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에도, 내가... 남아 있기를."



눈꺼풀은 뜨고 있었는데, 


안구에는 약간의 따끔함과 자극이 남아 있었는데, 


온 세상이 어두워졌다.



[아이니. 나는... 내가... 그게...]



데렉은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펑펑 울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텔레파시는 그 목소리와 감정을 토막내서라도 알려주었다.



눈물 많은 사람 같으니...



그래. 다른 미래를 보았을 때에도, 이 남자는 눈물이 많았다. 


기쁠 때에도, 안타까울 때에도, 힘들 때에도, 아플 때에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여러가지 감정에 힘들어하는 나를 끌어안고 위로해주었다. 


보는 사람이 슬퍼질 정도로, 절절하게 울곤 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겠지. 


그 때의 기억과 감정을 모두 끌어안고, 아무것도 잊거나 잃지 않은 채로 다시 일어서서 걷기 시작할 거다. 


나는... 그런 단단한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미안해요...]



너무 오래 가슴속에 묵힌 사랑한다는 말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 결국 미안하다는 말로 풀려나오기 마련인 건가. 


그 때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걸까,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된 사랑한다는 말 대신 사과를 하고 싶은 걸까.



"사랑, 해요."



마지막으로 말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감각이 남아있는 것은 심장이었다. 


심장 근처에 있는, 로브를 여미기 위해 달아두었던, 그 무거운 철 브로치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말을 남길 수 있게 힘을 실어주었다.



감각이 모두 차단되고, 세상이 멀어진다.



'......'



데렉은 조용히 고개를 떨군 아이니를 바라보며, 난간에 팔을 올리고 무너진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졌다.



침묵은 길었다. 


병사들이 교대하고, 몇 번 인가의 소요사태가 있었고, 곧이어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이 떨어질 때 까지도...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로 옆으로 쓰러진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다. 


이건 모든 현상에 우선하는 대전제다.



이 모든 상황이 모두 심상세계나 꿈일 가능성이 있을까? 


아니. 이 정도로 생생한 심상은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기억이 끊겨져 있지가 않다. 


데렉과 아이니는 수도원에서 도망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여기에 이상하거나 위화감이 들 만한 여지는 없지.



만약 혹시라도, 어떤 마법사가 심상세계를 열고 데렉을 강제로 끌어들였다면...


세 자리수의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세부적인 기억과 사람들의 반응을 일일이 조정해야 한다. 


현실성이 없지.



그리고 아이니시스가 어떤 마법사인가. 


대부분의 마법을 별 무리 없이 다루며, 특히 정신이나 텔레파시에 해당하는 마법은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가졌다. 


그런데 그런 아이니를 속이고 마법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리는 없지.



'치료할 방법은...'



사람을 비틀어놓는 힘은 사람을 치료하지 못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사람을 되돌리지 못한다. 


파괴하는 힘은 시간을 거슬러 이전으로 돌려놓지 못한다. 


만약 치료하는 것 처럼 보인다면, 원래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치유 능력을 조금 더 북돋아 주는 것 뿐이다.



데렉은 필사적으로 치료 마법을 머리 속에서 짜 맞추었다. 


이틀 후, 누군가가 방역을 위해 아이니의 몸을 끌고 가기 전까지.



결국 머리 속으로 생각해서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사람이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은 스스로의 힘이다. 


마법은 그저 도움이 될 뿐. 일어나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를 악물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데렉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온 몸이 초록색으로 변하며 죽어가는 병에 걸린 사람들은... 


한 군데에 모두 모아 화장을 했다. 


더 이상 병이 퍼지지 않도록, 기다란 날이 달린 낫으로 사람을 끌고 광장에 쌓은 뒤 불을 질렀다.



아이니도 그 자리에서 똑같이 불을 뒤집어 썼다. 


하늘로 올라가는 수 많은 연기와 재 중에서 얼마 만큼의 양이 아이니였을까.



그녀는 떠났지만 데렉은 잊지 못했다. 


그래. 그녀는 결국... 죽음 이후에도 데렉의 마음과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 미소와 웃음, 세상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똘망똘망한 눈까지.



[딸그랑]



잔뜩 그을린, 형체가 일그러진 철 브로치를 손에 들었다.



격리는 성공적이었다. 


데렉도 최대한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약초와 약을 찾아다녔고, 방역과 위생 개선에도 노력하며 마을 사람들을 도왔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아이니가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저 남은 것은... 그녀가 가지고 다니던, 자신이 받았던 작은 장신구가 전부였다. 


눈물은 이미 많이 흘렸는지,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작은 묘지를 만들었다. 


아이니의 유해... 로 짐작되는 재를 한 움큼 퍼서, 그녀가 입던 옷과 화장터의 옷 조각을 담아 묻었다. 


그리고 아이니가 좋아할 것 같은 하얀색 원피스도 함께.



비석의 모양은 십자가로 했다. 


비록 종교는 없었지만, 그녀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교회에서 자랐다. 


수 많은 시간 동안 교회에 있었으니, 아마 가장 익숙하겠지.



아이러니하게도 밝은 곳에 있는 십자가의 아래, 어두운 지하에서 신음하며 10년을 보냈으니... 


부디 이번에도 잘 적응할 거라고 믿어야 했다.



"데렉씨. 잘 지내셨나요?"



빵집의 가장 큰 아들이 그렇게 말하며 데렉에게 빵을 권했다. 


데렉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적힌 묘비와, 묘지가 완성될 때 까지 6개월 동안 데렉은 이 마을에 있으며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마을에 녹아드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누군가를 잃었으니까. 


비슷한 상실을 경험했다는 것에 있어서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강한 연대의식이 있었다. 


데렉도 잃은 사람으로서, 그들과 슬픔을 공유하며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데렉은 누군가를 잃은 슬픔을 잘 숨기는 편이었다. 



뭔가를 잃는 것은 익숙하니까. 


사냥대를 꾸려서 용을 사냥하기 전에, 마법사로서 학파에 있을 때 부터 뭔가를 잃는 것은 익숙했다. 


사람을 잃고, 연구를 잃고, 목표를 잃고, 자기 자신마저 잃을 뻔 하다가 결국 사냥대를 꾸렸다.



사냥대를 꾸리고도 전투에서 잃어버리는 사람, 


사냥대를 배신하고 물자를 빼돌리는 사람, 


자신의 개인적인 이유를 위해 사냥대에 들어온 사람...



간신히 보호했지만 내부에 마법이 발동되어 죽은 희생자,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잡아먹으며 버텼지만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 


용에게 장난감이 되었던 아이, 


마지막으로 용인이 되었던 소녀.



"아이니..."



데렉은 광장에 있는 벤치에 앉아 빵을 먹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침 해가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데렉은 굳이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의 상실은 잃어버림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에 깊게 담겼을 수록, 직접 노력하고 고생을 한 만큼 마음에 박혀 한 구석에 자리를 잡기 마련이다. 


못을 빼낸 벽에는 못이 박혔던 자국이 남는 것 처럼.



아프고, 슬프고, 죽을 것 같지만 그것도 결국 익숙해지는 법이다. 


데렉은 이런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지 않고, 흘러가도록 두며 눈물을 흘렸다.



"저기. 데렉씨."



빵집의 큰 아들은 언제 따라왔는지 데렉의 옆에 털썩 앉았다.



"아저씨는 마법사죠?"



데렉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앞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니를 잃었던 그 때 부터 마법은 고사하고 심상 하나도 퍼올리지 못하는데 무슨 마법사일까.



"마법으로 저희 부모님을 되살릴 수는 없나요?"



아이는 이 질문을 지난 6개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했다. 


답을 해줄 수 있다면 데렉도 그나마 마음이 편해지겠지.



"죽은 사람은 무엇으로도 돌릴 수 없어."



언제고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마법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서도 살려내겠지. 


그야말로 죽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유구한 마법의 역사에도 한 번도 기록된 적이 없었다.



"왜 우리는 죽는 걸까요."



데렉은 마법사로서, 사람으로서 이런 질문에 몇 번이나 대답을 한 적이 있었다. 


용에게 희생된 사람의 유족들이나, 학파에서 사고가 나서 동료를 기리는 자리에서.



그 때 마다 데렉은 '삶은 유한하기에 아름다우니까.' 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벽을 쌓고, 선을 긋고, 마음에 들여놓지 않았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구나."



아이니가 죽은 지 6개월이 지나, 묘비까지 만들어지고 나서는 데렉도 의문이 들었다.



왜 그래야 할까. 


사람은 영원히 살면 안되는 걸까?


 헤어짐과 이별이 주는 상실과 아픔은 과연 그 정도로 가치가 있는 건가? 


누구도 헤어지지 않고, 그저 모두 같이 모여서 오순도순 살면 안 되나.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 목소리가 들려요."



이제 빵집의 주인이 된 남자 아이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흐느끼지 않는 법을 터득했는지, 목소리에 떨림은 그다지 없었다. 


아마 아래로 있는 동생들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겠지.



"한 밤 중에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서 창고에 있던 밀가루를 같이 거실까지 옮겼어요."



아이에게서는 밀가루 냄새가 났다. 


푸석푸석하고 텁텁한 냄새이지만, 이 아이에게는 그리우면서도 아픈 냄새일 것이다. 


아이의 부모님에게서도 나던 냄새일 테니까.



"한참 그러다가 잠결에 잘 못 들었다는 걸 알고 다시 창고로 밀가루를 가져다 놓았죠. 


동 트는 걸 보면서."



데렉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아이가 그리움에 못 이겨 그런 행동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환청이라도 좋으니 의지하고 싶었겠지. 당장 10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빵집을 물려받아 운영해야 했으니까.



"나도 그랬어."



정신이 없는 상태면 항상 아이니시스를 찾았다. 


잠결에 누군가 이불을 당기는 느낌이 들어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아이니를 몇 번이나 불렀다. 


습관적으로 마법을 준비하고 연습하면서도, 옆 자리에 아이니시스가 없는 것이 적응되지 않아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



데렉의 말을 들은 아이는 몇 번이나 입을 달싹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아까 전에 했던 '부모님을 되살려주세요'라는 이야기는 시작에 불과했을 것이다. 


적어도 잠깐만 이야기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잠깐 모습만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한 번 손이라도 잡아보았으면 좋겠다고, 


부모님이 없는 빈 묘지가 아니라 그 시신이라도 온전한 묘였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겠지.



"그냥... 보고싶어요."



터질 것 같은 그리움에도 아이가 쌓인 말을 굳이 밖으로 꺼내지 않은 이유는, 


이 상황까지 와서도 아이는 어른이 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아이로서, 칭얼거리는 아이가 될 수 있었다면 아무 망설임 없이 데렉에게 말했겠지. 


하지만 세상은 부모님을 잃은 아이가 다 클 때 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사무칠 것 같은 그리움에 힘들더라도, 우리는 살아가는 걸 멈출 수 없어. 



그래서는 안 돼."



데렉은 자신도 공감하지 못하는 말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몇 년 전에 동생이 자신의 옆구리를 찌른 이후로 한 번도 다른 사람을 가까이 대하지 않고, 철저하게 선을 그으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가고, 구해주고 싶은 사람을 만나 짧은 시간을 같이 있었다. 


한 번 마음을 닫은 이후로 처음으로 마음 깊이 가까워진 사람일 것이다.



연애 감정이라기에는 이성적인 끌림이 없었고, 가족 관계라고 하기에는 서로를 너무 애틋하게 여겼다. 


이 마음이 어떤 것인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그녀는 떠나버렸다.



이제는 그녀가 데렉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아마 그렇기에 더 생각이 나고, 그리운 것일 테지.



"아이니시스..."



집에 돌아와 의자에 걸터앉은 데렉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을의 절반이 빈 집이 되어있으니, 갖고 있던 보석을 팔 것도 없이 지갑에 있는 돈 만으로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전염병이 돌았던 집이니 다들 헐값에 내놓기도 해서, 데렉은 간단하게 집을 청소하고 들어와서 짐을 풀었다.



처음에는 묘비가 세워지는 것 까지만 볼 생각이었다. 


적어도 아이니를 아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1주일도 있지 않았던 마을에 묻히는 것은 아무래도 외로울 테니까.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부터 병에 걸렸으니, 웃고 떠드는 소리가 줄어든 것도 있겠지. 


하지만 마을은 아직도 장례중인 것인지, 대낮의 거리마저도 고요했다. 


먼지가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을 정도로.



"데렉. 방에 있나?"



데렉이 있는 방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데...



"네. 무슨 일인가요?"



문을 열고 내다보니 강 건너편에 사는 세탁소 아저씨인 것 같은데... 


뛰어 왔는지 숨이 턱까지 차 오르고 있었다.



"빨리, 빨리 이쪽으로 와 봐. 지금 마을 촌장이랑 다 모여서 회의 중이니까."



데렉은 한동안 벗어두었던 하얀색 로브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미묘하게 이 사람에게서 마법의 잔향이 남아 있었으니, 그에 맞는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기다려요. 요즘 날이 추우니까..."



로브를 입되 후드를 쓰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 마을에서 교회에 쫓기기는 힘들테니까. 


사태 초기에 분노에 찬 사람들이 몰려 가서 교회를 말끔히 다 밀어버렸다. 


지금도 마을에 들어오려는 선교사나 수녀, 수사가 있으면 마을 입구에서 칼로 위협해 쫓아내곤 했다.



"빨리!"



너무 다급해보이는 이 사람의 태도가 굉장히 이상했다. 


결국 한 동안 쓰지 않았던 마법도구 벨트와 약이 든 주머니까지 챙기고 거리를 달렸다. 


누가 다치거나 아픈 건가?



"누가 다친 겁니까?"



"아무도 안 다쳤어! 오히려 일어났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아픈 사람이 일어났다는 건가?



"무덤에 있던 사람이 일어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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