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

"브렉은 이제 당신이 필요도 없을 텐데."

에이몬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쓸모없는 건 바로 잘라내는 작자예요."

폴이 에이몬을 흐리게 응시했다.

"당신처럼 멍청한 사람을 쓰면서 실실거릴 위인이 아니라고. 당신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모든 걸 계획해."

재상은 벙 찐 표정을 한 남작을 지나쳐 실버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언제 차가웠냐는 듯 산뜻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들은 내용을 전하께 보고드려야 될 것 같네요. 저것 이상은 모르는 자입니다. 제가 잘 처리하고 더 알아볼 테니 먼저 가보세요, 경."

실버는 폴을 바라봤다. 녹색 눈 안에 울고 있는 어린 소년이 보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유는 모를 일이었다.

"…괜찮은 건가."

그녀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폴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경에게 차인걸 말하는 거라면 사무치게 괴롭습니다만."

우는 시늉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불쾌해 하며 돌아섰을 말이었지만 실버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말했다.

"일 끝나면,"

실버가 로브를 여몄다.

"술 한잔 마실까."

폴의 눈동자가 천천히 확장되었다.

그 말을 끝으로 실버는 자라드에게로 향했지만 폴은 한동안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서 있던 그는 픽 하고 웃었다.

"아, 참 진짜. 포기 못하게."


-


책상에 엎드려 깜빡 잠이 들었던 자라드는 둔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도륵-

창문걸이에서부터 창턱까지를 소음과 함께 가로지르는 작은 돌에는 종이가 하나 매여 있었다.

"무슨…"

그는 서둘러 창문을 열어젖히고 의뭉스런 물체를 챙겼다. 마나폭탄을 의심했으나 그냥 평범한 돌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창밖의 어둠은 달빛도 집어삼켰다.


「    빌우드 강으로 곧장 오도록 해, 담소나 나누지. 반드시 혼자 와.   」


쾅!

"빌어먹을 브렉 리우드!"

자라드는 책상을 내리쳤다. 자신의 모든것이 읽히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회색 종이에 검은 잉크로 쓰여진 편지는 역겨운 기운을 풀풀 풍겼다. 자라드는 종이를 서늘하게 내려 보았다.

"하…"

그때 다시한번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가 줄곧 닿고 싶던 여자가 창 밖에서 입을 뻐끔 거렸다. 자라드는 깜짝 놀라 쳐다봤다. 

검은 로브사이를 비집고 조금 튀어나온 남색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아, 실버."

그는 창을 열어주었다. 

다른 한손으로는 회색 편지를 구겨 쥐면서.

"멀쩡한 문이 있는데 왜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거지?"

"몰래 나간거니 몰래 들어와야 될것 같았습니다."

실버의 시선이 자라드의 왼 주먹을 향했다.

"…그보다, 무슨 일입니까?"

자라드의 적안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별일 없어. 소득은?"

실버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뭘 알아냈지?"

인상을 조금 구긴 자라드가 재촉했다. 실버는 고통스러워 보이는 왕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손에 쥔게 무엇인지 말해 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자라드는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방금, 바로 손을 펴서 편지를 보여줄 뻔 한 자신이 끔찍하게 싫었다. 나에게 이런 글이 도착해서, 빌어먹게 불안하다 뱉을 뻔 했다. 

"실버."

"네, 전하."

"선을 넘는 짓은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했을텐데. 처음 봤을 때 부터."

실버가 자라드의 서늘한 얼굴에 동요했다. 그의 적안이 처음으로 두렵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가 진심으로 화내는 것이든, 감추기 위해 연기하는 것이든 말이다.

"…죄송합니다."

자라드는 고개를 푹 숙이는 호위를 바라보았다. 이 멍청하리만치 충실한 호위는 따라 오려 할 것이다. 틀림 없이 무슨 일이 벌어질곳에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그의 호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모순이다.'

자라드는 모순인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제 존재도 모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버티며 살아있어도 될까 싶었다.

그의 몸이 기울었다.

"전하!"

실버가 그에게 손을 뻗자 자라드가 거칠게 쳐냈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가."

자라드는 휘청이는 몸을 겨우 지탱했다. 그는 실버를 쳐다보지 않았다.

"알아 낸건 아침에 듣지. 당장 나가봐."

실버는 버거워하는 어린 청년을 바라보았다.

"나가!"

유리조각상 두어개가 깨진 후에야 실버는 집무실을 나왔다. 그녀가 손을 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자라드는 창문을 열고 빌우드 강으로 향했다. 그의 빨간 오러가 스스로를 보호하려 요동쳤다. 


소설 [죽은 장작에게]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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