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워듣거나 읽었던 옛 이야기 중엔 종종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으로 나타나는 설화들을 본 적이 있었다. 함께 살던 아내가 조개였다던가, 집에 들인 우렁이가 사실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던가, 혹은 요괴, 괴물, 도깨비, 아무튼 사람이 아닌 것들에 관한, 소위 말하는 전래동화라고 할 법한 옛 이야기들이다. 대부분은 집에 돌아왔더니 따뜻한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더라,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있더라 하는 등의 때 아닌 정성까지 곁인 건 덤이었다.

어릴 적 듣고 자란 옛 설화들을 떠올리며 시로는 눈을 껌뻑거렸다. 난생 처음 사람 아닌 다른 것을, 그러니까 손 안에 들어오다 못해 넉넉하게 굴러다니고도 남을 작은 물고기를 집에 들이면서 바뀐 게 뭐가 있었더라? 아침마다 머리맡의 물기 닦기, 일주일에 한번 씩 물청소하기, 물 갈아주기, 밥 주기……. 보탬이 되었던 건 확실히 있었다. 일이 늘었다.

혹시 그동안 살짝 추가된 보잘 것 없는 노동의 반동으로 인한 꿈과도 같은 피로감일까?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시로는 제 스스로 한쪽 뺨을 꼬집었다. 아프다. 동화도 꿈도 아닌 현실이었다. 눈앞의 청년이 괴상한 행동을 목격했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길가메시라고……?”


분명 이건 꽤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신화적 의미와 역사적 의의를 간직할 만한 기록으로 꽤 많은 학자들이 매달려 연구하는 바람에 한두 번 정도는 들어봤을 이름이었다. 확실히 중동의 고대 어쩌구의, 그런 쪽 이야기였지. 길가메시 서사시라던가 하는 그런 이야기에 사람이 물고기로 변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던가, 아니지, 물고기가 사람으로……?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궁리하는 시로를 두고 자신의 이름을 길가메시라 밝힌 청년은 젖은 앞 머리칼을 신경질 적으로 넘기고 있었다. 태생이 그랬다는 듯 얼룩진 것도 없이 물기를 머금은 금발은 가만 보면 작은 물고기의 빛깔과 닮아 있다. 반짝반짝 물 안에서 흔들렸던, 예쁜 금빛과 같은.


“꿈은 아니겠지?”

“뺨을 꼬집는 게 아니라 밟혀봐야 알겠느냐?”


역시 그 물고기가 맞는 것 같다. 딱히 화를 돋울 생각은 없었는데 이쪽의 영문을 모르게 벌컥 성질부터 내는 점이 그랬다. 하루 24시간 중 23시간 59분 정도는 내내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항 벽에 붙어서 지느러미를 펼쳐대던 제 물고기를 생각하며 시로는 괜한 억울함과 서운함을 담아 푸욱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 모습은 진짜로 화내는 물고기 그 자체였던 건가.


“……린은 도대체 어디서 이런 물고기를 가져온 거야.”

“호오? 그 맹랑한 양 갈래 계집의 이름이 린이라 하였는가.”

“린을 알아?”

“이 몸의 몸값을 두고 그 산적 같은 수족관 문지기와 흥정을 하던 꼴이 예전에 알던 어떤 수전노 여신을 생각나게 해서 말이지.”


린, 엄청 후려쳤나보구나……. 결과적으로는 린이 ‘사왔다’는 것인데, 이렇게 듣고 보니 정말로 이 길가메시라는 청년은 제가 나름 애써 돌보던 그 금빛 물고기가 맞나보다. 현실이 아직도 꿈인 것 마냥 와 닿지 않았기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는 없었으나, 생전 처음 보는 청년이 같은 학교의 동급생까지 알고 있으며 그 성격도 모두 파악한 걸 보면 억지로라도 확신을 가져야 하긴 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비 오는 날 전라로 돌아다니는 외국인이라니, 시로의 눈에 띄기도 전에 이미 지역 TV 방송으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을 일이었다. 그래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결국 시로는 스스로 어린아이 같은 질문이라 생각하면서도, 마치 동심이라도 담은 듯한 질문을 그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물고기에서 사람이 된 거야?”

“무엄하다. 나는 원래 사람이었다. 그렇다 해도 잡종들 부류와는 같은 차원에 둘 수 없는 몸이지. 네 놈, 내 이름은 아는 듯해도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구나.”


원래 사람이었단 소리는, 그럼 결국 지금은 아니란 거잖아? 가만 보니 자신을 길가메시라 밝힌 이 청년은 짧은 대답을 길게 풀어서 말하는 재주가 있는 듯 했다.

그러고 보면 도서관에서 잠깐 넘겨봤던 서사시의 일부 중엔 그의 태생 중 일부는 신의 피가 섞여있다는 기록을 본 것도 같다. 반인반신에서 물고기라. 어째 영 엉뚱한 결과였다. 신화 속 주인공이 제 현실에 있다는 것보다는, 당장에 비어있는 어항과 그 어항에서 튀어나온 것으로 (추정되어)보이는 수상한 청년이야말로 시로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와중에도 시로는 한 시간 안에 제가 겪었던 모든 말도 안 될 상황을 애써 현실에 끼워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비 오는 저녁 알몸으로 돌아다니다가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한 것도 모자라 집주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려 했던 수상한 침입자……. 입을 여니 책속에서나 봤을 법한 이름을 대고 자기소개를 하며, 한 달 생활 비용의 일부를 털어 준비했던 30cm의 작은 어항의 환경 조성에 대한 불만불평부터 줄줄이 나열하던 남자.

현실이 어찌되었든 수상한 느낌은 지울 수 없기에 뭐라도 물어보고 캐내야 함이 맞았는데, 질문을 어떻게 던져야 할지 몰랐다. 선반에 놓인 어항 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아침마다 금빛 지느러미를 구경하며 돌보던 물고기는 온데간데없고, 대신에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그 물고기와 똑같은 빛깔을 가진 금발의 청년이 마찬가지로 같은 빛을 머금은 붉은 눈동자를 부리부리하게 치켜 뜬 채 등장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저녁나절 마치 그 빗속을 맨몸으로 돌아다니기라도 한 것처럼 흠뻑 젖은 채, 맨 발로 아무 이유 없이 냅다 얼굴을 짓밟았던, 그것도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친 것 없이 맨몸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는 어항을 샅샅이 뒤져보는 시로의 뒤통수에 대고 이 몸이 바로 그 망할 물고기의 모습이었다, 라고 대놓고 정신 나간 소리를 이어갔다. 쫓아내야 했으나 그러지도 못했다. 에미야 저택에서 알몸의 남자가 튀어나왔다고 돌아다니게 될 동네 소문이 아주 끔찍했다.

어항을 뒤져보는 것도 포기하고, 낯선 알몸의 남자를 쫓아내는 것도 포기한 채 시로는 그와 마주하고 있었다. 결국 복잡하게 머릿속을 굴러가던 질문은 아주 단순하게 압축되어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길가메시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이 몸엔 저주가 걸려있느니라.”

“전래동화 다음엔 저주인가…….”

“뭐라?”


눈썹을 치켜뜨는 모습에 또 제 물고기가 생각났다. 유리벽을 두고 마주보기만 해도 바락바락 성질을 내던 작은 물고기……. 성질만 보면 정말 그 물고기가 이 청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길가메시는 한껏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몸에 걸쳐진 홑이불을 당기며 말을 이었다.


“고대의 신들이 천명이 다할 때 걸어둔 저주인 셈이지. 주어진 생을 마감하더라도 몇 번이든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는 것으로 말이다.”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게 물고기란 말이지.”

“믿거나말거나 지금 그 저주의 원천을 직접 보고 있지 않느냐. 흥,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그건 저주가 장난 정도 되지 않겠나.”

“축복이 아니라?”


시로의 질문에 길가메시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기가 막힌 걸 입에 올렸다는 듯이 결코 좋은 의미를 담지 않은 비웃음이었다.


“신이 인간에게 왜 축복을 내리더냐?”


도대체 역사의 기록 이외에 인식된 신들이란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길가메시는 ‘신’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며 질린다는 듯 표정을 지어보이면서도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미련을 두고 불평하지는 않아 보였다. 저주라고 몸소 밝혔으면서도, 이미 그렇게 태어난 것은 돌이킬 수 없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천명을 누리고 눈을 감았다. 뭐 별로 욕심을 둘 것도 없었지. 허나 이 몸이 직접 행한 생의 업적이 그들 입장에선 꽤나 약이 오른 법이었나 보더구나. 이미 이승의 줄을 놓고 가려는 자에게 억지로 끈을 매달아 둔 것일 뿐이다. 신들이란 제 좋을 대로 뭔가를 만들어두는 건 서슴지 않으면서 돌보는 일이라곤 어린아이가 진흙을 만지는 것보다 못한 수준이었으니, 인간이 제 갈 길을 찾아가는 것에 그들 또한 어쩔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억지를 부린 것이지. 그 대표 격인 셈이다. 이 이상은 그들도 결국 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데?”


벌을 받았단 소리 같기도 하고, 가만 보면 어지간히도 집착했다는 듯한 소리인데, 바꿔 말하면 그건 그럴 만 할 정도로 아꼈다는 소리도 되지 않겠는가. 비상식적인 일이었지만 이미 튀어나온 대답들이 그리 현실적이지는 못했다.

길가메시는 코웃음을 치며 턱을 치켜들었다. 꽤 즐거운 듯이 말을 잇는다.


“잘못? 결과적으론 길이 남을 위업이었다. 신들과 결별할 것을 선언한 것일 뿐이니라. 애초에 기울어질 운명, 아득히 기다릴 것 없이 이 몸이 이룰 업적 삼아 손수 보여줬을 뿐. 지나가는 세월에 빛이 다한 채 사라질 것에 미련을 두는 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신도 그러한 법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한낱 인간이었을 존재가 미련을 버렸음에도, 인정할 수는 없었던 게지. 그들에게는 죽음의 의미와 비슷했을 것이다. 결국은 인간과 이어져있어야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 신이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이어져갔으나 시로는 어쩐지 그가 하는 말의 모든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신화 속 존재가 옛이야기를 펼치듯 줄줄이 엮어주는 말들이라 하더라도, 현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떠나는 자식들을 미련 없이 보내며 앞날을 축복하는 부모들이 있는가 하면 죽는 날까지도 품 안에서 놓지 못한 채 그 모든 것을 낱낱이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었다. 직접 겪어보지는 못하더라도 숱하게 들어본 주변의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물고기로 태어나게 되는 생은 현실에 없는 이야기였다. 시로는 눈앞에 앉은 길가메시를 마주 보며 마치 동화와도 같은 이야기를 현실의 목소리로 듣고 있었다. 신들이 저주까지 내려가며 악착같이 놓지 않기를 바랐던 인간 길가메시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현실 속에 풀어놓고 있다. 아주 덤덤히, 더하고 덜어낼 것도 없다는 듯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시로는 입을 열었다.


“물고기로……. 그럼, 지금은 몇 번째 인거야?”

“글쎄.”


길가메시는 조금씩 물기가 말라가는 제 앞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한창 굵게 내리던 비가 점점 더 거세게 바닥을 때리고 있는 마당의 정경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마치 그 빗줄기에 흘려보내기라도 하는 양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 자리 수에 가까워져 올 때에는 귀찮아서 헤아리지 않았다. 뭐, 물고기로 태어나 명을 다할 때 까지 몇 백의 횟수를 반복했다 하더라도 더해봐야 이 몸이 천명을 누렸던 햇수의 반에 반도 못 미쳤을 게다.”

“그건…….”


잠시 아득해진 기분에 저도 모르게 대꾸하려던 시로는 곧이어 목을 짓누르는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시로는 황금색 물고기를 처음 집안에 들였을 때 이미 많은 것을 알아보고 있었다. 얼마나 건강히, 어떻게 해야 그 예쁜 지느러미를 고이 간직할 수 있을지. 기왕 지켜볼 모습이라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돌볼 것이라 은연중에 생각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모습을 안고 태어났음에도 이 물고기가 살아가는 수명은 무척이나 짧았다. 고작해야 2년, 그것도 건강히 잘 살아봐야 맞이할 수명이다.

짧다고 할 수는 없어도 인간이 느끼기엔 한없이 짧을 수명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반복했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건 아니었을까. 인간이었던 자가 물고기로 태어나 코앞에 다가올 죽음을 기다린 다는 것은, 기약할 수 없는 미래의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는 것보다도 괴롭게 느껴진다.


“그건……고통스럽겠네.”


목구멍을 짓누르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막연한 것을 알지도 못하는 무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이미 아는 것을 피할 수 없음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야 말로 고통과 다름없지 않을까. 그러나 길가메시는 그런 시로의 목소리에 별안간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후하하하하, 죽음이 말이더냐? 세상에 태어났으면 가는 날이 있기 마련 아니더냐. 이 몸은 이미 전성기 시절 그 모든 것을 보았고, 깨달았다. 받아들이는 것으로 말이다. 미련을 놓으면 고통스러울 것도 없지. 육체적인 것은— 뭐,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는 법이지만. 흠. 꽤 기특한 표정으로 고심하고 있구나, 잡종.”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탓에 시로는 그가 떠드는 동안 단 한마디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단 사실을 몰랐다. 고개를 들어보니 길가메시는 살짝 고개를 치켜든 채 마치 내려다보기라도 하듯 시로의 얼굴을 구경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귀찮지만 친히 그것을 용서해주기라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소유욕과 애정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인간이 흔히들 착각하게 되는 어리석은 부분 중 하나이기도 하지. 신들 또한 그러한 법이었다. 잘 알기에 이 모습으로 태어나게끔 저주를 남겨뒀지. 샤마쉬는……이 몸의 사후 뒤 내 영혼을 거두어 저승을 살피는 동행자로 삼고자했다. 신들이 저주를 내리기로 저들끼리 합의했을 때 유일하게 반대했던 신이기도 했지만. 그러나저러나, 그것 또한 그자의 소유욕이었으니까 말이다. 결국 합의 된 것이 이런 물고기의 모습이었다. 누구든 돌아보고, 누구든 곁에 두고 싶어하며, 누구든 사랑해 마지않을 모습으로 태어나게 만들되, 결코 자유롭지는 못할 형태로 말이지. 인간이 신과의 연을 끊어내며 스스로 역사를 일궈가도록 일어서게 했던 것을, 그들은 반대로 이 몸을 인간에게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말했듯이 소유와 애정은 다르니까 말이다. 신과 인간의 몇 안 되는 공통점이겠구나.”


저주, 그리고 분풀이. 그런 말을 하면서도 길가메시는 태평했다.


“부아는 이미 몇 백번이 차고 넘치게 일었던 일이지만 물고기로 태어나는 이상 잡종  놈들에게 생명을 부지해야 하는 것은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또한 신들이 노린 저주였지. 저들도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었으니, 욕망을 착각하여 소유하는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덧없는지는 더 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가벼운 말투였다. 시로는 문득 그가 아름다운 외형의 물고기로 태어나 지금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를 집안에 두었을 많은 사람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잘 살아봐야 2년이란 수명은 바꿔 말하면 고작 2년도 다 못 채우고 눈을 감았을 생도 많았음을 의미했다. 그저 평범한 물고기가 아닌, 그 모든 것을 기억하며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는 그 사실이 선뜩하게 다가왔다.

물속 생물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던 시로도 처음 보는 순간 예쁘다는 감상부터 했던 물고기였다. 어떻게 태어나더라도 결국은 사람의 근처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외관에 혹해 곁에 두었을 사람들은 많았음이 분명했다. 만약 그날 린이 자신에게 억지로 떠넘기는 것 없이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갔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제 자신이 어설프게 꾸며둔 어항보다도 저 완벽한 환경 속에서 만족을 했을 수도 있었고, 아니라면…….


“뭐 그래도, 겪어본 잡종 놈들 중엔 네놈의 노력이 좀 가상하긴 하구나. 저 비좁은 어항은 곳간으로 취급해도 모자랄 만치 허술하다만, 그 정도가 네놈이 나름 최선을 다했던 기량이겠지.”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소리였다. 어쨌든 현생은, 여러 삶을 비교해 보건데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소리일까……?

그래도 고작 2년이다. 좋아봐야 2년의 생명이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물고기의 시간과 같다. 해결법이란 걸 그가 알리없으리란 걸 인지하면서 시로는 물었다.


“저주를 풀기 위해선 뭘 해야 해?”

“모른다. 알면 이번 생에 또 이렇게 태어났겠느냐? 멍청한 것.”

 

곧바로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 그런가…….” 정작 저주를 받고 있는 상대가 아닌 멀쩡한 인간 하나가 풀죽은 모습을 보고 길가메시가 또 다시 요란하게 웃었다.


“비가 오는 때여도 어지간해선 친히 이렇게 나와 보지도 않았다만. 음, 반복한 생에서도 몇 번 되지 않는 일이구나. 평소 어설프게나마 정성을 다하더니 오늘따라 네놈의 소홀한 보필 탓에 호통이라도 치려고 나왔거늘.”

“비?”

“비가 오는 날에만 이 모습을 취할 수 있다.”


물고기이지 않느냐. 전혀 이해도 못하고 상관도 없을 설명이었지만 시로에게 그런 사소한 것은 당장 물어볼 질문거리가 될 수 없었다. 뜻대로 행할 수는 없어도 환경만 갖추어지면 오늘처럼 사람의 모습으로 튀어나올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본인이 내킬 때라는 전제가 남모르게 붙은 것 같았기에, 시로는 확인이라도 받듯 재차 되물었다.


“그럼 또 다시 사람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거야?”

“말했잖느냐. 비가 온다. 길게 이어질 비구나. 이 나라에도 우기가 있는 게냐? 한동안은, 제법 이 모습으로도 괜찮을 것 같다만.”

 

그렇게 말하더니 길가메시는 곧바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몸 위에 대충 두르고 있던 홑이불이 그 바람에 하얀 몸에서 그대로 미끄러지며 바닥에 안착했다.


“흠, 흠. 그럼 몸 소 이 비좁은 집 안을 둘러보아야겠구나. 정돈은 잘 되어 있느냐? 왕이 가는 길이 어수선 하다는 것은 불경을 몸소 표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만.”

“잠깐, 잠깐!”


팔을 뻗어 붙잡기도 전에 길가메시는 성큼성큼 방안을 가로질러 미닫이문을 힘차게 열어 젖혔다. 폭우가 쏟아지는 마당을 배경으로 바닥에 떨어진 홑껍데기 이불을 손에 쥔 시로의 다급한 목소리가 절박하게 외쳐졌다.


“제발 뭐라도 걸쳐!”


아무래도 내일은 당장 옷부터 사야할 것 같았다.

잡식성 독거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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