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아이유 - 밤편지)


***



겨울비가 내린다.

저녁 일곱 시 삼십 분경. 나의 2학년 2학기, 마지막을 장식할 <교육사회학> 시험을 보고 나오는 길. 시험을 보느라 처음 오게 된 건물의 입구에 서서 바깥세상을 바라보았다. 해는 가물은지 오래고, 얼음장같은 빗물만 낯선 구도의 캠퍼스를 적시고 있다. 낮부터 내리더니 지금까지도 내리네. 겨울비, 겨울비…. 겨울이라는 계절은 눈이랑 어울린다는 생각 때문인지 뭔가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단어를 곱씹으며, 나는 허리가 뚱뚱한 기둥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자연스레 공기처럼 내게 스며오는 생각. 빗물은 신기하다. 굉음으로 쏟아지는 장대비가 아니더라도, 가루같이 날리는 부슬비 역시 작은 속삭임만으로도 온 세상을 뒤덮고 또 물들인다.

차라리 비라서 다행이려나. 길이 꽤 가파르던데. 아마 눈이 내렸다면 내일이면 얼음길이 되어 여러 학생들이 곤란에 처했을 것이다. 여러 무릎이 시퍼렇게 멍들었겠지. 이름도 얼굴도 모를 누군가의, 일어나지도 않은 아픔을 걱정하는 나. 오직 제 고통에 골몰하느라 여념 없던 내가 이런 여유를 가지게 될 줄이야. 하얗게 흩어지는 입김을 따라 앞에 펼쳐진 풍경 역시 짙어졌다 흐려졌다 하고 있다. 어차피 곧 있으면 걸어 가야할 길을 눈앞에 두고 그저 바라만 보는 이유. 그건…


“마이 기다렸나.”

“아뇨, 저도 방금 나왔어요.”


강다니엘. 어김없이 등 뒤에서 나타나는 이 사람 때문에.

춥제. 무뎌지지도 않는지 고작 몇 분 기다리게 한 것에도 눈썹을 눕히는 그. 괜찮다는 대답에도 팔을 둘러 내 어깨를 감싸더니 커다란 손바닥으로 스윽스윽 문질러 내린다. 그 몸짓이 녹이는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와, 복도에도 아무도 없네.”

“그러게요. 형이 마지막인 것 같은데.”

“응, 그렇더라. 좀 어려워가.”


나는 안다. 저 어렵다는 말은 엄살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표정은 밝았으니까. 후련한 듯 예쁜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썹과 입꼬리. 내가 다 흐뭇해서 나는 강다니엘의 등을 담담하게 토닥였다. 그러자 가로로 길던 그의 눈매까지 둥글게 휘었다. 참 신기하게도.


“수고했어요.”

“너도.”


정말, 한 학기 동안 수고가 많았다. 우리 둘 다. 봄부터 겨울까지 참 행복했다. 때론 쓸려서 상처가 나기도, 부딪쳐 멍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잘 견뎌 왔다. 잘 닿지 않는 쓰린 곳에 서로 입김을 호호 불어주면서. 내내 나만 담던 강다니엘은 그제야 유리문 밖의 풍경을 보더니 “아직도 비 오네.” 하며 허망하게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아, 우산.”

“괜찮아요, 저 있어요.”

“줘봐, 내가 들게.”

“제 거니까 제가 들게요.”


그렇게 말하면, 본인이 더 키가 크지 않느냐며 기필코 빼앗아 가고 만다. 하여간 내 손에 뭐가 들린 걸 가만 보지 못했다. 하긴, 내가 들었다가는 우산살에 엉켜 머리카락이 기본 다섯 가닥은 뽑힐 것이다. 비 내리는 풍경으로 성큼 들어서는 그를 따라 나 역시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러다가 떠오르는 지난 봄날의 기억.


‘같이 쓸래요?’


그랬지. 무작정 빗속으로 몸을 던지려던 나를 붙잡았었는데. 조심스럽던 그때. 그리고 지금. 우린 이제 묻지 않아도 한 우산을 나누는 게 당연한 사이구나. 이런 게 아직도 새롭다니 얼마나 더 함께하면 당연해질까.


“우와….”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발을 멈추고 말았다. 학교를 다닌 지가 어언 2년짼데 처음 봤다. 이런 나무가 있었구나. 그 풍채에 놀라 멍하니 바라보자니 강다니엘이 와 그라노, 하며 물어왔다.


“나무가 되게 커서요. 엄청 오래 살았을 것 같아요.”

“내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도 이런 큰 나무 있었는데.”

“진짜요?”

“어, 그 나무만 보면 괜히 기분이 이상하더라.”

“왜요?”

“그냥, 얘들은 왠지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


내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니까. 그의 말에 나는 나무를 한 번 쳐다봤다. 음… 얘도 남 몰래 간직하고 있는 게 있을까. 궁금해져서 강다니엘에게 물었다.


“예를 들어서요?”

“음, 예를 들면-”


잠깐의 정적. 나뭇잎에 고였던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강다니엘은 우산을 잡지 않은 손으로 제 턱을 쓸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무게를 잡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숨을 아래로 깔게 되었다. 어렸을 적 할머니께서 동화를 읽어주시다 이야기가 절정을 맞기 직전에 멈추셨을 때. 바로 그 순간처럼 가슴이 조용히 뛰었다. 다물었던 입술이 서서히 열리고, 이어지는 말.


“뭐, 이 앞에서 누가 몰래 방귀 뀌었는지?”


풉, 웃음이 터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가벼움이었다. 그게 뭐예요-! 하니 우산을 들지 않은 한 손을 들어 내 볼을 마구잡이로 뭉갰다.


“시험 보느라 고생했으니까 좀 웃으라고.”


그 말에 히- 하는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러자 갑자기 진지해지는 눈빛. 강다니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말했다. 아까보다 조금 무거운 목소리로.


“그리고 또.”

“…….”

“누가 여기서 몰래 사랑했는지.”


눈이 마주쳤다. 우산 아래는 우리 둘뿐이다. 그 사실이 와 닿자마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바깥에는 우릴 내려다보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와 수만의 빗방울들이 있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게 유의미한 이유를 이런 저런 핑계 없이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내가 지금 사랑을 하고 있어서.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고, 그래서 이 순간을 사랑하고 싶고, 따라서 지금을 이루는 모든 것을 내 안에 담으려는 욕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기에 젖어 서로 찰박이는 나뭇잎들의 대화를 들어본다. 간만에 실컷 물을 들이마셔서 기뻐하는 나무뿌리의 내음을 맡아본다. 바람에 날려 내 뺨에까지 와 닿는 작디작은 물방울의 입맞춤을 느껴본다. 나는 온몸으로 이 순간을 껴안으며 살며시 시선을 올려봤다. 아까보다 더 푹 젖어있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나는 흐르는 시간처럼 눈을 감았다. 그래도 내 세상 안에 여전히 온기로 존재하는 한 사람.

입술끼리 닿았다. 내 어깨 위로 올라오는 손. 그 위를 타고 양팔로 강다니엘의 목을 감았다. 그가 내 입술을 천천히 머금고. 숨 쉬듯 그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가 나를 다시 머금기까지의 간격. 그 박자를 느끼며 나 역시 발맞춰본다. 목을 감았던 한 손을 들어 강다니엘의 옆얼굴을 덮었다. 찬바람에 식은 살갗들이 맞닿아 남아있는 온기를 나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내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그.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움직임. 느린 몸짓이 오히려 나로 하여금 선명하게 그를 느끼게 한다. 그 바람에 어색하게 멈춰버린 나를 뿌리부터 천천히 감아올리고.

비 내리는 오늘, 촉촉한 이 순간. 그리고 지금을 영영 기억할 커다란 나무 아래서. 우리는 서로를 나눴다.

.

.

.

“잘 들어가.”

“싫어요.”


우리는 지금 내 자취방 현관문 앞. 맹랑한 말에 강다니엘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니 볼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싫다는 저 말은 장난식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더 같이 있고 싶은데.” 고개를 수그리며 읊조리자 어김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

“…….”


내리는 빗줄기도, 토닥이는 빗소리도 모두 멎어버렸으면 좋겠다. 시간이 흐르는 걸 알리는 모든 것들이 자취를 감췄으면 좋겠다. 그와 나, 우리 둘이 눈을 감고 영원히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한참을 껴안고만 있던 그가 내 정수리 위에 쪽쪽, 입 맞추는 것이 느껴진다. 아득한 기분. 평소 같으면 좋기만 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 싫었다. 왜냐면 저건 강다니엘이 스스로의 아쉬움을 달랠 때, 그럴 때 나오는 사랑스러운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지훈아, 감기 걸릴라.”


역시나, 더 이어지는 세 번의 뽀뽀 끝에 내게서 떨어져나가는 그. 그리고는 나를 내려다보기만 한다. 으으… 나도 그 말만은 싫은데. 차마 입술을 떼지 못하는 그를 대신하여 내가 애써보기로 했다.


“조심히 가요.”

“…어, 가서 전화 할게.”


꼿꼿이 서있는 모습이, 내가 들어가기 전까진 발을 떼지 않을 기세다.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아쉬움에 손가락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억지로 끝까지 입력하자, 띠로롱- 기계음이 들렸다. 헤어질 시간을 알리는 소리 같아서 괜히 마음이 울적해진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거리 위로 혼자 그를 보낼 생각을 하니 더욱더.

결국 자취방 안으로 들어왔다. 현관문 위에 귓바퀴를 바짝 갖다 댔다. 문 너머로 한참이나 조용하더니 이내 더딘 발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울리던 소리가 잠잠해질 쯤 나는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곧장 난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깥 풍경은 사람 한 명 없이 고요하다. 강다니엘이 모습을 드러내려면 아직이었다. 그를 기다리면서, 어디서 날아왔을지 모를 빗물이 맺힌 난간을 검지로 한 번 쓸어보았다. 또다시 봄이 오면, 이 집도 안녕이겠지.

우리는 함께 살기로 약속했다. 고민할 것도 준비할 것도 많겠지만 지금 내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두 눈을 가리어서. 자취방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우선 강다니엘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일단 정한 건 그게 다였다. 집안일을 다 하겠다는 그의 어처구니없는 말도 형 딴에는 진심이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해줄 의향이 없다. 그래서 가사분담도 아직이다. 아, 이 겨울이 가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이 넘친다. 그러나 그 일들을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인지. 싸우고 다투는 날도 분명 있겠지만 겁나지 않았다. 그것도 함께하는 날의 일부이니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저 내가 걱정해야 할 것은, 혹여나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줄지 모를 상처.

단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절대로 그러지 말자는 자신과의 다짐. 


난간너머 아래를 바라보니 내 연두색 우산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까만 아스팔트 위에 들어서자마자 뒤를 돌아 이쪽을 올려다보는 강다니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기다렸다는 듯, 아니 기다렸던 게 맞지. 내내 그리던 그에게 손을 흔들자 멀리서도 보이는 미소.


“들어가라니까-!”


좋아서 비척비척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도 못하면서 저렇게 말한다. 못 들은 척 “조심히 가요!” 소리치자 그 역시 내게 손을 흔든다. 분명 그래놓고서 강다니엘은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고 그 짧은 골목길 위에서 머뭇거렸다. 두 걸음 갔다가 뒤를 돌고, 또 한 걸음 내딛었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그러다 결국 손인사를 마지막으로 저 멀리 골목길로 감춰진 뒷모습.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사람을, 그러나 나는 내내 바라보면서 홀로 기도했다. 내리는 비가 조금씩 잦아들 때까지.


아아,

봄바람같은 사람. 조금의 열린 틈으로도 내 안을 채우고 나까지 향기롭게 만드는 사람. 겁에 질렸던 내게 조용히 스며들어 이내 스스로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게 하는.


"……."


사랑하는 나의 다니엘 형.

우리 서로 건네는 안녕, 은

늘 언제나 재회의 약속이기를.


잘 가요, 내 사랑.


“…안녕.”


안녕, 내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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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상단의 타이틀은 오늘 뿌님께 선물받은 소중한 움짤이에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후원해주신 익명의 독자님, 읽어만 주셔도 감사한데 너무 어쩔 줄 모르겠어요 이 자리 빌어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합니다 읽어주시겠죠??


저는 오늘 새벽, 혹은 내일 저녁에 후기와 소장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돌아오겠습니다!

궁금한 게 있다면 댓글로 질문해주세요! 간단한 Q&A라도 해볼게요ㅎㅎ

다들 너무 감사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고마워요 정말!

저 그리고 녤윙단에서 단비 불판ㅠㅠ 읽으면서 늘 즐거워했어요 처음 말씀드리네요!

말로는 부족하지만 글로밖에 전할 수 없어서 아쉬울 뿐이네요ㅠ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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