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요타, 그리고 짐.”


제출했던 수학 과제를 돌려받았다. 종이 한쪽 귀퉁이에는 빨간색 펜으로 ‘A’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점수였다. 선생님은 가볍게 잘했다는 칭찬을 건네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던 중에 우후라와 눈이 마주쳤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지나쳤다. 항상 앉던 창가의 맨 뒷자리로 돌아왔다. 무언가 달라진 하루. 하지만 교실에 있는 그 누구도 내게 시선을 보내진 않았다. 책상에 엎드려서 종이를 뒤적거렸다. 여기저기 기분 좋게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게 보였다. 평소라면 반나절 정도의 기쁨은 되었을 일이었지만, 오늘은 그 빨간 흔적들도 의미 없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계속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은 하나 둘씩 앞으로 나와 과제를 받아가고 있었다. 턱을 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동장에선 아이들이 와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방금 경기에서 누군가가 득점을 한 모양이었다. 그 소리조차도 내 귓가엔 시끄럽게 들리기만 했다.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진 않았지만, 자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내가 지나갈 때마다 복도는 배로 조용해졌다.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흘끗거리는 시선도 한둘이 아니었다. 어제 보충수업에는 착실히 참여했지만, 아직 벌은 6일이 더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 남은 흔적은 그보다도 더 오래갈 성 싶었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었다. 상처가 선명히 만져졌다. 급식실에서 시비가 붙었던 하루 종일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복도에서 어깨를 몇 번이나 부딪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뭐라도 대꾸를 해줄까 싶긴 했지만, 한 번 더 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아서 속으로 화를 삼켰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도 쉽게 들질 않았다. 마치 모든 감정을 거세당한 것처럼 만사가 귀찮기만 했다. 오늘 치 감정을 어제 다 써버리기라도 한 걸까. 언제는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충동이 들더니, 또 오늘은 반대로 하루 종일 질리도록 무덤덤하기만 했다.


복도 게시판 앞에 아이들이 몰려 있다 했더니, 저번 달에 있었던 화학 경시대회 결과가 공고되어 있었다. 그냥 지나쳐 가려다가 슬쩍 눈을 돌렸다. ‘2등 – 레너드 맥코이’. 역시나. 헛웃음이 나왔다. 레너드는 만사에 성실한 편이었다. 더군다나 본격적으로 대학 입시 준비를 시작한 올해부터는 더더욱 그의 이름을 이렇게 볼 일이 많아졌다. 축하한다고 말이라도 해야 하나.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던 중에, 그와 내가 어제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락커에서 연고를 발견한 뒤에 그가 한 번쯤은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아닌 기대도 했지만, 그는 오후 내내 얼굴 한 번 비추질 않았다. 보충수업 때문에 하교 시간마저 달라져 버렸으니 결국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볼 일은 없었다. 옆집에 살면서도 얼굴 한 번 보기가 그렇게 힘들 줄이야. 내가 손만 놓으면 끝나버리는 관계라는 걸 예전엔 왜 몰랐을까.


“자, 여기. 됐지?”


식권을 몇 장 팔았다. 아침에 미리 누나에게 받았던 걸 챙겨온 덕에 잔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거래를 하는 내내 아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보면 괜한 시비가 붙을까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 덕에 잔돈으로 말다툼을 할 일은 없게 되었다. 그 애는 지폐 몇 장을 던져주고는 금방 사라져버렸다.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매점에서 가장 싼 아이스크림 샌드위치 하나를 샀다. 평소라면 한 끼 식사로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겠지만, 오늘은 배가 별로 고프질 않았다.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계단에 걸터앉아 포장을 뜯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식권 한 장은 남겨둘 걸 그랬나. 입안에서 끈덕거리는 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밍밍한 스파게티를 먹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것 같았다. 반쯤 먹다만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를 옆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입맛마저 무뎌진 모양이었다. 


학교는 남은 시간에도 고역이긴 마찬가지였다. 보충수업이 있을 걸 생각하니 시간은 더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락커에서 체육복을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평소에 좋아하는 체육 시간이었지만 마찬가지로 감흥은 없었다. 먼저 운동장에 나가 벤치에 앉았다. 다른 아이들은 한참을 떠들다 오느라 항상 5분씩은 늦곤 했던 것이다. 아프다는 핑계나 댈까. 평소 같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때맞춰 나온 체육 선생님은 트랙 앞에 고깔을 세워두고 있었다. 달리기라면 내가 우리 반에서 가장 빨랐다. 일부러 눈에 띠기 싫어서 한 박자씩 늦게 뛰곤 했지만, 이것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냥 뛰어볼까. 표정이 볼만할 텐데. 또, 괜한 반항심이 들었다. 주먹을 쥐어보았다. 이상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듯 싶었다. 그냥 쉬겠다고 할까. 아직 다리에 남아 있는 선명한 멍이 그 말에 신빙성을 더해줄 것이었다. 한숨을 쉬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평소와 같지 않은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저기. 안녕, 짐.”

“어?”

“아, 맞다. 나 기억하지? 나 너한테 엄청 잘해줬었는데.”


세수를 하고 나오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졸업 학년의 남학생이었다. 누나와 꽤 오래 데이트를 한 사이였기 때문에 얼굴이 퍽 익숙했다. 잘해줬다는 말에 어느 정도의 어폐는 있긴 해도 그가 나에게도 꽤 노력을 쏟았던 건 사실이었다. 등굣길에 나까지 차에 태워가려는 걸 거절하느라 진땀을 뺏던 기억이 났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 시선도 오랜만이었다. 그는 학교에서도 손에 꼽히게 유명한 남자애였다. 하필 어제 그 난리를 부린 후였으니, 그 눈길은 평소보다 배로 뜨거웠다. 수군거리는 소리까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또 무슨 변덕이야. 졸업 학년이면 지금쯤 대학 갈 준비를 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다던데, 그는 아무래도 예외인 모양이었다. 용건이 빨리 끝나면 좋을 텐데. 그가 앞을 꽉 막고 있는 바람에 몸을 피할 수도 없었다. 손에 들린 후드로 대충 얼굴을 닦았다. 그는 다짜고짜 손에 들린 걸 내 손에 쥐어주었다.


“이거 샘 좀 전해줘.”

“왜, 직접 주지.”

“어차피 걔가 부탁한 거야. 주기만 하면 뭔지 알거야.”

“뭔데?”

“핸드폰.”

“핸드폰?”

“그리고 걔 오늘 학교 안 왔잖아. 너한테 주라던데.”


안 왔다고? 그가 간 후에 상자를 열어보자 정말로 핸드폰이 들어 있었다. 집에 안 들어온 지 며칠이 되긴 했지만 학교까지 안 온 줄은 미처 몰랐다. 하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긴 했다. 누나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것이다.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열어보면 안 되려나. 잠시 망설여졌지만 왠지 모를 호기심이 들었다. 핸드폰 화면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저장되어 있는 번호라도 볼까. 핸드폰은 자주 만져 보진 않았지만 대강 조작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전화번호부를 확인해봤는데, 저장된 번호가 없다는 메시지만 나왔다. 빈 핸드폰인가? 혹시나 싶어서 메시지함을 확인해봤다. 보낸 메시지함은 마찬가지로 비어 있었고, 받은 메시지함에 두 개의 문자가 남아 있었다. 봐도 되려나. 누나가 알게 되면 소리 한 번 지르는 걸로 끝날 리는 없었다. 티만 안 나면 되겠지. 확인 버튼을 꾹 눌렀다. 익숙한 번호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뒤의 4자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앞부분만 보아서는 분명히 레너드의 번호였던 것이다.


- 저기, 비밀로 해줘

- 물어볼게 있는데 전화 좀 해줄래?


허탈했다. 뭐야, 목석같이 굴더니 또 이런 말은 잘하네. 마저 번호를 확인해볼 것도 없었다. 이미 레너드의 문자인 게 분명했다. 핸드폰을 고이 상자 안에 넣어두었다. 비밀이라니. 그래서 그렇게 조용했던 건가. 내 짐작대로 두 사람이 정말 사귀기 시작한 거라면 학교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누나가 연애를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도, 그 상대가 바뀔 때마다 아이들은 천지가 개벽이라도 한 양 떠들어댔던 것이다. 게다가 레너드는 지금껏 누나가 데이트를 했던 사람들과는 여러모로 다르기도 했다. 방금 내게 멋대로 이 핸드폰을 던져주고 가버린 저 애만 봐도 그랬다. 누나 남자친구들은 죄다 오만했다. 세상만사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었다. 적어도 이 학교에서 그 아이들은 규칙을 만들었고, 또 질서를 어그러뜨려놓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게 했다. 그 알량한 권력이 부러운 건 아니었다. 레너드도 그들을 우러러보지 않았으니까. 레너드는 오히려 규칙을 지키는 쪽이었지만, 그가 지키는 규칙은 다른 아이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게 그의 가장 특이한 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사실 누구보다 조용하고 얌전해 보이는 그가, 누구보다도 멋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걸.


상자는 락커 안에 넣어두었다. 자물쇠는 따로 채워두지 않았지만, 어차피 내 락커에는 손을 대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딱 한 사람만 제외하면. 그리고 내가 알기론 그도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가는 취미는 없었다. 락커를 열자 또다시 연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괜히 버렸나. 버릴 것까진 없었는데. 레너드가 보는 앞에서 버린 것도 아니었지만 괜한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지가 먼저 모른 척 해놓고는. 그렇게 쌀쌀맞게 가버릴 땐 언제고 또 착한 척.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속으로는 괜한 소리만 하게 됐다. 내 행동에 대한 변명이라면 변명이었다. 락커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또 지겨운 시선이 따라붙는다. 평소 같은 그의 가벼운 호의일 뿐이었다. 그로서는 손 하나 까딱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 호의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좋아하며 밤을 지새우던 게 아까워서라도 더 흔들리고 싶진 않았다. 고집이라면 고집이었다. 본즈, 난 네가 내 친구라는 게 정말 싫어. 내가 언젠가는, 다시 너를 예전 같이 대할 수 있게 될까.


락커 문을 닫고 뒤돌아서자마자, 그렇게 마주치기 싫었던 얼굴이 보였다. 복도 저 끝에 서 있었지만, 그의 얼굴 하나만큼은 또렷이 보였다. 레너드 맥코이. 그의 이름을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이 층까지 내려온 걸 보면 우연한 만남인 것 같진 않았다. 뭐 하러 그 귀한 걸음으로 여기까지. 차라리 반대편으로 피해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뒤에는 막혀 있는 벽밖에 보이질 않았다. 다시 락커 문을 열었다. 그가 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괜히 꽂혀 있는 과학책을 만지작거렸다. 책 모퉁이를 잡고 넘기다 보니 그가 해놓은 아기자기한 낙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토끼, 하트, 별, 그리고 ‘짐’. 짐? 또 내 이름이었다. 지우개로 벅벅 지워놓았는데도 자국이 선명할 정도였다. 다시 책을 손에서 놓았다.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 달린 거울에서 벌게진 내 귀가 언뜻 보였다. 그리고 쿵쿵 거리며 심장이 뛰었다. 그 소리는 마치 발걸음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쿵, 쿵, 쿵. 그 규칙적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나 진짜 착각할 거 같아. 너, 혹시 나 좋아해?


“짐.”

“...왜.”

“많이 다쳤네.”

“다 봤으면서, 뭘.”

“약 안 발랐어?”

“어차피 필요 없어.”


락커 문을 사이에 둔 채로 이야기를 했다. 고개는 돌리지 않았지만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마치 그간의 일이 없던 일이기라도 한 것 마냥.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하루 종일 이상할 정도로 잠잠해져 있던 심장이 갑자기 뛰어댔다.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왜 화가 나지. 너한테 화를 낼 이유가 없는데. 손이 떨리는 걸 감추려고 일부러 락커 속에 더 밀어 넣었다. 레너드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했지만 내 연기가 얼마나 먹혔을 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의 손이 락커 문을 잡았다. 얼른 손을 뻗어서 문을 잡아당기려는 그를 막았다. 지금 내 얼굴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일그러진 눈썹, 벌게진 두 눈, 어쩔 줄 몰라 하며 떨리고 있는 입술.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한편으로는 그의 침착한 숨소리가 들렸다. 귀에서 들리는 소리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죄다 뒤엉키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저리 가.”

“짐.”

“할 말 있으면 나중에 해.”

“치료는 해야지. 덧나면 어쩌려고.”

“본즈, 제발ㅡ”

“알았어. 갈게. 나중에 봐.”

“.....”

“미안해.”




*



“야, 너 그 셔츠 가지고 있지?”


누나는 대뜸 문을 열어젖히더니 방으로 들어왔다. 공을 만지작거리며 누워 있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기척도 없이. 누나는 곧바로 쌓여 있는 옷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얼른 누나를 말리고 의자에 앉혔다. 셔츠를 어디다 뒀더라. 파티에 갈 때 빌려 입은 후로 돌려달라는 말이 없어서 잊고 있던 셔츠였다. 어차피 누나가 입을만한 사이즈도 아니었던 데다가, 전 남자친구가 입던 걸 다시 돌려줄 일은 없겠다 싶어서였다. 비교적 잘 개어놓은 옷가지 사이에서 낯선 셔츠가 한 장 나왔다. 곧장 누나 손에 셔츠를 올려주었다. 누나는 먼지가 잔뜩 묻은 셔츠를 손가락 끝으로 집고는 탈탈 털었다. 누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잔뜩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며칠 만에 집에 들어온다 했더니. 누나는 내게 받아간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누나는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더니 셔츠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볼 일은 끝난 것 같은데도 일부러 뭉그적거리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공을 내려놓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건 왜 달라고 하는데?”

“돌려주려고.”

“그걸?”

“그 핑계로 얼굴이나 보려는 거지. 그걸 말해야 알아?”

“...걔를?”

“계속 연락오길래, 그냥.”

“본즈, 아니, 맥코이는 어떡하고?”


누나는 열심히 문자를 하다 말고 고개를 들더니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리고는 혀를 쯧쯧 찼다. 내가 몹시도 한심하다는 투였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누나가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누나가 전 남자친구인 마크를 다시 만나겠다는 건 의외의 발언이었다. 누나는 복잡한 관계는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제멋대로 구는 누나라고는 해도 지키는 선은 있었다. 그래서 적어도 한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얽히지 않도록 조심하는 편이었다. 누나가 갑자기 그 암묵적인 규칙을 깨기로 했다고 해도, 여태껏 내내 레너드와 잘해볼 생각만 하고 있던 누나가 마크에게 관심을 돌린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드물기는 해도, 누나는 한 번 원하는 게 생기면 잘 포기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누나는 계속 핸드폰 자판을 두들기던 손가락을 멈추고 핸드폰 플립을 닫았다. 분명 쓸데없는 장난이었다. 더 듣지 않아도 뻔했다. 지금쯤 당황한 내 얼굴을 보며 얼마나 속으로 통쾌해하고 있을까.


“글쎄.”

“뭐?”

“걔도 귀엽긴 한데, 난 그렇게 뻣뻣한 사람은 별로라서.”

“언제는 그래서 좋다면서.”

“왜 네가 편을 들어주고 있어. 걔가 그렇게 좋아?”

“뭐라고?”

“아니다. 너랑 뭔 얘기를 하겠냐.”

“왜, 무슨 얘기.”

“됐어. 마음 딴 데 가 있는 사람한테 공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누구? 본즈?”


되물어 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누나는 또 제멋대로 입을 닫아버렸다. 기왕 말을 해줄 거면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를 하던가. 다시 재촉을 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핸드폰을 집어 드는 걸 보면 더 말을 해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누나가 레너드와 따로 쇼핑몰에 가겠다고 한 후로 처음 나누는 대화였다. 그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누나는 레너드에 대한 흥미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마크에게서 계속 연락이 왔다더니, 둘 사이에 뭔가 대단한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마크와도 데이트를 꽤 여러 번 하기도 했었고, 그는 헤어진 다음에도 계속 누나에게 관심이 있는 티를 냈던 것이다. 잘된 일인가? 눈동자를 굴렸다. 상황이 너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새에 무슨 일이 이렇게 많았던 건지. 누나가 레너드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은 다행이지만, 아직은 경계가 거둬지지 않았다. 잠깐의 변덕일지도 몰랐다. 괜히 말려들어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게 될까 걱정이 앞섰다. 누나가 무언가를 착각했거나, 혹은....


“아, 너 머리는 언제까지 기를 거야?”

“머리?”

“좀 자르지. 그, 뭐냐, 옷도 좀 제대로 입고 다니고.”

“왜. 뭐 어때서.”

“진심으로 묻는 건 아니지?”

“아,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나가. 약속 있는 거 아니야?”

“기다려봐. 가위 없어?”


레너드에 대한 궁금증을 다 해소하지도 못했는데 누나는 다른 얘기를 해댔다. 평소엔 트집 잡지도 않던 머리니, 옷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누나는 생각보다 적극적이었다. 곧장 가위를 찾아 책상 위를 뒤지는 게, 말려도 소용없을 분위기였다. 고개를 돌려서 옷장 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머리를 자른 지도 한참이 되었다. 앞머리가 눈을 다 찌를 기세인 건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티셔츠는 몸에 꽉 맞았고, 긴 바지는 짧아져서 발목을 훤히 드러내 보였다. 퍽 멋있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입장에선 최선이었다. 그 옷도 아침에 쌓여 있는 옷가지 사이에서 겨우 찾아 입은 복장이었던 것이다. 내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에, 누나는 정말 머리를 자를 기세로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얼른 뒤로 몸을 젖혔다.


“여기서 뭘 잘라. 나중에 알아서 할게.”

“그 꼴로 돌아다니는 걸 봐줄 수가 없어서 그런다. 화장실에서 자르면 되지. 아예 올려도 될 것 같은데.”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미쳤어? 네가 하게 내버려두게.”

“어차피 지금 하고 다니는 거 보면 조금 망쳐도 티도 안 날 거 같은데.”

“아, 저리 가라고!”

“도와주는 것도 힘드네. 나중에 고맙다고 울지나 마라.”

“알았으니까 나가기나 해.”

“내가 왜 나가. 따라와 봐. 자르게. 나 이런 건 잘하는 거 알잖아.”


결국 끌려가다시피 화장실로 따라왔다. 반신반의하긴 했어도 누나가 이런 데에 실수할 사람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자른 지가 얼마나 됐더라. 학교에도 머리를 길게 기르는 애들이 많아서 잊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앞머리는 곧 잘라야 하지 않을까 싶긴 했던 참이었다. 손에 물을 묻혀서 더러워진 거울을 한 번 쓸었다. 깨끗해진 거울 속에서 내 모습이 보였다. 파란 눈동자, 그리고 그 눈동자를 반쯤 가리고 있는 어두운 금발의 머리카락. 머리가 이만큼 길긴 했네. 매일 락커에서 거울을 봤는데도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내 얼굴이 낯설었다. 언제 이런 모습이 됐지. 다른 데에 신경을 쏟고 있는 새에. 욕조에 걸터앉아서 서 있는 누나를 올려다보았다. 누나는 가위를 손에 끼우고 몇 번 시험을 해보더니 곧바로 두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집었다.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용사가 되는 꿈이라도 생겼나. 내가 연습용은 아니겠지.


“눈은 감고 있어.”

“내가 뭘 믿고.”

“야, 너는... 됐다. 그래. 똑바로 뜨고 있어라. 너도 끝나고 보면 알겠지.”


머리를 자르는 건 생각보다 한참이 걸렸다. 누나가 계속 앞을 보고 있으라고 성화를 하는 바람에 거울을 확인하지도 못했다. 너무 짧은 것 같은데. 불평을 하고 싶었지만, 혀까지 빼물고 집중하고 있는 누나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걱정은 속으로 삼켰다. 한참이 걸린 후에야 누나는 가위를 치우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바닥은 머리카락으로 온통 엉망이 되어버렸다. 양말을 신지 않은 발바닥에도 머리카락이 붙어서 찝찝해졌다. 누나는 빗을 들고 여기저기를 만져보더니 거울을 확인 해봐도 된다고 허락을 해주었다. 먼저 누나의 표정을 살폈다. 썩 밝은 표정이 아닌 걸 보니 결과물이 슬슬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의 깨끗한 부분을 찾아 얼굴을 움직였다. 그리고 머리가 훨씬 짧아져 있는 내 모습이 거울 속에 드러났다. 앞머리는 짧게 깎아서 완전히 위로 올려놓았고, 뒷머리도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어색한 느낌에 손으로 뒤를 더듬어 보았다.


“너무 짧은 거 같은데.”

“뭐가 짧아. 요즘 다 그렇게 하고 다니던데.”

“난 모르겠어.”

“훨씬 나은데, 뭐. 아무튼 정리나 하고 나와.”

“응.”


“얼굴에 그건 좀 지워야 되지 않겠냐. 계속 그러고 다닐 거야?”

“없어지겠지.”

“그나마 봐줄만한 게 얼굴인데 그거 망쳐서 어쩌려고.”

“나 말이야?”

“그래. 걱정시키려고 하는 거면 성공한 거 같지만.”

“무슨 헛소리야. 걱정하는 척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나 말고.”

“그럼 누구?”


역시나 멀쩡한 대답은 없었다. 샤워기로 머리카락을 대강 쓸어냈다. 가벼워진 머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청소를 하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긴 머리카락에 감춰져 있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얼굴의 상처도 더 또렷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오른쪽 광대에는 푸른 멍이 들어 있었고, 찢어진 입술에는 딱지가 앉았다. 왼쪽 턱 부분에는 무언가에 찢긴 흔적도 있었다. 특별히 눈에 띠진 않아도 콧등도 욱신거리는 걸 보면, 거기도 멍이 남은 모양이었다. 얼굴은 많이 맞지 않았던 것 같은데도 뜯어보니 영 꼴이 엉망이었다. 싸움이 있은 후에도 일부러 보건실에 가지도, 약을 바르지도 않았다. 방치한다고 당장 죽을만한 상처도 아니었던 데다가, 왠지 그 흔적을 쉽게 지워내 버리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레너드가 줬던 연고도 달갑지 않았다. 마치 내가 그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시비를 걸기라도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내가 다치면 레너드가 외면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가여워했다. 억지로 나를 함부로 굴려서라도 그의 시선을 한 번 돌려보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스스로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에게 그를 붙잡아둘 수 있는 수단이 고작 그것뿐이라는 것도. 


“옷은 애들한테 알아볼게.”

“굳이 뭘.”

“어차피 몇 벌 못 구할걸. 나머진 네가 알아서 사.”

“...너는 어떻게 사는 거야?”

“뭘? 옷?”

“응.”

“돈 주고 샀지.”

“그러니까ㅡ”

“그럼 훔쳤을까봐. 그건 네가 직접 알아내.”


누나는 내 방의 옷더미를 몇 번 뒤적거리더니 괜찮은 옷을 몇 벌 골라주고 집을 나섰다. 집 앞 도로에 차가 와서 서는 게 보였다. 누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에 올라타고 사라져버렸다.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는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누나가 다른 애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게 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핸드폰을 확인하고 나자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저런 고가의 물건을 살 정도의 돈이 나올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까. 외삼촌이 허가서에 서명을 해주진 않았을 텐데.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누나라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누나 친구들 중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이미 허가서를 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화장실에서 나가기 전에 거울 속으로 한 번 더 내 얼굴을 확인했다. 밝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는 두 눈이 또렷이 보였다. 괜찮아진 건가. 괜히 머리를 몇 번 쓸었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폭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누나가 지나간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정확한 건 몰라도, 평소답지 않게 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레너드 때문인가. 생각해보고 나니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사랑은 사람을 바꾼다고 하지 않던가. 이따 집에 들어오면 확실히 물어봐야지. 그런데 혹시 레너드가 정말 누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침대에 드러눕다 말고 눈이 번쩍 뜨였다. 상상도 그런 별 쓸데없는 상상이 다 있었다. 누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동급생 애들부터, 작년에 졸업한 대학생들까지도 누나를 만나고 싶어서 괜히 나를 찔러대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 레너드가 누나를 좋아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그럼 누나가 레너드가 싫어진 건가. 그건 나한텐 기뻐해야 하는 일이려나. 그러고 보니 그가 내내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던 것도 이해가 갔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의 불행을 나의 행운으로 여기고 싶진 않았다. 또, 어쨌든 두 사람은 잘 풀릴 게 뻔했다. 몇 년 안 되는 인생으로도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내 걱정이나 하자. 내 걱정이나. 한숨을 쉬며 공을 천장을 향해 던졌다. 다시 공이 내게 빠르게 내려왔다.



스타트렉 / 본즈커크 / 크리스 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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