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천재라고 한다. 한 분야에 뛰어난 사람을 그 분야의 귀재라고 하고, 타고난 재주가 있는 사람을 영재라고 부른다. 그녀에게 그런 재능은 없었다. 작곡하는 사촌언니처럼 음악에 특출나다던가, 축구선수를 하는 학교 친구처럼 운동을 잘하지도 못했다. 공부는 그럭저럭, 생각해보면 꽤나 잘 했지만 세상에 그녀보다 똑똑한 사람은 많았다. 물론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 이 등도 해보고, 미국 유학도 갔지만 일단 그녀가 대단하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경이로울만큼 경이로운 사람도 아니었고.

성은 정이요 이름은 세희- 나기는 부산에서 났고 서울로 상경해서 대학을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가족관계는 엄한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의 아래에서 듬직한 오빠와 함께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내고...라지만 별볼일 없는 뒷배경은 고사하고. 집안은 평범하지만 돈은 없다, 모든 평범한 가정들이 그렇듯이. 굶지는 않았으나 십 몇만원짜리 운동화를 살때는 최소 이 주는 고민하고 사야했고, 대학을 다닐 때는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어 써야 했다. 조금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보자면, 일단 열심히 살다보니 미국으로 유학도 가고 (빠듯하긴 했지만), 자취하는 집은 좁았으나 가끔 돈을 모아 좋아하는 옷은 살 수 있었다.

아- 평범하다는 게 얼마나 슬픈 것인지. 질풍노도의 시기 사춘기가 닥쳤을 때, 그녀는 얌전하던 자신에게조차도 사춘기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걸 핑계삼아 자신의 평범함을 마음껏 슬퍼했다. 학원과 학원 사이 봉고차에서 삼십 분 동안 창밖을 내다보며 락 뮤직을 듣거나 자기 전 침대에 누워 달을 바라보던가 하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도 그녀가 평범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지만.

하지만 그녀 자신은 모르는, 그러니까 알기는 아는데 잘 알지는 못하는, 혹은 알 필요가 없다고 여겨서 알아내지 않은 특출난 재능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았을까. 솔직히 그녀 자신은 그게 특출난 재능이라고 여기지도 않아서 아직 평범한 학생 축에 남아있는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그 재능을 설명하고 그게 평범하냐고 물어보면 열 명 중 열 하나는 평범하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평범한 그녀의 재능은 평범하지 않았다. 

띠리리링-

"어, 여보세요?"

[야, 너 왜 전화를 안 받냐?]

"나 장보고 있었어. 지금 들어가."

걸려온 룸메이트, 재연의 전화에 그녀는 전화를 닫고 품에 들고있던 식료품 봉지를 고쳐들었다. 재연은 재미교포였다. 1.5세대로, 사실 뉴욕에 살고있지는 않았지만 세희가 유학을 올 때쯤 대학에 들어왔다고 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계기로 친해졌고, 두 사람 다 비슷한 경제적 빈곤층에 가까이 놓여있었기에 친해지고서는 같이 살 계획도 세웠다. 

미국의 이 번화한 도시, 뉴욕에는 그녀의 집이 있었다. 그녀의 학교도 있었고, 아르바이트하는 카페도 있었다. 물론 그녀와 관련없는 사람으로 치자면- 그녀의 친구들도 있었고, 이 도시에서 누구보다 가까운 룸메이트도 있었고, 뭐 본 적은 없지만 동경하는 가수도 있을 것이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이어폰을 귀에 꽂은 그녀가 가게 가까이에 놔둔 자전거를 찾으러 발을 놀렸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 평소 듣는 음악보다 라디오를 틀었다. 곧 뉴스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자전거의 잠금장치를 익숙한 손짓으로 풀고 장 본 물건을 자전거의 바구니에 대충 내려놓자 뉴스가 시작했다. 그녀는 저녁 시간을 맞추기 위해 급히 출발했다.

[오늘 오전 일곱 시 경, 뉴욕 브루클린에서 인질극이 벌어졌습니다...]

세상 참 험하다, 그녀는 그렇게 읊조렸다. 괜한 불안감이 드는 것도 막을 수는 없었다. 여자 두 명이서 사는 아파트가 자리잡은 곳은 그리 외진 곳은 아니었지만 치안이 좋은 곳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미국의 치안이 동아시아 나라들 만큼 좋기를 바랄 수는 없었고, 도시의 중심가로 가기에 대학생 둘의 수입은 뻔한 수준이었으니까. 일단 무서워하면서 거기에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정경유착과 관련한 비리 의혹을 해명하기 위한 기자회견을 연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불법적인 자금은 받은 적이 없다'며 부인하고...]

그녀와 룸메이트, 두 사람이 덩그러니 사는 아파트에서 음식과 회계-여기서 회계라는 건 두 사람의 집세나 생활비의 정리-를 담당하는 건 그녀였고, 청소 등 잡다한 살림을 담당하는 건 그녀의 룸메이트였다. 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대학생, 돈이 없어 같이 살기 시작한 두 사람이지만 그래도 확실히 같이 사니까 돈은 굳었다. 집세는 양분하니 물론이요, 음식도 직접 만들어 먹으니 싸고 심지어 취향이 비슷한 옷이나 화장품도 빌려 쓸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유학을 와서 일단 무엇이든 한푼을 아껴야 하는 그녀에게, 또 혼자 다른 도시까지 날아와 사는 그녀의 룸메이트에게 그건 참으로 큰 장점이었다. 성격도 잘 맞고, 돈도 아끼고, 일도 분담하고. 돈이 없어서 차는 없지만 자전거는 있었다. 그거면 됐지, 뭐.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였다.

쉬이이이잉-

문득 하늘을 울리는 소리가 느슨한 이어폰 사이로 그녀의 귀를 찔렀다. 그녀는 자전거를 멈춰세우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길을 가던 것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붉은색과 금색이 합쳐진 무언가가 날아가고 있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우와, 아이언맨..."

별로 관심있지는 않은, 그래도 유명한 히어로. 토니 스타크, 유명한 토니 스타크.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도 호크아이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잘은 몰랐을 뿐이고, 팬 같은 마음으로 돌아다닌 게 아니기도 하고. 그래도 처음 보는 히어로다.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살고있는. 그녀는 히어로들이 뉴스에 나오기만 하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입고있는 옷이나 물건들은 또 얼마나 비쌀까 상상하고, 세상을 지키는 것을 구경하며- 자신의 가당찮은 '재주'는 저런 히어로들과 비할 것이 아니기도 하고, 게다가 일단 히어로들은 돈이 많잖아. 돈이 없는 그녀에게 능력은 세상을 지키는 데 쓸 것이 아니라 막노동 하는데 쓸 것이었다.

"다녀왔어-."

"야, 나 배고파."

"인사 좀 해 줘라. 뭐 먹을래?"

"몰라. 아무거나."

집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 소파에 누워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재연이 그녀에게 -재연의 입장에서는- 인사 비스무리한 말을 건넸다. 식품 봉지를 주방에 내려놓은 그녀는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편한 파자마를 입고 나오자, 여전히 집에서 입는 후드를 입은 재연은 노트북과 친해지려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앞치마를 둘러매며, 주방 앞에 선 세희가 흘러가는 말로 던졌다. 

"아, 나 오늘 아이언맨 봤다."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

"어, 그 백만장자."

"잘생겼더냐?"

"그렇게 가까이서 말고. 하늘 날아가더라."

"참 이상해, 따지자면 미확인 비행물체나 똑같은데."

"뉴욕은 하늘에 날아다니는게 워낙 많으니까. 부자들은 맨해튼으로 나갈때도 헬리콥터 타고 가잖아. 돈만 많으면 뭘 못하겠어."

"근데 아이언맨은 허가 받고 나는건가?"

"몰라, 그렇겠지."

"아이언맨 어디서 봤다고?"

"장 보고 오는데 보였어."

장바구니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며, 세희는 재연을 살폈다. 재연도 딱히 히어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따지자면 그런 마법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보다 스크린에서, 혹은 무대에서 멋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배우나 가수 말이다. 세희는 그냥 관심이 없었다. 포기한 것에 더 가깝다. 뒹굴거리던 재연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과 동시에 위층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운동을 하는 모양이다. 매번 이 시간대만 되면 위층의 사람은 운동을 시작한다. 재연과 세희가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소음들을 그냥 넘기게 된 건 이 아파트에 들어온지 일주일이 채 안 되어서였다. 그만큼 이곳의 방음은 절망적이었다.

"그 남자는 완전 바람둥이잖아. 아- 나도 한번만 그런 남자랑 만나보고 싶다."

"바람둥이랑?"

"아니, 부자랑. 사주는 선물도 대단할 거 아냐. 한번 노력해볼까? 대학에 특강이라던가 오기만 하면..."

"너 같은 애들이 한 둘이냐. 포기하셔."

"야, 그러지말고..."

"포기해."

"그럼 캡틴 아메리카는 어때? 몸이 완전..."

"캡틴 아메리카는 특강도 안오거든?"

"치이..."

짧은 문답을 끝으로 대화는 끊어졌고, 요리의 복작거리는 소리가 대신 작은 집 안에 울려퍼졌다. 끝나갈 즈음에야 재연은 깡총깡총 뛰어서 식탁에 앉았다. 스파게티를 각각 덜어 접시위에 담고, 별다른 말 없이 두 사람은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한참 배를 채우던 재연이 세희에게 물었다. 

"세희야, 이번 주말에 파티가자."

"파티? 누구 파티?"

"그, 누구냐. 돈 많은 애 있잖아. 핸디인가 핸드릭인가... 여튼 자선 파티인지 생일파티인지 있어, 그런거."

"그 럭비팀인가 야구팀인가 걔 말하는거지?"

"어어, 어. 걔."

"걔가 가난한 대학생인 우리는 왜?"

"몰라, 걔는 다 초대하던데. 아, 니가 말한 아이언맨도 온다 그랬다. 그럼 거기서 한번..."

"포기하라니까, 게다가 나 리포트 월요일까지라서 마무리 지어야 한단 말이야."

"숙제는 미리미리하는거라고 아무도 안 가르쳐주디? 가자. 내가 옷도 사놨어, 응?"

"너나 가."

"니 옷도 샀다고. 물론 니 돈으로."

"...미쳤구나."

한숨을 내쉬며 세희는 물을 홀짝였다. 가 보자는데 가지, 뭐. 그런 마음이었지만. 리포트는 토요일 아침에 끝마치는걸로 하자.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

"이쁘지? 옷 이쁘지?"

"...그래, 그렇긴 한데."

"아, 빨리 나가자. 늦으면 안된다고."

"그래, 가자, 가."

세희는 거울 앞에서 빙글빙글 돌아보는 것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높은 하이힐에 발을 구겨넣으며, 갈색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급한 재연을 따라 집을 나섰다. 재연이 한눈에 보고 너한테 맞을거라며 샀다는 검은색 미니드레스가 예쁘긴 했다. 오랜만에 이쁜 옷을 입으니 들뜨기도 했고. 힐이 조금 높았지만 그 정도야, 타협을 해야지. 

아무리 예쁘게 차려입었다고 해도 없는 돈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에, 두 사람은 택시가 아니라 버스와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조금의 산보도 함께했다. 정류장까지 가면서 돈을 건네는 미친놈에게 산뜻하게 쌍욕을 날려주고 두 사람은 버스카드를 다시 살폈다. 드레스를 입고 그렇게 돌아다니는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다행히 금요일 저녁이라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 위안이었다. 뉴욕에 미친 사람들은 많았고 그들은 전혀 미친 축에 들지 않았다. 그냥 노는 대학생 정도였지. 그리고 대학은 놀라고 있는거다.

직접 가서 본 파티는 생각과는 다르게 막 놀 수 있는 파티였다. 대학생들이 열 만한, 그러니까 마음껏 취해도 괜찮은 그런 파티. 물론 파티장을 양분한 두 세력이 있었고, 하나는 돈 좀 있으신 자제분들, 다른 하나는 그녀같이 돈없고 빽없고 똘끼있는, 하지만 놀이에 굶주린 늑대들. 물론 돈 좀 있으신 분들이 똘기로 치면 더하실테지만, 일단 아무 생각없이 들이키는 것은 그녀가 속한 후자였다. 들뜨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재연은 도착하자마자 발꿈치를 들어올리며 혹시 아는 유명인이 보이는 지 샅샅이 살폈지만, 안 그래도 크지 않은 키의 그녀에게 눈에 띄어줄 만큼 마음이 넓은 셀럽은 없었다. '토니, 토니 스타크! 스타크 인더스트리! 타워! 머니!' 를 외치며 총총 뛰어다니던 재연이 세희의 설득에 포기하고 술이나 마시기 시작한 것은 파티가 시작하고 사십 오 분 가량 지나서였다.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고. 한 잔 먹고 두 잔 넘기고 세 잔 받고 네 잔 돌리고 나면 시간도 술도 사람들의 정신도 훅 가있었다. 재연은 이미 취해서 저 쪽 소파에서 반 쯤 잠들다시피 늘어졌고, 파티장은 이미 열심히 섞여서 누가 어느 쪽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약도 슬금슬금 돌아다니는 것 같았고. 세희는 그중 멀쩡한 편에 속했다. 

세희는 술이 셌다. 선천적인 것도 있었고, 후천적인 것도 있었다. 술이 셌지만, 그래서 술을 마시는 것도 좋아하고 마시기도 많이 마셨지만, 절대로 주량을 넘긴 적은 없었다. 심지어 입이 조금 느슨해진다 싶으면 바로 술잔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갈 정도였다. 그건 절대로 통금이 심하다던가 부모님이 엄하다던가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녀의 요상한 '재주' 때문이었다. 평소에야 막 쓰지 않고, 당연히 가족들만 알고 있는 재주라지만, 술만 마시면 그 제어의 끈이 느슨해지는 탓에 발설할 위험이 높아졌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힘이 아무때나 막 튀어나오기도 했고. 열심히 취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물론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세상이 그렇나. 마음대로 되는 거면 내 세상이지 남들 세상이 아니라. 

술을 마시고 취한 것을 모르거나, 취한 것을 알아도 취해서 더 마시거나. 그런 날들이면 꼭 손에 들고있던 술잔을 깨버리거나, 접시 위로 내리찍은 포크로 접시를 이등분하거나, 건배를 하다가 맥주컵을 박살을 내거나, 그것도 아니면 취해서 탄 버스의 급정거를 못이겨 날아가 유리창에 박히거나 -여기서 박힌다는 뜻은 유리창을 부수고 그 틈새에 끼어버린다는 뜻이었다- 여튼 어디든 무엇이든 누구든 하나 부러뜨리고는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당연하다, 솔직하게 말해서 평소에는 멀쩡한 여자애가 조금만 취하면 손에 닿는 것은 모두 가루로 만들어버리는데 누가 안 놀라겠나- 붙여진 별명은, 알코올 중독과 어벤져스의 히어로 헐크를 합쳐서 '알코홀릭 헐크'가 되었다. 별명이란 것은 독특하다. 이게 점점 유명해지면, 누군가 '너 술만 먹으면 정말로 헐크야?' 하고 물어보기도 한다. 그녀 자신은 그런 질문들을 싫어한다기 보다 그런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자신의 과거를 자책할 뿐이었다. 내가 미쳤지, 하고. 물론 고쳐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젊은이의 대표인 '대학생'이었던 것이다. 위에서 주량을 넘긴 적이 없다고는 했지만, 그 아슬아슬한 선까지 다가간 적은 있었다. 

그래서 이번 파티도 그녀는 분명히 조심했어야 하는데, 그랬어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라는 것은- 비싼 칵테일에는 그녀가 익숙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달달한 것을 계속 들이키다보니 맛이 갔다는 것이고, 주위가 너무 시끄러워서 얼결에 홀짝대다보니 좀 많이 갔다는 것이다. 다행히 누구 팔을 부러뜨리기 전에, 파티의 한창에서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다. 이건 망한다. 더 마시면 망한다. 그런 마음으로 그녀는 최대한 빠르게 건물의 비상계단으로 빠져나왔다. 

"어후... 미치겠네."

머릿속으로 몇 잔을 마셨나 헤아려 보려고 했지만 계산이 불가하다. 인정하자, 좀 많이 마시기는 했다. 다행이 지금까지는 아무 것도 부수지 않았으니까 괜찮은데. 하지만 지금 들어가서 더 마시면 안 그래도 연약한 칵테일 잔을 바스라뜨러버릴 것 같단말이다. 무엇이든 해야하는데, 일단 이미 뻗은 재연이를 데리고 돌아가야한다. 갈 때는 버스를 타야하고, 지갑은 잃어버리지 말자. 차에 치이지 말자. 넘어지지 말자. 핸드폰 챙기자. 열쇠도. 여기서부터 집까지 가는 계획을, 한치의 실수도 없도록 비상계단 한켠에 앉아서 중얼중얼거리던 그녀였다.

달칵-

"어, 이게 누구야."

"...너."

"세희구나? 어때, 파티는 재미있어?"

자칭 파티의 주인공이신 남자애다. 그, 핸디인지 핸드린인지 뭔지 하는 남자애. 파티 중간부터 안보이길래 여자애들 사이에 파묻혀있는 줄 알았는데, 왜 여기에 있는거냐.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차마 술에 취했어도 버릇없이 굴 수는 없는 세희였다. 그녀가 어정쩡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 뭐. 그럭 저럭. 조금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에이, 세희는 술이 세다며? 들었어."

"아하, 조금..."

들어? 어디서 들어? 하-이 놈은 담배를 피러 나온건지 노상방뇨를 하러 나온건지 뭘 하러 나온건지 지 할일이나 하고 들어가던가 사람이 나와있는 걸 알면 사라지던가 왜 술취해서 힘들어하는 취객 앞에서 주절주절 거리나- 올라오는 짜증에 그녀는 계속해서 울리는, 안 그래도 비상계단인데 가뜩이나 크기까지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파티 주최자로서 얼마나 좋아 어쩌고 거쩌고 저쩌고... 이쯤 되자 왜 밖에 이리 나와서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말이 하고 싶으면 안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한테 하라고. 난 힘들다고.

"저기, 세희. 우리 올라가서 한잔 더 할까? 나 안그래도 조금 지루해지고 있었어."

난 하나도 안 지루해. 오히려 뭔가 부술까봐 심장 떨려 죽겠어. 집까지 가는게 지금 나한테는 미션 임파서블보다 다이나믹해.

"방은 내가 잡아놨어. 스위트룸이야, 너 스위트 룸은 가본 적 없지?"

내가 비싼 스위트룸에 가본 적이 있는지의 경험 유무가 그렇게 궁금하니. 나도 가본 적은 있어, 내가 묵은 적이 없어서 그렇지. 솔직히 말해서 속셈이라고 할까, 너무 뻔했다. 제발 꺼져달라니까. 나 말고 다른 여자를 잡아.  그녀는 애써 속을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오늘은 조금 힘들어서. 나 갈게."

"잠시만, 그래도. 너 오늘 옷 예쁘다?"

"아하, 고마..."

남자가 예고 없이 다가왔다. 큰 손이 그녀의 어깨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얼굴을 아래로 숙여온다. 사실 지금 반, 아니 한 쯤 술에 취한 그녀에게 이 상황은 놀람보다 짜증이 먼저였다. 

"올라가자, 너도 가고 싶잖아? 돈이 필요한가? 얼마나 줄까? 오백? 천?"

아이고, 돈 많아서 좋으시겠어요, 도련님. 사람을 그렇게 대놓고 물건 취급하냐, 이 새끼야. 버릇이 없는 건 돈이 많아서 버릇이 없는건가, 가정교육을 못받아서 버릇이 없는건가, 버릇이 없어서 가정교육을 못 받은건가, 돈이 많아서 가정교육을 못받은건가. 느이 집에선 그렇게 가르치디?

"가자, 세희야."

너 나 아세요?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지? 나도 너 잘 모른다고. 그렇게 묻고싶은 그녀의 등으로 손이 슬금슬금 내려온다. 얼씨구? 그녀는 얼굴을 치켜들면서 물었다.

"핸. 내 별명이 뭔지 알아?"

핸, 이라고 부른 거, 솔직히 말해서 얘 이름이 뭔지 몰라서 얼버무린거다. 

"아니... 뭔데?"

스윗 하트? 그 마지막 말에 그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알코홀릭 헐크야."

콰앙-

남자가 벽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비상계단을 타고 충격음의 메아리가 울렸다가 사라졌다. 아이고, 너무 세게했나. 그녀는 힘을 주었던 손을 쥐락펴락 하면서 널브러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진짜 술을 먹으면 미치는구나, 이런 일도 하고. 맨정신이면 거기를 걷어차서 도망을 치지 아예 날려버리지는 않았을거야. 그러니까 이제 제발 집에...

"이봐 아가씨. 천 달러로는 부족하지. 안 그래?"

어떤 새끼가 또... 저 위에서 내려오는 목소리가 들린다. 위에서 보고 있었나. 힘을 쓴 걸 들켰나? 설마. 내가 무슨 마법사냐, 힘쓴다고 마법산줄 알게. 그것보다 집에 가고싶다. 피곤하다. 내 사랑하는 룸메이트야 잠만 쳐자지 말고좀 데리러와달라니까.

"내가 줄게, 만 달러."

"...어?"

만 달러. $10,000. Ten thousand. 환율 적용해서 한국 돈으로 11,372,000원. 그녀의 고3시절 세뱃돈이 친가 외가 다 합쳐서 40만원 전후였던 것을 생각하면, 힘겨운 고3 생활을 아주아주 오래해야 그 정도 돈을 모을 것이다. 재수도 삼수도 아닌 무려 28수를 한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위층의 맛이 간 돈을 제시한 남자의 얼굴을 보았고, 그제야 그게 미국 제일가다시피 하는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주인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바람둥이 카사노바 백만장자의 대명사 토니 스타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상이 미쳐가는 모양인다. 눈 앞에 있는게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 사람이 맞는 건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아이언맨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서 더 문제다. 진짜 아이언맨인 것 같다. 

...진짜 아이언맨인 것 같다.

...진짜...아이언맨인 것 같다...

"만 달러. 오늘 딱 하룻밤만 와주면 돼. 너무 적나? 이만?"

"...네?"

"대학생으로서 돈도 부족하잖아? 브롱스 가장자리에 룸메이트랑 사는 것 같던데. 아, 혹시 다른 것도 필요한가보지? 더 줄 수는 있는데, 원한다면 옷이나, 가방이나, 그런 것도 괜찮고. 집안 좋은 남자를 소개시켜 줄 수도 있고. 정기적인 후원도 바란다면..."

"...아뇨, 필요는 없는데."

내가 브롱스에 사는 건 어떻게 알고, 룸메이트랑 둘이 사는 건 어떻게 알고, 돈이 부족한 건 어떻게 알고 이 지랄을 떠는걸까, 이 남자는. 이 아이언맨이라는 남자는. 아이언맨정도 되면 충분히 유명하지 않나? 왜 나 같은 대학생한테 관심을 가질까? 뉴욕에 그가 전화만 넣으면 달려올 여자들이 차고 넘쳤는데. 그녀의 룸메이트만 하더라도 토니 스타크를 만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아니다, 이건 아니야.'

떳떳하게 살아야지. 아무리 성인남녀라고 해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물론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좀 이상한 사람인 건 알고 있으니까...

"오늘 하룻밤. 시간은 많이 안 끌게. 잠시 와주면 고맙겠는데."

"...싫어요. 저는 지금 집에 가야하는데."

이 상황자체가 좀 이상하니까... 물론 법적인 문제라던가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

"아까, 알코홀릭 헐크라고?'

"..예?"

"알코홀릭 헐크, 재미있는 이름이네. 혹시 술만 먹으면 힘이 세진다는 뜻인가?"

와, 죽고싶다. 아이언맨이 내 별명을 안단다. 미쳤나보다. 왜 내 별명은 그딴 거일까. 

...죽고싶다...

"...전 가볼게요."

여기에 있어서는 안될 것 같으니까. 싸인은 받고싶지만 생략하자. 급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는 그녀를 또 남자가 불러세운다. 

"데려다줄게, 밤도 늦었는데."

"..."

"물론 무슨 수작이 있는 건 아니고."

아무리 봐도 무슨 수작이 있으니까 이런거지요, 이 자식아. 오늘 내 운수 왜 이렇냐. 어쩐지 오늘은 괴상하게도 운수가 좋더라니, 설렁탕따위가 문제가 아니잖아. 아, 우리 빨리 집에 가자.

"거짓말이죠?"

"정말로, 내가 거짓말은 안해. 사기는 칠지언정."

"그럼 사기당할 것 같으니까 안 갈래요."

"정말? 후회할텐데."

"...후회 안 할건데."

"왜나면 거절하면 대학교로 찾아갈거거든."

직접.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 원한다면 매일. 아침에 한 번, 강의 끝날 때 한 번, 집에 갈 때 한 번. 이렇게 와 줄게. 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일어날 재앙이 그녀의 눈에 훤했다. 기자들로 캠퍼스는 엉망진창이고 다들 놀라서 달려들고 길이 막혀서 페이퍼는 제 시간에 내지도 못하고... 일단 뭔가 일어날 게 뻔했다.

"어때? 후회하겠지?"

씨익 웃으며 남자가 말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를 찾지 못했다. 그녀는 분명 후회할 것이다.

"...룸메이트 데리고 올게요."

"탁월한 선택이야."

이 선택도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것 같지만.

-------

"Wake up, Jane, wake up. We gotta go home, Jane..."

처음에는 얌전히 영어로 소파에 널브러진 재연을 흔들어 깨우던 세희는, 시간이 갈수록 말이 험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급했다.

"야, 이년아, 빨리 일어나, 우리 망했어 지금."

"아 뭐야..."

뺨을 몇 대 때리고 나서야 찡그리고 눈을 뜬 재연을, 아무 말 없이 세희는 잡아끌었다. 재연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세희 자신도 무슨 일인지 몰랐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 뭔데..."

"너 소원성취해."

그러나 아이언맨이 오라고 했던 주차장까지 내려와서 재연은 세희의 어깨에 기대어 다시 잠들어버렸고, 아이언맨의 비싼 차에 올라탈 때 즈음에는 의식을 잃어있어서 결국 소원성취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재연이를 뒷자석에 던지고, 세희는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자, 믿겨지지 않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게 너무 부담스러워 그녀는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내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아가씨, 이름이 세이, 맞나?"

"세희, 세희요. 중간에 h, 있어요."

"세희?"

"네, 세희."

머나먼 이국 땅에서 그녀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었고, 그저 스쳐지나갈 사람이라면 그녀는 굳이 이름을 고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스타벅스에서 이름이 'Say'로 적혀도 그녀는 자신의 컵을 잘 찾았고, 대학교 오피스에서 클럽이나 동아리에 가입을 할 때도 이름 불리우는 한 두번 정도는 '세이 지옹'으로 타협했다. 그래도 이 남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자세히 설명했던 것은, 그녀 자신도 무의식에서 한 행동이었지만, 오랫동안 이어질지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희. 내가 누군지는 알지?"

"...네. 아마도."

"그럼 왜 안 오지? 돈 필요하지않아?"

"...그냥요. 좀 무서워서."

"내가?"

"아, 뭐... 그냥, 다..."

당신도, 당신이 아이언맨이라는 사실도, 준다는 돈도, 계속 물어보는 질문도. 다 무서웠다. 

"그럼, 그 힘은 뭐지?"

...어?

"...무슨 힘이요?"

"아까 비상계단에서 그 남자애를 날려버릴 때 썼던 힘."

"...네?"

나, 날려버려? 뭔 소리지, 이 남자. 봤다는 거야 알았지만, 그 힘이 뭐가. 뭐가 재밌다고 막 물어봐? 막노동에나 쓸 법한 힘인데. 설마 내 몸이 아니라 그게 궁금해서 이러는거야?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질문이야? 그녀는 머릿속 엉킨 생각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알코홀릭 헐크라며? 술만 마시면 힘이 세진다는 뜻 아니야? 그런데 술을 마셔야 힘이 세지는 건 아닌 것 같고. 살펴보니까 외상이나 골절 같은 걸로 병원을 간 적은 없더군. 미국과 한국 진료기록 모두 합쳐서."

미국은 몰라도 한국 진료기록은 어떻게 찾는...? 

"무슨... 그거야 뭐, 조심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게다가 사람이 정신이 나가면 그럴 수도 있죠..."

"저번에 버스 유리창에 박힌 적이 있던데? 그러면서 다치지는 않았고. 어릴 때는 차에 치인 적도 있더군."

그때도 다치지 않았잖아? 남자가 태연히 말했지만, 세희는 지금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그걸 니놈이 어떻게 알아요? 언제적 일인데... 하지만 감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이 차는 빨랐고 그녀는 집에 빨리 도착할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었지만, 일단 변명, 변명을 찾아야 한다.

"...그냥 체질적으로 운이 좋은가보죠..."

이건 좀 아니었다.

"이게 운이면 이미 복권 당첨은 여러번 됐을 텐데?"

"...그쪽에서만 운이 없었는지도."

이건 더 아니었다. 답변을 하고 나서야 '복권 안 사요'라고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하지만 다행히 아이언맨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집에 도착했고, 죽어있다시피 한 재연을 끌어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헤어지기 전에 고맙다는 말과 싸인 한 장을 부탁하자 남자는 조금 웃는가 싶더니 흔쾌히 차 글로브 박스 안에서 한 장 집어줬다. 자신은 바쁜 사람이니 미리 만들어둔다나. 다음에 볼 때는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즉석에서 해주겠다고 했으니, 그녀 자신에게는 필요없는 선의까지 배풀어 준 셈이다. 그녀는 들어가면서, 이런 동네에 비싼 차가 있으면 너무 눈에 띄니까 계란 같은 것 맞기 전에 어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내가 TV에서 본 아이언맨의 차만 수십 대는 될 것 같은데 그럼 모든 차들의 글로브 박스 안에 싸인이 들어있으면 그게 몇 장이지? 하고 생각했다.

재연이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자신의 침대 협탁 위에 놓여있는 싸인을 보고 흥분해서 물어댔지만, 차마 어제 니가 아이언맨 차를 타고 돌아왔는데 자고있어서 못 본거다, 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조용히 길에서 주웠다고 넘어갔다. 

"배고파! 아침! 아침! 아침!"

"시간이 한 신데 아침이 말이 되는 소리냐."

"나는 오늘도 세 끼 먹을거야."

하루 세 끼 다 먹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시는 룸메이트분께서는 또 소파에 자리를 잡고 뒹굴거리고 있는 만큼, 그녀는 할 수 없이 주방으로 들어서서 냉장고를 열었다.

"...어?"

냉장고가 가득 차있었다. 그것도 신선하고 좋은 것들로. 여튼, 그렇게 보이는 것들로. 야채칸은 이름도 모르는 야채들이 한 뭉치씩 들어차있었고, 고기 칸은 붉은 물체들이 빈틈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과일 칸에는 지금 때, 그리고 지금 장소에 나기는 나나 싶은 사계절과 기후를 초월한 아이들이 함께 뒹굴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맥주가 차 있었던 그 옆자리에 각각 1898, 1930, 1970이라는 아주아주 오래된 연도가 떡하니 적혀있는 와인 병들이 고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 사이로, 쪽지 하나가 고고하게 놓여있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쪽지를 집어 펼쳤다.

[아가씨들 밥상에 영양이 부족하네. 가벼운 선물이야. 가방같은 거 보다는 먹을 게 좋을 것 같아서.]

그 아래에 화려하게 그려져있는 싸인은, 재연이 방금 거실 벽에 붙여놓은 액자 안의 내용물과 똑같이 생겼다. 그녀는 가만히 냉장고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재연아. 고기먹을래?"

"어? 뭔 소리야? 무슨 고기?"

"스테이크 먹자, 스테이크."

그게 그녀가 어벤져스에 다가가는 한 발자국이었다.

글러지만 글러먹음.

DEBut뎁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