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는 무슨 일이지. 페드릭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라면 더 까칠하게 굴었을 사내가 순순히 방에 찾아와 엉겨붙을 때에는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여자가 아니면 방에 잘 들이지도 않고, 급한 용무가 아니면 얼굴을 마주할 기회도 없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이렇게 추근덕 거리는 경우는 꼭 그 연유를 들어야 했다.

롯은 특유의 이죽이는 표정을 지었다. 페드리은 그 표정이 싫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면서도, 한 쪽 구석에는 꼭 여지를 남겨두는 표정이었다. 그렇기에 그 표정을 바라보고 있으면 차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들만 생기기에, 얼굴을 들이미는 그가 탐탁치 않았다.

누군가가 둘에게 무슨 관계냐고 묻는다면 둘은 기꺼이 '아무 관계도 아니다'라고 일축할 수 있었다.

롯 그리고 페드릭, 두 사람은 그런 관계였다. 둘은 절대적인 평행선에 놓여 있었고 그 선은 무한히 늘여도, 설령 이 8우주를 끝까지 돈다고 하여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평행선을 유지할 관계였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궤도를 멋대로 이탈한 붉은 선 하나가 무차별적으로 움직이며 마구잡이로 각을 만들어 냈다.

서서히 기우는가 싶던 그 선은 이내 치솟으며 뾰족한 각을 만들었다. 페드릭은 이 과정이며 이어지는 행동 모두가 싫었다. 아직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공작님의 '전투의 신'으로 불리우며 칭송 받는 이 과정이 너무나도 싫었다. 자신의 충성이 무너져서도 아니었다. 전투의 신, 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그는 정말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전투를 이끌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끈다기보다도 상황을 끝낸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다. 그는 모든 것들을 일단락 내는 것에 재주가 있었다. 그렇지만 끝내지 못 하는 이 어정쩡한 관계는 페드릭을 내내 찝찝하게 만들 뿐이었다.

"선배."

아닌 척 해도 묻어나는 장난끼 넘치는 말투에 페드릭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응."

"선배."

그럼 뒤이어 롯의 부름이 따라왔다. 이걸 떼놓는 방법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는 것 뿐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앉아 치근덕거리는 녀석을 바라보면 그는 이내 얼굴을 가까이했다. 눈앞이 온통 빨갛게 된다. 페드릭은 이 광경이 싫었다. 지독히도 싫은 이 광경이, 점점, 점점, 가까워진다. 몸을 빼고 싶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제 뒤통수를 받치는 따뜻하고 큰 손이 느껴지고 의도하지 않아도 몸이 딸려가고 만다. 눈앞을 가득 메운 붉은 광경에 눈을 지그시 감을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페드릭은 이 순간이 싫었다.

자신을 유린하듯 굳게 닫힌 입술 사이를 뚫고 들어와 마구잡이로 치열을 훑는 그 난잡한 키스. 생각을 읽히거나 다른 지독한 방법으로 자신의 속내가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부끄러운 행위였다. 겉에 드러나는 피부를 보이기보다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얼떨결에 내보이는 곳이지만, 가장 소중한 이에게만 허용해주는 은밀한 장소였다.

페드릭은 이 순간이 지독히도 싫었다.

축축하고 물컹한, 기분 나쁜 것이 제 혀를 옭아맸다. 이미 자세는 틀어진지 오래였다. 더이상 제 머리를 붙들고 있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먼저 손을 뻗어 붙들고야 만다. 자신의 앞에서 여유로이 자세를 바꿔, 무게를 차츰 싣고 있는 이 남자, 페드릭은 이 남자가 싫었다. 자신의 몸이 침대의 부드러운 시트 위에 닿으면 잠깐 숨을 고르며 자세를 바꾸기 위해 겨우 입을 떼는 남자였다. 생물을 잡아먹는 식물마냥, 독을 뿜어내며 자신을 옭아매 죽여버리고야 마는 사내였다.

"그만해."

페드릭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롯은 이 말을 줄곧 무시해왔다. 페드릭은 언젠간 듣겠지, 라며 언성도 높이지 않고 여러 차례의 롯의 응석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이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 둘은. 절대로. 단지 몇 번, 직선으로 구르던 공이 제멋대로 튀어 오를 뿐. 늘 그렇듯 튀어오르던 공은 점점 그 높이가 낮아져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길 마련이었다. 페드릭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 튀겨주면 계속 튀어대는 공의 특성 상 가만히 두기로 마음 먹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조금 더 큰소리를 냈다면 지금 이렇게 기어오르지 않았을텐데.

작은 후회의 조각들이 거침없이 평행선을 찔러댔다. 그 출혈에 주춤하며 나아갈 방향을 잃고 고꾸라지면 지체 없이 그 머리를 붙들고 놔주지 않는 롯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만하란 소리에 그대로 동작을 멈추고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몇 번인가 손에 꼽을 정도로 눕혀 보았던 여자들마냥 가만히 누워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면 회의감이 밀려 온다.

롯에게 있어 자신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일까?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은 롯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침대가 아니라 깊은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이 위태로웠다. 옷이, 몸이 눅눅히 젖어가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의 눈에 상이 맺혀 있더라도 자신이 '생각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니란 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실성한 사람처럼 웃자 롯이 적잖이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뭐요, 그 웃음."

붉은 피부 위로 번들거리는 것이 당황한 땀이란 것까지 눈에 들어왔다. 한참 웃던 페드릭이 웃음을 멈췄다. 이 무슨 천하의 등신 같은 자식이 다 있나.

"그만하란다고 진짜 그만 하냐."

"그것도 그렇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롯은 얼굴을 곧바로 묻지 않았다. 평소라면 대뜸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 입술로 훑어대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아직도 두 팔로 무게를 버티는 채 페드릭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침묵이 계속 되자 안달이 먼저 난 쪽은 페드릭이었다.

"안 할거면 나오던가."

무미건조한 음색은 늘 짓던 표정과 같았다. 평이한 톤으로 롯을 도발하면 그 도발에 곧잘 걸려드는 롯이었다. 다만, 오늘의 특별한 상황을 고려해보면 지금 나오는 롯의 표정은 도발은 커녕 지금의 말에 실망한 얼굴이었다. 그는 위에서 벗어나 침대의 끄트머리에 걸터 앉았다. 페드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에 앉았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 대해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롯의 침묵이 이어졌지만, 페드릭은 옷 매무새를 정리할 뿐 작은 말 한 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무언(無言)의 시위. 롯은 지금의 분위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자신에게 말을 하라고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선배, 우리 정말 아무 관계도 아냐?"

"뭔 헛소리야?"

"아니, 그렇잖아?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해. 물론, 선배가 가끔 고깝게 구는 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우리 둘이 무슨 관계다?"

몇 번의 문답으로 이어지는 릴레이의 마지막에 돌아오는 롯의 리시브는 없었다. 툭툭 롯을 쳐 담배를 얻어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길게 들이마시며 폐 속 가득 해로운 공기를 들였다. 더 이상의 해로운 침범은 없었다. 이까짓 담배가 해롭다 한들 퀑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오래 있지도 못할 해로움이었다. 하지만 롯은 아니었다. 긴 호흡과 함께 희뿌연 담배 연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지만, 롯은 흩어지지 않았다.

"내 말은 ……."

"네 말은, 우리 둘이 교제라도 한다 이 말인가?"

페드릭에 물음에 다시 롯은 답이 없었다. 페드릭은 방 바닥에 담배를 떨구고 구두발로 밟았다. 한 입 밖에 빨리지 않은 담배가 짓이겨 꺼졌다. 롯은 그 장초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가. 그만 방해하고."

페드릭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롯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머뭇거리다가 방을 나갔다.

페드릭은 이 순간이 싫었다.

페드릭은 롯이 싫었다.

페드릭은, 롯을 지독히도 좋아하게 되었다.

덴마 / 사이퍼즈 / DmC / 라이트드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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