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런 미친##들이!”

 

거실 소파에서 한참을 부들거리며 휴대폰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하영이 별안간 몸을 벌떡, 일으키며 빽,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어제 먹고 남은 볶음밥을 데워 거실로 가져오던 민혁이 와르르, 무너졌다.


우당탕탕- , 엄청나게 요란한 소리가 났고, 그제야 이곳에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닌 민혁 또한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하영이 분이 덜 풀려 여전히 씩씩대면서도 미안한 얼굴을 했다.

 

“아, 미..미안..”

“아야..넌 꼭 그렇게 갑자기 소리치더라..놀랐잖아. 이거봐봐. 볶음밥 다 쏟아진 거. 아..라면이나 끓여야겠다.”

“내, 내가 끓일게!”

“그래.”

 

바닥에 다 쏟아진 볶음밥을 주워 담으려다가 이내 포기하고 빗자루를 가지러 일어서며 한숨을 푹 내쉬는 민혁을 붙잡은 하영이 라면은 자기가 끓이겠다고 했다. 흔쾌히 수락한 민혁이 다용도실로 갔다. 하영이 라면을 끓일 동안, 자신은 아까의 포효로 인해 다 엎어진 볶음밥-이었던 것-만 치우면 되니까 말이다.

 

*

 

“그래서. 왜 그런 건데. 또 그 녀석들 때문이야?”

“엉. 내가 고민상담해주는 상담원도 아니고, 지들 일이면 지들끼리 해결할 것이지 나한테 그런다니까? 친구가 나밖에 없나? 것도 짜증나는데 더 짜증나는 건 내가 이렇게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면 그건 좀 아닌 것 같다잖아! 뭔 말만하면 알아서 하겠대! 근데 또 다음날이면 나 어떡해 흐어엉..이런 식으로 잉잉댄다고!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아..겁나 짜증난다고!”

 

하영이 끓인 라면을 먹으며 슬쩍, 무슨 일이냐고 물어온 민혁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 하영이 열변을 토했다. 펄펄 끓는 뜨거운 물같이 날뛰는 하영을 바라보며 민혁은 ‘저러다가 진짜 수증기가 돼서 증발해버리는 거 아닐까.’라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이씨..진짜, 너무 힘들어..아까도 둘이 동시에 ‘나, 이제 어떡해..? 하영아 도와줘!’라고 문자했단 말야..”

 

펄펄 끓으며 당장이라도 증발해버릴 것 같던 하영이 어느 정도 식자 하영의 그릇에 라면을 덜어준 민혁이 벌써 한 달 째, 원수 같은 인간들에게 당하고 있는 불쌍한 친구를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어, 고생했어. 이제 그냥 무시해라, 무시해. 네가 계속 받아주니까 그러는 거야. 어, 잘했어.

 

“하아..역시 그렇지? 내일부터는 차단을 할까봐.”

“응. 그래, 그렇게 해. 잘했어. 잘했다, 한하영.”

 

겨우 두 달 먼저 태어난 주제에 자신이 오빠라도 되는 것 마냥 자연스럽게 자신을 달래는 민혁에 뭔가 굉장히 민망하고 부끄러운 동시에 약간의 반발심과 얄미움이 든 하영이 습관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민혁의 손을 탁, 쳤다. 이제 그만해. 내가 세 살 먹은 애인 줄 알아?

 

“애 맞잖아. 화나면 어쩔 줄 몰라 하고, 펄펄 뛰면서 날뛰는 거. 딱 세 살 먹은 애 같은데.”

“야..자꾸 그러면 내 손에 죽는다, 너.”

“네네~”

 

더 이상 애 취급하면 죽는다는 살벌한 눈을 한 하영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민혁은 하영의 경고를 무시하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허허 웃었다.

 

“아,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네네, 안 하고 있잖아요.”

“이게 뭐가 안 하는 거야..머리 다 헝클어지겠네..”

 

하지 말라고 해도 딱 그때뿐이고, 어느새 그 경고를 즐기기까지 하고 있는 것 같은 민혁의 능글맞은 태도에 하영은 그냥 포기하고 자신이 끓인 맛있는 라면이나 마저 먹기로 했다. 이미 피곤한 상태인 저 자신을 더 피곤하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

 

하영이 참고 또 참다가 오늘, 펄펄 끓는 물같이 날뛰게 된 이유는 민혁과 똑같이 유치원 때부터 10년이 넘게 소꿉친구로 지내온 친구인 수영과 시훈이 갑자기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며 고민상담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고민상담에 하영의 의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둘 다 이런 쪽으로는 얼마나 약삭빠른지..10년지기 친구라는 것이 무색하게 친구 일이라면 거절을 못하는 하영의 약점을 노려서 선수를 쳤고, 하영은 그것에 말려든 것이었다.

 

두 달 전의 화창한 주말. 기분 좋은 날 그 두 사람은 갑자기 하영을 다른 시간, 다른 장소로 불러내더니 다짜고짜 ‘나 수영이/시훈이 좋아해. 근데 오랫동안 친구로 지낸 사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했다.


처음에 하영은 자신이 잘못들은 줄 알았다고 한다. 갑자기? 10년 지기 친구들이 서로 좋아한다고? 뭐지, 이거?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고.

 

네 명이 10년 째, 소꿉친구인데 그 중 두 명이 서로 좋아한다?

나머지 둘 중 한명한테 고민상담을 요청했다?

와, 이거 Real인가? 단단히 꼬였네. 만약에 둘이 잘 안 되면 망하는 건데. 아, 망할 건 없구나. 서로 좋아하니까.

근데 사귀다 헤어지면? 한명이 떠나야할 텐데..그건 싫다..

 

이런 생각 때문에 하영은 그날 밤 엄청 괴로워했다. 물론 그 다음날에 어차피, 자신과 상관없으니 그냥 신경 끄자. 라는 마음으로 평화를 얻었지만.


아무튼 그때는 그냥 곤란하면 거절해도 된다며, 자신이 알아서 해보겠다면서, 진짜 필요할 때만 물어볼 거라고 해서 하영도 그냥 알았다고 했다.


뭐, 아직 둘 다 모르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서로 좋아하는데 자신이 끼어들지 않아도 알아서 이어지든 고백했다가 차이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뭐든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달이 훌쩍 지나도 아무런 진전이 없더니 한 달 전부터 갑자기 두 사람 다 하영에게 자신들 좀 도와달라며 징징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이틀 정도는 하영도 잘 받아줬다. 그래, 고생이 많다. 뭘 도와줘야 하냐, 뭐든 물어봐라, 잘 모르긴 하지만 도와주겠다, 이런 식으로 달래면서.


문제는 그게 일주일도 이주일도 아닌 한 달이 넘어가고 있다는 것. 그게 문제였다.

 

매일같이 문자, 혹은 전화를 해서 ‘하영아, 어떡해. 나 좀 도와줘!’라며 자신들과 10년 소꿉친구라는 것만 빼면 아무 상관 없는 하영을 들들 볶아대니, 하영이 폭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참을성 강한 하영이 오죽하면 끓었을까, 오죽했으면 소리를 질렀을까.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는 것. 그것을 그 둘만 모르고 있었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친구라는 이유 하나로 묵묵히 도와주고 있는 하영과 하영이 폭발한 그날 아침에, 얼떨결에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종일 하영을 달랜 민혁까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

 

“아, 또 문자왔어..”

“뭐야. 또 왔어?”

“엉...어떡해..난 이제 포기할래..네가 대신 해줘.”

“..뭐? 내가 왜!”

“그냥..나 너무 힘들어..”

 

라면을 다 먹고, 시간을 확인할 겸 휴대폰을 본 하영이 울상을 지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어김없이 온 두 사람의 문자 때문이다.


설거지를 하던 민혁이 궁금한 얼굴로 다가왔다. 힘없이 휴대폰을 들어 민혁에게 건넨 하영이 저 대신 이 문자에 답장을-이 고통을 감당-해달라고 했다. 정확히 3초 뒤 상황을 파악한 민혁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소리쳤지만 하영은 잠도 안 자고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한 사람처럼 풀썩, 쓰러져서 잠이 들어버렸다.

 

“아, 이게 뭐야..난 어쩌라고..아아, 한하영..진짜..”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고민하던 민혁이 두 개의 메시지 창 중에 하나를 클릭했다. 그리고 화면을 스르륵, 넘기다가 답장은 해야 할 것 같아 키보드를 열었다. 그리고 하영의 말투를 떠올리며 문자를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결국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민혁은 문자 창에 무언가를 써서 전송 버튼을 눌렀다. 휴..아, 난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나야, 민혁이. 일단 너부터 좀 만나자. 더 하다가는 하영이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안 되겠다.]

 

**

 

“아, 제발..고백 안 할 거야? 응?”

“못하겠는데 어떡해..얼굴만 보면 말이 안 나와..”

 

또다시 화창한 주말. 얼떨결에 같은 입장이 되어서 10년 소꿉친구 보다 더한 동질감을 형성한 하영과 민혁은 피곤한 얼굴로 카페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그 둘의 앞에는 하영과 민혁을 괴롭게 한 사람 중 한명인 수영이 앉아있었고.

 

“뭐..?”

“못하겠어..말이 안 나와..흐엉..”

 

10년 된 소꿉친구를 둘이나 괴롭게 했으면서 한다는 말이 ‘못하겠다’인 수영에 이미 지쳐 음료수만 빨고 있는 하영 대신 민혁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하영과 민혁의 영혼이 바뀐 것처럼.


도저히 못하겠다면서 울상을 지은 수영이 고개를 숙이자마자 참고 또 참던 민혁이 폭발했다.

 

“야, 신수영.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을 이렇게 생고생을 시켜놓고 뭐? 안 해~? 못해~?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네가 몰라서 그렇지. 어제 한하영, 엄청 힘들어 했어. 밥 먹기 전에도, 밥 먹고 나서도 계속 문자 와서 펄펄뛰다가 지쳐서 잠들었다고.”

“뭐..? 정말로..?”

“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은 뭐냐..진짜 몰라서 물어? 아, 그래. 모르니까 그러겠지. 하여튼..신수영 어릴 때부터 눈치 꽝이었지..눈치고자에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한테 뭘 바래..”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얼굴에 더 화를 내려다가 이내 제풀에 지친 민혁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눈치가 없다.’, ‘눈치고자에 지밖에 모르는 사람한테 뭘 바라냐.’ 같은, 당사자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쁜 말이었다. 듣고 있던 수영이 입술을 툭, 내밀면서 씩씩댔다.

 

“뭐냐. 왜, 왜..서민혁 네가 그러냐? 하영이면 몰라도 네가 그런 말하면 기분 나쁘거든? 누구보고 지밖에 모른다는 거야..”

“지금 님이 하고 있는 짓이 지밖에 모르는 짓인데요? 남은 힘들어 죽겠는데, 지가 부끄러워서 못하겠다고 배 째라! 하는 게 얼마나 나쁜지 진짜 몰라? 너 인생 헛살았음. 진짜로 헛살았음.”

“아, 뭐래..! 가뜩이나 심란한데 시비 걸지 마..! 하영이만 그럴 수 있거든? 너도 어제 알았다면서 뭘 같은 입장인 척 굴어?”

“뭐? 야!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뭐! 내가 뭐! 넌 상관 꺼!”

“야!”

 

티격태격, 둘이 번갈아 시비조로 말을 주고받던 민혁과 수영의 대화는 역시나 민혁에게 잔뜩 세웠던 날카로운 눈초리를 거두고 울 것 같은 얼굴로 변해, 하영을 부른 수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아무튼 하영아, 너한텐 정말 미안한데..못하겠어..”

“하아..아니,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래...그냥 고백 좀 하라니까?”

“그치마안..입이 안 열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지칠 때로 지친 하영은 손에 얼굴을 묻으며 자신한테 뭐가 불만이기에 이런 짓까지 하는 것이냐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움을 구하는 입장임에도 너무나 두꺼운 철판을 가진 수영은 연신 못하겠다고만 했다. 그로인해 민혁과 하영의 속은 고구마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물기가 거의 없는 뻑뻑한 밤고구마로.

 

“그냥 시원하게 고백해버리지? 지금까지 진전이 없다며. 걔도 모르고 있는 거잖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은데? 그냥 고백해버려. 남 고생시키지 말고.”

“그래, 민혁이 말이 맞아..막말로 걔도 널 좋아할 수도 있는-”

“그건 아냐! 절대로 아냐!”

 

이 사태를 어느 쪽으로든 해결을 하기 위해 고백을 부추기는 민혁의 말에 불퉁한 얼굴을 하던 수영이 이어진 하영의 말에는 벌떡 일어서며 빽, 소리를 질렀다. 어찌나 크게 소리쳤는지 그 카페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 셋이 있는 곳을 바라봤을 정도였다.

 

“아..”

 

소리를 지른 당사자인 수영은 너무 놀라 자리에 앉지도 않고 굳어버렸고, 음료수를 마시던 민혁은 사레가 들려서 콜록거리고 있었고, 말이 잘린 하영은 역시나 굳어버린 수영을 바라보며 멍한 얼굴을 했다.

 

“참나..그럼 뭐 어쩌자는 건데. 이대로 우리는 계속 괴롭게 하고, 너도 괴롭게 살려고?”

“아니..”

 

기침이 멈춤과 동시에 먼저 정신을 차린 민혁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그대로 굳어있는 수영의 팔을 잡아 끌어내렸다. 그로인해 자리에 앉은 수영은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내며 얼른 이 사태를 해결하라는 민혁에 고개를 푹 숙였다.

 

“고백도 못하겠고, 다른 방법도 못 찾겠고..이건 뭐..야, 그냥 깔끔하게 마음을 접지? 방법이 없는데?”

“뭐? 야, 그건..”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민혁의 말에 울먹이며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이 대화가 얼마나 반복되었던가. 하지만 그때마다 고이는 눈물은 수영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너무 진심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 사람은 살아야 해. 아무 상관도 없는데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민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친구지만 본인이 해결도 못할 일을 주변인들이 계속 붙들고 도와줄 수는 없으니까. 결국은 본인이 어떻게든 움직여야 할 일이었다.

 

“거봐.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결국 제자리잖아. 네 마음이 진심이라면 적어도 그 중에 하나라도 시도해봐야 하지 않겠냐? 계속 이 상태면 진짜 우정도 못 지킨다고. 10년 우정 깰 일 있어?”

“.....”

“그래, 수영아. 벌써 두 달 넘었잖아. 너, 요새 시훈이 피해 다닌다며. 계속 그러다간 둘 사이가 이유 없이 멀어지기만 할 걸? 그냥 한번만 용기를 내봐.”


민혁에게 들들 볶아지듯 혼나고 풀이 죽은 수영을 하영이 달랬다. 울먹이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져서 없는 기운을 뽑아서 어르고 달래는 것이다.


사실은 제발 빨리 고백을 하던 뭘 하던 일이 진행되기를 바랐지만. 하영이 수영의 손을 잡아주며 괜찮을 거라고 다 잘 될 거라며 달랬다.

 

“하, 하지만..고백했다가 차이면..그때는 친구로도 못 있잖아..흐..난 그런 거 싫단 말이야..좋아하는데 확신이 없으니까 못하겠다고..흐어엉..”

 

결국 마음 여린 수영은 울음을 터트렸다. 아까의 일 때문에 카페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쏠려있다는 것을 신경도 쓰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손을 잡고 있던 하영이 울고 있는 수영을 끌어안아 토닥이고 뭐라 한마디 더 하려던 민혁 또한 아무 말 없이 일어서서 하영과 같이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자신들은 짝사랑을 해본 적이 없으니 이 애타는 마음을 100%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애타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고.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마음일까? 잘못하면 어느 것도 가질 수 없는 위험한 외줄타기. 


하영과 민혁은 흐느끼는 수영을 달래며 그런 생각을 했다.

 

**

 

“수영이는..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을까. 어차피 서로 좋아하는데..”

“모르지. 잘못하면 10년 우정이 깨지니까. 만약 잘 돼서 사귀게 된다고 해도 헤어지면 다시 친구로 못 돌아오니까 평생 못 보는 거잖아. 그래서가 아닐까. 무섭겠지, 봐온 세월이 기니까.”

“그렇지..나도 그 생각은 했어. 그냥 놔두고 싶어서 상관 안 했지. 처음 그 이야기 들었을 때는 알아서 잘 되겠지, 뭐. 이런 생각만 했단 말이야. 미안하긴 한데 그 사이에 엮이기 싫어서..”

“그렇지. 근데 지들끼리 하라고 나뒀더니 결국 잘 안 됐지.”

“응..그러니까, 그게 문제야. 근데 도와주고 싶어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공감을 못하겠어. 짝사랑을 해봤어야 어느 정도 공감을 해줄 텐데..그러니까 해결 할 방법도 생각 안 나고..휴, 아무런 도움도 못 되어줘서 미안하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우리가 아무리 자리 깔아줘도 지들이 좋아한다고 말 안 하면 끝이야.”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수영을 달래 어찌어찌 집으로 보낸 후. 하영과 민혁은 한적한 가로수 길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이 엉망진창인 ‘사랑과 전쟁’을 어떻게 해결하고 마무리 지어야 하나, 에 대해 생각했다.


둘 다 짝사랑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 막막했고,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지만 10년을 본 소중한 친구들이 괴로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라지. 라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분명 수영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더는 이 일에 묶이기 싫다며, 알아서 하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그렇게 눈물까지 흘리는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하나. 10년 우정이 그렇게 얄팍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결국, 반드시 이 일에서 벗어나겠다던 결심은 와장창 깨졌고 다시 원점이 되었다.

 

“그나저나, 둘 다 소심해서 어쩌지? 이 대로면 계속 이 상태일 걸.”

“그렇지. 둘 다 겁나 소심해.”

 

이 일은 만만치 않았다. 사실, 7살 시절부터 10년이 넘게 형제자매처럼 자랐지만 적극적이고 과감한 성격을 가진 하영, 민혁과 달리 사랑과 전쟁을 치루고 있는 수영과 시훈은 그 둘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겁이 많고 눈물도 많고 마음이 여리던 수영과 차분하고 진중하지만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시훈이 서로 좋아한다니..하영과 민혁은 10년 친구들이 서로 좋아하고, 서로 삽질 중이라는 사실보다 그게 더 놀라웠다.


소심한 성격과는 반대로 예쁘고 잘생긴 외모 때문에 인기는 참 많았는데, 고백을 받아도 다 거절하더니..결국 이 사태를 만든 것이다.


그래, 인기가 많으면 뭐하나..고백도 제대로 안 해본 녀석들이 갑자기 짝사랑? 누가 개입을 하지 않으면, 하영과 민혁이 손 놓고 지켜보고만 있으면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대로 뒀다가는 10년이 더 지난다고 해도 그대로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야, 가자.”

“응. 일단 걔한테도 가봐야 할 것 같아. 오늘..담판을 짓자.”

 

동시에 똑같은 결론을 내린 하영과 민혁은 전쟁을 앞둔 병사 같은 얼굴로 일어서서는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당사자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 사이에 있는 우리라도 열심히 움직여야지. 소중한 10년 우정이 이런 식으로 망가지려는 걸, 두고 볼 수 없으니까.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그런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은 비장하게 각오를 다졌다.

 

**

 

딩동- ,

 

“야! 이시훈! 너 당장 문 열어!”

 

가로수 길을 지나 10분 정도 걸었을까. 주택가가 나왔다.


그 수많은 주택들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흰색의 깔끔한 2층 주택 앞에서 멈춰선 하영과 민혁이 초인종을 눌렀다. 민혁은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자 사랑과 전쟁의 또 다른 주인공인 시훈을 큰 소리로 부르기까지 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퀭한 얼굴의 시훈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뭐야..하영이랑 서민혁? 네들이 웬일이야,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이야기 할 게 있어서 왔지. 들어가도 돼?”

 

점심때가 조금 지난 시간에 갑자기 찾아온 민혁과 하영을 번갈아 본 시훈이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하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어와. 부모님 외출하셔서 저녁에나 오셔.

 

“아, 그래.”

“그거 잘 됐네. 부모님이 안 계시다니. 넌 오늘 우리한테 좀 맞아야 해서.”

“뭐? 그게 뭔 소리야? 야, 무슨 말이냐고.”

“아아, 들어가 보면 알게 되니까 묻지 말고 일단 들어가자.”

 

하영은 체념한 것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 뵈는 게 없어진 민혁은 살벌한 소리를 하며 시훈의 등을 떠밀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시훈에게 ‘들어가 보면 알게 되니까 묻지 마.’라고 하면서 말이다.

 

*

 

살벌한 기세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점심도 안 먹은 채로 수영에게 시달렸더니 배가 고픈 탓에 먼저 배부터 채우기로 한 하영과 민혁은 거실 소파에 늘어졌다. 부엌을 뒤지던 시훈이 뭘 먹을 거냐고 물어왔다. 배고프지. 너희 점심 안 먹었다며. 뭐라도 먹을래?

 

“뭐 있어?”

“어..고구마? 어제 많이 받아서 왕창 삶았는데..엄청 많아서, 먹을래?”

 

윽, 그건 좀..그거 말고 다른 건 없냐? 시훈의 입에서 ‘고구마’라는 말이 나오자 절로 인상이 써진 두 사람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고구마라면 차고 넘치게 먹고 있으니 절대로 사양이었다.

 

“고구마 싫어? 둘 다 좋아했던 것 같은데..알았어.”

“어어, 고구마만 아니면 돼. 그 외에는 다 좋아..”

 

결국 선물로 받은 빵과 케이크를  꺼내온 시훈이 거실 탁자에 그것들을 내려놓고는 얼른 바닥으로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스르륵, 천 조각이 흘러내리듯이 거실 바닥으로 내려온 하영과 민혁이 포크를 집었다.

 

“음..맛있다! 이거 어디 거야?”

“몰라. 나도 선물 받은 거라서.”

 

케이크를 한입 떠서 입에 넣은 하영의 얼굴에 스르륵 미소가 걸렸다. 단 것이 들어가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 덕분이었다. 단 걸 좋아하는 하영은 벌써 케이크를 세 개나 해치웠다.


반면, 단 것에 면역이 1도 없는 민혁은 멋모르고 집은 쇼트케이크를 한입 먹더니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제 손에 들린 쇼트케이크를 노려보던 민혁이 너무 달아서 혀가 아리다며 울상을 지었다. 윽..너무 달아..넌 진짜 잘 먹네..난 못 먹겠던데..엄청 달아, 이거..혀가 다 아리다고..

 

“내 거랑 바꿀래? 이건 별로 안 달아. 다크 초콜릿이랑 코코아 맛이라서.”

“어..?”

“자, 이거 먹어. 나 포크에 입 안 댔어. 한입밖에 안 먹었고.”

 

하영이 포크를 입에 문 채로 자신이 한입 먹은 케이크를 민혁에게 건넸다. 벌컥벌컥, 찬물을 들이키던 민혁이 자신이 지금 뭘 잘못 들었나 싶어 황당한 얼굴을 했다.


민혁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 해보인 하영이 뭐가 문제냐는 얼굴을 했다. 유독 이런 것에만 거침이 없는 하영에 괜히 부끄러워진 민혁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아니..돼, 됐어..먹던 걸 왜 바꿔..그냥 너 먹어..”

“응? 난 괜찮은데? 나 입 안 댔다니까?”

“아, 아냐..그래도 됐어..그냥 너 먹어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린 하영의 순수한 얼굴에 민혁은 속으로 ‘얘는 왜 이런 거에만 눈치가 없어..’라고 생각하며 귀를 붉혔다.


평소, 능글맞은 면이 강한 민혁이 유난히 부끄러워하는 때가 이런 경우였다. 여자형제가 없어서인지 이런 것에 예민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진짜 괜찮아? 너 표정 완전 썩었는데?”

“괜찮아, 괜찮아..”

 

하영과 민혁의 치열한 공방전은 결국 저 멀리 치워버렸던 쇼트케이크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온 민혁으로 인해 마무리 되었다. 그쯤하자 하영도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오! 오늘 기념일로 삼아야 할 것 같은데? 단 거랑 담 쌓은 줄 알았던 서 민혁이 자진해서 단 걸 다 먹다니. 웬일이냐?”

 

그걸 지켜보던 시훈이 키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미있다는 듯 웃긴 했지만 하영의 눈치를 보며 곤란한 얼굴로 억지로 쇼트케이크를 먹고 있는 민혁을 위해 달지 않은 음료라도 내주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 눈치는 있어야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시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

 

“야.”

“왜.”

“나한테 할 말 없냐?”

“뭘.”

“.....”

“그러니까, 뭘 말하냐고. 뭘 말해줘?”

“너, 신수영 좋아하지.”

 

푸웁- , 오렌지주스를 마시던 시훈이 머금었던 주스를 다 뱉어버렸다.


하영이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둘만 남자 민혁이 운을 뗐고, 먼저 말을 걸어오기에 그냥 받아쳤을 뿐인데 갑자기 요즘 가장 신경 쓰이는 주제를 콕, 집어서 말하니 입에 머금었던 음료수를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고 다 뱉어버렸던 것이다. 야, 콜록..! 너..너..그거..

 

“내가 모를 것 같았나보네. 너도 참, 내가 그 정도로 눈치 없어 보이냐? 미안하지만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서 말이야.”

“어, 어떻게..어떻게 알..”

“어떻게 알았냐고? 그럼 넌 내가 뭘 모를 줄 알았는데? 네가 신수영 좋아하는 거? 아니면 네가 고민상담 한답시고 한하영한테 하루에도 몇 번씩 문자하고 전화한다는 거? 것도 아니면 좋아한다고 한지 두 달이 넘어가는데도 아직 고백도 못한 거? 어떤 걸 몰랐으면 하는데.”

 

콜록대며 기침을 하던 시훈이 이어진 민혁의 대답에 멍한 얼굴을 했다. 정곡을 찔린 탓이다. 그에 비해 민혁은 아주 평온한 얼굴로 심드렁하게 귀나 후벼댔다. 그에 더 다급해진 시훈이 민혁의 팔을 붙들었다. 야, 그..수, 수영이도 알아..? 내가..자기 좋아하는 거..

 

“아니. 알 리가 없지. 그 눈치고자가.”

“아, 다행이다..”

 

수영은 모르고 있다는 대답에 시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붉어졌던 뺨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신수영만 관련되면 저렇게 빨개지는데..대체 어떻게 이시훈이 자길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거지, 걔는.’

 

붉어졌다가 하얘진 뺨을 보며 민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소심한 탓에 두 사람이나..아니, 어쩌면 세 사람을 고생시키고 있는 시훈이 얄미워서 이마를 쳤다.

 

“뭐가 다행이야, 인간아. 걔가 네 마음을 1도 모르면 이어질 가능성이 더 없어지는 건데. 야, 이시훈. 너 이대로 계속 지낼 거냐?”

“아, 진짜..그럼 뭐 어쩌라고...”

“고백해.”

“못해.”

“아니..걔도 너 좋아할지 모르잖-”

“아닐 거야.”

“아, 아니..내 말 좀 들-”

“아니야.”

 

그나마 수영보다는 이성적이라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더 말이 안 통하는 거대한 철벽을 대하는 느낌에 얼이 빠진 민혁이 때마침 나온 하영에게 도움을 청했다. 야..한하영..

 

“..? 뭐야, 왜 그래?”

“아, 와봐..신수영보다 더해..”

“응?”

“야, 수영이가 여기서 왜 나와?”

“아, 아니다..”

 

시훈만 모르는 이상한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 동시에 시훈을 바라봤다. 너무 노골적인 눈빛에 움찔,하며 놀란 시훈이 얼른 본론이나 꺼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수영이 좋아한다며. 왜 아무것도 안 해?”

“뭘 아무것도 안 하냐..며칠 전에도 같이 영화보고 밥 먹었는데.”

“그럼 왜 고백 안 해? 우리가 보기엔 쌍방인 것 같아. 썸이라고, 썸.”

“그래도..아니면 어떡해. 그러면 우정이랑 사랑 둘 다 잃는 건데. 난 그런 거 싫어.”

 

예상은 했지만 벌써부터 밀려오는 답답한 느낌에 하영과 민혁은 사실 시훈이 자신들에게 케이크를 준 것이 아니라 삶은 고구마를 잔뜩 준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면 닮는다고, 고백 못하는 이유도 어쩜 이리 똑같은지. 두 사람은 ‘너희 둘 다 서로 좋아하고, 삽질 중이라고! 그러니까 그만 고백하고 얼른 사귀라고! 우리 그만 괴롭혀!’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야, 그래도..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너도 지치고 아무 진전도 없지 않겠어? 고백 안 하면 평생 친구로 지내야 하는 건데..만족할 수 있어?”

“..응. 내가 잘 숨기면 되니까.”

 

하아..너무 신중하고 너무 우유부단한 시훈에 동시에 한숨을 내쉰 하영과 민혁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야, 그냥 말하자. 응?

아, 그래도..고백은 중요한 건데..둘이 하게 하자..

아니야. 이 상태면 백만 년이 지나도 고백 못할 걸.

그럼 어쩌지?

그냥 확 불어버릴까.

야, 그건 안 돼..!

 

“야, 시훈아.”

“어?”

 

차분하게 시훈을 부른 민혁이 얼굴을 굳혀 진지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평소와 다른 민혁에 놀란 시훈이 침을 삼켰다.

 

“이대로 고백 안 하면 너 진짜 후회할 거야. 그래도 괜찮아? 상대가..신수영이 너랑 똑같은 마음일 수도 있는데 진짜 고백 안 할 거라고?”

“.....”

“한번 잘 생각해봐. 뭐라도 해야 결과가 나오지.”

 

단호한 말투로 충고한 뒤, 아무 대답이 없는 시훈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킨 민혁이 하영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럼..우리 이만 갈게. 잘 먹고 잘 쉬다간다. 가자, 한하영.

 

“어? 어..”

“아, 그리고 앞으로 얘한테 그만 연락해. 한달 가까이 받아줬으면 충분하지 않냐.”

 

벗어뒀던 외투를 챙기며 넌지시 하영을 챙기는 말을 한 민혁에 시훈은 고개를 들었고, 하영은 ‘얘가 왜 이러지.’라는 얼굴을 했다.

 

“뭘 그렇게 봐? 얘가 날뛰면 나도 힘들어서 그런다, 왜. 한 달 내내 참다가 어제 펄펄 날뛰었거든. 말리느라 겁나 힘들었음. 알았으면 그만해라. 어?”

 

원래대로 돌아와서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는 민혁에 그냥 상황에 따른 변덕이었구나, 싶어 안심한 하영은 신발장이 있는 현관 쪽으로 유유히 걸어갔고 그 장난스러운 말에 그제야 피식, 웃게 된 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은 심란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있어서 좋았기 때문이다.

 

**

 

“와, 진짜..겁나 답답하네..너 힘들었겠다.”

“응..엄청 힘들었어. 지금은 너랑 이런 이야기라도 할 수 있지..그 전에는 아무한테도 말 못해서 진짜 죽을 것 같았어. 무튼, 너무 우유부단해..둘 다 너무 답답해서..돌아가실 것 같아.”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덕분에 떨어지는 벚꽃 잎을 바라보며 나란히 걷던 하영과 민혁은 횡단보도가 있는 길가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 앞에서 멈춰 섰다.


활짝 핀 벚꽃을 바라보며 하영은 중얼거렸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하던 간에 고백할 거야. 저렇게 애타는 마음도 좋지만 너무 힘들 것 같거든. 난 무조건 직진이야.”

“그러게, 나도 그럴 걸. 답답한 건 못 참으니까.”

 

민혁도 똑같이 고개를 들어 벚나무를 바라보며 답했다. 이마 위로 떨어진 벚꽃 잎을 떼어낸 하영이 그걸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떨어지는 벚꽃 잎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말이 있던데. 걔네한테 잡아보라고 할까?”

“애초에 쌍방인 마음, 둘 다 용기를 못 내서 그런 건데..그런 거 가지고 될까.”

 

민혁도 팔랑팔랑 날아다니던 벚꽃 잎을 손으로 휙, 낚아챘다. 하영은 손에 들린 벚꽃을 입으로 후, 불어 날리고서는 웃으며 답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셈치는 거지, 뭐.”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온 것을 본 민혁은 하영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얼른 건너자고 손짓했다.

 

“그럼, 네 말처럼 지푸라기라도 잡아볼까?”

 

신호등을 건너며 민혁이 말했다.

 

“뭘 어쩌려고?”

 

하영이 걸음걸이가 큰 민혁을 쫓아가기 위해 종종걸음을 치며 물었다.

 

“말했잖아. 사랑의 계절인 봄이기도 하고, 벚꽃도 엄청 많으니까..지푸라기라도 잡는 셈치고..다 같이 놀러나가자.”

 

민혁이 맞은편 길가에 도착하자마자 답했다. 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우리끼리 봄 소풍이라도 가자는 거야?”

“응. 어쩌면, 걔네한테 고백하라고 다그치는 것보다 잘될 수도 있잖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민혁이 대답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하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수도 있겠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과 5월사이의 어느 날.

열일곱 소년, 소녀들의 봄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끝.

꿈꾸는 일은 즐겁다. 얼렁뚱땅 굴러가는 글방 주인장 & 초보 작가.

꿈꾸는 소녀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