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위터에서 풀었다가 여기저기 끄적인 짧막한 조각글 엮은 거라 정신 없지만 어쨌든 두루두루 사랑받는 현왕님이 보고싶어서.
  • 7장 스포일러 및 애니의 연출 장면 이것저것 섞여 있음.
  • 마스터의 성별은 길무렇게나











##그 여신의 경우 1

 

 

부끄러움이란 것은 또 다른 소란이 되곤 한다. 그 소란이 벌건 대낮에 이루어지느냐, 아무도 없는 한 밤 같은 곳에서 이루어지느냐, 그렇게 표현될 수도 있었지만 들을 수 있는 귀는 어디에든 많았다. 다만 그저 형태가 달랐을 뿐.


“뭐야? 도대체 정말! 난 지금 한창 바쁘단 말이야, 앞으로는 더 할 거고! 도대체 그렇게 피해 다닐 땐 언제고 이제는 알아서 찾아오는 거야? 당신은 아직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고! 본인이 더 잘 알 거 아냐!”


죽은 자는 산 자와 다르다. 살았던 생에 끝에 어떤 종말을 맞이했다 한들 그 영혼은 최후의 모습과는 다르다. 명계는 산 자가 간직했던 모습을 거울처럼 반영한 채 그들의 모습을 지키곤 했다. 죽은 이는 명계의 주민으로 눈을 뜬다. 그러나 명계에 누워 죽은 자와 같은 인간이 있다. 죽은 자들이 돌아다니는 땅에서 죽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이라니 말이 되지도 않을 꼴이었다. 몇 번째였지? 처음엔 놀랐지만 곧이어 평정심을 가졌더랬다. 여신이다. 명계의 주인이다. 알던 얼굴이 방문하는 것 정도야 놀라울 일도 아니건만.


“바보 같아…….”


누구에게 한 말이었을까. 명계의 여신은 죽은 듯 누워있는 남자의 창백한 뺨을 찌르며 말했다.


“돌아가, 고집쟁이 왕. 당신은 아직 여기에 오면 안 돼.”


어쩐지 조금 미안하지만.

여신은 힘껏 한 손을 치켜든 채 주먹을 쥐었다.






암석과 자갈로 가득한 땅은 꽃은커녕 풀 한 포기 피울 수 없을 정도로 메말랐으며 얼음과도 같이 차갑다. 낮이어도 한밤 같은 곳이나 애꿎게도 별빛을 닮은 것들이 지상과 비슷한 것을 부질없이 흉내 내고 있는 곳이었다. 어둡고 차가운 곳, 지상의 아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빛을 가지지 못한 곳, 곧 생을 살아가는 자들은 머물 수 없는 곳이며 그것을 잃은 자들에겐 안식처가 됨을 의미했다. 황혼의 끝에 머물러지는 어둠만을 간직하듯, 생의 마지막을 보낸 자들이 찾아오는 장소다. 누군가가 준비한 자리로.


“지상에 있는 자들은 다 바본가?”


그 여신도, 그 남자도. 그의 친구도 그랬던가. 경외를 가진 자들도, 그저 자신의 흥에 겨운 자도, 욕심이 넘쳐나 겁을 상실한 자도, 인간과 신 다를 바 없이 누구든 꺼리는 땅을 밟아 보는 것. 대부분은 희미한 호롱과도 같을 빛무리만을 남긴 채 내려오는 것. 성가신 일이야, 하고 그녀는 중얼거린다. 손끝에 짙은 빛의 창살이 닿는다. 거칠어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 정성스럽게 손보아 둔 매끄러운 감촉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그곳엔 땅의 주인도 미처 알지 못하는 사랑스러운 꽃이 있다고 한다. 죽음이 삶처럼 존재하며 영혼이 함께하는 곳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사랑스러움, 신이기에 알고는 있으나 베풀지 못할 말이었다.

죽음이 주는 사랑이란 것은 결국 그 이름의 뜻과 다르지 않은 것들이다.











##그 왕의 경우

 


길가메시는 평소보다 침침한 눈을 깜빡이며 머리를 짚었다. 조금 추운 듯도 하다. 두통이 가시질 않는다. 전날 분명 침소에 들기 직전 한꺼번에 몰아친 일거리들을 일일이 손보느라 평소보다 늦게 몸을 뉜 탓인가도 싶었다. 그렇다해도 이 오한은 무엇이며, 꿈을 꾼 것도 아닌 듯 한데 마치 생생한 꿈을 본 듯 피곤한 몸은 무엇이란 말인가. 피가 제대로 돌지 않는 것만 같은 저릿한 기분을 느끼며 그는 천천히 뒷머리를 더듬었다. 뻐근했다.


“?”


혹도 있었다.


“역시 어제 무리를 했던 것 같네. 많이 불편한 거야?”

“쓸데없는 소리.”

“……라고 하기엔 오늘은 좀 늦잠을 잔 것 같은데.”


시간의 축을 이용해 교묘하게 현현한 캐스터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자신의 마스터를 바라보며 기묘한 웃음을 흘린다. 보통 인간을 기준으로 두기엔 범상치 않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모자랄 만치의 마력을 쥐어짜 냈던 인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아 바닥을 기는 마력 대신 체력을 연료 삼아 버티고 있었다. 분명,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의 감상은 다르지 않았다. 죽을 것 같았는데.


“죽었던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나. 돌아오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뭐 그랬나 싶었던 거야. 그래 보였으니까. 물론 그래서는 안 될 일이고. 안 그러겠지, 나의 왕은?”


왕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죽은 자의 땅일 테니. 아직은 때가 아니지.”

“내가 알기로 때 아니어도 찾아갔다고 듣긴 했지만. 지금은……. 제 발로 갈 생각이 아니어도 아무튼 넘어가진 말아줘.”


왕님은 너무 인기가 많은 것 아닐까? 그날따라 헛소리가 많다고 생각했던 마법사의 말 중 가장 어이가 없던 말이었다. 이미 당연한 것을 언급하는 것에 별달리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않던가. 지배를 받는 백성들이 왕을 우러러보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라는 말에 멀린이 말했다.


“그을쎄에……. 인간만이 사랑을 하는 건 아니지. 당신이야말로 잘 알고 있겠지만.”


난 사랑의 이야기도 아주 좋아해. 길가메시는 빙글빙글 웃어 보이는 멀린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왕의 머리에 혹이 났다. 길가메시는 제 정수리의 오른쪽 부분을 더듬으며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가 후려친 것일 테다. 꽃의 마술사 놈이 힘이 센 것은 알고 있었으나 함부로 제 마스터의 몸에 위해를 가하지 않을 정도로의 상식은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가장 유력한 후보를 에둘러 피한 뒤 아무리 생각해 본들 옥체에 작은 손상을 입힐만한 위인은 없다. 분명 무지막지한 체력과 힘을 가진 일격이 왕의 머리 위에 혹을 달아 놨다. 필시 고된 수련과 능력을 갖춘 자만이 가능할 일이다. 제 머리통 옆구리에 혹을 매만지면서도 왕의 평가는 무척이나 흥미롭고 태평한 종류였다.


“분명 범부는 아닐 테지.”


괴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신의 피가 섞인 인간들의 왕에게 혹을 달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 정도의 칭찬은 아깝지가 않았다. 적어도 오래전 함께 했던 친우 정도는 되어야 만들 수 있는 위업일 것이다. 아니면―


“그 망아지 같은 여신 정도는 되겠지만.”


그것이야 말로 우스울 일 아니냐! 하루의 일과로 집어 넣기엔 그저 성가실 정도로 치부될 왕의 고민은 짤막한 짜증과 함께 한달음으로 증발해 버렸다.











##구경하고 싶었던 마술사의 경우

 

 

“길가메시 왕 말인데, 잠은 제대로 자고 있어?”

 

시두리가 대답했다.

 

“요즘은 오히려 늦잠을 주무신 적도 있습니다만.”

 

물론 그 뒤에 짜증을 내며 왜 이 시간이 지나도록 왕을 깨우는 업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냐는 역정이 있었다는 것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일이었다. 그러나 놈팡이를 자처하는 꽃의 마술사는 곤란한 듯 웃으며 말한다.

 

“자는 것 맞아?”

“그렇지 않다면 침소에 누워 계시지도 않았겠지요?”

 

꿈속에 잠기더라도 깨어있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꽃향기로 덮어두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꽃무리에 둘러싸인 왕을 생각하다가도 멀린은 고개를 휘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 침상을 뒤덮을 만큼의 꽃잎을 흩뿌렸던 것은 한 번으로 족하거든. 멀린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뭐, 적어도 아직은 아니지.”

 

아직은. 때는 길가메시가 미리 예고했던 이후의 시간 보다도 한참 전이었던 어느 날이었다. 지구라트에 낯선 방문객이 당도하기도 전, 이후 그 ‘아직’이란 시간이 조금 빨리 다가왔을 때 마술사가 느낀 당황함은, 어느 평범한 인간이 보기엔 화를 내는 것으로도 보일 수 있었음을 멀린은 아주 뒤늦게야 알 수 있었다.











##그 여신의 경우 2

  


리츠카는 우루크라는 낯선 땅에서 가장 처음 본, 인간의 형태이지만 인간과는 가장 거리가 멀면서도 인간 비슷하게 요동치는 여신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한 가지 의문을 품어본다.


“난 저기 있는 금반짝이한테 볼 일이 있어서 온 건데?”


여신의 볼 일이라. 천장을 부수고 모인 사람들의 반……, 아니, 대부분 혼비백산 상태로 만든 것 정도는 딱히 신경 쓸 일도 아니라는 듯이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오는 붉은 눈동자가 어느 한 곳을 향해있다. 여신을 제 시선 아래에 두고도 다리를 꼰 채 코웃음을 흘리는 길가메시는 당장에라도 눈앞이 폭발하는 것이 아닐까 하며 양 팔을 벌린 채 가로막은 리츠카와는 달리 턱을 괸 채로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손마저 훠이훠이 내저어 보인다.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를 귀찮아하듯이.


“별일이구나. 네 녀석이 남 걱정을 하는 경우도 있단 말이냐?”

“누……! 누가, 네 걱정을 한다는 거야아?!”


직후 너무도 당연하게 관심의 핑계를 왕에게서 우루크로, 우루크에서 자존심으로 옮긴 여신의 분노와 소란 ― 길가메시는 짜증이라 말하던 약간의 소음 ― 이 한 차례 지나고 나서야 조용해진 알현의 장소를 추스를 틈도 없이 정무를 이어가는 왕의 발치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정신없이 내몰린 리츠카는 그 후 한참이 지난 뒤에도 남아있던 지구라트 천장의 무너진 구멍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안 갈 수 없는 천장의 휑한 구멍이다. 잔해는 치워져 있지만 딱히 곧바로 고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누군가의 변덕이 스친 그 날의 무시무시한 흔적을 바라보면서 리츠카는 하늘 위를 날아다니던 여신의 발꿈치가 지구라트를 딛을 수밖에 없었던 가장 처음의 이유를 생각한다.

신이라는 거, 의외로 심심해한다던가……?


“심심풀이였을까? 이슈타르…….”

"어이쿠, 누가 들으면 당장에라도 호통 칠 이야기인 것 같은데. 나름 재밌는 얘깃거리이긴 하겠지만."


알지, 알고말고. 원래 구경이란 건 가장 즐거운 일이야. 자타공인 오래되고 오래되어질 예정인 히키코모리 은둔 마술사의 세상 구경 이야기야 별다를 없을 대화거리였으나, 멀린에게선 그저 보는 것만큼이나 떠들기를 좋아하는 면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을 리츠카도 조금은 예상하던 바였다.


“신이니까 말이지. 굳이 저렇게 구멍을 내진 않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뭐든 내다 볼 수 있겠지. 아아, 너무 그립고도 부러운걸. 은신처에 앉아서 마음에 든 대상의 실시간 모습을 무 손실 원본으로 구경하는 그 재미……!”


떠들기 시작하는 멀린을 두고 한숨 쉬는 아나를 잠시 바라본 뒤, 리츠카는 결국 여신이 손가락질하며 성큼성큼 다가갔던 대상에 거짓이 없었음을 깨닫는다. 결국, 그녀는…….


“걱정……. 하는 건가?”


직전까지 보았던 왕의 얼굴이 스쳤다. 알고 있는 나이를 기억해낸다 한들 여신을 골려 먹으며 소년마냥 신나게 웃던 모습에 잠시 납득하려던 생각을 멈춰본다. 대신에 우루크가 신경이 쓰여서, 라고 말하며 신경질을 내기 시작한 여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차라리 그 이유가 조금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우루크를 지키는 수호신, 여신의 성정이 어떠한 들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이유로는 그나마 가장 정상적인 것 아니겠는가.











##그 여신들의 경우

 

 

“뭐냐고, 죽일 생각은 없었거든? 멋대로 과로사 한 주제에.”


생각해보면, 좀 혼내는 것 같지 않았나? 왕이 무시를 치다 못해 어이없어 할 이야기였기에 속으로만 삼킨 리츠카의 감상이었다. 여신의 진심은 어느 경우엔 솔직한 사실 속에 교묘히 숨겨진 것도 같다. 돌이켜보면 충분히 알 수도 있었을 것을, 마찬가지로 어느 소란스런 여신과 다르지 않게 흘러가버린 지하의 소동 탓에 생각의 겨를도 없이 은근슬쩍 스쳐 지나가버렸다고 말하는 편이 나았다. 아마도, 분명 여신의 말 한마디에 거짓 하나 보탬 되어 있지는 않다지만, 여신의 자존심에 차마 올릴 수 없는 감정을 부끄러움이라고 한다면 조금 더 쉽게 알았을 수도 있을 말을.


“신들은 원래 다 그렇게 무모한 거야?”


황망한 리츠카의 중얼거림에 이번에도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한 마술사가 웃었다.


“어느 문명이든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같은 말에 신을 인간으로 바꿔도 비슷할 거야. 말하자면 신들의 심정도 몽마인 나에겐 제법 어려울 뻔 했다는 이야기야. 그래도 내겐 학습한 범위란 게 있으니까, 뭐 그래, 난 이런 이야기도 좋아하지.”

 

 

 

그 후로 또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또 다른 경우, 잠시간 되묻는 말의 의미를 알면서도 그 감정을 익히 아는 존재이기에 그저 덤덤히 제 할 말을 다하는 성숙한 인간이 하나 있다.


“너,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거야?”


직후 들을 수 있던 왕의 대답에 여신은 그저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오를 뿐이었다.

 










##리츠카의 경우


 

“저 녀석, 고집만 세서 인간 주제에 무리나 하니까 말이지, 잘 지켜보라고.”


리츠카는 여신의, 여신들의 말을 기억한다.

그건 알고 있었어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마술사가 즐거워 할 어느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리츠카는 지하의 권능을 흩뿌리며 영혼의 한 자리를 지키던 여신을 기억한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을 지상의 시간을 알 듯, 돌아갈 수 없는 영혼을 위해 맞추어 자리한 지하를 지키는 모습이다. 어느 곳보다 춥고 삭막한 자리, 산 자는 알 수 없을 지상 아래의 모든 것 중에 그녀가 만들어내고 지키고 싶어 했던 단 한 사람을 위한 안식처가 있다.

그들이 신경 쓰고 있던 것 중 어느 것 하나에도 경중을 따질 필요는 없었다. 똑같은 무게, 똑같은 가치를 담아 저 나름대로의 뜻을 가진 신들의 기준이란 것은 인간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헤아릴 수는 없으나 들을 수 있던 말들이 있다. 보고 기억할 수 있는 모습이 있었다.

 

그 순간 리츠카는 여신들이 보고 있던 것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이 헤아리지 못한 시야, 하늘과 지하의 눈높이. 그 사이에 서서 어느 곳에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앞을 바라보던 자.

리츠카는 폐허의 우루크를 기억하고 있었다. 검붉은 어둠의 바다 안에서도 우뚝 서 있는 지구라트가 있다. 여신의 눈에 비친 땅 위의 모든 풍경들과 함께,


그 안엔 단 한 명 남은 우루크의 왕 또한 우뚝 선 채로 오래도록 담겨 있었다.

잡식성 독거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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