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열두 시가 되자 나와 나연이가 속한 차 끓이기 팀은 10분의 자유시간 후 홍보 팀과 교대했다. 



“우리는 저-어기 신관 쪽으로 갈게. 이따 반에서 만나!”



일의 효율성을 위해 두 명씩 짝을 지어 구역을 정했다. 다른 애들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나연이는 한복 치마를 종아리께까지 끌어올리며 옆에 있던 벤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씨, 겁나 거추장스럽잖아. 앉아서 차 끓일 땐 몰랐는데.”

“그래도 예쁘긴 되게 예쁜데.”



“예뻐서 좋아?”

“그럼, 좋지.”



“와, 김여주가 예뻐서 좋아하는 것도 다 보고. 신기하네.”

“허. 내가 무슨 로봇이야?”



“우리 반 대표 로봇이지. 근데 우리 진짜 한 번씩 이렇게 꾸미고서 기분전환 좀 하자. 친구가 활짝 피니 내 마음이 너-무 좋다.”

“좋아해 줘서 고맙다.”



“부끄러워하기는.”

“이제 일어나서 좀 돌아야지. 이거 들고.”



“얘가 얘가, 뭘 모르네. 여기 앉아만 있어도 다 광고가 된다니까-? 우리 옷이 여기서 제일 시강이야. 여기 피켓도 딱 있겠다. 뭐가 문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내 모습에 툴툴거리면서도 결국 따라 일어나던 나연이가 한탄하듯 입을 열었다. 



“아- 김여주가 남친만 없었어도 오늘 같은 날 딴 학교 남자애들이랑 만나고 그러는 건데.”

“만나서 뭐.”



“뭐긴 뭐야, 꽃돌이들 만나서 솔로 탈출이지. 근데 다 틀렸어. 김여주 때문에.”

“왜 하필 다른 학교 애들이야?”



“그런 로망 있지 않아? 다른 학교 남자애들이 그래도 우리 학교 애들보단 나을 거라는 로망? 에잇. 어쨌든 다 틀렸으니까 니 남친이네 검도부 친구들이나 소개시켜줘.”

“··· 그렇게 말해봤자 난 아무도 모르는걸?”



“뻥 치시네. 일 년 넘게 사겼다며. 남친이가 소개 안 해줬어?"

“···.”






.


.


.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우린 어느새 신관 앞을 지나고 있었다. 건물 안쪽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탄성에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표지판 하나.



< 검도부 공개 대련 >

12:00 - 13:30 1차

14:00 - 15:30 2차

신관 체육관



“아, 여기서 하는구나? 알고 온 거야?”

“··· 아니.”



“재밌겠다. 들어가 보자.”

“지금?”



“저 안에도 사람 짱 많을 거 아냐. 광고 확실히 되지.”



한쪽 팔로는 피켓을 들고, 다른 쪽 팔로는 내게 팔짱을 낀 나연이가 신관 안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체육관 안은 이미 먼저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것도 여자 사람들로. 그 중 태반이 [ 전정국 사랑해 ] 나 [ 우유 빛깔 검도 남신 정국♥ ] 같은 문구가 쓰인 피켓을 든 타 학교 여학생들이라는 점이 내 입에서 실소를 자아냈다.  



“이야- 역시 검도부 간판 전정국. 인기 많네.”



작게 감탄을 하며 팔꿈치로 나를 툭툭 치는 나연이. 정국이가 네 경기를 연달아 한다고 했었던가. 체육관 한쪽 벽면에 일렬로 앉아있는 흑색 도복 차림의 검도부 애들 사이에 정국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금 막 대련을 마친··· 아, 저깄다. 대련이 끝나고 잠시 휴식을 갖는 중인지, 호구를 벗고서 땀을 식히던 정국이가 바닥에 있던 물통을 집어 들었다. 



“저··· 오빠, 여기 시원한 걸로 드세요.” 



근처 여고 교복을 입은 앙증맞은 여자아이가 관중석 앞쪽에서 종종 걸어 나와 몸을 배배 꼬며 음료수 통과 수건을 정국이에게 건넨다. 오오올- 그 모습을 본 검도부 애들은 바닥에 발을 구르며 신나게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더는 보고 있기 힘들어 고개를 돌렸다. 정국이의 수많은 소녀 팬들 중 하나일 뿐인데. 나 왜 이렇게 예민하지. 한숨이 나왔다. 더 있다간 괜히 마음만 더 불편해질 것 같아 나연이를 잡아 끌었다.



“여기 사람 너무 많아서 광고도 안 되겠다. 나가자.”

“어? 어···.”



체육관을 나선 이후 줄곧 기운이 빠진 채 터덜터덜 걷는 내게 나연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신경 쓰여?”

“뭐가?”



“아까 그 여자애.”

“아니? 전혀. 내가 걔 옆에서 겪은 시간이 얼만데. 그런 거 가지고 신경 쓸 리가 없지. 절대.”



“신경 많이 쓰이나 보네. 야, 난 니가 그렇게 빨리 말하는 거 처음 본다.”

“···.”



“지지배야, 너 전정국 옆에 있어도 1도 안 꿀려. 그러니까 인상 좀 펴고. 어깨도 좀 펴고.”

“펴고 있었어.”



“저언혀 아니었거든.”

“후···. 우리 몇 시간이나 남았지?”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하며 신관 건물 주위로 돌아다니다가, 학생 둘이 너무 예쁘다며 같이 사진 찍자는 아주머니 몇 분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틈나는 대로 운동장에 줄지어 차려진 먹거리 천막에서 간식을 먹다 보니 어느새 교대 50분 전이었다. “아- 교실 가기 싫어.” 나연이가 울상을 지었다. 역시 교실에서 차 끓이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할 만 하네. 기분은 전과 비교했을 때 많이 나아져 있었다.






*






“같이 좀 가지. 매정한 지지배. 나 머리만 다시 만지고 온다. 얌전히 여기 앉아있어.”

“응.”



교대 시간이 20분 정도 남았을 무렵, 나연이는 화장실에 간다며 가까운 본관 건물로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덜 붐비는 운동장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래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는가 싶더니, 타학교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남자애들이 스탠드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지나가는 길이겠지. 시선을 돌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리에서 빠져나온 한 명이 곧장 내 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확인했다. 성가신 일이 생길 것임을 직감하고서 내려놓은 피켓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그새 앞으로 다가온 녀석이 역한 담배 냄새를 풍기며 입을 열었다.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안녕.”

“···.”

“몇 살이야?”



애초에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못 들은 척 나연이가 들어간 본관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녀석은 피식거리며 내 옆에 앉았다. 스탠드 아래에서 위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교복 무리가 환호성을 지른다. 불쾌감에 저조해지던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아마 체육관에서 정국이에게 환호하던 그의 부원들의 떠올라서였을까. 그만. 그만 생각하자. 쓸데없는 상념을 털어내려 머리를 두어번 흔들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나연이 따라서 갈 걸 그랬나. 한복이 거추장스러워 가고 싶지 않았던 거였는데 이거야 원, 일이 더 성가셔졌잖아. 



“한복 잘 어울린다. 번호 좀 줄래?”



앞뒤 없이 계속되는 반말에 한 소리 하려다 그만뒀다. 됐어, 김여주. 동요할 필요 없다니까. 곧바로 피켓을 챙겨서 계단을 오르는데 우악스러운 손이 팔목을 잡아채 아래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일순간 몸이 휘청거리며 귀에서 삐- 이명이 들려왔다. 하마터면 스탠드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다는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 균형을 잡지 못하는 내 양어깨를 붙잡아 고정한 녀석이 다시 한번 내 팔목을 움켜잡고 제 앞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족제비 같은 얼굴이 눈앞에 바짝 다가오자 불쾌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왜 자꾸 사람을 무시하지? 귀머거리야?”

“놔라.”



“튕기는 것도 어지간해야 귀엽게 봐주는 거지, 너무 과하면 매력 없어.”

“놓으라고.”



한 팔 가득 들고 있던 피켓을 내려놓은 후 있는 힘껏 뿌리치려 했지만 잡힌 팔목은 점점 더 옥죄어 왔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오히려 팔 전체에 전해지는 통증만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바스락거리는 한복은 움직임을 훨씬 더 둔하게 만들었다. 무턱대고 몸부림치다가 옷이 찢어지기라도 할까 봐 온 힘을 다해 뿌리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잔뜩 열 받은 채로 한참을 씩씩대고 있을 때,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가온 기척이 순식간에 날 녀석에게서 떼어놨다.



“놓으라잖아.”



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그럼에도 잊은 적 없는 목소리였다. 흠칫하며 고개를 돌리자 검은 티셔츠에 교복 바지를 입은 박지민이 보였다. 박지민은 내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로 계단 위쪽을 향해 고갯짓 했다. 올라가라는 거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피켓을 주웠다. 일단 누구라도 불러와야 해. 이왕이면 선생님으로. 거추장스러운 한복 치마를 한쪽으로 올리며 계단을 올랐다. 



“이 샌님 같은 건 또 뭐야.”

“남의 축제에 왔으면 조용히 놀다 꺼져.”



계단 끝까지 올라간 후 뒤를 돌아봤을 때 아래쪽 상황은 꽤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양쪽으로 목을 꺾던 족제비가 박지민의 어깨를 한 손으로 밀쳤다. 스탠드 아래에 서 있던 무리도 하나둘 위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머릿수가 여섯이다.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어떡하지?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선생님. 선생님을 불러와야지. 근데 어디서 찾아? 축제라고 교무실도 다 잠가놨던데. 



“어? 야! 김여주, 어디 가!”



손에 물기를 털며 걸어오던 나연이를 지나쳐 무작정 달렸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 밖에 없으니까. 치렁치렁한 치마를 한 번에 잡아 올린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어? 너 정국이 여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3학년이었다. 김태형. 이름 세 자가 새겨진 빨간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모르는 사람이 맞는데 선명한 인상과 날카로운 눈매가 어쩐지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얼굴이 아주 솔직하네. 어디서 봤냐면, 꽤 예-전에 만났었는데. 체육관 앞에서. 네가 정국이 기다리고 있을 때.”

“···.”

“그땐 정국이 여친 아니라고 했었지, 아마?”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었다. 박지민이 지금쯤 그 무뢰한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이 사람도 검도부였다는 거잖아. 그럼 꽤 세지 않을까? 태연한 얼굴로 정국이의 안부를 묻는 사람을 붙잡고 다급하게 외쳤다.



“도와주세요! 저 밑에···.”



발을 동동 구르며 스탠드 쪽을 가리켰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 혼자 서 있던 자리엔 이미 타 학교 남자애들 여러 명이 잔뜩 몰려 있었고, 박지민은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황 파악을 끝낸 김태형이라는 사람은 망설임 없이 계단 쪽으로 발을 옮겼다.



“남의 학교 와서 시끄럽게 만드는 새끼들은 어딜 가나 있다니까.”



김태형이 내려간 후, 위쪽에서 초조함에 애꿎은 신발코만 찧어대고 있을 때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쩌-어기요. 저기 제 친구 죽어요! 빨리요, 빨리!”



학주 쌤을 대동하고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 김여주? 너 어떻게 여기···, 어? 박지민은?”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정호석은 곧 스탠드 아래쪽으로 선생님을 이끌었다. 다행이다.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교복 무리를 열중쉬어 자세로 세워놓은 학주 쌤의 훈계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박지민의 팔을 붙잡고 올라오는 3학년 선배와 뒤따라 올라오는 정호석이 보였다. 내 옆으로 다가온 나연이가 꿈에 빠진 듯 몽롱한 얼굴로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화장실 갔다 왔더니 이게 대체 뭔 일이래···? 저 꽃돌이들은 또 뭐고!”



속삭이듯 뒷말을 뱉은 나연이가 내 대답을 재촉했다. 어느새 계단 위로 올라온 박지민은 물끄러미 날 응시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췄지만, 일 년 전 그 날과 다르게 내 눈을 피하지 않는다. 



“야, 박지민. 너 괜찮은 거야? 맞은 거 아니지?”

“··· 어.”



정호석이 박지민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신경질적으로 몸을 틀며 정호석을 밀어내는 모습이 우스웠다. 계단 위로 올라온 뒤에도 줄곧 우리 주위를 맴돌던 3학년 선배에게 고맙다 인사하자, 그는 대답 대신 내게 찡긋 윙크했다. 이 사람··· 석진 선배랑 친군가? 영양가 없는 생각에 빠져있을 때, 홍보 피켓을 유심히 살피던 김태형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물었다. 



“2학년 4반. 야, 차차. 여기 가면 너 있냐?”

“예?”



순식간에 성큼 내 앞으로 다가온 김태형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남의 얼굴을 보고 비웃다니 뭐 하는 짓이야. 살짝 뒷걸음질 치며 미간을 좁혔다. 



“알겠다. 정국이가 아주 꽁꽁 숨기는 이유.”

“···?”



“우리 정국이는 말이야, 같은 부 애들한테 여친 얘기 한마디도 안 하거든. 그래서 우리 다 올해 처음 알았잖아. 그 자식 여친 있는 거.”

“···.”



“장담하건대, 분명 지금도 정국이 솔로인 줄 알고 들이대는 여자애들 꽤 있을 걸. 원체 사귀는 사람 있다는 티를 안 내는 녀석이니까.”

“······.”



정국이에게 시원한 음료수를 내밀던 귀여운 여자애. 정국이의 뒷모습. 그 둘을 보며 환호하던 정국이의 부원들이 떠올랐다. 그 당시에 뭉게뭉게 피어났지만 애써 지워버렸던 생각이 있었다. 여자친구 있는 애한테 추파가 들어오는데 저런 식으로 환호한다고?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거라고만 생각했다. 쿨하지 못한 것이라 판단해 내내 혼자서 삭히고 있었다. 근데 아니었어. 이건 객관적으로 봐도 이상해. 사귀는 사람 있다는 걸 숨기는 거야? 왜? 김태형으로 인해 또다시 생각의 늪에 빠지고 말았지만, 정작 내 마음을 밑도 끝도 없이 심란하게 만든 장본인은 무해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또 보자, 차차.”






*






“너네 반 진짜 튀긴 튀네. 뭐야? 전통 찻집이야?”

“뭐, 그런 셈이지.”



“신기할 것 같다. 우리도 가도 되나?”

“그래. 어차피 지금 교실 가는 길이니까 같이 가. 근데 너희도 2학년?”



“엉. 우리 둘 다 1반.”

“헐, 진짜? 대박 우연이네. 같은 이과잖아?”



“흠, 사실 엄밀히 말하면 우연은 아니지. 쟤랑은 1학년 때부터 알던 사이라서.”

“어쨌든 신기하네. 그건 그렇고, 아깐 어떻게 된 거야? 나 왔을 땐 상황 다 끝나 있었어서 암것도 몰라. 여주 저 지지배는 대답도 안 해주고.”



“아 그거. 본관 앞에 지나가고 있었는데, 박지민이 갑자기-”



처음 만난 사인데 저렇게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다니. 햇수로만 따지면 일 년이 넘은 나와 박지민보다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는 정호석과 임나연이 훨씬 더 가까워 보였다. 나란히 걷고는 있지만 녀석과 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박지민의 옆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맞은 건 아닌가 보네.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나 때문에 교복 무리에게 두들겨 맞기라도 했다면 짓누르는 죄책감에 녀석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을 거야. 일 년 전 쯤 흐지부지하게 작별을 맞은 후 교류는커녕 따로 대면한 적도 없었던 우리다. 이런 생뚱맞은 일로 얽히게 될 줄이야.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지민이 마침내 입술을 뗐다. 



“미안.”

“··· 무슨 소리야? 네가 왜?”



“···.”

“고맙다. 너 없었으면 한복 입고 추격전 한편 찍었을 지도 몰라. 그 인간들 진짜, 남의 학교까지 와서 민폐도 가지가지.”



박지민이 피식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난 계속,”

“···.”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어.” 

“···.”



“지금도 그래. 너무 늦지 않았다면 꼭 사과하고 싶어. 미안해.”

“···.”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 거냐고 일일이 따져 물을 필요는 없었다.



"여주야."

"응."



“생각해보니까, 오랜 시간 걸려서 생각해보니까 그렇더라. 어떻게 봐도 내가 널 몰아세울 입장은 아니었어.” 

“···.”



“좋은 친구를 잃었다고 생각했고,”

“···.”



“사과해야겠단 마음을 먹었을 땐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느낌이었고,”

“친구 사이에 공소시효가 어딨어.”



“···.”

“박지민.”



“···.”

“내가 말했잖아. 넌 나한테 충분히 좋은 친구였어.”



“···.”

“나 2학년 올라와서 친구 많이 사귀었는데, 너 만나기 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야. 그래서··· 쭉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너한텐.”



“··· 이제 와서 좋은 친구로만 네 옆에 있을 준비가 됐다고 하면··· 그건 너무 염치없어?”

“이젠 뭐, 나도 친구 꽤 많아져서 박지민 같은 친구는 딱히 궁하지도 않은데.”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정호석과 대화 중인 나연이의 뒷모습에 시선을 두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박지민이 시무룩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네 절친 1호는 나였어. 그건 절대 안 바뀌지.”

“그럼 뭐하냐고. 일 년이나 홀랑 잠수 탔는데.”



“··· 이렇게 너랑 얘기하고 있으니까 꼭 우리 1학년 때로 돌아간 것 같다.”

“··· 그러네.”



“아까 걔네한테 맞았어도 나쁘지 않았겠는데.”

“그건 또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더 극적이라 이 순간이 오래오래 남을 것 같아서.”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한 발상이라는 데엔 이견이 생기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박지민을 앞질러 갔다. 



“그럼 오늘 김여주가 끓여주는 차 마시는 거야?” 



방긋거리며 걸음을 재촉하는 박지민의 얼굴에 오래전 내가 참 좋아하던 순박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34



마지막 교대를 위해 박지민과 정호석을 주렁주렁 달고 교실에 도착했다. 언제부터 기다린 건지, 교실 한쪽에 앉아 있는 정국이가 보였다. 불과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도복 차림이었던 그는 검은 진 청바지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딘가 냉랭한 그의 시선이 내 뒤에서 잠시 머무르다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무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얼굴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정호석이 먼저 달려 나가며 소리쳤다.



“오, 전정국! 간만이다!”



곧장 정국이의 맞은편 자리를 꿰찬 정호석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난 어쩐지 그 애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국이의 자리에서 좀 떨어진 곳에 박지민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 여주랑 나연이 왔네? 니네 인제 그만 놀고 피켓 받아서 가라.”



놀랍게도, 다도 카페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중이었다. 테이블도 몇 개를 제외하곤 꽉꽉 차 있던 터라 막 교실에 도착한 우리 둘도 팔을 걷어붙이고 밀린 주문부터 받기 시작했다. 주문을 받고, 차와 다과 접시를 이쪽저쪽으로 운반하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면, 그곳엔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정국이가 있었다. 건너편에 앉은 정호석의 이야기에는 흥미가 없는지 계속해서 단답으로 일관하는 듯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줄곧 나를 쫓고 있었다. 얼마 후 자리에서 일어난 정호석은 정국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박지민이 있는 테이블로 이동했다.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니는 진득한 시선을 오롯이 느끼며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손님도 꽤 빠졌겠다, 한숨 돌리며 리셉션 테이블의 메뉴를 정리하는데, 세은이가 다가왔다. 



“니 남친, 너 오기 사십 분 전쯤부터 와서 앉아 있었다고 그러더라? 원래 여기서 만나기로 한 거야? 애들이 너한테 문자도 했다는데.”

“아니, 몰랐어.” 



가방에 들어있는 폰을 확인할 겨를이 어딨어. 정국이한테 미리 들은 게 없으니 모를 수밖에. 사실, 내가 알지 못한 건 정국이가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대련을 언제 어디서 볼 수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부 활동을 하는지, 또 부 활동이 끝난 후 축제에서의 남은 시간은 어떻게 보낼 예정이었는지. 정국이와 같은 부에 있었던 사람에게 이상한 얘기를 들어서 그런가, 평소 같았다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상황들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렀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정국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름 굳건하게 지키던 긍지를 도둑맞은 기분이 들어 몇시간 전부터 마음이 어수선한 채로 돌아다녀야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구태여 날 소개해줄 필요는 없다. 그게 얼마나 볼이 화끈거리는 일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아까 강당에서의 그 상황. 도대체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장담하건대, 분명 지금도 정국이 솔로인 줄 알고 들이대는 여자애들 꽤 있을 걸. 원체 사귀는 사람 있다는 티를 안 내는 녀석이니까.”



아까 그 3학년의 말을 듣고 나니 의구심은 커졌다. 난 그 상황을 우연히 목도하게 됐지만, 그런 상황들이 전에도 여러 번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정국이에게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이런 모난 감정까지 그의 앞에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한창 한가한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있냐며 나연이가 등을 떠밀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최대한 비우고서 정국이에게 다가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정국아, 미안. 오래 기다렸지. 언제 끝났어?”

“핸드폰 확인 안 해?”



“··· 어?”



뒤늦게 가방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화면에 뜨는 알림. 여덟 통의 부재중 전화와 열두 통의 메시지. 



“미안. 볼 정신이 없었어.”

“···.”



입술을 다문 채로 말없이 날 응시하던 정국이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이 정도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정국이는 오랜만인데. 나 또한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풀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일부러 생글생글 웃으며 분위기를 녹이려고 노력했다. 



“이제까지 먹은 것 중에 뭐가 제일 맛있었어? 아쉽다. 아침에 왔으면 내가 직접 내려줄 수 있었을 텐데. 만들어 주진 못해도 내가 갖다주는 거니까 또 골라 봐봐. 아님 내가 골라줄까?”

“···.”



“아, 맞다. 나 아까 너 보러 체육관 잠깐 갔었는데 끝까지는 못 봤어. 잘 끝냈지?”

“··· 언제 왔었는데.”



“한··· 열두 시 조금 넘어서?”



드르륵- 



뒷문이 열리며 새로운 손님들이 밀려들었다. 이젠 정말 일어나야겠네. 의자를 뒤로 빼며 입을 열었다. 



“정국아. 나 일단 주문 받고 다시 올게. 뭐 먹을지 골라 놔, 알았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정국이를 향해 싱긋 웃고서 걸음을 옮겼다. 새로 들어온 테이블이 세 개. 리셉션 테이블에서 메뉴 세 장을 챙긴 후 발을 떼다 누군가의 단단한 몸에 머리를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꾸벅 인사하고서 가던 길을 가려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저음의 목소리가 나를 멈췄다. 



“여기오니까 진짜 있네, 차차.”

“···?”



“물어보는 걸 깜박해서. 아까 내가 도와준 은혜는 어떻게 갚을 거야?”



김태형은 나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와 ‘은혜'에 대한 멍멍이 소리를 펼치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돌아간 시선이 굳은 표정의 정국이에게서 멈췄다. 그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됐다. 내 시선을 따라가던 김태형은 정국이를 발견하고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 상상도 못했네. 정국이가 여기 있을 줄은.”

“···.”



“표정 풀어, 정국아. 별거 아니고, 우리 차차랑 나 사이에 끝나지 않은 계산이 남아서 말이야.”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김태형이 느릿하게 뱉어내는 의지는 정국이를 향한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런 이상한 뉘앙스로 얘기하다니, 이 사람 제정신이야? 미간을 좁히며 김태형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별안간 어디선가 의자 다리가 교실 바닥을 긁으며 기분 나쁜 소음을 만들어냈다. 침묵이 내려앉은 교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정국이는 냉기를 흘리며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가 서 있는 교실 앞에 다다를 때까지, 정국이는 단 한 번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이 교실에 나와 정국이 뿐이던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절한 시선이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정돈되지 않은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시선을 떨구었을 때, 커다란 손이 내 팔을 잡아 거칠게 끌어당겼다. 스탠드에서 있었던 소동 중 잡혔던 팔목이었다. 멍이 들었음이 분명한 위치에 다시금 힘이 가해지자 욱신거리는 고통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정국이를 올려다봤지만 그는 더이상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뒷머리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정국이가 입술을 부딪쳐왔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자 입술과 입술은 더욱 깊게 맞물렸지만 평소처럼 애정 어린 행위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거칠게 파고드는 키스는 아랫입술에 작은 생채기를 냈다. 찢어진 입술이 따끔거리며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반 애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개적인 장소였다. 내게 함부로 구는 그의 행동에 처음엔 놀랐고, 수치스러웠으며, 그다음엔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무엇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도 얼추 알겠고, 그의 연락을 확인하지 못한 것은 분명 내 잘못이었지만, 설명할 수 있었다. 오늘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떤 생각들이 날 괴롭히고 움츠러들게 만들었는지까지도. 설명할 수 있었고,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저, 설명할 기회가 필요했을 뿐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억압적으로 유린당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었다. 


두 손으로 있는 힘껏 그의 가슴팍을 밀쳤다. 원망에 찬 눈으로 정국이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눈을 깜빡이면 눈가에 고인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 최대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또르르, 찻물이 내려지는 소리를 제외하면, 교실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누구도 섣불리 침묵을 깨뜨리지 못했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교실 안의 관객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심지어 이 사달의 원인이 된 김태형조차도.



난생처음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제대로 꾸민 날. 아침부터 내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던 가장 큰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 예쁘게 꾸민 내 모습에 놀라 동그랗게 눈을 키우는 정국이가 보고 싶었다. 내가 세상 그 누구보다 소중하다는 듯 다정하게 웃어주는 토끼 같은 미소가 보고 싶었다. 사랑스러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품에 꼭 안길 수 있기를 바랐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버티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루가 이미 망쳐진 것 같아서. 교실 문에 가까워질 때까지 한 발짝, 두 발짝,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문을 연 후엔 양손으로 걸리적거리는 치마를 붙잡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렇게, 다시 한번 정국이에게서 도망쳤다. 











별 헤는 밤 복사나무 꽃 아래서.

노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