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내가 알던 우장훈이라면, 너무 울어 눈두덩이가 짓무르기 직전이었던 날 카페에 버려두고 혼자 돌아섰던 그 정도의 싸가지와 결단력이라면 아마 충분히 남남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문제라면 우장훈이 죽어서 저승이라도 보고 온 사람마냥 이제는 180도 바뀌어버린 태도로 군다는 거다.

출근길 정문 앞 카페에서 커피를 사면 그도 거기 있었고, 어떤 날은 지하철역 앞에서부터 지검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내리고 사무실 문 열기 직전까지 쭉 옆에서 서로를 의식하며 온 적도 있다. 회의실을 들어갈 때 복도에서 마주쳤던 짤막한 머리의 뒤통수가 회의 끝내고 나올 때에도 어김없이 앞을 지나치는 척 기웃기웃. 구내식당에서도, 퇴근길에서도 비슷하고 뻔한 전개. 필사적으로 들러붙는 술래, 그걸 어떻게든 피하려는 도망자.

도대체 왜 이러는데. 이제 와서.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또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한다. 애써 쑤셔 넣은 감정들이 다시 튀어나올까 봐 곤란하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닿는 지점을 만들어 보려고 이리저리 머리 굴려 가며 용쓰던 그 때.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저녁에 눈 감을 때까지 온통 우장훈이던 그때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서 더욱 괴로웠다.


하지만 그렇게 죽도록 그를 피해 봐야 같은 층에서 맴돌 뿐이지. 결국 한 번은 제대로 마주칠 일을 만들고야 말았다.


“정아. 정이씨.”

“......네?”

“식사는요. 점심식사요.”


기가 막히네. 일도 뭣도 엮일 일 없는 형사1부 검사가 형사2부 실습생 나부랭이 대신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넣어주면서 점심 먹었냐고 물어보는 상황. 누가 듣고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이 먹을까요? 점심.”

“아니요. 싫습니다.”

“와. 와 싫은데요?”

“...모르는 사람이랑 밥 안 먹어요.”

“먹으면서 알아가면 되지요.”

“시간 없어요.”


아예 작정하고 모퉁이에 기대서서 지나가지도 못하게 막고선 한다는 소리가 저렇게 실속 없었다. 절대 쳐다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고의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꼬리잡기가 거슬려 끝내 짜증스럽게 올려다보면 우장훈은 제 가장 큰 무기인 서글서글 눈웃음을 헤헤 쳐대며 눈치를 살핀다. 


“시간 없으믄 도시락 사 올까요? 정이씨 좋아하는 돈까스도련님.”

“허, 내가 언제! ...돈까스 안 먹어요.”

“불고기덮밥?”

“고기 끊었어요.”

“그럼 비건푸드?”


하찮은 집요함에 헛웃음이라도 날 뻔. 

미련 따윈 남지 않게 다 쏟아냈고, 그렇다고 다시 당신을 좋아할 일도 없을 거라는 결연함을 증명해야 했다. 빠르게 문장들을 머릿속에서 골라내어 제법 묵직하게 쏘아붙였다.


“우장훈 검사님.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

“제가 학생이고 어려서 만만하세요?”

“그기 아이고,”

“검사님한테는 이렇게 어설프게 검찰청에서 돌아다니는 게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저는 엄연히 실습 중이고 여긴 공적인 공간입니다. 개인적인 대화 걸지 말아주세요.”

“그라믄 퇴근하고 나서는? 해도 되나?”

“물론 사적인 곳에서도 자제 해주세요. 불쾌했어요.”

“......”


며칠 전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에 대한 언급인걸 우장훈이 모를 리 없다. 불쾌, 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으며 곱씹던 그의 얼굴에 살짝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응, 그렇게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 맞아. 냉정한 인상을 주려고 최대한 크게 바람을 일으키며 그의 옆을 스쳐 지나쳤다.

그건 오히려 내가 약간 손해 보는 행동이었다. 성격에도 안 맞는 못된 척 오바를 하는 바람에 이 미친 뇌세포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우장훈만의 희미한 향이 옅은 담배냄새 위로 실려 와서, 나는 또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 뻔 했거든.


그런데 그의 향이 김검사의 사무실까지 따라붙을 줄은 몰랐다.

“윤정씨. 정아.”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닫으려는 문을 붙잡고 그가 다급하게 불렀다. 나도 모르게 김검사가 있을 안쪽 집무실을 힐끗거렸다. 오늘 공판이 있어서 김검사도, 다른 사람들도 법원에 가서 아무도 없는 게 다행이었다.


“불쾌하드나. 미안하다.”

“진짜, 왜 자꾸 이렇게-”

“미리 사과할라고. 앞으로 더 불쾌할지도 모르겠다.”

“......”

“늦은 것도 알고, 내가 등신 바보 천치인 것도 잘 안다. 니를 만만하게 보는 것도 아이다.”


그때도 그는 다 안다고 했다. 내 고백을 거절하던 날. 

지금도 다 안다고 한다. 뭘 다 아는데? 끝까지 잘난 척, 어른인 척.

한순간에 계단 위에서 날 밀어 떨어뜨린 사람이, 만신창이 된 몸으로 힘겹게 다시 계단을 올라서려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미안했다. 내 손 잡아라. 도와줄게. 하면, 그 손이 다시 날 언제 밀어낼 줄 알고 잡아야 하나.

우장훈의 단단한 눈동자를 피해 아무렇게나 허공을 쏘아봤다. 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다시 덧붙이는 음성이 얕게 떨린다.


“이제 내가 니를 기다릴게. 정아.”

“...뭘 기다린다는 거예요.”

“내한테 온나. 와줘. 그땐 내가 뭘 몰랐다. 이제 아무것도 신경 안 쓸게. 니만 볼게.”


다 안다더니 뭘 또 몰랐다는 거야.

최선을 다해 매정하게 한다고 하는데도 자꾸만 봐달라고 졸라대는 우장훈의 지금 마저... 누군가 그에게 하던 짓이랑 지독하게 꼭 닮았다. 나한테 복수라도 하는 걸까?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그때랑 지금은 달라.”

“와.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나?”

“네. 있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우장훈 때문에 울고불고 발광하는 간격이 서서히 길어지고 로스쿨의 살인적인 공부량에 적응하면서 얼굴을 펴고 사는 날이 많아졌더니 내가 좋다는 사람도 생겼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우장훈이 밑바닥으로 뚫고 내려가도록 떠민 나의 자존감도 덕분에 많이 회복했지.


“그때 그 안경잽이? 비리비리하고 뻐끔거리던 놈?”

“자기는 얼마나 잘났다고 남을 그렇게 깎아내린데.”

“아니, 내가 못난놈이긴 한데 그래도 금마보다는 내가 좀 더 딴딴하고 낫다이가. 그래서 니가 좋아했잖아.”

“미쳤나봐! 아니거든요?”

“아아. 그게 아니면 그럼 내를 왜 좋아했는데요?”

“...그만 하세요, 우장훈 검사님.”


세 번. 그 날도 딱 세 번째 즐겨보는 소소한 우월감이었다. 몇 번 밥 먹고 커피 마셨던 로스쿨 동기가 비가 많이 온다는 핑계로 날 데려다줬고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전공도, 생활 패턴도, 관심사도, 무엇보다 나이까지 비슷한 동기와 대화가 생각보다 잘 통했고, 유쾌했고, 모든 게 다 좋았는데. 그랬는데.

비까지 맞으면서 거기 서 있던 우장훈 때문에 다 망했어.

몰래 숨겨둔 훔친 물건을 들킨 기분이었다. 아직도 나를 못 잊어서 엄한 사람의 마음까지 이용해먹냐고, 그 옛날 나한테 갑자기 내밀던 풍선껌처럼 너는 생각도 행동도 어려서 빤히 다 들여다 보인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비 쫄딱 맞고 기다린 보람도 없이 어린애한테 무시당해서 기분 나빴어야 할 건 당신인데 어째서 내가 속을 까발려진듯 슬펐을까. 겨우 안 보이게 덮어놓은 그 깊숙한 곳의 미련을, 초라한 나를 결국 오랜만에 거울을 마주하듯 선명하게 보았던 그 날.


예전 그때 소중히 보관하던 풍선껌은 어쨌더라?

아마 몇 번의 이사와 정리를 거쳐서 버렸겠지. 도무지 어떻게 했나 기억도 안 나는걸 보면. 내가 14살 꼬맹이적부터 일편단심으로 당신만 쭉 생각하며 절절하게 잊지 못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우연히 만난 그 날 때문에, 고작 옛날 풋풋한 짝사랑의 ‘기억’ 때문에 흔들려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 이번에도 남은 두 달의 실습기간만 잘 넘기면 초라했던 14살과 24살의 윤정과 영원히 안녕 하겠지.


“금마 대충 만나고 온나 내한테.”

“왜 이렇게 진상이에요? 그리고 한 명 아니거든? 만나는 남자 존나 많거든요?”

“역시 우리 정이다. 훌륭하다. 원래 예쁘면 그렇다. 아무튼 만날 놈 있으면 다 만나보고 온나. 그럼 된다.”


시골 할매들이 난봉꾼 아들 두둔하듯 끄덕이면서 저런 실없는 소리나 하는데. 속 시끄러운 건 또 나 하나뿐인가보다. 우장훈은 본인이 주장하는 ‘어른’답게도 나한테 모진 소리를 들어도 아프지도 않는지, 여유가 넘쳐 보였다. 


“언제는 또래한테 가라면서. 내가 다 늙은 아저씨한테 왜 가야 해? 난 얻는 게 없는데요?”

“간이랑 쓸개도 다 빼줄게.”

“나이 든 아저씨걸 어디다가 쓰라구.”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줄 때 갖고 있어봐라. 그리고 액면가는 좀 그래도 정신은 니가 더 어른이다, 윤정.”

“......”

“한창 어른이다. ...니가 다 옳았더라 정아.”


일부러 제 약점을 아프게 콕 찍어 말해도 뭐가 좋다고 빙글거리는지. 날카롭게 대꾸 할 수록 더 신나게 받아치는 게 그런 쪽 좋아하는 변태인가? 

마침 공판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온 김검사가 아니었으면 우장훈의 그런 뻔뻔함에 휩쓸릴 뻔했다. 퍽퍽 곧게 던져대는 돌직구에 맞은 가슴이 아직도 얼얼해서 두근거려.


“우프로 요즘 자주 보네요.”

“예에. 김프로한테 물어볼 거 있어가 왔는데 없다그래서. 기다렸네요.”

“저한테 뭘 물어보시려구요.”

“작년에 서초지구 개발사업 횡령 건 공판 결과 파일 좀 볼 수 있나 해서.”

“그거 그냥 포털에서 조회하면 되잖아요.”

“가까운데 있으니까 겸사겸사 받으러 왔지요.”

“겸사겸사요? 뭘 같이 곁들이는데요?”


이 둘은 분위기가 왜 이렇게 흘러가냐. 멀미가 훅 올라왔다. 표면적으로는 과열될 이유가 전혀 없는 두 사람이 웃는 낯으로 서로를 빈정대는 중간에 낀 나는 토할 것 같았다. 


“와그리 날카로워요? 사무실에 뭐 숨겨놨나. 같은 지검 식구끼리 안면 트고 친하게 지내면 좋지.”

“제가 낯을 좀 많이 가려서요. 앞으로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미리 연락 하고 오세요.”


더럽게 깐깐하네. 던지듯 안겨주는 황파일을 집어 들며 투덜거리는 우장훈의 면전에서 문을 닫은 김검사가 씩씩거렸다. 나는 또 쭈굴하게 모니터로 몰입하는 척이나 해야 했다. 그가 던지고 간 말들을 죄다 다시 꺼내어 곱씹으면서.







‘남자가 많다’는 그 애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진짜 존나 많았다. 내는 성격에도 안 맞는 낯뜨거운 말을 한 마디씩 뱉을 때마다 오그라드는 심장도 같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는데, 정이는 비결이 뭔지 뻔뻔하게도 시커먼 사내놈들을 몰고 다니느라 즐거워 보인다. 식사시간에도 죄다 남자, 회의실에도 양옆 앞뒤로 싹 다 남자, 조사실에도 남자들이랑 같이. 물론 형사2부 걔네 팀이 남자 검사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긴 한데 그래도 좀 너무한 거 아인지.


“정이씨는 집이 어느 쪽이에요?”

“저요? 저는 OO동이요.”

“가깝네. 걸어 다녀도 되겠다.”

“푸하. 한 7km쯤 될 텐데 어떻게 걸어 다녀요?”


니는 여자애가, 요즘 세상에 겁도 없이 어디 사는지 물어본다꼬 넙죽 말해주고. 저딴 실없는 헛소리가 진짜 웃겨서 웃어주는 거냐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반대쪽 복도에서 우르르 몰려오던 형사2부 떨거지들이 뭔 꽃받침처럼 받쳐주는 가운데 낀 그 애가 영 못마땅했다. 휴대폰 화면에 고개를 박고 성의 없이 죽죽 훑어 내리는 남자의 손짓만 괜히 거칠었다. 


“정이씨 근데 남자친구 있나?”

“야. 요즘 세상에 그런 거 대놓고 물어보면 실례야.”

“아 왜. 없으면 우리 사촌 동생 소개시켜 줄까 했지.”

“아하하...”


아 그래서. 있냐고 없냐고. 그건 내도 궁금한데 끝까지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어장관리 기술 직이네. 


“우리 사촌 동생도 로스쿨 다녀요. 이제 졸업반 됐을걸? Y대.”

“우와, 공부 잘 하셨나봐요.”

“그런가? 뭐. 그렇다 치고. 키도 커요. 어... 한 요 정도? 등빨이 좀 있어. 어깨도 넓고.”


눈만 돌려 힐끗 쳐다보니 떨거지 중 한 놈이 적극적으로 그 애 머리 위의 한 뼘 반쯤 되는 허공에 휘휘 손을 그어댄다. 키 뭐, 크면 뭐. 전혀 상관 없는 남자의 미간이 팍 그어졌다.


“아냐, 근데 생각해 보니까 그 새끼는 나이가 좀 많아서 정이씨한테 안 되겠다.”

“몇 살인데?”

“31살인가? 32살? 차이 많이 나잖아. 정이씨가 아깝지.”


에이씨. 엘리베이터는 왜 늦게 와서 기어코 저딴 말을 듣게 만들어 기분 더럽게.

그런데 그 애가 어쩐지 살짝 남자 쪽을 쳐다본 것 같은 기분은 그저 착각일까. 


“정이씨는 부모님이랑 살아요? 아니면 혼자?”

“어, 저는 혼-”

“아니 씨바, 그걸, 왜 잊어버리는데! 그래 그냥 두면! 어,떡합니까! 분실신고 했으요?!”


뜬금없는 남자의 버럭대는 욕설에 그 애는 말을 끊고 입을 닫았다. 엘리베이터가 순식간에 조용히 얼어붙었다. 오바스럽게 박박 우겨대는 남자의 거친 사투리가 전화기에 꽂힐 때마다 그 애의 눈썹이 움찔했다. 저 가시나가 혼자 산다고 대답을 왜 해주냐고! 저 놈들 중에 누가 무슨 딴맘을 먹을 줄 알고! 조심성 없이 그저 뽀얗게 웃고만 있으면 어쩌는데. 터져나가는 어처구니를 담아 전화 너머로 엄한 계장에게 버럭버럭 풀어버리는 남자의 속도 썩고 있었다. 





그래도 그 떨거지들이 묻는 질문들은 평범한 관심 축에 속한다. 이 딱딱하고 보수적인 조직에 새로 온 상큼한 외부인에 대한 보통의 호기심. 정작 남자에게 죽도록 거슬리는 건 따로 있었다. 

김프로 그 새끼. 사수라는 핑계로 유독 지가 무슨 그 애 보호자라도 되는 양 주변을 계속 맴돈다. 처음에는 사수니까 그럴 수 있지 싶었는데 출근을 지 차로 같이 하는 건... 경우가 아니지 않나?

결혼도 한 놈이.


중앙지검 근처로 이사 오고 나서 남자는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그러다 유독 추웠던 날 운전해서 출근했다가 우연히 보고 말았다. 지금 정문 앞 두 세 블록 떨어진 곳에서 낯선 차에서 내리던 그 애. 설마 하던 의혹은, 정이를 내려준 차가 남자의 차와 나란히 지검 지하 주차장까지 들어가던 때 확신이 섰고. 운전석에서 내리는 건 김검사였다.

단 한 번으로 단정 지을 순 없다. 우연일 수도 있잖아. 우연인데 아침에 같은 차를 타고 와서 굳이 정문에서 떨어진 곳에서 먼저 내린다거나. 우연히도 퇴근길 엘리베이터도 같이 타는걸 봤다던가. 우연이지만 정이 근처만 가면 대놓고 기분 나빠하는 김검사.

정말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일까.


“퇴근해요? 둘이 같이?”

“어...”

“......”


그래서 한 번은 작정하고 지하주차장에서 둘을 기다렸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자연스럽게 김검사의 차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그 애 눈이 튀어나오기 직전까지 휘둥그레졌다.


“윤정. OO동 산다며? 잘됐네. 내 거기 역 근처 스타벅스 가는 길인데 내 차 타고 가지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우검사님.”

“김프로는 아예 반대방향 아니에요? 잠실 살잖아.”

“......뭔 남들 집을 그렇게 잘 알아.”

“내가 데려다준다니까? 정아.”


그 새끼 눈치는 왜 보는데 윤정.


“뭔데 둘이.”

“뭐가 뭡니까?”

“아니, 씹, 그러니까-”

“우프로 전부터 이상하네요? 왜 남 일에 오지랖 떨어요.”

“오지랖? 허! 지금 둘이-”

“저! 잠시만요!”

“......”

“저는, 그... 갑자기 들를 곳이 있어서요.”

“야, 정이 니 진짜...!”


남자의 말을 잘라먹고는 그 애는 도망치듯 주차장을 먼저 빠져나갔다. 뒤이어 남자를 한심하게 깔아보던 김검사도 차를 타고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 니 남자 존나 많은 것도 알겠고 다 좋은데, 내가 지은 죄도 있으니까 그저 아무 말 못 하고 네 결정 기다려야 하는 신분이지. 그런 거 다 인정한다 치고. 그래도, 그래도...

유부남은 아이다 정아. 그건 아니어야 한다.





분노로 밟은 엑셀이 거칠었다. 무슨 정신으로 사고 없이 여기까지 운전해 왔는지 모르겠다. 비 오던 그 날보다 한층 더 질척거리게 정이의 오피스텔 앞에 버티고 섰다. 그만큼 절박했다. 분명 지검 주차장에서 헤어졌는데 저보다 앞서서 집 앞에서 저를 기다리는 남자를 발견하자 질겁하는 그 애. 0.5초 정도 생전 안 하던 짓을 자꾸 하는 쪽팔림과 후회가 스쳤다. 내 자존심이 어디까지 추락하는지 이젠 내도 궁금할 지경이네. 추하긴 해도 할 말은 해야겠다 싶어 정이의 앞까지 성큼 걸어갔다.


“뭐, 뭐에요. 왜 또-”

“혹시 내 도움 필요하나 정아.”

“내가 뭘. 검사님이 왜 필요해?”

“김프로가 실습 성적가지고 협박하드나.”

“네?”


그러니까 그 놈이 제 작은 권력인 실습 평가 점수 가지고 순진한 애를 위협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데 저렇게 코웃음까지 치는걸 보면 그건 아닌가.


“윤정. 요새 무슨 생각으로 그러고 다니는데.”

“......”

니가 남자를 존나 많이 만난 건 뭐 그렇다 치자. 그래서, 그러고 다니느라 정신까지 어떻게 헤까닥 되셨어요? 설마 그건 아니겠지.”

“다짜고짜 무슨 말이에요 그게.”

“야, 그, 어? 니가, ...하.”

“아 뭐. 오늘도 불쾌하게 할 거면 그냥 좀 가세요.”


패딩점퍼 후드를 뒤집어쓰고 푹 숙인 그 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성질이 확 도진다. 김프로 유부남 새끼랑은 잘도 눈 마주치고 헤헤 웃으면서, 내한테는...! 그래, 내가 그 애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빌빌거리던 등신 삽질의 대가가 이렇게 크다 싶으면서도, 고작 나이도 엇비슷한 유부남 새끼한테 밀리는 게 억울한 것도 사실이니까.


“불륜이나 그런 미쳐버린 자극만 좋아하게 된 거냐고!”

“불, 불륜?!”

“와. 찔리나.”


확 들어 올린 그 애의 새빨갛게 터지기 직전의 얼굴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정도로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남자의 머릿속이 차갑게 굳었다. 이거 안 될 일이네. 암만 그 애가 하는 모든 일이 다 예뻐 보인 데도, 네 모든 행동과 결정을 전적으로 존중하겠다 마음 먹었어도 선을 그냥도 아니고 씨게 넘는걸 지켜만 보는 건 못 하겠다.


“...실망이다 정아.”

“이제 실망했어요? 난 작년에 했는데.”

“김프로 그 유부남 새끼랑 하는 그게 정상적인 거야?! 어?”

“뭔 소리야 아까부터!”

“이게 다 니 걱정되서 하는 얘긴걸 왜 몰라.”

“내 걱정을 왜 해. 내가 애도 아니, 아... 그렇지. 검사님 한테 나는 그냥 아는 애라고 했나? 애 맞네. 어린 애가 하는 일에 어르신은 신경 끄세요.”

“애 아니다. 이제 여자다.”

“......”

“내 눈에도 여자라고. 정아.”


뒷머리가 사라질 정도로 벅벅 긁어대다가 에이씨, 민망함에 시선을 떨구어버렸다. 무어라 말하려는지 몇번을 달싹이는 그 애의 오물거리는 볼이 바닥으로 시선을 붙이는 그 찰나에도 눈에 잡혔다.


“그런 놈들은, 어? 니 보면서... 그렇고 그런 지저분한 생각밖에 더 하냐고! ...엮이면 니까지 더러워지는데.”


더럽다고? 내가? 제 다른 말은 귓등으로 들었는지 마지막 단어만 자꾸 곱씹는 그 애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러는 검사님은, 그렇고 그런 지저분한 거 그거야말로 검사님 아니에요? 왜 싫다는데 자꾸 집 앞에 찾아오고, 쫓아다니고 그러는데.”

“내는, 내는 다르지!”

“뭐가 다르냐고요!”

“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다르니까!”

“......”


빳빳하게 굳었던 그 애 입꼬리가 순간 움찔하다 조금 들썩이며 말려 올라간 것 같기도 하고. 


“아아. 그래서 우장훈이 품은 마음은 다르다? 그렇고 그런 생각, 지저분한 거 절대 아니고?”

“아니, 봐바 정아. 물론 그렇고 그런 생각은... 어... 하긴 하는데,”

“네?!”

“그, 그게 정상이지! 아 그러니까 내 말은, 원래 남자들은 다 그런... 내도 남자고! 근데 니가 여자고, 예쁘고 또, 니를 보고 있으면... 아니 그... 안 볼 때도 마찬가지지만,”

“......”

“씨바 이게 다 무슨 말이지? 아무튼 내는... 마음이 다르다니까.”


허어. 그 애의 탄식으로 새어 나오는 황당함이 하얀 입김으로 흩어졌다. 미친놈. 내가 생각해도 개소리가 심했다. 더 있다가는 무슨 말을 지껄일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이상한 뻘짓 하고 다니지 말자, 부탁한다 정아.”

“지금 검사님이 제일 이상하거든요?”

“......”

“...할 말 없죠? 나 추워. 갈래요.”


정아 잠시만, 떠나려는 그 애를 다시 붙잡고 다급하게 조수석 문을 열고 꺼낸 검은 봉지를 내밀었다. 선선히 받아들지 않아 내용물을 실토하며 채근했다. “붕어빵이다. 역 앞 트럭에서 파는 긴데 먹어봐라. 맛있다.” 이 상황에 뭔 붕어빵이냐 싶은 정이의 두 눈과 허공에서 얽혔다. 유부남이랑 뭔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의심스러워 빡이 친 와중에도 먹일 건 먹여야지 싶어서 충동으로 샀다. 총체적으로 일관성 없네. 그냥 제정신이 아니다.  


남자는 도망치듯 그 곳을 빠져나와 집에 와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맨정신에 지껄인 헛소리를 주워 담을 수는 없고 술 마시면 잊히기나 하려나. 한 캔 다 마시고 다른 캔 하나를 뜯을 때 술 마저도 소용 없는걸 깨달았다. 자꾸만 황당해하던 그 애의 표정이 동동 눈앞을 떠다닌다. 그런 반응이야 뭐 충분히 이해한다. 그게 아니라 이 등신 미친놈이 지나치게 가감없이 생각 나는대로 지껄인 게 문제지.

다음에 정이가 마음이 풀릴 때 쯤 슬쩍 물어볼까? 

그런 더티하고 추잡스러운 발언도 고백으로 쳐줄 거냐고. 







어이가 없네. 진짜 따끈한 붕어빵이다. 

이번엔 무슨 얘길 하려고 저러나 궁금해서 들어줬더니, 집 앞으로 기껏 찾아와서 한다는 짓이 불륜이냐고 혼자 성질부리다가, 너를 보면서 그렇고 그런 생각을 한다고 본인이 변태라는 선언을 당당하게 하다가, 시뻘건 얼굴로 뜬금없이 붕어빵을 주고 갔어. 

식탁에 펼쳐놓은 붕어들의 ‘어’ 하는 표정이 우장훈의 어벙벙한 표정과 닮아서 헛웃음이 났다. 그래서 머리부터 와작와작 맛있게 먹어줬다. 음식은 죄가 없으니까. 

붕어빵은 그를 닮아 희한한 맛이었다. 기쁘기도 하면서 씁쓸하고 심통맞은 맛. 분명 달지 않은데 달달하게 느껴지는 맛. 혼자 질질 울다가 실실 웃으면서 두 마리째 집어먹게 만드는 그런 미친년 널뛰기 하는 맛.

그러니까 저 인간이 지금 나와 김검사 사이를 의심하고 있다는 거지? 굳이 오해를 풀어주지는 않을 거야. 이제서야 내가 여자로 보인다고 실토하는 그에게 그 ‘오해’가 한 몫 단단히 거들어준 걸 수도 있잖아. 솔직히 요즘엔 우장훈이 나한테 매달리는 상황이 쬐끔 즐겁기도 하고.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모질게 했는데 요 정도 소소한 복수는 하게 해줘야지.


그래서 그의 속이 디비지거나 말거나 그냥 둬봤다. 오해와 질투로 눈이 먼 우장훈은 볼만했거든. 구내식당에서 굳이 자리가 많은데도 김검사 맞은편에 앉는걸 볼 땐 사나운 불독처럼 으르렁거리다가, 흡연구역에 서 있는 김검사에게 아메리카노를 건네주면서 팔뚝을 살짝 스치듯 두드리면 비 맞은 대형견처럼 귀도 꼬리도 축 처져서 땅만 팡팡 차댔다.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런 게 귀여운걸 보면 변태는 그 혼자만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나는 그와 다르니까. '적당히'의 정도를 알고 양심도 있는 편이다. 실습도 막바지에 다다른 때라 우장훈 약 올리기를 서서히 관둘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계속 놀렸다가 기껏 내 손바닥 위에 올려둔 우리 아저씨가 또 도망가면 안 되니까. 그리고 실습생인데도 처리해야 할 잡일이 쌓여서 너어무 바빠져서 여력이 없기도 했고. 


그 날은 퇴근길 무렵부터 눈이 내렸다. 어차피 일이 많아서 야근 확정인데 교통까지 아수라장이니까 그냥 천천히 나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아, 정정. 사실은 전날 회식의 여파로 해야 할 일의 진도가 느렸던 탓이 제일 컸지. 숙취와 술병때문에 뒤틀린 위장을 붙들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는데 근처를 지나가던 우장훈과 또 마주쳤다.


“어디 아프나? 배가 안 좋아?”

“...설마 화장실까지 따라다녀요 이제?”

“그건 아이고, 근데 정아 니 어디 아프냐고.”

“아아뇨.”


쪽팔리잖아. 내가 여자로 보인다며. 그런 사람한테 나 술 너무 많이 달려서 배탈났져용 이라고 말 절대 못 해! 자꾸 부르는걸 무시하고 사무실로 도망쳐서 일이나 했더니 늦은 저녁엔 좀 괜찮아져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이번엔 배탈이 아니라 김검사가 문제였다.


“야 윤정. 너 디지고싶냐?”

“아 왜. 뭐가.”

“인덱스를 누가 이렇게 이따위로 하래.”

“시키는대로 한 건데? ...문제 생겼어?”


다른 사람들은 퇴근하고 둘만 남은 사무실이라고 김검사가 ‘지검 밖 모드’로 나에게 스스럼없이 발광할 시동을 걸길래 나도 똑같이 받아치려고 예열 중이었다. 


“하나도 안 맞잖아! 증거 목록이랑 목차랑 표시해놓은 거랑 다 따로 논다고.”

“허. 이상하다, 나 진짜 두 번씩 확인 했는데.”

“허 같은 소리 하네, 해결 할 생각을 해야지.”

“고쳐놓을게요오...”

“당장 내일 아침  첫 공판인데 이걸 언제 혼자 다 고쳐!”

“하면 되지이...”


내가 진짜 지 밑에 새끼검사도 아닌데 저렇게 성질을 박박 부리냐. 나오는 말과는 다르게 불만 가득한 입이 삐쭉 나왔다. 잘못 분류한 문서들을 다시 갖다주러 내 자리까지 온 김검사가 장난이지만 진심이 아주 없지는 않은 강도로 내 목에 헤드락을 거는 바람에 켁켁 소리가 절로 나왔다. 


“으이구 잊을 만 하면 사고를 쳐!” 

“아, 아파요! 하지 마!”

“너는 진짜, 내가 언젠가 실체를 확 다 폭로해서 너 학교도 못 다니게 만들 거야.”

“그건 안 돼! 다시 한다고오. 하면 되잖아요.”

“하. 오늘은 니네 집에서 자야겠네.”

“에잇.”

“그럼 니네 집에서 해야지, 차에서 할까?!”


이러고 있는 시간에 하나라도 더 고치겠다! 성질 부리려고 숨을 모으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우장훈이 등장했다. 

타이밍 진짜 시트콤 같고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같지요?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길 바랬다는 뜻이다. 순간 나도, 김검사도 너무 깜짝 놀라서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러니까 애매한 헤드락 자세로. 한 손에 약국 봉지를 든 그가 김검사의 팔뚝 밑에 반쯤 파묻힌 날 보고 세상이 망한 표정으로 성큼 들어서는데, 안 좋은 예감이 그대로 훅 스치고 지나가더라. 


“뭐고.”

“......어, 검사님-”

“느그 진짜, 하긴 뭘 해!”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나에게서 분리한 김검사의 멱살을 잡아 질질 뒤로 끌고 가는 우장훈.


“아! 아악!”

“그 손 안 치우나!”


아무래도 진작 그에게 사실을 말하고 오해를 풀지 않은 것이 이렇게 또 다른 삽질로 파생된 모양이다. 밖에서 대충 띄엄띄엄 들은 부분이 하필 그렇고 그런 쪽인가 봐! 


“할 짓이 없어서 애를 협박하나. 더러운 새끼야.”

“누가... 뭘, 컥! 커컥!”

“검사님! 검사님 그런 거 아냐, 좀 놓고 얘기해요. 응?!”

“학교를 못 다니게 해?! 니가 뭔데 개새끼야. 니가 뭔데 집에서 자니 마니!”

“우, 우프로, 그만 좀!”


퍽. 목이 졸려 숨이 막혔던 김검사가 우장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덕분에 김검사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그가 숨을 골랐다. 이제 진정 좀 되려나, 상황을 설명하려는데, 우장훈이 주먹으로 김검사의 얼굴을 후려팼다. 정확히 의도한 곳에 꽂힌 그의 주먹. 입술에 피가 맺힌 김검사의 얼굴에 걸린 안경이 위태롭게 달랑거렸다. 아무래도 우리 다 같이 뭐 된 거 같지, 그치...


“그만! 그만, 그만... 우장후우우운!!”

“......정아.”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니는, 니 진짜 끝까지-”


사촌! 사촌오빠야! 사촌오빠라고.

김검사 앞을 가로막고 서서 악을 지르는 소리에 놀란 건지, 아니면 내가 쏟아내는 그 내용 자체에 놀란 건지 우장훈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씩씩거리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촌? 김프로가... 사촌?!”

“그래요! 우리 큰 이모 아들! 이라고!”

“아니, 근데... 아까는 그...”


나와 김검사를 번갈아 쳐다보는 눈동자가 몹시 위태로웠다. 그제서야 그도 깨달았겠지 뭐 됐음을. “아 씨발, 니네 둘이 진짜 뭔데.” 제정신을 가장 먼저 차린 김검사가 툴툴거리는 소리에 우장훈이 번개같이 내 책상 위에 놓인 티슈를 뽑아서 들고 김검사 입가를 닦아주려고 했다. 저거 봐, 평소에는 저렇게 눈치가 잘도 빠르게 휭휭 돌아가면서, 이번엔 왜 그랬어.


“아, 저리 꺼져요.”

“그... 김프로, 내는... 꿈에도 몰랐지! 하나도 안 닮아가 정이하고.”

“사촌이 닮아봤자, 하 씨바. 그냥 관둡시다.”

“...근데 와 말 안 했으요?”

“그걸 내가 왜 말을 해야 하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겠냐. 그냥 다 털어야겠어.


“검사님 그게... 나 성적이 좀 간당간당해서 검찰청 실습이 다 커트라인 인거야. 그래서... 오빠가 살짝 힘을 좀 써줬...어요.”

“뭐?!”

“아니이, 진짜 딱 한 과목이, 그것만 문제였다니까? 내가 이 오빠 귀찮게 졸라가지고 오빠가 부장님이랑 겨우 쇼부 봐서 외부엔 비밀로 하고 나 실습 받아준 거에요.”

“...무슨 과목?”

“형사법... 총론...”

“니는, 가시나야! 검사 지망할 거라 카면서, 제일 중요한 거를...! 죽도록 공부해서 거 갔으면 열심히 했어야지!”

“그게 다 검사님 때문이잖아!” 

“......”

“검사님이 여자친구 생겼다고... 나 걷어차는 바람에... 내가... 1년 내내 얼마나...”

“어... 야, 우나? 정아 울지마라, 응?!”


김검사한테 거절당한 티슈가 내 얼굴로 붙었다. 놀고들 있네. 김검사가 빈정거려도 몰라, 난 안 들려. 그저 어정쩡하게 안을랑 말랑 하는 자세로 내 얼굴을 티슈로 콕콕 찍어주기 바쁜 우장훈 한테 확 안겨들어 버릴까 고민하기 바쁘거든. 근데 이 아저씨가 인중을 잔뜩 늘어뜨리고 얼굴에 힘 팍 준거 보면 웃고 싶은걸 억지로 참고 있는 게 빤하다. 당신 때문에 1년 말아먹었다는 게 웃을 일이야?! 짜증나 유죄인간. 


“우프로. 진짜 뭡니까 둘이? 사겨요?”

“아, 아니, 아니요. 그... 내가... 정이를 좋아합니다.”


저 인간이 지금, 나한테도 안 한 고백을 누굴 쳐다보고 어떻게 하는 거야! 

기가 막혀서 항의 하려고 해도 김검사의 어처구니없어하는 욕지거리에 쏙 기어들어 갔다. 나이가 몇 살 어쩌구, 중얼거리는 김검사의 말에 머쓱하게 입술을 말아깨무는 우장훈. 

나한텐 헛소리 별소리 잘도 당당하게 하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쫑알대는 그게 뭐라고 기가 죽고 그러냐. 안쓰럽게. 이럴 때 보면 그가 말 한대로, 의외로 나보다 더 어리고 소심한 구석이 있다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내 고백을 대신 받은 사촌오빠놈 보란 듯이 눈앞에 보이는 그의 허리를 확 껴안아버렸다. 







[청담동 E클럽!]


휴대폰 액정에 뜨는 알람 때문에 어두운 차 안이 밝아졌다. 새벽 1시. E클럽 맞은편에 선 세단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으어어 기지개를 거하게 쭉 펴고 담배를 물었다. 세 모금도 못 빨았는데 울리는 진동. 이 새벽에 꼭 저래 난리다, 쯧. 구겨진 인상과는 상반되게도 통화 버튼을 누른 남자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예, 부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우프로 임마, 너 어디, 집이야?! 차장님이 S건설 비자금 사건 당장 보자는데! 나도 지금 다시 지검 나가는 길이야.

“그거요. 아까 11시에 부장님 책상 위에 초안 올려놨습니다.”

-뭐? 벌써 초안이 나왔어? 

“추가 근거자료는 같이 올려놓은 USB 보시면 됩니다.”

-어? 어, 그래그래. 일단 그거면 다 되는 거지? 어?! 허, 우프로 덕분에 살았네. 잘 했다 짜식. ...근데 너 임마 밖이야? 시끌시끌 한다?

“오늘 잠복 할 일이 있어가, 지금 밖입니다.”

-새끼, 뭘 또 잠복씩이나. S건설 건으로 하는 거야? 쉬엄쉬엄 하라고. 

“그, 예 뭐, 겸사겸사... 넵 부장님. 혹시 다른 일 있으면 또 연락 주십쇼!”


오늘 새벽의 ‘잠복’ 때문에 급하게 S건설 건을 처리해 놓고 나오길 잘 했다 과거의 나 새끼. 새벽에 전화해서 빨리빨리 하라고 갈구려던 얄미운 부장마저 할 말 없게 만들어버리는 효과까지 좋네.

남자는 다시 시간을 확인하고 앞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몇 명이랬지, 어... 스크류바 세 개와 숙취해소 음료 세 개를 들고 계산대에 선다. 창 너머로 보이는 E클럽에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나오자 다급해졌다. 


“검사니임!”

“안녕하세요오!”

“야. 니들 인사해. 우리 검사님이야.”

“푸하, 정이 기지배 취했나봐. 우리 이미 니네 검사님 너무 자주 봐서 자알 알거든?”


하이고. 많이도 마셨네. 폭삭 안겨드는 정이 몸에서 훅 끼치는 술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다른 로스쿨 동기들 인사는 웃으며 받아줬다. 팔랑거리는 정이를 조수석에 넣고 나머지 두 명은 뒤에 태우고 봉지에서 스크류바와 숙취해소 음료를 꺼내 배분하는 남자의 폼이 꽤 몸에 익었는지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되고.


“우와, 아이스크림까지! 센스 짱이시다.”

“잘 먹겠습니다 검사님. 매번 이렇게 신세 져서 좀 미안하긴 하다.”

“괘얀습니다. 오늘 생일이, 누구더라? 정은씨?”

“네! 저요 저요!”

“축하해요.”


한창 공부할 로스쿨 학생들이 생일이라고 클럽에서 새벽까지 술 퍼마시고 노는걸 보니까 우리나라 법조계의 미래가 고마 밝아 디지네요. 라는 본심은 그냥 삼켰다. 출발 직전 껍질 깐 스크류바를 정이 손에 쥐여주니 뭘 잘했다고, 그저 생글생글 웃는다. “잘 놀았나. 재밌드나.” 개뿔 알고 싶지는 않지만 예의상 한 마디 해주고 남자는 서울 시내를 순회하는 귀가 차량의 시동을 걸었다.  


“검사님.”

“어. 와?”

“나 오늘 고백받았다? 클럽에서.”


제 친구들이 다 내릴 때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실실 웃기만 하다가 꺼낸다는 첫 마디가 저거였다. 그것도 요새 통 바빠져서 무려 일주일 만에 보는 애인한테. 남자는 푹 한숨을 쉬었다.


“뻥이지롱.”

“니는 진짜, 사람 놀리나.”

“응. 검사님 놀릴 때가 제일 재밌어서.”

“하이고.”

“검사님은 내가 그렇게 좋아요?”

“어. 좋다. 좋아 죽겠다.”


기껏 물어봐 놓고는 대답하니까 말이 없다. 싱겁기는. 운전 때문에 정면만 보다가 잠깐 옆으로 쳐다본 정이는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정이 왼손 약지에서 은은히 빛나는 반지가 오늘도 제 값어치대로 큰일 했겠네. 끼워두길 잘 했지. 


“......” 


빨간 신호등. 톡톡,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리며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면서 고민했다. 저 상태로는 혼자 놔두면 제때 일어나기도 힘들긴데. 오전 안에 일어나면 다행이다. 해장도 시켜야겠고. 너무 오랜만에 보기도 했으니까. 저래 두면 씻지도 않고 잘 거 같아서. 기타 등등. 갖다붙이자면 이유가 한 트럭이다. 

초록색으로 바뀐 신호. 한적한 도로 덕분에 시원하게 차선을 바꿔 좌회전, 남자의 집 방향으로 핸들을 트는 손이 가벼웠다. 





<fin.>




잡식에 죠필을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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