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지만 역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는 오싹한 실내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귀찮을 정도로 이런저런 말을 걸어왔을 박지민이 뚱한 얼굴로 앉아있으니 그건 또 그것대로 신경이 쓰여 한숨을 내쉬었다. 



“너 계속 그럴 거야?”

“ ···.”





*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 정국이의 고백도 벌써 삼일 전의 일이었다. 그날 밤, 오빠에게 떠밀리듯 방에 들어와 확인한 핸드폰엔 미처 확인하지 못한 지민이의 메시지가 몇 통 와있었다. 



[ 오늘 만나기로 한 멘토랑 연락했어 ]

[ 한 명 못 온다니까 그럼 그냥 담주에 만나자더라 ]



오히려 잘됐네. 월요일에 보자는 답장을 보낸 후 새벽 내내 정국이와 통화하다 잠이 들었다. 



방학식이 있던 월요일. 학교도 일찍 끝났겠다, 집에 가는 길에 함께 빙수나 먹으러 가자는 정국이의 제안에 종례가 끝나자마자 그의 교실로 향했다. 다른 반들은 방학이라고 너도나도 칼종례를 받는데 정국이네 반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으로 그의 반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중 전화가 울렸다. 박지민이었다. 



— 오늘 과학실에서 만날래? 석진이 형도 온다던데.



오호라, 이젠 선배가 아니라 형이야? 어쩐지 점점 물들어간다 했다.



“어?! 김여주!”



깜짝이야. 전화기에서 나오는 소리라 치기엔 지나치게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잠깐, 설마···. 긴가민가하며 뒤를 돌자 복도 끝에서부터 신나게 질주하는 박지민이 보였다. 맙소사. 저거 대체 몇살이야.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박지민이 "짜잔-!" 하며 한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진지하게 모르는 척 지나칠까 고민하는 내게 녀석은 들뜬 음성으로 물었다. 



“뭐야아- 새삼스럽게 왜 남자 층까지 왔어. 그냥 과학실에서 만나지.”



어? 딱히 널 만나러 온 건···. 오해를 풀기 위해 입을 열다가 친구와 함께 뒷문을 빠져나오는 정국이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듯 동그란 눈을 키우더니 짐짓 표정을 굳히고 나를 향해 성큼 걸어오는 정국이. 무안할 정도로 무심히 지민이를 지나친 정국이는 내 손을 잡고 계단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미안, 이따가 연락할게!”라는 말만 남기고 멀어지는 나와 정국이의 모습을, 지민이는 계단 위에서 아무런 동요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


.


.






“누가 학교에서 마음대로 손 잡으래.” 



학교를 빠져나오며 구시렁대자 정국이는 이마에 내 천 자를 새기고서 나를 흘겼다.



“누가 함부로 데리러 오랬어.”

“내가.”



“거기가 어디라고 올라오냐고. 그냥 얌전히 교실에서 기다리면 내가 갈 텐데.”

“그런 게 어딨어. 먼저 끝난 사람이 가서 기다리는 거지.”



“그러니까,”

“··· 내가 기다리는 게 창피했어?”



긴장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정국이는 대답 없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널 창피해하냐.”

“···.”



그가 잡은 손에 깍지를 끼며 더 단단하게 얽어온다. 



“이 헛똑똑이야. 우리 층에 여자애 보면 환장하는 놈들 천진데 내가 널 거기 두고 싶겠어?”

“지금 자기 무덤 파는 거 알고는 있나 몰라. 그거 너도 포함이야?”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묻자 정국이의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난 너만 한정이고.”



온도도 습도도 높은 한여름의 어느 날. 우리는 빙수 가게에 도착할 때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






박지민과 나를 단톡방으로 초대한 대학생 멘토가 보낸 톡을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억지로 하는 건가? 열정도 없고 예의도 밥 말아먹었는데.



[ 내일 11시 사거리 역 앞 카페 ]



시간 괜찮고 감사하다는 내용으로 답문을 보내자 채팅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이거 참 얼떨떨하네. 자기도 학생으로서 스펙 쌓으려고 하는 걸 텐데 뭐가 이리 거만해? 속으로만 씩씩대다가 박지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녀석은 자동응답 메시지가 흘러나올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칼답률 100%를 자랑하는 박지민이 웬일이래? 분명 바쁜 일이 있나 보다 생각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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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내 옆에서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앉아 있는 박지민을 보자 내 감이 말했다. 얘 어제 일부러 씹은 거구나. 



“야 박지민, 너 혹시··· 그날 내가 과학실에 안 가서 삐졌니?”



‘삐졌니'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자마자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모습은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툭 튀어나온 입술에 ‘나 삐졌어요,' 하고 쓰여 있는데 뭘. 물으나 마나지. 쨍하게 나를 째려보는 박지민에 푹- 한숨을 내쉬며 말을 정정했다. 



“그래, 삐진 게 아니라 기분이 상했니?”



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열심히 받아치는 날 열렬히 노려보던 녀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

“···.”



“대체 전정국이랑 뭐야?”

“뭐.”



“아무리 좋아한대도 그렇게 끌려다닐 필요는 없잖아. 맘 없이 이리저리 휘두르는 거에 왜 일일이 장단 맞춰 주냐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성격대로라면 무시한다던가 신경 쓰지 말라고 했겠지만 어쨌든 저쨌든 날 걱정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니까. 박지민한테까지 그럴 수는 없지.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긴 뭘,”



“나 정국이한테 고백받았어.” 

“······.”



박지민은 경직된 얼굴로 순식간에 말문을 잃었다. 정국이가 나한테 고백한 게 그 정도로 놀랄만한 일이야? 하긴, 나도 놀랐는데 너라고 뭐 다르겠냐. 그래도 묘하게 괘씸한 마음이 들어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긴 했지만 참았다. 테이블 위의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내게 무어라 말하려던 박지민의 시도는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벨 소리에 의해 좌절되었다. 



“··· 여보세요?”



“아, 저희 둘 다 도착해서 이미 안에 자리 잡았는데요.”



박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계를 보니 현재 시각은 11시 14분. 정말 보면 볼수록 비호감이네, 이 사람. 시간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나름의 신념을 가진 나로서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첫 만남이었다. 만나기도 전에 차곡차곡 쌓은 비호감이 도대체 얼마야. 이거 괜히 시간 낭비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여어.”



저건 또 무슨 희한한 인사법이야? 나직한 음성에 고개를 들자 테이블 옆에 서 있는 나른한 인상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검정 볼캡을 쓰고 단순한 디자인의 박스티를 입은,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민윤기. 한국대 수학과 1학년.”



자리에 앉자마자 “늦어서 미안,” 하고 담백한 저음으로 사과한 민윤기는 만사가 귀찮아 보였다. 아니, 세상만사의 모든 것을 통달한 사람처럼 피곤에 찌들어 있었달까. 그래서 그런지 불과 조금 전까지 혼자 열을 내던 내 상태도 조금 진정됐다. 



“학교 선배라고 생각해. 호칭은 형이던 오빠건 선배건 너희 편한 대로. 아, 선생님만 빼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말을 이으며 핸드폰을 두드리던 민윤기는 우리를 쓱 보더니 “뭐 시켜줄까,” 하고 물었다. 


박지민은 고개를 저었고 난 “아이스 그린 티요,"하고 대답했다.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핸드폰을 몇 번 더 두드리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테이블에 내려앉은 침묵이 어색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앞으로의 계획이나 일정에 대해 얘기할 거라고 들었는데요.”

“너네 소개부터 하자.”



“아, 죄송해요. 프로필 보셨을 줄 알고.”

“봤어. 그래도 얼굴 보고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 다시 소개해봐.”



“···.”

“···.”



“00고 1학년 김여주라고 합니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은 건 자연과학 계열이고요.”



턱을 괸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하는 민윤기. 다음.



“어, 저는 같은 고등학교 다니는 박지민이고, 심리학이나 생물 쪽 전공 생각하고 있어요.”



지이잉- 진동이 오는 핸드폰을 손에 쥔 민윤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윽고 양손에 음료를 들고 돌아온 그는 내게 그린티를 건네고서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민윤기의 앞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이 놓였다.



“너네가 제출한 성적 쭉 훑어봤거든. 내신이랑 모의고사 둘 다 흠이 없던데. 딱히 내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진 않아.”



손을 떼겠다는 말을 빙빙 돌려 말하는 건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자 민윤기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공부선에서는. 그래도 진로적인 부분에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내 폰 번호도 알겠고.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대학생 된 지 일 년도 안 돼서 수험생활이 고스란히 남아있거든.” 



여기에. 그리고는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줄곧 궁금해하던 질문을 꺼냈다. 



“멘토 멘티는 어떤 식으로 정해진 거예요?”

“본가가 너희 학교랑 가까워.”



설마 그 단순한 이유가 끝?



“너희 둘 다 이과 지망이기도 했고.”

“···.”



“또 질문?”

“그럼 앞으로 매주 이 시간에 여기서 만나는 거예요?”



박지민의 질문엔 살짝 고개를 갸웃하던 민윤기는 이렇게 답했다. 



“프로그램 규정상 일주일에 적어도 네 시간은 만나야 하니까···. 목요일에도 이 시간 괜찮으면 그때 한 번 더 만나는 걸로 하자. 스터디 메이트 정도로 생각하고 공부할 거나 다른 할 거 들고 와서 해.”



내가 생각했던 것과 좀 많이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신청한 거 열심히 해 보자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가 앉아있던 소파가 아래로 푹 꺼졌다. 고개를 돌리자 내 옆에 조금 남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정국이가 보였다. 운동을 막 끝내고 온 건지 그에게선 옅은 비누 냄새가 났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정국이가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도 껴서 할래. 같이 하게 해줘.”



동시에 민윤기의 입이 열렸다. 



“전정국?”






.


.


.






세상에 살다 보면 이런 우연 저런 우연 다 있다고 하던데, 맞는 말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니, 민윤기는 정국이 아버지 친구분의 아들이라는, 짧게 말하면 새로 정국이 과외를 맡았다는 그 대학생이었다. 심오한 고민에 빠진 척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민윤기. 하지만 난 확신할 수 있었다. 민윤기는 결국 오케이를 외칠 것이라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정국이가 우리 미팅 시간에 오면 우리는 자습하고 자기는 정국이 과외 해주면 되는데. 시간도 엄청 굳을 테니 지금쯤 마음속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중일걸?  곧 민윤기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희가 정 원한다면 어쩔 수 없네. 사실 난 상관없긴 한데.”



결국 이 멤버 그대로 일주일에 두 번 미팅을 가지자는 결론이 났다. 민윤기는 대화가 대충 마무리 되자 곧장 자리를 뜰 채비를 했다. 참으로 피곤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을 때 내 어깨에 턱을 올리고 있던 정국이가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우리도 가자.”

“어? 잠깐. 그 전에···.”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지민이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휙,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가기 전에 둘이 인사 좀 할래? 저번에 소개해주겠다고 했잖아.”



마침 두 사람 다 여기 있으니까 잘 됐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냉랭했다.



“딱히 소개가 필요할 것 같진 않은데. 정국이랑은 전에 이미 인사했어. 먼저 간다.”



조용히 제 할 말을 마치고 가방을 어깨에 걸치는 지민이의 모습은 평소답지 않게 서늘했다. 미팅 전 토라져 있던 모습보다 어딘가 더 틀어져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왜? 어울리지 않게 날을 세우는 태도를 한여름 더위로 인한 변덕스러움 쯤으로 치부하던 난, 그 상태가 길어질 것이라고는 한치도 예상 못한 채 녀석을 보냈다. 











25



이 선배들은 실험실에서 주거하는 건가? 진희 선배가 단톡방에 올린 실험/보고서 스케줄표를 확인하자마자 그들의 열정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주중 5일 내내 실험-결과 보고-결과 정리-보고서 작성의 굴레를 돌고 도는 무자비한 계획표라니. 저것이 나의 미래일까, 진지하게 고민했더랬다. 아주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어 한 주에 한 번 정도는 꼭 찾아가 이런 저런 잡일을 도왔다. 간단한 배양이나 보고서 정리 같은 것들이 내 임무의 주를 이루었다. 


방학식 이후로 매주 월요일마다 —심심할 땐 다른 날도 가긴 하지만— 과학실에 출석 도장을 찍은 지도 거진 한 달째.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학교에 도착했다. 선배들 프로젝트 준비를 위해 방학 때도 출근하신 과학 부장 쌤께 여느 때처럼 먼저 인사를 드리고 과학실로 향했다. 



지민이에겐 내가 언제 과학실에 가는지 굳이 알리지 않았다. 매주 있는 멘토링 미팅 때마다 얼굴은 보고 있지만, 그 녀석과 나의 관계는 전과 달랐다. 대화를 이어갈 의지가 없는 상대를 붙잡고 질척대는 타입도 아니고, 무엇보다,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그 녀석에게 맞춰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석진 선배의 말에 따르면 녀석도 꾸준히 과학실에 나오고는 있는 듯한데, 난 들은 것이 없으니까. 뭐, 그냥 그 녀석이 나를 열심히 피하고 있구나, 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과학실 문을 열었다. 나 참, 저 선배들은 한여름에도 저러고 싶을까. 실험대 앞에서 민망하게 찰싹 붙어있는 두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닭살 커플 선배 둘의 폭풍같은 스킨십은 우리 동아리의 일상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굳이 피해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순 내 기척을 느낀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뭘 저리 오버해서 떨어진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실소를 흘렸다. 어, 잠깐.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알 수 없는 괴리감에 시선은 다시 그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하하···.”

“···.”

“···.”



내가 예상했던 두 사람이 아니었다.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고 서 있는 것은 석진 선배와 진희 선배였다. 아주 난감한 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 눈에 띄게 상기된 얼굴의 진희 선배에게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들고 온 음료수 봉지를 소지품 보관함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오늘··· 바쁜 일이 있어서 음료수만 배달하는 거거든요. 그··· 어··· 이만 가볼게요. 화이팅.”



최대한 평소처럼 보이려고 목소리에만 온 신경을 쏟았더니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 목소리조차 덤덤하게 들리지 않았던 터라 낭패였다. 한 손을 들어 어색하게 흔들며 뻣뻣한 백스탭으로 과학실을 빠져나갔다. 



중앙현관이 보이는 곳에서 정국이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는데 뒤에서 무언가가 내 팔을 잡았다. 



“힉!”

“아, 깜짝야-!”



“선배가 잡았잖아요.”

“어? 어. 아, 그랬지. 바쁜 일 있어도 이건 마시고 가지? 네가 사 온 거잖아.”



“아니, 저는···,”

“딱 사람 수 맞춰서 사 왔더구만. 날씨도 좋은데 밖으로 나가자.”



유리문 밖의 세상은 아지랑이로 꿈틀거렸다. 푹푹 찌는 이 날씨가 좋다고? 밖에 나다니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불쾌지수도 장난 아닐 텐데요? 석진 선배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기어이 나를 끌고 나가 운동장 스탠드로 향했다. 날 자신의 옆에 나란히 앉힌 후 비타민 워터 하나를 쥐여준 선배는 아무 말 없이 운동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끌려온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하던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선배.”

“응, 여주야.”



 “선배님들 교제 사실은 처음 알게 된 거라 좀 놀라긴 했지만 제 입단속은 걱정 마세요. 제가 생긴 대로 입이 꽤 무거운 편이라서요.”



내 말을 들은 선배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좋겠는데,”

“···?”



“나 진희랑 사귀는 거 아니야."

“······ 예?”



“내가 진희를 좋아해.”



그런가. 진희 선배도 분명 싫은 얼굴은 아닌 것 같았는데. 하긴, 당사자가 아닌데 뭘 알겠어.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다 다시 선배를 올려보았다. 근데 그걸 왜 저한테 얘기하시는지···. 



“그걸 왜 저한테 얘기하세요?”

“······ 예?!”



“딱 그 표정이다, 지금.”

“아, 아니거든요?”



깜짝 놀랐네. 또다시 마음을 읽힐까 봐 신발코로 시선을 내렸다. 후우- 한숨 소리와 함께 석진 선배가 하소연을 시작했다. 


선배의 사정은 이랬다. 남녀 분반은 우리 학교에서 올해 처음 시행되는 거라 작년까진 쭉 남녀합반이었는데, 석진 선배와 진희 선배는 작년, 그러니까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고 한다. 학기 초부터 진희 선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석진 선배는 동아리 활동 또한 진희 선배를 따라 시작했다. 지금은 이게 둘 사이에 하나 남은 연결고리라고. 워낙 틈을 내주지 않는 진희 선배라 일부러 까불거리며 자신을 주목하게 만드는 것에도 익숙해진 지 오래지만 고3이 되어 하나 남은 접점이 사라지면 서서히 멀어지게 될까 봐 걱정이라는 것이 선배의 요점이었다. 



“왜 고백 안 하세요?”



“··· 좋은 질문. 방학 끝나고 할 생각이야.”



늘 장난기가 드글드글 하던 선배의 눈이 이렇게 진중해 보이다니. 좀 신기했다.



“김여주.”



흰 박스티 차림의 정국이가 이쪽으로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석진 선배가 의아한 얼굴로 나와 정국이를 번갈아 봤다. 



“여주, 남자친구가 있었어?”



금세 스탠드 꼭대기까지 올라온 정국이가 나와 석진 선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여긴 제 소꿉친구이자 남자··· 친구인 정국이고요,"



“이쪽은 같은 동아리 2학년 김석진 선배야.”

“이야- 아직도 김석진 선배라니 너무 하네. 석진 오빠라고 살갑게 부르라니까.”



다시 짓궂은 얼굴로 돌아온 선배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했다. 선배의 농담조에 익숙할 리 없는 정국이만 도끼눈으로 석진 선배를 노려볼 뿐이었다.



“여주가 왜 그쪽 선배님을 그렇게 불러야 합니까?”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정국이를 바라보던 석진 선배가 손을 내저었다. 



“이 친구 참 재밌네. 농담이야 농담.”



정국이의 결연한 얼굴엔 어떤 농담이 와도 다큐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이제 그만 가자고 눈짓하는 정국이를 따라 일어서며 선배에게 물었다. 이런 일에 개입하고 싶진 않지만. 짝사랑은 내 전문이라 남 얘기 같지 않아서.



“도와드려요?”

“어?”



“진희 선배 살짝 떠 보는 건 할 수 있어요. 뭐 다른 거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 테니까.”

“우리 여주는 인성까지 다 됐네. 부족한 게 없어.”



피식 웃는 석진 선배를 뚫어버리겠다는 듯 열심히 노려보는 정국이의 팔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전정국.”

“···.”



“너 지금 내 동생이랑 뭐 하냐?”



남준이 형의 힐난조에 심장이 콕콕 찔리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거실 불을 켠 후 형을 돌아봤다. 언젠가 올 상황이었다. 하지만 막상 닥치니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조차 떠오르지 않아 입술만 달싹였다. 거실로 들어온 남준이 형이 소파에 철퍼덕 앉으며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하-”



“너희 사귀냐?"

“응.”



“··· 언제부터.”

“···.”



“···?”

“··· 오늘.”



형의 얼굴에 의문, 당혹감, 허탈함, 분노의 감정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듯 보였다. 형의 미간에 진 주름이 점점 깊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무렵, 남준이 형이 입을 열었다. 



“난,”

“···.”



“솔직히 응원은 못하겠다.”

“···.”



“여주 좋아해?”

“어. 좋아해.”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여주가 너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지 알지.”

“··· 알지.”



“걔가 내색은 잘 안 하는지 몰라도 마음고생 심하게 했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고개만 주억거렸다. 



어릴 적부터 숫기가 없는 날 데리고 컴퓨터 게임도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일주일도 안돼서 모두 나에게 따라잡히긴 했지만) 사나이는 자고로 운동을 해야 한다며 운동을 시작해보는 게 어떻냐 권유했던 것도 남준이 형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덜렁거린다고 아줌마한테 만날 혼나는 주제에 외동인 내가 거리감이나 소외감을 느낄까 봐 늘 나까지 챙기던 형의 고군분투는 어린 나의 눈에도 보였다. 그런 모습들 때문에 남준이 형이 내 친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나와 터놓고 얘기하던 형이 딱 한 가지 나에게 입도 벙긋하지 않던 건 여주에 관한 것들이었다. 초등학교 때의 그 경고 이후로는. 



“그래서 네가 여주 좋아한다는 것도 난 왜 못 믿겠냐.”



한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린 남준이 형의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졌다. 



“마음 같아선 여주 마음고생 시킨 만큼 너도 괴로웠으면 좋겠다. 방해하고 싶고.”

“···.”



“근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러겠냐. 여주가 좋다는데. 둘이 서로 좋다는데.” 

“···.” 



“다만,”

“···.”



“너 때문에 여주 눈에 눈물 난단 소리가 내 귀에 한마디라도 들리면, 아무리 너라도 가만 안 둘 거야.”



시간이 지나도 꾸준히 변함 없는 형의 똑같은 레퍼토리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절대 걱정할 필요 없게 할게.”



푸흡, 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버린 웃음. 



“어쭈. 웃어? 이게 지금 장난 같냐? 그래, 전정국?”



그런 나를 보고는 벌떡 일어나 헤드락을 거는 형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항복을 외쳤다. 씩 웃으며 나를 놔주는 형의 볼에 쏙 들어간 보조개가 눈에 들어온다. 여주는 보조개 없는데. 남매인데도 닮은 구석이 없다니까. 세트로 똑똑한 것 빼고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온 형이 팔짱을 끼고서 크흠,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



“··· 순진한 애 꼬셔서 그러지 마라.”

“내가 뭘.”



“내가 뭘? 야, 전정국. 난 또 너네 만난 지 몇 년 됐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줄. 아까 딱 붙어 있었던 거 내가 못 봤을 것 같지?”

“만난 걸로 따지면··· 꽤 오래됐지···.”



"까불지 말고. 아무튼. 성인 되기 전까지는 여주한테 손가락 하나 갖다 댈 생각도 하지 마. 알았어?”

“··· 그럼 성인 되면,”



“그건 그때 가서 다시 말할 거고, 알았냐고.”

“···.”



멀뚱히 제 얼굴만 쳐다보는 나에게 형이 다시 한번 대답을 재촉했다. 



“전정국.”

“알았어.”



안 댈게. 손가락 하나는. 











별 헤는 밤 복사나무 꽃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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