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레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도 자막만 보고 있던 TV의 소리를 아예 죽였다. 아이방에서 거실 쪽으로 나오던 황시목이 소리가 나지 않는 뉴스에 잠깐 시선을 두다 말고 섰다.


“자요?”


오늘자 마감 뉴스의 두 번째 꼭지는 장관 특검이었다. 아침 뉴스부터 줄창 나왔던. 그 역시 빤할 뉴스일텐데도 혹 뭐라도 새로운 살이 붙었는가 싶었는지 애랑 자다 나온 얼굴이던 황시목은 금세 검사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다음 뉴스가 넘어가도록 대답이 없는 상대에게 한여진이 손을 흔들었다.


“서서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봐요.”


목소리를 더 돋우자 그가 돌아보며 한여진 쪽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몇 번 읽었습니까.”

“어…. 방귀 책은 다섯 번 괴물 책은 세 번 정도요.”

“웬일로 괴물 책.”

“그러게요. 골라 오라고 했더니 그 두 권 가져오던데요. 슬슬 자는 것 같길래 안고 잠깐 같이 누워있다 나왔습니다.” 

“응. 그래 잘했어요 잘했어. 자는 것 같다고 바로 나오면 즉시 발각입니다. 득달같이 깨서 두 배는 더 칭얼댄다구.”


역시 한 번 얘기해두면 절대 까먹지 않는 원조 사람답다. 한여진이 씩 웃으며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맥주 캔을 들어 보였다.

 

“암튼. 축하드립니다 황 프로. 자체 기록 경신.”


한 시간이면 선방이네 선방.

제 옆으로 다가온 황시목에게도 여진이 거실 테이블을 가리켰다. 맥주 캔 옆에 나란히 끓여서 보온병에 담아놓은 허브티가 있었다. 물끄러미 보던 시목이 희미하게 웃었다.


“일은 다 끝내고 온 거에요?”

“급한 건요. 나머진 내일 가서 마무리 하면 됩니다.”


여진이 같이 꺼내놓은 찻잔에 티를 따르다 말고 황시목이 옆을 돌아봤다.


“카페에서도 가끔 사 먹는데.”

“응?”

“카모마일 티요. 항상 맛이 이상합니다.”


풉. 뭐.

뜬금없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양 의사를 들은 적은 없어서 한여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검사님 허브티 안 좋아해요?”


아니 이때까지 그럼…. 한여진은 연애하기도 전부터 그에게 사다주거나 끓여줬던 그 많던 허브티를 다시 헤아렸다. 받아들던 황시목의 표정이나 말들을 되돌이켰다. 나름 황시목의 표정 없는 표정이나 드러내지 않는 말들을 알아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저기, 술 보다는 좋아하는 거 같길래 나는… 뭐야. 괜한 짓 했네. 말을 하지. 딴 거 뭐 줄까요? 어디 보자 마실 게 또 뭐가 있나.”

“아뇨. 좋아합니다.”

“으응? 맛 이상하다고 방금….”


한여진이 갸웃하다 말고 맥주 캔을 천천히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싫어하는 걸 좋아한다고까지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예 아무 감상조차 없다면 모를까. 거기다 다시 뭘 갖다주기엔 황시목은 이미 찻잔 김까지 식혀가며 잘만 마시고 있었다. 이상하다는 말을 꺼낼 때도 분명 카페에서 가끔 사먹는다는 말과 앞뒤가 맞지도 않았다. 

고민하던 한여진이 다시 물었다.


“얼마나 좋은데요?”


황시목은 마시고 있던 잔을 가리키며 이걸 묻는 거냐고 반문했다. 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1부터 10으로 치면.”


둘이서 공유하는 오래된 기준값으로 치환하는 게 제일 정확했다. 황시목이 잔에 담긴 찻물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한여진을 응시했다. 


그가 곧 잔을 내려놓고 여진에게 다가앉으며 허리를 안았다.


“따뜻하고 맛있습니다.”

“뭐래. 답은 않구. 1이에요? 1이구나?”

“고맙습니다. 경감님.”


황시목이 여진을 더 안으로 당겨 안았다.


“이거 봐. 꼭 자기 곤란할 때만 강아지같이 굴지. 아이구 알았어요 알았어. 더 안 물어 볼게요. 많이 드세요.”


한여진은 간지럽다고 그만하라고 작게 웃으면서도 황시목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황시목이 다가붙는 여진의 뺨에 목덜미에 지그시 입을 맞췄다. 아이를 안고 있을 때 나던 살냄새가 한여진의 몸에서도 났다. 목 안 쪽 깊숙이까지 간질거리는 향이었다. 저도 모르게 기침을 하듯 목을 가다듬게 되는. 


“검사님. 근데. 진짜로 내가 준 거라고 입에도 안 맞는 걸 억지로 먹는 거면 먹지 마요.”


황시목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한여진이 끓인 차를 황시목이 마시지 않을 날은. 그가 결정한 방향. 골라낸 답. 허락한 관계들까지도. 


한여진이 내민 잔이라면. 그와 함께 마실 수 있다면 몇 번을 되풀이하더라도 황시목은 잔을 들 수 있었다. 기꺼운 마음으로 언제까지나.


/


아이가 태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싸운 날은 황시목이 전주지검 발령을 받고 나서였다.


함께 저녁을 먹고 치운 뒤 소파에 기대 책을 보던 황시목이 다음 달의 행선지를 한여진에게 말했다. 황시목도 그 날 오후에 받은 공지였다. 밥을 먹으며 할까 하다가 밥은 다 먹고 해야겠다고, 설거지를 하면서 할까 했지만 여진이 욕실에 들어가 있으니 안 되겠다 조금씩 미루던 말이었다. 더 미루다간 날이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럴수록 더 무거워질 건 뻔했다.


거실 탁자 옆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앉아 발톱을 자르고 있던 한여진에게서 소리가 멎었다. 경감님. 등 밖에 보이지 않는 그를 한 번 더 부르자 답이 들렸다.


“다음 달 언제요?”

“말일이요.”

“잘 데는.”

“관사, 미리 신청해두려고요”


한참 들리지 않던 발톱을 자르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응. 알았어요.”


한여진은 여전히 황시목 쪽으론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결국 책을 덮고 바닥으로 내려간 황시목이 그의 옆으로 앉으며 천천히 풀어 말했다.


“주말에 올라오겠습니다.”

“매주?”

“네.”

“그러지 마요. 피곤해. 나도 일하느라 못 만날 때 많을 거고.”


해봤잖아요 우리 그거 어떤 건지. 한숨처럼 웃는 한여진은 불편해보이지도 화가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저,


“짐을 또 싸야겠네.”


다 잘라낸 발톱을 모아 버리려 일어섰다. 휴지통 가까이 가자 자동으로 켜진 현관 센서등을, 이어서 현관문을 물끄러미 보던 한여진이 황시목을 돌아봤다. 

성큼성큼 소파 쪽으로 걸어온 그가 황시목 앞에 섰다.


“팔.”


앉아있는 황시목의 셔츠를 위로 끌어올리며 다시 말했다. 팔 들라고. 그답지 않은 말투에 시목은 팔을 드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한여진에게 팔을 둘러 안았다. 입을 맞추며 한여진의 안쪽 살을 쓸어올렸다.


“방에 가서 하죠.”

“안 벗을 거에요? 왜요. 하기 싫은가 또.”

“또라니 제가 언제…. 벗을게요. 일단 좀.”


한 번 더 가볍게 입을 맞추고 설득하려는 황시목을 한여진이 엇갈리듯 피했다.


“여기서 그냥 하고 싶은 날도 있는 거잖아요.”


알겠다고 그럼 방에서 콘돔만 가져 오겠다고 황시목이 몸을 뗐다. 한여진이 잡았다.


“가져 오지 마요.”

“…….”

“말했잖아. 그냥 하고 싶다고.”


물끄러미 한여진을 쳐다봤다. 그는 아직도 황시목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밥이라도 먹고 이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몇 분 새 한여진이 이렇게까지 핼쑥해질 말이었다면.


“이번 발령. 먼 곳일 거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잘 가라는 말 대신 잘 다녀오라는 말이 한여진의 입에서 처음 나왔던 날. 

황시목은 처음으로 두 병 반 만큼의 술을 비웠다. 모르고 살았지만 이성이 끊어지는 황시목의 마지막 알콜선은 거기였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한여진의 장난끼 가득한 얼굴이었다. 황시목이 깰 때까지 침대에 앉아 내려다보던 그에게 멍하니 기억이 정확히 나지 않는다 중얼대자 명랑하게 번지던 웃음이, 시목은 아직도 귓가에 묻어났다.


‘제가 뭘 했습니까.’

‘별 거 안했어요.’

‘그러니까 뭘….’

‘그냥 뭐. 평범한 주정뱅이였다니까. 내가 술 취한 사람 엔간히 봐서 아는데 검사님은 중간값입니다 딱. 그 정도면.’

‘…….’

‘딴 사람들처럼 다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검사님도. 여기 어디에.’


한여진은 손을 들어 황시목의 흘러내린 앞머리를 가볍게 흩트러뜨리며 웃었다. 


보는 사람마다 넌 정말 유별나다며 그렇게 다르게 살면 좋냐고 고개를 저어도. 혹은 그래 그렇게 너 혼자라도 다르게 살라고 위하는 듯 배제해버릴 때도. 황시목은 별 수가 없었다. 우회하거나 길이 아닌 곳을 디딜 순 없었으니까. 좋은 길을 느낄 순 없어도 옳은 길만은 알고 있었으므로. 고개를 숙이고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지나쳤다.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한여진은 그런 순간마다 일일이 고개를 들었다. 일어나서 그게 아니라고, 단언하거나 깨버렸다. 

다를 거 없다고.

의심해야 할 크고 작은 악. 눈 감은 당신들의 동맹이 거기 어디 있다면 수는 적더라도 여기, 눈을 뜬 우리들도 분명 있다고. 그 자신의 존재 자체로 확인시켰다. 황시목이 별나서 혼자인 게 아니라 그저 우리는 모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흩어져 혼자였을 뿐. 망망대해를 지켜보며 안개 숲을 헤매다 어렵게 만난 우리끼리는 그러니 이제 서로 알아봐주고 격려하자고. 공을 들여 웃어 보였다. 

‘다른 일’이 아니라 그저 ‘힘이 드는 일’일 뿐이었다. 

그럴 때. 한여진이 황시목에게 둘부터 시작하는 거면 그래도 낫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그 일들은 다 별 것도 아닌 것처럼. 유별나게 험준한 산맥이 아니라 어디에든 있는 동네 뒷편의 언덕 쯤으로 보였다. 다들 맛있게 먹는 떡꼬치가 먹고 싶거나 보고 싶은 사람들과 모여서 뒷풀이를 하고 싶을 때도 있는 사람처럼 황시목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로 보였다.


혼자선 모르지. 근데 둘이면?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 날이 생길 수도 돌아올 곳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지난 날. 그러므로 그때에 막 둘이 되었던 그들은 다정한 작별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한여진이 다시 가고 싶지 않아 하는 길은 황시목 또한 이미 지나온 길이었다. 


어차피 고향이랄 것도 없었다. 집이란 재산이나 편의로써의 의미 이상을 가지지 못했다. 한여진을 등 뒤에 두고 내려가는 차에서부터 뭔가 달라진 걸 느꼈으면서도 황시목은 저에게 그 이상으로 치솟을 기대나 걱정은 없을 거라고 쉽게 치워버렸다. 똑같은 일에 똑같이 매달리다 보면 아침과 밤의 2년치 공허란 생각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 가늠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금방이라고 황시목의 등을 밀어주던 한여진이 2년 간 어떤 방식으로 시드는지 지켜보며 황시목은 섣부른 제 짐작을 후회했다. 몇 달을 일정이 엇갈려 만나지 못했던 어느 날엔 한여진이 집에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밤새 운전해서 그의 집 앞을 서성이다 다시 내려가야 했다. 단 한 번도 궁금하지 않던 그 다음 발령지를 미리 따져보거나 예상했다. 

2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깨달았다. 두 번째, 세 번째로 쌓이는 누적치는 황시목도 계산에 넣지 못했다. 제곱이 되어가는 피로가, 어렵게 이어놓은 점과 점 사이의 선이 희미해지기만 하는 매일을 견디기가 버거웠다.


“검사님 아이만 아니면 되지 않아요?”


이제 더 자신이 없는 한여진의 목소리는 황시목의 한숨으로 이어졌다. 나올 때 마다 접점을 좁히지 못한 주제를 지금 굳이 다시 꺼내는 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제 아이가 아닙니까.”

“내 아이만 하면. 내 호적에 올리면 되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닌 거 아시잖아요. 하아. 그리고 그게 말이….”


감정이 고조될 때. 

얼핏 상기되는 것 같던 한여진은 오히려 말을 할수록 서늘해졌다. 


“알았어요. 그게 그렇게 말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하지 마요. 그만하자고.”


그리고 황시목은 반대였다. 


“그만?”

“그래 그만.”

“헤어지는 겁니까 그럼?”


끝까지 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게 어떻게 그리로 튀지? 난 헤어진다는 소리 안 했는데요. 헤어지고 싶은가 보네.”

“아님 아이 얘기 다신 안 하겠다는 말로 알아들을까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한여진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거실 이쪽 편에서 저쪽 편까지 서성대는 사이 들어찬 차가운 침묵에 머리가 식었다. 황시목이 말을 돌리려 했다.


“애초에 아이 얘기는 여기서 중요한 게….”

“하긴 그러네. 되도록이면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내가 사랑하는 아이의 친부이면 좋겠지만 충분조건이고 필요조건은 아니잖아요. 중요하지 않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어차피 내가 낳은 아이의 엄마는 100% 나니까.”


모진 말이었다. 분명히 말을 한 한여진이 더 괴로워할 거란 것까지도 듣는 순간 황시목은 알았다. 

기우뚱 엎어진 말이 다 쏟아지기도 전에 한여진은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혼자 울겠다. 저 사람.

뒷모습에서 이미 그의 한계를 읽은 황시목이 곧장 따라가려는데 머리를 관통하는 통증이, 덮쳤다. 한여진의 손을 잡은 이후로는 없었던 통증이었다. 그대로 다시 주저앉았다. 걷잡을 수 없이 치미는 오래간만의 구토감을 되삼켰다. 


예전엔 사지가 다 굳는 이 정도의 통증이었으면 아마…. 


나가버리려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고도 황시목은 시간을 헤아렸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다잡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제 병에 그 긴 시간을 다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여진이 울고 있을 방으로 당장이라도 들어가야 했다. 답답했다. 이보다 더 깊이 아파도 상관없으니 빨리만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이 그 와중에도 스쳤다. 창문을 열면, 창가 쪽으로 가서 바람을 쐬면 나아질까 몸을 옮기려 했다.

그때. 어느새 거실로 다시 나온 한여진이 쓰러지고 있는 황시목을 안아 올렸다. 어떻게든 버텨주려는 몸이 황시목을 받쳤다.


“아니야. 괜찮아요. 검사님. 나한테 기대요.”


미안. 내가 미안 응? 

잘못을 빌듯 애틋한 손길이 황시목을 쓸었다. 그럴 사람은 당신이 아닌데도. 온통 쓸리고 까져서 누굴 위로하거나 나눠줄 만한 성한 마음이 더 남아있지도 않으면서. 

손을 뻗었다. 가까이 다가온 한여진의 머리 뒷쪽을 가만히 끌어당겨 안았다. 

따라와 순순히 안기면서도 그새 젖어든 한여진의 목소리가 황시목을 여러 번 불렀다. 황시목은 괜찮아질 거라고. 점점 더 강해지는 당신이라면 괜찮다고. 마주 안은 황시목의 등을 쓸었다. 

서서히 어둠이, 이명이 물러났다.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통증을 지고서도 잔뜩 찌푸린 황시목은 다시 한여진을 부르며 힘을 줘 안았다. 얼떨떨한 얼굴로 안긴 한여진이 품 안에서 굳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니. 지금은 내가 문제가 아니라 검사님 머리….”

“경감님.”

“…네.”

“저 부르세요. 혼자 울지 마시고.”


방에서 나와 주세요. 지금처럼.

남은 통증을 억지로라도 털어내고 싶었는지 황시목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서둘러 바톤을 이어받는 것처럼 안고 있는 한여진의 등을 다독였다. 한여진이 방금 전까지 주문처럼 나직이 말해주던 위로를 한여진의 귀에다 말해줬다. 

당신이라면 분명 괜찮아질 거라고. 그러니 울지 말라고. 우린 괜찮다고.


한참을 한여진은 말이 없었다.


“…울고 싶으면 검사님을 부르라고?”

“네.”


그게 뭐야. 

눈가로 잔뜩 물이 고여 있던 한여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상처난 속을 억지로 누르려고 숨는다는 걸 알기에 따라가던 것도. 무심코 날카로워진 대화에 온몸이 아플 사람이 걱정 돼 저도 모르게 다시 나와본 것도. 둘은 더 말하지 않았다.


“자기가 무슨 뭐…. 만화 주인공인 줄 알아. 그런 건 본 적도 없으면서.”

“봤는데요. 꼭 보라고 하신 만화는 다.”


황시목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한여진이 반짝 일어나 그를 마주봤다.


“그걸 다?” 

“네.” 

“언제요?” 

“경감님 집에서도 보고. 사서 핸드폰으로도 보고요.”


우등생, 모범생인 건 알았지만 참.

말문이 막혔는지 한여진은 황시목을 한동안 쳐다보다 다시 그의 가슴 쪽으로 얼굴을 묻었다.


“그래. 볼 만은 하던가요?”

“어떤 건요. 끝까지는 다 봤습니다.”

“머리는?”

“괜찮습니다.”


손만 위로 뻗어 황시목의 머리를 더듬더듬 가만 다독이던 한여진이 생각할 수록 웃긴지 킥킥댔다.


“근데 내가 부른다고 뭐. 바쁜 황 검사님 어디 나 달래줄 짬이 있겠어요. 사건 수사해야지 공판 준비해야지 만화책 봐야지….”

“갈게요. 어디에 있든. 안 바쁩니다. 경감님이 부를 땐.”


가슴이 미어졌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주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그 말들은 다 항상 말 뿐이지가 않아서, 고르고 고르다 잘 닦아서만 한여진에게 내미는 남자라는 걸 알아서 더 목이 메였다.


“…검사님 때문에 울고 싶어지면?”

“저 때문에 울었습니까.”


머리칼이 다 쏠릴 정도로 세게 고개를 젓고 난 한여진이 편안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그럼 아이 얘기.”

“…….”

“우리 다시 해볼까요.”


한여진의 입가로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더이상 눈돌리지 않겠다는 눈빛이 같은 눈빛을 반겼다.


“나도 지금 당장 아이를 갖자는 건 아니예요.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다 결국 아이가 없는 삶을 택할 지도 모르지.”


용량이 없는 사랑을 더 깊이 주고받고 싶었다. 

황시목과 손을 잡고 나서 맛본 세상은 너무 단단하고 안온해서 한여진은 조금만 더 끝을 상정하지 않고 싶었다.


“이건 정답이 있는 문제지가 아니잖아요.”


선과 악의 경계란 그저 조금만 힘을 주면 뜯어져 나가는 통제선 이쪽과 저쪽 뿐이듯.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란 구별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것처럼. 


“지금의 난 그냥, 내 인생 전체를 놓고 남은 날에 대한 상상을 해보고 있는 겁니다. 그 중 아이도 있는 일상은 어떨지 고려해보는 거구요. 무엇이든 시작과 끝은 있고 삶에는 각자가 만드는 챕터가 있는 거잖아요.”


아직 다 쓰여지지 않은 나머지 페이지에다 밝은 날들을 더 모으려던 것 뿐이었다. 어느 오후 황시목 옆에 앉아서 보던 노을같은 풍경들. 그것 뿐일 순 없겠지만 그런 일들이 조금씩 더 힘을 가지고 이겨내는 삶을 적어내려가고 싶었다.


“나는 그 구상 안에. 내 남은 생의 모든 챕터에 황시목이 등장해줬으면 하고 바랍니다.”


담담한 고백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당신을 사랑한다고. 꿈처럼 한여진이 말하고 있었다.


“곧 막 하나가 끝날 거예요. 그리고 다시 다음 막이 열리겠죠. 그런데 이 얘기만 하면 검사님은 화를 내요. 안 그러는 분이. 이 말은 다 들어보지도 않고 잘라내려고만 해.”

“…화가 난 게 아닙니다.”

“그럼 뭔데요.”


달려가는 한여진의 등만 보고 있는 스스로가 초라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는 삶. 언제까지일지 생각해보려 들지 않는 생이었다. 사십 년 만큼을 살고서도 짐작컨대 그 십 년 뒤, 이십 년 뒤에도 그런다면 과연 그때의 일상과 지금의 일상은 같을 수 있을까. 기억이 퇴화하고 누운 자리가 배기는 나이여도 그럴까. 공직에서 물러난 그 다음의 행선지는. 더이상 아무도 지정해주지 않을 그 이후 발령지는 어딜지 애써 외면하지 않았는가. 학교일까. 아니면 어제는 적이었으니 오늘은 동지라며 법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까.


눈 깜짝할 새 계절이 가버리고 전관이 되어서도 법전만을 무기로 든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비쩍 마르고 지친 말 위에 홀로 앉은 늙은 기사.


이전에 그 옆에 아무도 없던 때 그는 그저 변하지 않은 사람일 뿐이었다. 가슴으로 꽂히는 그 무엇도 없이 어딘가에 가 꽂힐 일만 잔뜩인 벼려진 칼. 그 끝만 무뎌지지 않기를 갈고 닦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검사님. 난 지금의 내가, 아직은…. 그래도 괜찮아요. 어떤 면에 있어선 이전보다 아주 쪼금 나아진 사람인 것 같기도 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람이란, 변하지 못한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


“변하지 못하는, 변하지 않는 근본을 지킬 거예요. 다만 노력하되 방법은 계속 바꿀 겁니다. 계란으로 안 되면 당근이나 파로도 바위 칠 거거든 난.”


쓸려가지 않는 빛을 품은 사람을 만났다. 서슴없이 강하되 바탕이 맑은 정의를 깃대에 꽂고 달릴 기수. 

먼저 답을 고른 한여진이 선봉에서 멈춰 황시목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싶어요. 내가 정한 방향 쪽으로. 앞으로도 계속. 그런데 황시목이란 사람이 그걸 함께 돌아보지 않는다면….”


한여진이 황시목을 사랑하기로 했을 때 감수한 것들은 그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반대에는 뭐가 있었는지 돌아봤을 때 생각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안개 속을 헤매다 만난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도.

정말로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황시목이 결정해야 하는 건 한여진이 포기하는 게 여기서 더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경감님.”

“네.”

“다시 고민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정말.”


안도의 숨을 내쉬는 한여진의 눈가를 살며시 쓸었다.


“다만 전 아마 일주일 뒤에도, 일 년 뒤에도 제 아이가 태어나는 게 기쁘진 않을 겁니다.”


그대로 그가 굳었다.


“알겠어요. 그럼….”


체념한 듯 힘이 하나도 없는 그를 똑바로 마주보며 황시목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전 이제 더 이상 그 부분을 고민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도 모르는, 답 없는 문제를 되돌아보고 논의하면서 번번이 당신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제가 다시 고민한다는 건, 저를 포함해 이와 연결된 모든 부차적 상황과 관계를 제했을 때 남는 걸 다시 생각하려고 하는 겁니다.”


한여진의 다시 없을 기쁨이 될 아이라면. 


“언젠가 태어날 한여진의 아이는 저도 기쁠테니까요.”


한여진과 만난 이후 황시목은 최고법을 바꿨다. 가이드라인을 다시 세웠다. 그의 기쁨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이 설령 황시목이 한여진을 놓아야 하는 결과를 낳더라도 기꺼이 하고 싶었다. 해야만 했다.


“그 방향으론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구체적으로 제가 뭘 해야 할지 찾아보겠습니다. 아깐 말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경감님이 얘기한 법적인 문제도 포함해서요.”


저야말로 아깐 미안합니다. 그런 식으로 얘기해서. 

황시목이 고개를 숙였다. 한여진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가만히 귓가에 입을 맞췄다. 허리를 안았다. 한여진이 마주 팔을 들어 황시목의 목을 감싸 안았다. 목덜미로 숨을 묻었다. 입가로 걸린 한여진의 미소가 목덜미로 또렷하게 느껴졌다. 간지러워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자 품에 안은 한여진 입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결국 샜다.


둘 사이의 아이를 갖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하기까지는 황시목이 전주로 내려가고서도 반 년이 더 걸렸다. 한여진은 8만큼 원했고 황시목은 8만큼 원하지 않았다. 

황시목이 먼저 제안했다. 아이를 갖되 시효 기간을 걸자고. 아이가 태어나고 5년. 그 안으로 황시목의 숫자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 종료일에는 최종 결정하기로 약속했다. 이후로도 셋으로 살지 아니면 끝내 둘과 하나가 될지.


“헤어져야 한다면 헤어질 수 있을까요, 우리?”


막 대답하려는 황시목의 입을 한여진이 손으로 막았다. 


“아니다. 예상같은 거 하지 맙시다. 앞으로.”


손을 뗀 한여진은 황시목의 입술 끝을 살짝 물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뭘, 모르는 건데요.”

“그니까. 그걸 모른다고. 뭘 모르는지. 하나씩 깝시다. 그때 그때 놀랄 준비만 해요 우리.”

“여기서 더 말입니까?”

“네. 여기서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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