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넬/가이드버스

센티넬 성현제 X 가이드 한유진

오만가지 트리거워닝 주의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센티넬 표준 모형(Sentinel Standard Model: SSI)에서 모든 센티넬은 자연계의 기본 원소군에 소속되어 가지를 뻗는 식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면 물, 불, 흙, 바람, 이런 식인데 얼핏 듣기에 이 표준 모형에 정신계 센티넬은 소속이 없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표준모형에 따르면 모든 정신계 센티넬은 물에서 뻗어나간 원소군인 ‘전기’집합에 속한다. 정신계란 결국 인간신경의 아주 세밀한 부분을 조종하고 차단하거나 변형시키는 것이고 신경을 이루고 있는 뉴런은 전기자극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자연계 기본 원소군이 가지의 뿌리 부분에서 가까울수록 그 힘의 수용력이 커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센티넬학의 권위자 에밀리 스펜스는 센티넬 표준 모형, 즉 SSI의 기본 토대를 재평가하고 이를 업데이트에 반영하여 기준안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SSI의 가장 기본적인 분석 기준인 ‘자연계의 기본 원소군’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에밀리 스펜스는 센티넬의 뿌리에 원소가 있는 것이 아닌 물리학계에서 ‘기본 상호작용’이라 부르는 우주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네가지 힘이 있다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즉 중력, 약력, 강력, 전자기력이 센티넬의 뿌리에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이 근원은 각각 다른 개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며 때에 따라 힘을 번갈아가며 쓰거나 결합하고 상호작용한다고 덧붙였다. 

지극히 물리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이 새로운 이론에 따라 센티넬을 연구하는 이론가들은 새롭게 등장한 이 ‘센티넬 기본 상호작용’이 물리학의 세계에서 처럼 하나의 틀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이 모든 상호작용을 통합하는 이론을 ‘모든 것의 이론’이라 부르는데, 이렇게 되면 대칭성이 더 커진다. 다시 말해 단 한 명의 강력한, 즉 근원에 가까운 센티넬만 있어도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모든 비밀을 밝혀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스펜스가 주장한 자연계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상호작용인 중력, 약력, 강력, 전자기력은 각각 어떤 힘일까? 

거시세계를 구성하는 중력은 물체를 서로 잡아당겨 인력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시공간을 변형시킬 수도 있다. 스펜스 박사는 현존하며 알려진 센티넬 중 이 힘의 근원에 가장 가까운 센티넬로 인터폴의 간판스타 송태원을 꼽았다. 그러나 우주에서 별과 행성 간에 작용하여 천체 궤도를 형성하고 은하계 운동을 관장하는 중력은 얼핏 굉장히 강력한 힘 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자연계 기본 네 가지 힘 중에서 가장 약하다. 중력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거대한 힘이지만 전자나 양성자로 구성된 미시세계에서의 힘은 극단적으로 약하여 거의 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약한 상호작용이라 불리는 약력은 원자핵에서 중성자를 붕괴하는데 관여하는 힘인데, 짧은 거리에서는 중력보다 10의 39승 만큼 강하다. 약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다만 강력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약력은 한마디로 방사성 붕괴를 일으키는 힘이다. 원자력 발전소, 원자폭탄이 바로 약력을 이용한 대표적인 예인데, 스펜스 박사는 이 힘의 근원에 가장 가까웠던 센티넬로 1945년 폭주하여 핵폭발을 일으키며 사망했던 미국인을 언급했다. 

강력의 경우에는 원자핵이나 중간자들을 결합하고 상호작용하게 하는 힘이다. 강한 상호작용이라고도 부르는 이 근원에 가장 가까운 센티넬을 찾을 수 없었던 스펜스 박사는 이 힘을 태양에 비교했다. 모든 무거운 원소들을 만들게 한 근본적인 힘으로 태양이 수많은 열에너지와 빛에너지를 내뿜는 것이 이 강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자기력은 미시세계를 구성했다. 네가지 상호작용 중 가장 강한 힘은 강력이나 그 작용 범위가 매우 한정적이라면 전자기력은 두번째로 강한 대신 그 힘의 범위가 거시적이었다. 똑같이 거시적인 힘을 가진 중력도 그 세기가 작아서 매우 큰 질량이 모여있지 않는 한 좀처럼 그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느끼기 어렵다면, 전자기력은 그 도달거리가 무한대에 작은 전하로도 큰 힘을 미칠 수 있었다. 접촉면의 원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자기적 상호작용인 마찰력을 떠올리면 그 방대한 영향력을 상상하기 쉬울 것이다. 이처럼 모든 상호작용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인간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힘은 전자기력에서 비롯되었다.

스펜스 박사는 전자기력의 근원에 가까운 센티넬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대신 아주 강력한 몇몇 정신계 센티넬이 지구 반대편에서도 영향력을 끼치곤 하는 점을 예시로 들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박사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전자기력의 근원에 가장 밀접하게 다가간 단 한 명의 센티넬이 다름아닌 국제사회를 공포에 떨게 하는 범죄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


리에트 윈저 루히르 공작은 앉은 자리에서 숨만 쉬어도 초 단위로 몇천달러씩을 벌고 그 재산을 다 쓰기 위해서는 장미꽃 200억 송이를 사야만 한다는 이야기로 유명했다. 공작은 그래서 실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석유사업에는 얼굴을 내놓을 대리인을 세워놓고 극도로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며 가십이란 가십은 모조리 만들어서 이사회가 그를 내쫓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루머까지 돌게끔 했다. 그는 센티넬이었으나 그가 센티넬인 것 보다 그가 만드는 황당한 사건사고들이 더 유명했다. 금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나 방탕한 망나니가 된 공작이 국제세계에 센티넬이 끼치는 영향력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현제는 공작이 세성의 가장 중요한 자금줄이라 설명했다.

“하하하하하!”

루히르 공작은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테이블을 쾅 치면서 웃었다. 유진은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지만 성현제는 그게 익숙한 것 처럼 유진이 처음 듣는 빠르고 기관총처럼 쏘는 듯한 영국식 영어로 딕 체니가 사냥을 나갔다가 친구에게 엽총을 오발한 일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런 다음에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상의를 벗은 모습에 집착하는 평론가들의 태도가 성 도착증으로 보인다고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그때 공작은 거의 의자에서 뒤집어지면서 웃느라 무릎으로 테이블을 쾅 치는 바람에 샤토마고 와인병이 기우뚱 하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성현제는 공작과 함께 킬킬거리면서도 테이블 아래로 떨어지는 병을 물흐르듯 붙잡아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에는 한 손을 들어 웨이터를 향해 가볍게 신호했다. 웨이터는 텅 빈 레스토랑 대리석 바닥을 가로질러 걸어와 정중하고 친절하게 웃어보였다. 성현제는 말했다. 

“손님이 더 올 것 같군. 의자 하나를 더 놔 주게.”

한유진은 성현제를 힐끔 바라보았다. 성현제는 이쪽을 문득 돌아보더니 한쪽 눈을 찡긋해준다. 뉴욕에서 가장 예약하기 힘들다는 레스토랑 르버나딘에서 가장 손님이 많을 시간에 테이블은 오직 그들이 앉은 중앙 뿐이었다. 모든 종업원도 전부 오직 공작과 그의 일행만을 위해 일했다. 곧 종업원이 의자를 가지고 왔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유진의 옆으로 루히르 공작이 한 손에 와인잔을 쥔 채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생각해봐. 어? 영장류가 집단 생활을 시작한 주된 목적은 포식자에 대한 방어였어.”

갑자기 무슨 소리지? 유진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성현제를 돌아보았으나 갑자기 공작의 목소리가 확 커지는 바람에 다시 그를 보았다. 

“육상생활을 하는 피식동물 일수록 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강한 포식동물 일수록 집단의 숫자가 적어지지.”

공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몹시 흥분했기 때문에 와인잔이 크게 흔들려 자기 손에 와인을 조금 흘렸다. 그런데 그러자마자 공작은 혀를 내밀어서 와인이 흐른 자기 손등부터 와인잔 겉 면까지 모조리 날름 핥아버리더니 와인을 벌컥벌컥 마셨다. 한 병에 4천달러 하는 샤토 마고가 공장와인 취급을 당하고 있다.

“센티넬은 포식동물인거야. 그렇다면 이 포식동물은 왜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들의 생존과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주로 효율 때문일거야. 인간처럼 큰 집단을 잡아먹기 위해서는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었을테니까.”

유진은 루히르 공작이 너무 가깝게 몸을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몸을 슬슬 뒤로 뺐는데 그의 앞으로 익숙한 팔이 가슴팍을 감싸고 보호하듯 등 뒤에서 다가왔다. 

“공작, 한유진씨의 인내심을 시험하진 말지.”

“오.”

그러자 리에트는 이빨을 다 드러내고 이죽거렸다.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 내가 시험한건 한유진이 아니라 그의 센티넬이 가진 인내심이야. 세성의 대가리가 목숨걸고 애지중지하는 가이드가 생겼는데 회사에 투자하는 입장에서 이 정도는 해 봐도 되는 거 아닌가? 바늘로 찔러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던 성현제가 어디 한유진을 바늘로 찔러도 아무렇지 않은지 궁금한거지.”

그때 한유진이 성현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 이야기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요. 자기 가이드를 구하기 위해 무슨짓이든 할 수 있었다구요. 저는 그래서 공작님이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을 인질로 잡고 고통을 대가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아는 사람일 줄 알았답니다.”

리에트의 흰자가 아주 많은 눈알에서 검은자위가 이쪽으로 굴러왔다. 한유진은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겁을 먹은 것도 아니고 후회하지도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스테이크 나이프를 집어들어 공격이라도 할 것 처럼 도전적이면서도 그런 감정을 순식간에 갈무리 할 수 있을 정도로 온화해 보였다. 그 옆에 앉은 성현제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리에트는 그 순간 한유진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씩 웃으며 입을 열려던 순간 이쪽으로 걸어오는 금발머리를 보았다. 노아 루히르였다. 

“누님은 그런 사람이죠.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정말 몰랐다면 실망인데요.”

“이게 얼마만이냐?”

리에트는 히죽거렸으나 노아 루히르는 그쪽을 보지도 않았다. 웨이터가 다가와 의자를 빼주려 했으나 그는 한 손을 들어 고개를 저었다. 유진은 그가 손에 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서 결벽과 방어가 느껴졌다. 그는 노아 루히르가 ‘누님’이라는 단어를 쓰는 즉시 긴 설명 없이도 저 둘이 오누이 사이임을 알았으나 그 둘이 지독하게 다르게 생겨서 아무 정보 없이 만나게 되면 연관성을 도저히 찾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노아 루히르는 서 있는 채로 코트 안에서 이동식 저장 장치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런 뒤에 성현제를 바라보고 말했다. 

“우리 재단을 이런식으로 이용하지 마세요. 이렇게 도와드리는 건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성현제는 웃는 눈으로 어린 센티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손으로 턱을 괸 리에트도 그를 히죽히죽 웃으며 보고 있었다. 유진은 그 시선들 속에서 기묘한 압력을 읽었다. 성현제와 리에트는 두 마리의 거대한 포식자들이다.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들의 이빨에는 맹독이 흐르고 길고 두꺼운 혀로 언제든 상대방을 잡아와 누른 채 뼈까지 으적거리며 삼킬 수 있었다. 그건 서열정리였다. 말 한마디 없이 두 명의 강력한 센티넬이 어린 센티넬 하나를 완전히 해체하고 있었다. 그러자 노아 루히르의 백색으로 멀끔하게 빛나던 보이지 않는 가면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갈라진 틈에서 두려움이 새어나온다. 유진은 그때 성현제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하지 마세요.”

성현제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유진은 이제 리에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그러자 리에트는 이죽거리면서 음식 그릇에서 굴러다니던 토마토 조각을 손으로 집어 입 안에 던져넣으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여전히 노아를 보고는 있었으나 이전처럼 위협적인 기색은 없었다. 성현제는 건성으로 사과했다. 

“이런, 미안하군. 나도 모르게.”

“개소리하지 마세요.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

“하지만 유진아.” 

성현제는 이쪽을 보면서 눈썹을 시옷자로 만들며 불쌍한 척을 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

“부하직원이 기어오르면 눌러놔야지.”

유진은 문득 그의 태도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는 지금 좀 달라보인다. 한없이 다정하고 배려 넘치던 사람이 포악하고 차가웠으며 간담이 서늘했다. 그러면서도 조롱하고 공포로 상대를 지배하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세성이 뭐 하는 곳인지 보여주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그건 결국 자신이 일할 때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 그라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변할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는 말 같았다. 성현제의 이런 면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가 이보다 더 변해도 나는 괜찮을 수 있을까? 유진은 잠자코 있다가 결론내렸다. 받아들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느끼는 부분도 분명히 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성현제씨 지금 좀 밉상이네요.”

성현제는 그때 웃는 얼굴 그대로 한쪽 눈썹을 쓱 올렸다. 그러자 루히르 공작이 폭소했다. 테이블을 쾅 치면서 깔깔거렸다.

“완전히 잡혀살고 있네!”

그때 유진은 리에트를 확 돌아보았다. 그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당신 가이드 앞에서도 이럴 수 있어요? 공작님이 그 어린 친구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그런 다음에서야 노아 루히르를 돌아보았다. 노아는 이쪽을 잠시 바라보았다.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고마운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는 뭐라고 말이라도 할 것 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며 유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서 레스토랑을 걸어나가버렸다. 그 태도에서는 자존심과 취약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유진이 그에게 미안한 마음에 미련이 남은 눈으로 닫히는 문을 보고 있는데 리에트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우리 이제 자주 보게 될 것 같은데 이제부터 리에트라고 불러.”

유진은 그를 돌아보았다. 리에트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잠시 그를 빤히 보던 한유진은 루히르 공작이 부유한 권력자인데에 비해 그에게 오는 모욕을 크게 중요치 않는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그렇지 않다. 그에게 눈에 보이는 단점이 있는 만큼 장점도 있을 것이다. 공작은 곧 유진에게 벨라레가 요즘 다니는 학교가 교복을 입는데 참 귀엽다면서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사진 속의 아이는 밤처럼 어두운 피부에 보석같은 녹색 눈을 가지고 이쪽을 보며 이를 다 드러낸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유진은 사진을 내려다보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건 반칙이예요.”

“왜?”

“이러면 리에트 당신에게 호감이 갈 수 밖에 없잖아요.”

그러자 리에트가 그를 향해 씩 웃으면서 사진을 집어넣었다. 

“내가 하는 일들이 벨라레 앞에서 떳떳할 필요는 없어. 한유진씨도 알지? 센티넬의 기대수명은 길어봐야 반백년도 안돼. 그리고 난 지금 마흔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제껏 끼고 있던 가죽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툭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 손으로 와인병을 집어들어 자기 잔에 따랐다. 유진은 그의 손을 본다. 손 끝 부터 손등까지 새까맣게 검었다. 그냥 검은 정도가 아니라 마치 악어나 용의 껍데기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유진은 입을 조금 벌렸다. 그 손에서는 죽음이 느껴졌다. 그건 공작의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리에트는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한가지야. 나의 벨라레가 어른이 되었을 때, 혼자서 내 울타리 밖으로 나가게 되어도 이 세상이 가이드와 센티넬에게 살만한 땅이 되는 거 말이야. 그게 내가 세성에 투자하는 이유야.”

유진은 그를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성현제를 돌아보았다. 의자에 기대앉은 그는 아무 표정 없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잔을 들어올리며 리에트에게 말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니 지루하군. 건배나 하지.”

“오, 좋아. 뭐가 좋을까? 미래를 위해?”

그때 성현제는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을 위해.”

리에트가 킬킬거렸다. 그러면서 잔을 들었다.

“좋아. 사랑 좋지.”

유진도 얼떨결에 잔을 들었다. 문득 성현제는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궁금해졌지만 물어보려던 순간 레스토랑 창문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창틀에 앉았다. 까마귀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한쪽눈으로 이쪽을 보았고, 창문을 부리 끝으로 탁 쳤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유진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서 그냥 함께 술을 마셨다. 와인은 쓰고 달았다. 


-


다음날 한유진은 저가브랜드 대형의류할인매장 피팅룸 대기의자에 앉아 있었다. 매장에서는 졸음이 쏟아질 것 같은 한가한 음악이 흘렀고 밋밋하기 짝이없는 허여멀건 열 두 칸의 대형 피팅룸 중에 문 하나만이 닫혀 있었다. 유진은 자기가 고른 옷을 옆에 내려놓은 채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저도 모르게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곧 닫혀있던 피팅룸 문이 열렸는데, 거기서 성현제가 걸어나왔다. 하품을 하던 한유진은 그걸 보고 갑자기 흐흐 웃기 시작했다. 

성현제는 그가 절대 입지 않을 것만 같았던 중저가 브랜드 옷을 입고 있었다. 흰 셔츠에 검은색 라운드넥 니트를 겹쳐 입고, 발목을 좀 드러내는 미색 바지에 로퍼를 신었는데 거기다 뿔테안경까지 썼다. 옷을 고를 때 보니 가능한 한 단정하고 깔끔하게 고른 것 같았는데 어째 입고 보니 너드 같기도 하고 몰몬 같기도 해서 유진은 참을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에는 별 생각 없이 사람이 부티가 난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보니 여태까지 성현제가 입던 옷이 정말 좋은 것이었구나 싶기도 했다. 미묘하게 재질감에서 차이가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성현제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 처럼 물었다.

“어때 보이나?”

“미친 너무 웃겨요.”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서서 성현제의 어깨에 튀어나온 니트 실밥을 안으로 넣어주었다. 그는 씩 웃었다. 

“그리고 너무 좋아요.”


한시간 뒤에는 밝은 색 후드에 청바지를 입어 근처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과 구부정한 거구의 어리숙해보이고 행동이 느린 남자가 브루클린의 하이브메이어 부동산 직원과의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직원은 그들이 미리 전화로 약속했던 집을 보여주고, 그 자리에서 몹시 안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하면서 이 두 사람이 그렇게 똑똑하고 야무진 편은 되지 못하지만 돈은 좀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신원확인을 하면서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은 실제로 근처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는 학생이고, 도무지 인종을 추측할 수 없는 거구의 남자는 근처 엘드릿지 박물관 사무직원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보다는 이 둘이 어쩐지 좀 나이차이 많이 나는 커플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다행히 체구가 작은 쪽이 좀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것 같고 뿔테안경을 쓴 쪽이 하자는대로 다 따르는 것 같았는데, 열쇠를 넘기기 직전까지도 둘 사이를 의심하다가 돌아갔다. 

그들이 잡은 아파트는 278번 주립도로가 머리 위 고가로 지나가는 위치에 있었다.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의 6층짜리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시설이 나쁘지 않은 편이고, 또 엘리베이터가 없는 까닭에 주로 젊은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인프라가 좋았기 때문에 유입이 꽤 빨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의 601호는 계속 빈 집으로 사람이 살지 않았다. 이건 루히르 공작이 세상 여기저기에 수많은 대리인들을 앞세워 사둔 안전가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계약이 별다른 마찰 없이 진행된 이유는 우선 거기에 있었다. 

한유진과 성현제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집요한 추적을 당하고 있었고, 그때문에 더더욱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다. 이들은 일부러 유동인구가 많은 도시로 들어갔고, 깨끗하게 세탁된 새로운 신분으로 일반 사람들과 같은 사용하여 계약을 마쳤기 때문에 추적망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추격자들은 성현제를 치밀하지만 허영이 넘치는 인물로 프로파일링 했기 때문에 도망을 갈때도 이전처럼 그의 부유한 친구들에 기대거나 사유지로 갈 것이라 여겼지, 도시 한복판에서 일반인들과 어울리는 짓은 하지 않을거라 여겼다. 

그러나 성현제는 기꺼이 뿔테안경을 쓰고 실밥이 튀어나온 중저가 옷을 입은 뒤 맹한 척을 했다. 그래서 윌리엄스버그 아파트의 주민들은 아침에 6층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처음보는 얼굴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한 명은 배낭을 메고 학교에 늦은 것 처럼 5층에서 마주친 주민을 후다닥 스쳐 지나갔고, 덩치가 큰 쪽은 작게 죄송합니다. 하고 중얼거리며 옆걸음질로 간신히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6층에는 네 가구가 살았는데, 604호 사람은 응급실 외과 레지던트였기 때문에 미친듯이 바쁘게 살았고 603호에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다는 대학생이 살았다. 603호 학생은 노는 걸 좋아하는 모양인지 밤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602호에는 자칭 작곡가라는 남자가 살았다. 그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603호 학생이 복도에서 눈에 띌 때 마다 자기가 헐리웃에 아는 레코드 회사 사장이 있다며 괜히 치근덕거리곤 했는데, 한번은 그러고 있다가 한유진과 성현제가 지나가자 말을 멈추고 인사를 했다. 603호 학생은 한유진을 힐끔 보고 성현제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날 이후로 603호는 성현제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602호는 그걸 아주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웃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두 사람은 일을 시작했다. 성현제는 그들이 뉴욕 한복판으로 들어온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패턴을 깨고 추적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도 있었지.”

아침 일찍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면서 성현제가 말했다. 

“하지만 우선 만날 사람들이 있다네.”

“만날 사람들이요?”

그때 성현제는 자연스럽게 유진의 어깨를 잡아 보행자도로 안쪽으로 자리를 바꿔주었다. 그들 옆으로 지하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길이 좀 불안정해서 자리를 바꿔준 것이다. 성현제는 그렇게 하고 나서 드릴 소리 때문에 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세성과 브레이커는 공동의 목표가 크게 두 개 있는데, 그 첫번째가 센티넬 억제제 사업을 중단시키는 것이었다네. 그건 이제 문대표 덕분에 해결이 됐지. 하지만 이번에 내가 단독행동을 하는 바람에 브레이커와의 신뢰관계가 좀 깨졌다네. 한유진씨가 아니었으면 신뢰를 영영 회복하지 못 할 뻔 했어.”

성현제는 그 말을 하면서 씩 웃었다. 유진은 그 뻔뻔한 태도를 보면서 차갑게 대꾸했다.

“그러게 왜 단독행동을 해요? 앞으로 그렇게 하면 두 번 다시 구하러 가지 않을겁니다. 아시겠어요?”

성현제는 웃어보였지만 유진의 말을 구렁이 담넘어가듯 무시했다. 이제 드릴 소리가 멀어졌기 때문에 그는 대신 걸어가면서 고개를 한유진 쪽으로 조금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거나 브레이커는 그 사건 때문에 여러가지 조건을 제시했다네. 노아 루히르가 준 이동식 저장장치 기억나나? 그 안에는 최근 암시장에 새롭게 생겨난 동향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어.” 

“암시장이요?”

“음. 그동안 세성은 초국가적 범죄조직을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 관리 하에 놓기 위해 애썼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너무 위험한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걸으면서 뻔뻔스럽게 말했기 때문이다. 성현제는 이쪽을 힐끔 보더니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센티넬 억제제 일을 진행하면서 그 부분을 조금 손놓고 있었더니 구멍이 생긴 듯 해. 브레이커는 그 구멍을 메꿔주길 바라지. 두번째 목표를 향해 가는 동안에도 브레이커와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세성이 좀 바쁘게 움직여야 하게 생긴거라네.”

“어떤 구멍인데요?”

“인신매매가 다시 시작됐다더군. 그런데 좀 이상한 방식이라고 해.”

“이상한 방식?”

“인간을 매매하는 건 동일한 것 같은데, 곁다리로 다른 것들도 이동된다고 하더군. 우리 예상은 센티넬 억제제 같은 마약류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유진은 성현제를 바라보다가 문득 몇 주 전 그를 구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가는 긴 운전길에 강소영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강소영은 세성이 러시아 마피아와 비슷한 구조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세성은 마치 러시아 마피아 처럼 어떤 국가든 부패한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통해 침투했다. 1세계 지배층은 범죄조직과 비공식적인 관계를 맺는 데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고, 초반에 세성은 그들에게 경제적 수익의 극대화를 가져다 주면서 공생하는 것 처럼 보였다. 폭력을 이용하여 지배층과 협력해 수익을 앞세우는 것 처럼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지배층의 약점을 수집하여 적제적소에 사용하는 식이었다. 

세계시장으로 진출하면서는 다른 초국가적 범죄조직과 연계를 하는 것 처럼 보였다가 막대한 정보력과 세성의 가장 큰 무기인 성현제의 신적인 힘을 앞세워 조직의 머리를 하나둘씩 잡아먹었다. 앞서서 세계시장에 진출했던 거대 범죄조직들의 머리가 무차별하게 잘려나갔다. 복종하지 않으면 몸통과 꼬리까지 모조리 먹어치웠다. 그렇게 불법화 수준의 폭력조직처럼 보였던 세성이 초국가적이고 정치적이며 심지어는 합법화 단계의 범죄조직이 된 것이다. 

세성은 법에 의한 독재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고, 몹시도 정치적이었으며, 뇌물을 매개로 이루어진 더러운 공생관계에 아무 거부반응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세성의 가장 무서운 점은 세성의 수장 성현제가 1세계 지배층 엘리트들이 너나할 것 없이 어울리고 싶어할 정도로 매력적이면서도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범죄조직마저 압도될 정도로 무자비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세성은 순식간에 지하경제의 운영자로 자리잡았으며 1세계 지배층의 보호자이자 독재자로 군림했다. 세성이 저지르지 않는 범죄는 없었다. 그들은 오직 단 한가지, 센티넬과 가이드를 대상으로 한 범죄만 허용하지 않았다. 인간을 대상으로는 무엇이든 했다. 일명 강령을 지키는 범죄자들이었던 것이다. 

성현제가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두 손에 묻혔고, 그 행위의 윤리적인 부분에 얼마나 무관심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자연히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유진은 오직 자신만이 성현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성현제가 온 몸을 명품으로 두르고 있던 것은 그의 허영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그에게는 무엇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그런 옷을 입었던 것은 오직 필요했기 때문이다. 필요. 그것은 성현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그는 극도로 합리적이고 또 극도로 비합리적으로 변할수도 있었다. 그가 페라가모 구두를 신었던 이유는 그를 보는 사람들이 착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늘 깔끔하게 그루밍을 하는 이유는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예민한 사람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성현제는 강박적이고 깨끗하고 강력하고 신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필요’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대형 의류할인매장에서 산 중저가 옷을 입고, 못생긴 뿔테 안경을 쓰고 사람을 틈에 끼어 지하철을 탔다. 그는 자신의 맞은편에 서 있는 한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현제는 한유진을 필요로 한다. 유진은 생각했다. 만약 내가 지금 여길떠나서 영원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게으른 바보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면 그는 그걸 들어줄 것이다. 성현제는 한유진이 전쟁을 원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오직 대중교통만을 타고 뉴어크 항구에 도착했다. 항구 근처 푸드트럭에서 간단하게 부리또를 사먹고 탄산음료를 마시고 있는데 저쪽 끝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왔다. 캐주얼한 옷을 입은 강소영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강소영은 마치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처럼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 앉더니 성현제를 보고 말했다. 

“와 진짜 입어도 어떻게 이런 옷을 골라 입으셨어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소영씨. 어때보여요?”

“솔직하게요? 보스가 화내면 유진씨가 지켜주실거예요?”

“약속할게요.”

“솔직히 진짜 몰몬처럼 보여요.”

“푸하학!”

한유진은 그때 배를 잡고 웃어댔다. 너무 웃어서 의자가 뒤로 기우뚱 했는데 뒤로 넘어지지 않게 성현제가 의자를 잡아주었다. 한유진이 마음껏 웃어대고 있었는데 그때 같이 웃던 강소영이 문득 스마트워치를 들여다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가시죠. 준비 끝났어요.”

두 사람은 강소영을 따라 일어섰다. 항구에서 스피드보트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걸 타고 아서 킬을 지나 강과 바다가 만나는 샌디 훅 에서 방향을 틀었다. 운전은 썬글라스를 쓴 강소영이 했고 유진은 뒷자리에 성현제와 함께 앉아 지나가는 도시들을 바라보았다. 보트는 대서양 초입에서 슬슬 속도를 줄이더니 멀리 보이는 컨테이너 선박으로 향했다. 보트가 거대한 컨테이너 선박에 멈추자 강소영은 위에서 세성 직원이 내려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고 성현제는 한유진을 안고 온 몸에 전기를 감더니 확 날아 선박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유진이 성현제가 내려주는대로 자리에 내려섰는데 꽤 많은 세성 직원들 사이에 문득 아는 얼굴이 서 있는게 보였다. 노아 루히르였다. 

“안녕하세요.”

루히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성현제는 그걸 듣는 둥 마는 둥 했기 때문에 유진은 좀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또 뵙네요. 반가워요. 루히르 씨 맞죠?”

유진이 반갑게 인사하자 루히르는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본래 그렇게 웃는 사람이 아니라 조금 긴장한 것 같았다. 그때즈음 선박으로 다 올라온 강소영을 힐끔 바라본 성현제가 유진에게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보게 될 건 조금 잔인할 수 있네. 괜찮은가?”

“내가 싫으면 나갈게요. 하지만 보고싶어요. 나도 내가 어디에 발을 집어넣는 건지 알고싶거든요.”

성현제는 유진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나서야 강소영을 돌아본다. 뒤에서 싱글싱글 웃으며 대기하고 있던 강소영은 바로 그 신호를 알아듣고 그들을 안내했다. 몇백개씩 쌓여있는 컨테이너 박스들 중에 붉은 컨테이너 앞에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노아 루히르는 거기서 라텍스 장갑을 뽑아 꼈고, 성현제는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강소영이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문을 열었다. 갑자기 후끈한 열기와 습하고 불쾌한 냄새가 확 풍겼다. 피비린내와 오물 냄새다. 노아 루히르가 그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 곧 안에서 누군가 깨어난 것 처럼 쿨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아가 다시 걸어나왔고, 그는 라텍스 장갑이 피로 범벅이 된 채로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라텍스 장갑을 낀 강소영이 먼저 간이 의자를 들고 들어갔고, 그 다음으로 노아 루히르가, 성현제가 그 뒤를 따라갔다. 유진은 간이 의자를 든 강소영의 양 손에 너클이 끼워져 있음을 깨달았다. 유진은 긴장으로 침을 삼키며 천천히 뒤따라갔다. 안쪽은 어두웠다. 불은 바닥에 놓인 랜턴 하나가 전부였다. 성현제는 강소영이 펴놓은 간이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강소영과 노아 루히르는 성현제의 양 옆에, 그러나 약간 뒤편으로 섰다. 어둠 속에서 어떤 남자가 계속해서 기침을 하고 있었다. 성현제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두운 컨테이너 내부를 건성으로 둘러보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오줌을 지렸나? 냄새가 지독하군. 하긴 내 보좌관 주먹이 꽤 맵지.”

그러자 성현제의 오른쪽 뒤에 서 있던 강소영이 킥킥거렸다. 두 사람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소름이 쭉 끼칠 정도로 이상했다. 그때 피웅덩이와 오물 사이에 앉아 있던 남자가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말이라도 해 줘야 할 거 아냐…….”

성현제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엉망진창을 만들어 놨더군.”

“네가 누군데! 빌어먹을!”

그러자 성현제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방긋방긋 웃고 있던 강소영이 갑자기 웃지 않았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귀신처럼 튀어들어가 남자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얼굴을 미친듯이 때리기 시작했다. 뼈가 다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악! 악! 비명소리가 들렸고 곧 뼈가 아니라 살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곤죽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얼굴이 사라진다. 곧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강소영은 그제서야 남자를 바닥에 던져놓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섰다. 그러자 성현제의 왼쪽 뒤편에 뒷짐을 진 채로 서 있던 노아 루히르가 남자에게 걸어갔다. 그는 남자 앞에 쭈그려 앉더니 두 손으로 상처 부위들을 만졌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에서 어렴풋한 빛이 새어나오고 남자의 부러진 뼈와 내려앉은 얼굴이 복구되기 시작했다. 남자는 다시 기침을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이제는 울기 시작했다. 노아 루히르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서자 그제서야 성현제는 말했다.

“네 아버지와 대화할 때가 그래도 마음이 편했는데 아쉬워. 센티넬은 정말 일찍 죽지.”

남자는 흐느껴 울면서 악을 쓰기 시작했다.

“개자식! 이 씨발새끼! ”

그때 뒤에서 세성 직원들이 걸어들어왔다. 한 명은 유리 박스 안에 커다란 들쥐 한 마리를 들었고, 다른 한 명은 그 쥐가 통과할 수 있을것 같은 파이프 호스와 덕테이프를 들고 들어왔다. 곧 남자는 비명을 질러댔다. 강소영이 그의 입에 파이프를 쑤셔박고 덕테이프로 고정하고 있었다. 남자는 공포에 질려서 발버둥쳤지만 세성 직원들이 그를 움켜잡고 놓아주지 앉았다. 어둠과 악취 속에서 성현제가 마치 그곳에서 태어난 악마처럼 아무 표정 없이 앉아 이 모든 일을 지휘하고 있었다. 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단 한순간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


밤 늦은 시간의 뉴욕 지하철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유진은 성현제의 옆에 앉아 있다가 문득 그가 니트 안에 받쳐입은 흰 셔츠의 카라 부분에 피가 몇 방울 튀어있는 것을 보았다. 유진은 그래서 그 카라 킷을 잡아 니트 안에 잘 넣어서 숨겨주었다. 성현제가 이쪽을 보았다. 유진도 그를 힐끔 올려다 보고 그냥 별 말 없이 손을 잡았다. 멍하니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다가 노아 루히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남자는 기어코 정보를 모조리 토해냈다. 컨테이너 박스를 나오며 루히르는 진저리를 치면서 라텍스 장갑을 집어 던지더니 갑자기 한쪽 끝으로 달려가 구역질을 했다. 유진은 놀라서 그를 뒤쫓아가 등을 두드려줬다. 

“마약같은 걸 파는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루히르는 울고 있었다. 

“좀 더 말을 잘 듣는 센티넬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을 왜 안해봤을까요? 당연히 인간은 시도를 한거예요. 동물들을 센티넬로 만드는 시도를…….”

유진은 그의 등을 두드려주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성현제가 서서 이쪽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강소영은 조금 지친 듯이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 상처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생각했다. 이 끔찍하고 끝없는 싸움을 하기 위해서 진창에 들어가 그들보다 더 잔인하고 무자비해져야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그러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 수 있었을텐데, 그래도 그들은 이 길로 왔다. 성현제도 피로감을 느낄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수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는 남들보다 더 잘 버티기 때문에 거기 있었다. 

지하철이 덜컹거리며 멈췄다. 멈춰선 역에서 시끄러운 한 무리의 백인 양아치들이 탔는데, 그 중 몇몇은 센티넬 처럼 보였다. 그들은 저들끼리 떠들어대다가 이쪽을 보더니 갑자기 낄낄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이쪽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시비를 걸었다. 

“야 이새끼들 좀 봐.”

유진은 그들을 보았다. 덩치가 크고 폭력적으로 보이는 이들이 오직 억압과 독식만을 위해 시비를 거는데 이전이라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유진은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고, 성현제는 한숨을 쉬면서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엄지와 나머지 네 손가락을 문질러 눈에 보일 듯 말 듯 한 전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마치 손을 씻고 난 뒤 털듯이 네 손가락을 동시에 탁 튕기자 시비를 걸던 남자들의 눈 앞에서 전기가 팍 터졌다. 다섯 명이 동시에 각막이 타들어가 자기 눈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굴렀다. 유진은 그걸 보면서 다시 안경을 쓰는 성현제의 팔에 자기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음 역에서 두 사람은 바닥에서 기어다니며 우는 사람들 사이로 손을 잡고 걸어나왔다. 




+


글쓰는 사과

Blue Apple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