 채 자리를 뜬다.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이찬영은 눈썹 사이 바짝 모으고 송은석이 한 말 곱씹는다.

저 형 진짜 뭐래? 정성찬은 대체 왜…….


“저기, 죄송한데요.”

“네?”

“아까 술집 안에서부터 봤는데, 혹시.”


한창 머리 싸매고 있는데 상념 깨는 목소리가 들린다. 언어 달라도 플러팅 할 때 치는 멘트는 만국 공통이다. 한국어로 듣는 작업 멘트가 어색할 뿐이지, 이렇게 시작하는 말 유연하게 거절하는 법이야 미국서부터 진작 익혔던 이찬영이 멋쩍은 미소 만면에 띄우곤 목소리 가다듬는다. 제가 지금 어떤 남자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요. 물론 실제로 그렇게 말할 건 아니고. 일단 이 자세로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가 싶어 주섬주섬 몸 일으키는데,


저 멀리서 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

찬영도, 찬영 앞에 서 있던 사람도 시선을 돌렸다.


“이찬영.”

“…다시 왔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이 친구랑 급한 일이 있어서.”


뛰어오는 길에 바람 잔뜩 맞아 멋대로 뻗친 머리칼 매만질 여유 따윈 진작 사라진 정성찬이 그대로 이찬영 손 잡아챘다. 그래도 예의는 차려야 해서 고개 숙여 가며 사과부터 한다. 덩달아 사과 박은 이찬영은 정성찬 뒤 졸졸 따랐다.



 급한 일 있다고 채갈 땐 언제고 걷는 내내 입도 뻥긋 않는다. 잠자코 따라 걷던 찬영이 한숨 내쉬었다. 쭈그려 앉아있다가 갑자기 걸으려니 다리가 저렸다. 모양 빠지게 굴기 싫었으나 절로 앓는 소리 튀어나왔다. 결국 잡혀있던 손 빼낸 이찬영이 중간에 멈춰 선다. 이찬영 손 빠져나가기 무섭게 정성찬이 뒤돌았다.


“왜.”

“다리.”

“아파?”

“오래 앉아있어서.”


이찬영 말 끝나기도 전, 냅다 주저앉은 성찬이 찬영의 종아리를 손으로 주무른다. 말투나 표정은 평소보다 냉해도 손길은 다정하기 짝없었다. 찬영은 가만히, 성찬의 정갈한 머리칼과 정수리를 내려다본다. 형 머리 진짜 작다. 숱도 많고. 문득 정성찬을 이 정도로 내려다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본다. 앉아있는 정성찬 앞에 서 있을 때 말고. 정성찬이 스스로 무릎 굽히고 기꺼이 낮은 자리 자처할 사람이 그의 인생에 몇이나 있었을까.


“형.”

성찬이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말간 눈망울이 올곧게 이찬영 올려다보는 순간, 찬영은 머리카락까지 바짝 서는 쾌감을 느낀다. 미적 쾌감 같은 게 아니라 눈앞의 남자 때문에 몸 한구석이 간질간질 들끓는, 그런 쾌감.


“응.”

“저 CC 아니래요.”

“무슨 말이야?”

“은석이 형이 알려줬어요. 진짜 뜻.”

“가짜 뜻은 뭐였는데.”

“형이 알려준 뜻.”


속삭이듯 뱉은 말에 내내 얼음장 같던 정성찬 얼굴에 봄 오는 소리가 들린다. 파스스, 얼음 깨부수고 비로소 예쁜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자세 바로 한 성찬이 이번엔 이찬영 시선보다 아주 조금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본다.


“내가 뭐라고 그랬어?”

“형이랑 나라고.”

“그래서 그렇게 말했어? 너 CC라고?”

“그런 줄 알았으니까요.”

“그게 너랑 나야?”


단어 사이사이 잦은 웃음이 파고든다. 딱히 웃을 상황 아닌 것 같은데 실실 웃음이 샜다. 이건 뭐, 아수라 백작도 아니고. 그래도 쌔빠지게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매몰차게 두고 왔으면서, 이찬영의 잘 빚은 밀가루 같은 얼굴이 눈에 밟혔고, 테이블 위 굴러다니던 그 애 립밤이 자꾸 생각났다. 결국 골목길 앞 사거리에서 발걸음 돌린 순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어리지도, 그렇게 작지도—작은게 아니라 엄청 크다.—, 그렇게 맹하지도 않은 애인데, 그만큼 귀한 건 맞아서. 행여 무슨 일 났을까 걸음 보폭 점점 넓어지고 이내 뜀박질로 변한다. 그렇게 도착하면 아니나 다를까. 그새 다른 사람에 붙잡힌 꼴에 또 기분이 널뛰었다. 매번 새롭게 형 속 뒤집는 재주가 있었다.

동시에 매번 골때리게 사랑스러운 짓을 해댔고. 지금처럼.


“저도 비밀 하나 말했으니까 형도 말해요.”

“너랑 내가 CC인 게 왜 비밀이야.”

“장난 말고. 형 나한테 왜 화났어요?”

“글쎄.”

“저 그냥 가요?”

“미안, 생각할 시간 좀 줘.”


회피하는 게 아니라 정말 무슨 답 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찬영 맘 상한 타이밍은 그게 어디든 간에 귀신같이 눈치채면서 자기가 정확히 뭐에 꼭지 돌았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찬영한테 애인 생겼다는 말 주워들은 순간부터 장기 다 꼬이는 것처럼 속 뒤틀렸고, 그 와중에 다른 여자들에게 번호 팔리는 이찬영 지켜보는 것도 곤욕이었다. 그러나 정성찬에게는 이찬영이 여자친구 만들어 오는 것에 참견할 권리도, 남에게 번호 주는 거 말릴 권리도 없었다. 그걸 너무 잘 알아서 또 열받았다. 애초부터 무언가가 되고 싶어 찬영의 곁을 맴돈 것은 아니었으나, 이찬영에게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마음을 쓰고, 애정을 쏟는 것은 나인데—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제겐 그 어떤 권한도 주어지지 않는 게 속 쓰렸다.

게다가 알고 봤더니 여자친구 아니라 남자친구라잖아. 찬영의 입으로 그렇다 선언한 건 아니지만, 좀 전의 대화 복기할수록 다른 답이 안 나왔다. 그럼 정성찬이 최종 눈 뒤집힌 부분은 여기인데, 그렇다고 찬영에게 ‘네가 남자 만나는 게 싫다.’ 소리 하자니 이찬영이 오해할까 겁났다. ‘이찬영’이 싫다는 게 아니라, 밤마다 정성찬 신경 바싹바싹 말린 존재가 ‘남자’라는 게 싫었다. 이찬영 만나는 상대가 여자인 줄 알던 때에도 거슬리는 게 한두 개 아니었다. 그래도 여자친구니까. 나는 이찬영의 여자친구가 되어줄 순 없는 거니까.

근데 남자친구? 대체 그게 왜 필요한 거냐고.


그건 내가 대신 할 수 있잖아.

끝내 물꼬 튼 생각의 둑이 범람해 여기까지 다다르고 말았을 때, 정성찬은 비로소 깨닫는다. 여자고, 남자고, 애초부터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이찬영 옆에 그 누가 자리하든, 정성찬은 결국 못 견뎠을 거다.


“찬영아.”

“더 줘요, 시간?”

“내가 너한테 어디까지 상관할 수 있어?”


자꾸 신경 쓰고 싶다. 할 수 있다면 저 아이의 내밀한 구석까지 모두 상관하고, 관심 갖고, 낱낱이 살펴 아주 사소한 부분도 빠짐없이 예뻐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모든 행위가 오직 본인에게만 허락됐으면 했다.

이찬영에게 지하철 환승하는 법 알려주는 것도, 찬영이 가고 싶은 곳을 함께 가는 것도,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도, 하다못해 이찬영의 립밤 챙겨주는 것도, 정성찬이 아닌 이들에게 허하는 범위와 정성찬이 누릴 수 있는 범위가 분명하게 달랐으면.


“얼마나 하고 싶은데요?”

“네가 허락하는 만큼.”

“내 맘 말고, 형 마음.”

“다.”


너에 관한 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맘대로 오해하고 맘대로 서운해하고 맘대로 속상해하고 싶었다. 멋 없어도 괜찮다. 그런 맘 떳떳하게 티 낼 수 있는 자격만 갖는다면. 설령 본인 속 다 타들어 가도 그게 애정의 증표인 셈 칠 수 있을 거 같았다. 동시에 이찬영도 자신의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사소한 것에 삐지고, 토라지고, 멋 없어졌으면 했다. 

한 번 솔직해지기 시작하니 좋은 모습만 보이려 애쓰고픈 마음 한 톨도 안 남았다. 그렇게 포장한 허울 좋은 겉면 말고, 시꺼면 속내 다 보여도 주저 않고 그 품에 뛰어들어 줄 이찬영을 원했다. 이찬영이라면 그래 줄 거 같았다. 찬영은 언제고 정성찬 예상 범주 가뿐히 넘나드는 사람이었으므로.


정성찬이 제 두 손에 쥔 모든 것 내려놓고 맨몸으로 부딪혀 오자 그 모습 지켜보는 이찬영 얼굴에도 옅은 웃음이 움텄다. 원래 애정은 보잘 것 없고 초라하고 연약한 땅 위에서 싹 피운다. 남들도 다 아는 단단한 외면 말고, 나 아닌 그 누구에게 보여준 적도 보여 줄 일도 없는 여린 속살에 입 맞추고 싶은 게 사람 심리였다.

정성찬이 멀끔한 미소로 꽁꽁 싸맨 날것의 속마음 드러낸 순간, 억지로 다듬어 왔던 이찬영의 가지들이 그간의 서러움 피력하듯 순식간에 만개한다.


“형, 저 좋아해요?”

“…응.”


이찬영이 던진 담백한 직구가 정성찬 정면으로 날아든다. 저게 이찬영의 방식이다. 조용하지만 곧은 애. 조용해도 자기 온 힘 실을 수 있는 애. 성찬은 매번 속수무책, 그러나 기꺼운 맘으로 휘둘린다. 고작 ‘응’ 한마디 하는데 목 메이고 난리다. 눈가는 멋대로 달아오르고. 좋아한다는 말로 충분할 마음이면 참 좋을 텐데. 입 밖에 내는 순간 터무니없이 작은 단어의 그릇을 실감한다.

좋아해, 어쩌면 ‘좋아해’보다 더 많이.


포슬포슬 소리 날 것 같은 얼굴을 한 찬영이 한 발 다가와선 손가락으로 정성찬 손등 가볍게 건드렸다. 검지로 살살 간지럽히다가 나머지 손가락 슬그머니 얽어오는 행동에 단내가 폴폴 났다. 그대로 이찬영 손 잡아채 빈틈없이 깍지부터 낀 성찬이 냅다 얼굴을 들이민다. 붉은 기운 매달린 그의 눈동자가 찬영을 바로 보며 사르르 흩어졌다.

안 그래도 반짝이는 눈동자가 물기 머금은 게 보기 좋다면 좀 그런가. 정성찬 저렇게 만든 사람이 본인이란 것에 묘한 정복감마저 드는 게, 과연 맞는 건지 고민하게 됐다.


“형 때문에 이상해지면 책임져요.”

“책임지게 해 주는 거야?”

“뭔 소리. 나 두고 가지나 말지.”

“이제 안 그래. 제발 두고 가 달라고 부탁해도 그럴 일 없어.”


새초롬한 눈매가 장난스럽게 성찬을 째려봤으나 삼 초도 안 가 웃음 터졌다. 웃길 거 하나 없는데 두 사람 웃는 소리 끊이질 않았다. 잡은 손 놓을 생각 없는 둘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나눠 들고 기숙사까지 걸었다. 기숙사 뒤, 농구 골대 옆 벤치에 앉아선 시답잖은 얘기를 한참 떠들어댔다. 여전히 손은 꼭 잡은 채였다.

찬영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제 무릎으로 성찬의 무릎을 툭툭 쳤다. 왜? 나 립밤 잃어버렸어요. 형 땜에. 조그맣게 달라붙는 타박이 사랑스러운 탓에 못 참고 이찬영 어깨에 얼굴 파묻었다. 뭐가 웃겨요. 암만 뾰족하게 깎아도 정성찬 귀엔 여전히 동글동글, 귀엽게만 들리는 말투.


“형이 미안해. 내가 챙겼어야 되는데.”

“그니까, 그거 향 좋았는데.”


아, 드디어, 성찬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순간. 이건 오직 정성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아랫배 뻐근해지는 만족감이 성찬을 덮쳐 왔다. 찬영아, 형 좀 봐봐. 이찬영 어깨에 턱 괴고 그리 부르면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또르르 딸려 오는 시선. 야무지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와 적당히 도톰해 보이는 입술이 곧장 보인다. 깍지 낀 반대 손으로 찬영의 턱 가볍게 쥔 정성찬이 짓궂게 속삭였다.

형도 립밤 발랐어. 형, 진짜 뭔 소리? 어라, 찬영이도 무슨 소린지 아는 거 같은데? 찬영이 귀 빨개졌는데? 됐어요. 왜, 형 꺼도 향 좋아. 안 궁금해요. 맛도 있어.

한 마디 뱉을 때마다 얼굴 사이 거리가 점점 폭 좁힌다. 광대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이찬영이 부끄러움 못 이기고 눈 꽉 감으면, 이내 말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가벼운 숨소리만이 몇 번이고 오고 갔다. 이찬영이 발발거릴 때마다 모른 척 깍지 낀 손 꽉 붙들어 매는 정성찬은 끝내 무릎 발로 차인 뒤에야 몸 물렸다. 얻어맞은 주제에 뭐 좋다고 만면에 미소가 꽉 꼈다.


“뭐라고?”

“……거 같다고요.”

“응?”

“심장 튀어나올 거 같다고요ㅠㅠ.”


속삭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데시벨로 최선을 다해 성낸 이찬영이 벤치 박차고 튀어 나간다. 다섯 걸음 정도 먼저 걸어가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더니 목덜미까지 빨개진 채로 빨리 오라고 손 저어가며 보챈다.

아 절대 두고는 안 가겠다, 이거지. 발끝부터 타고 오르는 사랑스러움에 숨넘어가게 웃어댄 성찬이 단숨에 보폭 좁혀 이찬영 허리춤 끌어안고 그 목덜미에 입술 부벼댔다. 아, 형, 진짜아, 누가 봐요! 팔꿈치로 옆구리 쳐도 꿈쩍 않는다. 애초에 힘도 제대로 안 주면서 뭘 어쩌겠다고.


새벽이라 오가는 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지 아니었음 이찬영 말마따나 누군가에게 진작 발각되었을 거다. 사랑에 눈먼 미친 CC의 애정행각 규탄하는 대자보 붙을지도 몰랐다. 잠깐, CC? 응, CC. 그랬다. 오늘부로 이찬영과 정성찬은 CC다.

찬앤찬 그딴 거 말고, 캠퍼스 커플. 진짜 C.C.


fin.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는 안 읽어도 무방한 짧은 후기예요. 


전 원래도 캠퍼스 누비는 게 잘 어울리는 커플들을 사랑하는데, 숑이 톤이를 볼 때마다 과잠과 주점과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썸의 기류가 찰떡 같단 생각을 했어요. 내 퍼컬이 캠게인데 거기에 부합하는 아이돌이 n년 만에 내 인생에 나타나다... 덕분에 글 쓰는 내내 너무 즐거웠습니다.

중간에 나오는 남상미와 레이챌 맥아담스 밈은 두 사람 모두 과거 패스트푸드점 알바 경험이 있는데 그녀들의 출중한 외모로 가게 손님이 끊이질 않았었다는 일화를 토대로 가져온 거고요. 사실 제 눈엔 찬영이가 진짜 그런 로코여주로 보이기도 해요. 뒤통수 얼얼하게 사랑스런 짓 골라 하는 아이라는 점이 ㅎㅎ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두서없고, 매끄럽지 않은 부분들도 더러 있지만 즐겁게 봐주시는 분들이 계시길 바라요. 그리고 전 편에 달아주신 댓글들도 넘 감사합니다. 기쁜 맘으로 매일 매일 읽고 또 읽고 있어요오♡

제가 낯을 마니가려서 트위타 계정 파놓고도 트윗 쓰기 민망스럽더라고요. 그래도 팔로해주시묜 숑이 톤이 얘기들 마니 퍼담아놓겠습니다. 조만간 다른 글로 또 찾아오께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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