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 대한 백 가지 이야기 



Marlin 作





재발 후 첫 치료인 1차 관해가 실패해서였을까 아현은 2차 관해에 들어 간 이후 줄곧 예민한 상태였다. 아침마다 채혈하는 간호사의 발걸음 소리 가 들리면 무엇을 하는 중이던 간에 피곤하다며 침대에 파묻히곤 했다. 채혈을 피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핑계이자 도망거리였지만 아현은 매일 아침마다 그 생활을 반복했다.



씨타라빈, 이다루비신, 도노루비신……. 1차 관해에도 모자라서 2차 관 해에도 계속된 항암제로 인해 아현은 심신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오늘은 잠에서 깨서도 그대로 침대에 기대어 눈꺼풀만 파르르 떨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는지 눈을 반쯤 감고 있는 모양에 잠이 든 줄 알았는데 지석이 조금만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내면 다시 눈을 떴다가 는 다시 감았다.



“채혈 할게요.”



평소라면 주사바늘에 몸서리를 치던 아현이지만 오늘은 미동도 하지 않 았다. 늘 쇄골 뼈 정맥에 연결된 히크만을 통해서 채혈을 했지만, 오늘은 일주일에 두 번 있는 바늘 채혈이 있는 날이었다. 혈액의 응고 상태를 보 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껏 아현은 바늘 채혈이 끝나고 나서는 주사 부위를 쳐다보며 징징 거렸다.



“그거 알아? 바늘은 맞으면 맞을수록 아파.” 

“엄청 잠깐인데 엄살은.”

“일주일에 두 번씩 주사를 맞아봐야 저런 소리를 안 하지.”



하지만 아현은 오늘따라 몸 한번 움찔 안하고 기운 없이 늘어져있다. 늘상 채혈 후 있던 투덜거리는 버릇도 나오지 않았다.



“어제 밤에 아팠어?”



아현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힘들어?”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검사는 좀 잘 나와야 하는데. 뭐 아픈 곳은 없어?”



물음에 대한 답이 있기도 전에 간호사가 오늘의 혈액 검사표를 들고 들어왔다. 지석은 아현에게서 벗어나 바로 종이를 받아 들었다. 



“오늘은 혈색소 수치가 10.2이네요. 많이 좋아졌어요.”

“백혈구 수치가 620, 혈색소가 10.2, 혈소판이 39000, 과립구는 21. 현아 어제보다 훨씬 나아졌다.”

“어제 수혈이 효과가 많이 있네요. 7.1에서 확 올랐어요.”

“그래도 혈소판 수치는 조금 떨어졌네요. 갑자기 막 나빠진 것은 아니죠?”

“네. 혈색소 수치가 많이 나아져서 이제 빈혈기는 좀 덜하실 것이에요, 환자분.”



오늘 아침도 아현의 일상은 벗어나지 않았다. 혈액 검사를 하고 아침이 온다.



하지만 아현은 식사를 드는 둥 마는 둥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는 그녀의 손만 감싸고 있었다. 원래 하얗던 아현이 지만, 항암치료로 인해 살이 너무도 창백해 보였다.



“빨리 완전 관해가 되어야 되는데”



지석은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늘어져있는 아현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현이 천천히 4번 눈을 깜박거렸다. 움직이는 곳은 오직 눈꺼풀뿐이라 그 곳만 보고 있던 지석은 그 횟수마저 세고 있었다.



“우아현 환자, 몸은 좀 어때요?”



손석호 담당의가 들어왔다. 아현은 여전히 약에 취해 몽롱한 상태였다. 



“오늘은 좀 힘들어 하는 것 같아요. 식사도 거의 못하고 저렇게 누워만 있네요.”

“아무래도 환자가 체력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다 보니……. 지난번에 말 씀드렸다시피 오늘 오후에는 방사선 치료를 할 것이니 든든하게 먹어놔 요. 또 한동안 잘 못 먹을 텐데.”

“네…….”

“일단 완전 관해가 되는 것을 지켜봅시다.”



완전 관해. 암세포가 5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는 것. 그 5퍼센트가 나오지 않아서 아현은 이 항암제를 받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정규 회진이 아니라 그런지 손 담당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굳이 회진 전에 들린 것은 오후에 있을 방사선 치료를 미리 말해 주려는 듯 했다.



말은 마친 손 담당의는 옆 침대의 환자를 한번 슬쩍 들여다보곤 밖으로 나갔다. 훨씬 젊은 아현과 달리 첫 발병의 첫 관해치료 중인 할아버지는 오히려 그녀보다 더 쌩쌩해 보였다.



방사선 치료라는 단어에 아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석은 방사선 치료가 이런 의미로 아현에게 기운을 차리게 할 수 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현은 지난 발병 때도 방사선 치료를 받았었고, 그 경험이 두려움을 줄 이기보단 오히려 공포심을 극대화 시켰다.



경험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그 고통이 심각한지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그 고통을 마주 쳤을 때는 그 배의 두려움을 느꼈다.



아현이 눈을 다시 감았다. 꽤나 신경질 적인 움직임이었다. 미간 사이에 잔뜩 힘을 줘서 내 천자가 그려졌다.



“현아, 잘 치료 받고 오자.”

“넌 그게 얼마나 아픈지 모르니까, 그렇게 쉽게 말 하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아현은 지석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치료가 길어지면서 아현도 점점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병과 싸우는 그 고독 자체는 지석이 함께 걸어 갈 수 없는 길이었고, 긴 투병생활과 어울 리며 못된 악마로 변해갔다.



병이 계속되면서 몸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기운도 없고 계속 멀미를 하는 기분이야. 넌 아무 것도 모 르잖아.”



지석은 오른쪽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요즘 들어 아현의 짜증 이 늘어가면서 두통도 자주 그를 찾아왔다. 지석은 중지의 끝으로 관자놀 이를 꾹꾹 눌렀다. 살이 뼈에 눌리며 느껴지는 자극이 두통을 잠시나마 없애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손가락을 떼자마자 뇌가 흔들거리는 기분이 들었고, 결국 지석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 눌렀다.



“정말로 나는, 내가 너 대신 아플 수 있다면 아파주고 싶어.” 

“이것 봐. 아무 것도 모른다니까, 넌.”



아현이 다시 지석을 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지석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꽤나 짜증스럽게 튀어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 같으면 금세 수그리고 들어갔을 그였지만, 한번 터진 감정은 관성처럼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는 그동안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곁을 지 키는 것을 점점 의무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병을 고치려고 하는 건데 자꾸 그렇게 투정만 부리면 어떻게 해?” 

“누가 그걸 모른데? 그냥 힘들어서 그렇단 말이야. 난 아무 것도 못하는 바보 같아. 망할 과립구 수치 때문에 외출도 못하고 병실에만 있어야 하고 뭐만하면 소독, 소독, 소독 그 빌어먹을 소독에도 진절머리나.” 

“그 빌어먹을 병원에 있는 것은 너 뿐만이 아니야. 나도 항상 네 곁에 있다고. 너 끙끙 앓는 것 보는 나는 마음이 편할 것 같니? 내가 안 아프니까 난 마냥 편할 것 같아?”

“그래. 넌 그렇게 아무것도 몰라.”

“대체 뭐가 그렇게 모른다는 거야? 넌 내가 너처럼 아파야 속이 다 풀 리려니?”



지석의 마지막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잃었다. 지석도 말을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말은 흩어진 물방울 같아서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컵 안으로 주어 담을 수 없었다.



서로 잡아먹을 듯 쳐다보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연인들의 싸움은 결국 서로에게 칼날이 되는 말만 휘두르고 생채기 만을 남겼다.



“백지석, 나 너랑 10년 넘게 붙어 다닌 사람이야. 네가 모르는 네 생각 까지 읽는 사람이라고.”



그의 말에 꽤나 상처 입은 듯, 아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가슴팍 에서 느껴지는 울먹임을 참아내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대체 네가 읽은 그 생각이 뭐냐니까?”



사과하겠다던 생각도 잠시 지석은 또 치솟아 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신은 늘 아현의 곁에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당최 알 수 없었다.



“넌 몰라.”

“그래,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면 뭐하겠니.”



두 사람은 말을 멈추었다. 서로 입을 다물고 자신의 생각 속에 갇혔다. ‘우리의 마음은 밭이다. 그 안에는 기쁨, 사랑, 즐거움, 희망과 같은 긍 정의 씨앗이 있는가 하면. 미움, 절망, 좌절, 시기, 두려움 등과 같은 부정의 씨앗이 있다. 어떤 씨앗에 물을 주어 꽃을 피울지는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얼마 전 읽은 책에 있었던 한 글귀였다. 지석은 자신들에겐 이미 부정의 씨앗이 싹터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병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래도 저 지른 잘못이 있어서인지 멀리가지는 못하고 병실 문 바로 옆 벽에 붙어 섰다.



요즘 아현과 시간을 못 보내던 것은 병원비 마련을 위해서 홍대에서 밤 공연도 뛰고 종종 들어오는 편곡 작업도 맡기 위해서였다. 그런 제 노력 에도 불구하고 투정만 부리는 아현에게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다. 



“훕……. 훕”



벽에 기대어 서있는데 아현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그의 못된 말을 꾸짖고 있는 것 같아 그는 완전히 병실 을 뛰쳐나왔다. 이런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음을 깨닫고 더 화가 났다. 목적지 없이 병원을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해져 병원 공기로는 숨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병원의 회색빛 타일을 벗어나자마자 금세 가슴이 트였다.



이상하게도 어떤 건물 안에 들어가도 병원처럼 갑갑하지는 않았다. 단순 히 약 냄새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환자와 보호자들의 절망감으로 공기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석은 늘 생각했다.



항상 이 근처에 있을 때는 아현의 병실이거나 잠시 집을 들릴 때 뿐 이라 이렇게 병원 밖으로 뛰쳐나오고도 갈 곳이 없었다. 결국 버스를 타고 보던 조그만 공원, 아니 아파트 뒤의 놀이터 수준의 공원으로 발길을 향 했다.



평일 오전이라 공원은 한산했다. 지석은 할 일 없이 공원 의자에 앉았 다. 유치원 생으로 보이는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나란 히 손을 잡고 걸어갔다.



한 때 지석과 아현도 저런 미래를 꿈꾼 적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는 외식을 할 수 있고, 주말 아침에는 가족끼리 손을 잡고 영화관에 나들 이를 가고, 일요일 아침마다 서로 청소기를 돌리라며 싸우기도 하는 그런 소소한 삶을 꿈꿨다.



하지만 아현의 발병 이후로 그런 일상의 소소함조차 즐기지 못하고 오직 병마와의 기나긴 싸움에 지쳐가고 있었다. 



“아, 술이나 진탕 마시고 싶다.”



지석의 눈에 깨져있는 초록색 소주병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이 전날 밤 거리를 떠도는 노숙자나, 노스페이스 패딩을 최고로 아는 아이들이 잔치를 벌인 흔적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술을 마신지도 꽤 오래 되었다.



“이렇게 싸웠어도 항상 맥주 한잔이면 금세 화해했었는데.”



소주마냥 미소가 쓰다. 아직 해가 머리위로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좋아하 지도 않던 술이 자꾸 아른 거리는 것을 보니 자신도 아현처럼 지쳐 가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가장 힘든 것은 현인데.”



꼭 후회는 그 행동을 하고 나서야 하는 것인지, 모질게 군 자신의 모습 이 금방 미안해졌다. 병원 안에서의 갑갑한 숨통에서 벗어나고 보니 자신의 모습이 똑바로 보였다.



“나도 참 못났다.”



지석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핸드폰 주소록을 열었다. 술 한 잔 사람도 곧바로 떠오르지 않아 목록을 뒤지고 있는 자신이 초라했다.



“영제 형은 외국 나가있고……, 태희 형도 역시 바쁘겠지…….”



결국 한참을 스크롤을 내리다가는, 핸드폰을 든 손을 내렸다. 아침 이른 시간부터 아무렇게나 불러내기 편한 사람이 없었다.



“다들 취직하거나 일하고 있는데 나는 언제쯤 일어서려나.”



울적한 그의 기분처럼 하늘도 꾸물꾸물하다. 결국 지석은 자리에서 일어 났다. 우울한 기분엔 몸을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걷다보니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고 들어 선 곳은 공원 앞에 있는 24시 편의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나는 딸랑거리는 소리에야 자신이 있는 곳에 대해서 의식하기 시작했다.



지석은 결국 편의점 음료수 칸 앞으로 가서 서성였다. 초록 병의 투명한 액체와, 갈색 페트병 속의 탄산수, 캔 안의 거품이 그를 유혹했다. 하지만 한참을 서성거리기만 할 뿐 결국 술사는 것은 포기했다.



“그래도 병원에는 다시 돌아가야지. 잘못한 건 난데.”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나면 기진맥진해 있을 아현의 모습이 선하여 결국 유혹을 이겨냈다. 우울한 일로 알코올을 입에 대기 시작하면 인사불성이 될 때 까지 마시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빈손으로 편의점 밖으로 나오려는데 아르바이트생 뒤쪽의 담배가 눈에 띄었다. 아현도 그 종이 타는 냄새를 싫어했었고,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천식으로 고생해왔기 때문에 담배는 단 한 번도 입에 대어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담배를 찾는 데는 이유가 있다 생각 되 어 갑자기 한 대 펴보고 싶어졌다. 밖으로 나가려던 발걸음이 절로 계산 대 쪽으로 돌아섰다.



“담배 한 갑주세요”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음…….”



막상 담배를 시키려고 했지만 아는 종류가 없었다. 술이라면 보통 성인 으로서 아현과 밤새 축구 경기를 보며 맥주 한 두 캔씩 홀짝이기도 했고, 공연 뒤풀이에서 마시기도 했으니 말이다. 29살이나 되었지만 대학생이 되고도 늘 상 모든 생활을 아현과 공유한 터라 이런 남자들의 생활의 일 부는 여전히 낯설었다.



“아무거나 하나 주세요.” 

“네…….”



아르바이트생이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뒤돌아서서 여러 종류의 담배 중에서 기웃기웃하며 망설이는 것이 괜히 미안해졌다. 지석은 밴드 멤버 들이 피던 담배를 기억하며 구석에 있는 하늘색 빛의 물건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푸르스름한 것으로 주세요.”



지석이 결정을 내려주니 이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진지 아르바이트생의 행동이 빨라졌다. 금방 한 곽을 내려놓더니 바코드를 찍는다. “2500원입니다.”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오천 원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이내 그에게 천 원 두 장과 오백 원 짜리 하나 그리고 담배가 손에 쥐어졌다. 지석은 지폐는 다시 그대로 뒷주머니로 집어넣고, 동전은 여전히 쥐고 있 었다.



“현아, 여기 동전…….”

 


지석은 무의식적으로 그 동전을 옆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담배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 혼자인 것을 확인한 그가 힘없이 팔을 거두었다.



“아……. 동전 싫은데.”



동전 하나에 아현과 함께 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는 계산대 앞에 우두커니 서서 옛일을 떠올렸다.



과거의 그는 방금 전처럼 또 동전을 건네고 있다. 하지만 다른 점이라면 그 때는 아현이 그의 옆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또 동전! 자, 우아현, 여기 받아라! 옙다!” 

“백지석! 진짜 너 동전 맨날 나한테 줄래?” 

“귀찮단 말이야. 남자 지갑에는 동전 지갑도 없어.” “싫어, 싫어. 지갑 무거워져 안 받을 거야.” 

“이거 그냥 주는 거 아닌데?”

“뭔데 그럼?”



아현의 눈이 궁금증에 동그래졌다.



“이 걸로 네 시간 내가 조금 씩 사서 모으는 건데? 다 사모아서 나중에 너 내꺼 해버리게.”

“어휴, 그럼 한 번에 한 십억쯤 주면 안 되냐?”



그 때 지석과 아현은 서로를 마주 보며 새 하얗게 웃었다.



그는 아르바이트생으로부터 받은 오백 원짜리 동전을 꽉 쥐었다. 아현의 시간을 산다는 이야기, 반쯤은 농담으로 한 이야기였지만, 그 때 아현에 대한 지석의 감정은 순수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로 내 미래를 너와 함께 하고 싶었는데……. 이제 미래가 보이지 가 않는다.”



지석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꼭 쥐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에서 담배를 필만큼 양심이 없진 않았던 터라 그는 자리를 옮겼다. 사람은 한번이라도 와봤던 장소가 더 익숙했다. 오갈 곳 이 없었던 그는 고작 10분도 머무르지 않았던 그 공원으로 다시 돌아갔 다.



영어로 적힌 담배의 이름만 읽었을 뿐 뭔지도 모르는 담배의 포장지를 뜯는데, 문득 라이터가 없다는 것이 생각난다. 



“아, 라이터. 안 펴본 것 티내나.”



평소에 하지 않는 것이라 그저 담배만 사면 다 되는 줄 알았다. 



“백지석, 이 병신.”



결국 지석은 담배는 물지 못한 채 그저 사람들만 보고 있다. 아직도 공원은 꽤나 한산했다.



한참을 앉아있는데 지석의 옆 쪽 쓰레기통에 정장 차림의 남자가 담배를 물고 있다. 저런 차림으로 왜 이 시간에 이 공원에서 헤매고 있는지 궁금 했지만, 그는 깊이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문제를 감당하기에도 벅찼 기 때문이다.



빨간 불이 붙여지며 탄내랄까, 그런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담배향이 풍겨져왔다. 아현은 항상 비흡연자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보며 열을 내고는 했었는데, 지석이 담뱃갑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화 낼까 싶었다. 아현을 생각하자 다시 마음이 갑갑해져서 결국 그는 쭈뼛쭈뼛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라이터 좀 빌릴 수 있을 까요?”



남자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더니 그 안에 있던 라이터를 건 네주었다. 라이터를 이렇게 보관하는 것을 보니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여기요.”




지석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하얀 담배 끝이 타들어 가기 시작하자, 다시 남자에게 라이터를 넘겨주고 걸음을 옮겼다. 담배를 피우려고 했지만, 아현이 싫어하던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사람 이 아무도 없는 화장실 옆으로 가서야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였다. 



“후훕…….”




고작 한 모금 빨아 들였을 뿐인데, 지석은 가슴을 움켜잡았다. 속이 미식거리면서 신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순식간에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아 서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려 버렸다. 고작 한 번 뿐이었는데 100미터 달리기를 한 것 마냥 숨이 가빠졌다. 두 손으로 무릎을 잡고 허리를 숙인 채 짧은 숨을 헉헉거리자, 이내 머리가 맑아지고 숨이 느려졌다.



큰 숨을 들이키며 눈을 크게 감았다 뜨자 한 입 문 담배가 아직도 빨간 불을 내면서 사그라지고 있었다. 한참 고통을 겪고 나니 천식 환자 주제에 참으로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현아, 너 늘 이렇게 아팠구나. 밥이 비리다고 할 때도, 토할 거 같다 가슴을 쥐어 잡을 때 넌 이 배로 이렇게 아팠구나.”



지석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늘 밥 먹고 나서 울렁거린다고 칭얼거렸던 아현의 아픔이 이 정도 일 것 이라고 생각하니 하늘이 노래져왔다. 치료 후, 항상 속이 안 좋다고 말하 는 아현의 말에 그는 그저 등만 쓸어 내려주었다. 아현의 힘듦을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그저 그 순간만을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었다. 



“난 단지 아픈 널 보는 내 마음이 불편한 것이 싫을 뿐 이였어. 네가 정말 얼마나 아픈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널 이해한다고 생각 하던 것은 내 오만이고 널 사랑한다고 말하며 네 곁에 있는 것은 내가 네 곁에 없으면 내 양심이 불편해서 그런 것이었어.”



그동안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아현에게 부끄러워졌다. 좋아하는 것 은 자신이 행복해 지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랑 한다는 것은 상대가 행복해 지기 위함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지석은 아현에 대한 사랑이 어느 순간부 터 불순물로 점점 물들어 갔는지 기억 할 수 없었다.



지석은 어느 순간부터 아현과의 대화보다도 간호사와 의사와의 대화에만 더 열중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현의 상태가 염려되어 의료진에 매달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아현의 상태보다도 아현 그 자체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들을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녀와의 대화에서도 자신이 의료진인 것 마냥 상투적인 대화만 나누고 있던 것을 생각했다.



‘약은 언제 먹었어?’, ‘어지러움 증은 어때?’, ‘밤에는 아픈 곳은 없었어?’, ‘속은 울렁거리지는 않니?’ 와 같이 누구나 물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오늘 기분은 어때? 어제는 아파서 하루 종일 우울해보이던데.’, ‘항암제 맞는 것이 힘들지만 잘 버티고 있는 네가 정말 사랑스러워.’와 같이 오직 지석만이 아현에게 할 수 있는 말을 더 건넸어야 했다.



“그래서 넌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구나.”



지석은 아침에 소란을 피웠던 다툼이 결국 자신이 잘못임을 수긍했다. 단지 나쁜 말을 해서 아현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근본적으로, 상대를 이해하지 않은 채 자신의 만족감만을 위한 사랑을 했다는 것이었다.



“방사선 치료…….”



지석은 아직도 조금은 텁텁한 기운이 남아있는 숨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한참을 쪼그려 앉아있어서 인지 피가 죄다 다리에 몰려있어서 어지러움 증이 몰려왔다. 눈앞이 한동안 까맣더니 다시 빛이 돌아왔다.



또 다시 지석은 아현의 아픔을 하나 씩 더 이해하고 있었다. 빈혈 증상 에 늘 비틀 거리던 아현의 머릿속은 매일 매일이 방금 전 지석의 머릿속 처럼 정신없이 돌고 있을 것이었다.



지석은 한시라도 빨리 아현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리 지석이 함께 있었어도 방사선 치료만 들어가면 혼자 인 것 같은 느낌에 두려워진다던 아현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일어나자마자 발밑에서 빨갛게 타고 있는 담배의 끄트머리를 지졌다. 금세 끝 부분이 재색으로 변했다. 미운 마음으로 불타던 그의 마음도 가 라앉았다.



“다시 돌아가자.”



지석은 동전을 꼭 쥐었다. 앞으로 이 동전을 보며 지금 마음먹은 결심을 다시는 잊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지석은 공원으로 걸어온 그 길을 정확히 따라 돌아갔다. 한시라도 빨리 아현에게 돌아가고 싶어서 그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까 핀 담배의 영향 으로 아직도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거짓된 사랑을 버리고 진실 된 사랑을 채우고 돌아오는 길, 그는 마음 한 구석이 묵직해짐을 느꼈다. 그 사랑의 무게 때문인지 병원으로 돌아가 는 길이 참으로도 멀었다.



“비다.”



한참 병원으로 걸어가는데 물방울 하나가 그의 콧잔등을 때렸다. 병원을 나설 때부터 하늘이 어둡더니 결국 비가 내리려했다. 벽돌 바닥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던 빗줄기는 초여름의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세차졌다. 지석은 손 그늘을 만들고 뛰었지만 병원으로 가는 길은 너무도 멀었다. 병원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홀딱 젖어 가만히 서있는 상태임에도 소 매 끝으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병실을 눈앞에 두고 집에 갔다 와야겠네. 하아…….”



지석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단 한 번도 운적이 없었지만, 이 순간만 큼은 비에 숨어 울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방사선 치료 받고 혼자 무서울 텐데.”



어차피 이 상태로는 병실에 한 걸음도 들어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 에 그는 힘없이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섰다. 온통 젖은 그를 보고 기사는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지석은 40분 넘게 걸리는 되는 집까지 앉지도 못하고 쭉 서있었다.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봐 그는 안절부절 못했다. 철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목이 조금이라도 따끔한 날은 얼마나 가슴이 내려앉는지 몰랐다. 단순히 몸이 아픈 것이라면 그저 앓고 지나갔겠지만, 그로인해 아현이 배로 아파지고 온전히 병이 나을 때 까지 병실 근처에 발 딛지도 못한다는 것이 아장 마음에 아팠다.



버스 문이 열리자마자 지석은 다시 빗속을 내달렸다. 겨우 말라가던 옷 들이 다시 비에 젖어갔다.



“으. 춥다.”



예상하지 못한 비를 맞은 이 기분은 마치 처음 발병을 확인하였을 그 때 의 기분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혀 상상치 못하게 뺨을 맞은 것 같다.



날은 따뜻해졌지만 사람이 없는 집이라 영간 휑한 것이 아니었다. 지석 은 문간에 서서 티셔츠와 바지를 벗어 놓았다. 방금 막 빨래를 마친 옷처 럼 물기가 가득하다. 양말도 벗어 그 옷가지 위에 올려놓고 수납장으로 걸어갔다. 그의 동그란 뒤꿈치가 바닥에 또박또박 찍혔다. 오직 속옷 바 람으로 갈아입을 옷을 챙겨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을 틀어 몸을 적시니 한기가 좀 가시는 것 같았다. 그는 몸이 덥혀질 때 까지 한참이나 샤워기 밑에 서있었다.



평소라면 물줄기를 맞는 것을 즐기며 한 시간 가까이 서있었을 테지만, 오늘은 금방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입구에 있는 빨래거리를 세탁기 안으 로 던져 넣고 시간을 보니 3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평균적으로 오후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는 이정도 시간에 한참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을 터였다. 서둘러 병원에 돌아가지 않으면 아현이 다시 병실에 돌아오기 전에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불안감에 손가락으로 세탁기의 세탁 시간 부분만 신경질적으로 쳤다.



“그냥 내버려두고 가버릴까.”



한 손으로는 여전히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면서 거실로 나왔다.



마음이 편해지고 나니 아현과 함께했던 추억담긴 물건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난번 백혈병의 완치 이후로 지석은 짐을 싸서 아현의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아현과 함께 있고 싶은 점도 한몫했지만 병약 해진 아현의 곁에 있어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 주된 이유였다.



실은 이런 저런 핑계가 많긴 했지만, 주된 이유는 대학 때 부모님께 받은 원룸을 내놓아 부족했던 병원비의 일부로 사용하면서 갈 곳이 없어졌 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니 방 한편에 세워둔 기타에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있다. 마지막으로 기타를 잡은 적이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이제 왼손 끝에 있던 굳은살은 다 벗겨져있었다.



지석은 기타를 집어 들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동안 자신이 쳐오던 몇 몇 곡의 노래를 쳐보았지만, 손이 굳었는지 그 음색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코드를 잡다간 줄이 꽤나 많이 녹슬었음을 깨달았다.



“줄도 안 풀어 놨었네. 넥 다 휘겠다.”



꽤나 큰마음을 먹고, 몇 달 동안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용돈을 쪼 개어 산 기타였는데, 너무도 소홀하게 놓여있었다. 오랜만에 기타를 잡으 니 작년 초까지 같이 밴드를 모아 활동하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나름 가망성 있는 인디 밴드로 앨범도 두 장 냈었는데, 아현이 아프기 시작하며 결국 보컬 자리를 비워 주고 나왔다. 종종 인터넷에서 자신이 있던 밴드의 기사를 만날 때는 괜한 씁쓸함이 그를 덮쳤다.



다시 몰려오는 그 기분에 기타 줄을 느슨하게 풀어 놓고, 기타를 내려놓 았다.



집 안을 한참이나 어슬렁거리던 지석은 소파로 가서 앉았다. 공포영화를 볼 때, 귀신이 나오기도 전에 지례 겁먹고 지석의 품에 파묻히던 아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귀신보다 네가 무섭다니까.”

 


오늘 처음으로 지석의 얼굴에 미소가 펴졌다. 마치 그는 그 순간으로 돌아가 있는 것 같았다. 머리를 털어내던 수건을 내려놓고 부엌을 바라보았 다. 단지 얼굴 각도에 의해서 시선이 갔을 뿐이다.



다치기라도 할까봐 아현을 식탁에 꼭 붙들어 놓고 서툴게 칼질을 하던 자신의 모습이 흐리게 그려졌다. 팔팔 끓는 미역국의 냄새와 갓 지은 고 소한 밤 냄새가 맡아지는 것 같았다. 지석은 그 상상 속의 향기를 깊게 들이 마시었다.



“우리 현이는 밥도 잘 먹지.”



그 시절을 생각하며 지석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때 설레던 감정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평온해졌다. 오늘의 긴장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세탁기의 삑삑거리는 소리에 지석은 황급히 눈을 떴다.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다는 사실에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수건까지 바닥에 떨어뜨릴 정도 였다.



그 사이에 그의 머리는 모두 말라있었다. 여전히 비몽사몽인 상태로 그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탁기가 막 자신의 일을 충실히 수행하고 시끄러 운 비명을 질러댔다. 지석은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옷들을 대충 빨래대에 걸어 놓고 그는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집에 돌아온 것만으로도 아현과 행복했던 그 시간이 지금인 것 같은 착 각에 빠져들었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면 그 감정에 다시 먹구름이 끼려 고 하겠지만, 그는 이 추억을 힘으로 남은 시간도 이겨낼 생각이었다. 지석이 잠든 그 잠깐 사이 이미 비는 모두 그쳐있었다. 여전히 하늘은 어두웠지만 더 이상 비가 쏟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오직 바닥에 물웅덩 이만이 참으로 세차게도 비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석은 다시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벌써 5시가 넘어있었다. 



“진짜 쓸모없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



지석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다가 건너편 편의점을 보고 손을 거두 었다. 아현은 분명 방사선 치료 후 아무것도 못 먹고 있을 텐데, 그나마 토해내지 않고 잘 먹는 오렌지 주스를 사가고 싶어져서였다.



반복되는 행동에 익숙한 듯 지석은 곧바로 편의점의 음료 쪽으로 걸어갔 다. ‘어서오세요’ 라는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가 경쾌했다. 물론 방문객용 음료수 박스가 한편에 잔뜩 쌓여있기는 했지만, 이 병원 안에서 그 나마 병원을 느낄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수중에 돈이 얼마 없는 것을 아는 사람은 무언가 사기 전에 항상 남은 돈을 확인하고는 한다. 지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털었다. 손바닥 위에는 아까 담배를 사고 남았던 이천 원과 오백 원짜 리 동전 하나가 전부였다.



“벌써 이번 주 생활비를 다 썼나. 곤란한데……. 태희 형한테 편곡할 거리 없나 좀 물어봐야지…….”



지석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현이 모아둔 돈과 지석이 모아둔 돈은 병원 비로 물 흐르듯 사라졌고, 통장에 남은 약간의 돈은 앞으로 병원비를 위 해서 거의 손대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수중에 남은 이 돈으로 내일까지 버틸 생각이었는데 한숨부터 나왔다. 앞으로의 결심을 휘둘리지 않기 위한 동전은 그대로 지갑 안 사진첩에 끼워 넣고, 나머지 천 원 두 장을 쥐어 잡았다. 500원 짜리 오렌지 주스 캔 두 개를 집고 나니 그의 손에는 천원 만이 남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하루 종일 제대로 먹은 것이 하나도 없네.”



문득 편의점에 널려있는 레토르트 식품들을 보니 허기짐이 올라왔다. 지 석은 즉석 식품 쪽을 서성였다.



4300원. 5000원. 5300원.



그가 가진 돈으로는 턱도 없을 터였다. 그나마 제대로 된 식사로 보이는 식품 코너 쪽을 포기하고 컵라면 쪽으로 발을 옮겼다.



1400원. 1300원. 1800원.



고작 컵라면 주제에 참으로 비싸기도 했다. 지석은 헛웃음이 나왔다. 전 에는 작업실에서 밤새는 동안 식사하기 귀찮아서 사먹던 컵라면 이었는데 지금은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꼴이다. 허기짐이 강해지면서 통장에 있 는 돈을 뽑아서 고기라도 한 점 뜯고 싶어졌지만, 다행히 인출기는 병원 밖 15분 거리라 그 마음을 억누를 수 있었다.



결국 지석은 천 원짜리 김밥 한 줄을 집어 들었다. 점심도 챙겨 먹지 못 했는데, 결국 손에 든 것은 간식 정도 되는 김밥 한 줄이다. 평소에는 고 기 2인분을 먹고도 냉면을 해치우던 지석이었는데 요즘은 병원비와 아현 의 곁에 붙어있는 시간 탓에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기 일 수였다.

 


지석은 김밥과 아현에게 줄 캔 두 개를 들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온 후라 그런지 저녁이 되니 제법 쌀쌀했다. 김밥 종이를 까서 하나씩 하 나씩 입안에 넣고 씹는데, 너무도 목이 막혔다. 음료수 하나 없이 그 퍽 퍽한 밥을 삼키니 목이 아렸다. 아현의 음료수라도 하나 집어 먹을까 하 다간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고 있을 아현이 생각나 캔 음료 두 개를 주머 니 안에 집어넣었다.



김밥을 다 먹고 나서도 겨우 허기가 가실 뿐이라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결국 종이에 붙은 밥알을 떼먹고 아쉬움에 만지작거리다가 금세 자리 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는 아현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혈액 암 병동에 들어가기 전 지석은 두 손 가득 소독약을 올려 비비고 마스크를 쓴다.



1320호. 우아현. 너무도 자주 오가는 병실이라 이제 이름과 병실 번호를 보지 않아도 찾아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지석은 차라리 아현의 치료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 치료가 끝나고 돌아오는 그녀를 맞아 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병실에 들어섰을 때는 아침에 그가 뛰쳐나갈 때처럼 가녀리 게 지쳐있는 아현이 보였다.



방사선 치료가 힘들었는지 아현은 지석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입술 각질이 잔뜩 일어나고 군데군데는 핏자국도 보였다.



아현의 눈꺼풀이 바들바들 떨렸다. 지석은 자리에 앉아 아현의 손을 꼭 잡았다. 늘 자신의 손보다 따뜻하던 아현이었는데 오늘은 그가 그녀의 손을 덥히고 있었다.



잠든 것은 아니었는지 아현이 힘겹게 눈을 떴다. 속눈썹이 파르르 움직 였다. 지석이 의자에서 일어나 아현에게 가까이 갔다. 얼굴이 지나치게 파리하다. 혈액 검사 수치가 좋지 않아 어제에 받은 수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얼굴은 창백하다.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화부터 낼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않는 아현의 모습에 얼마나 지금 그녀가 아픈지 와 닿았다.



“미안해. 현아……. 나 진짜 밉지?”



아현은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의 손 안에서 그녀의 손이 빠져나갔다. 병원 복이 헐렁하여 앙상해진 아현의 등이 보인다. 지석은 그녀를 안을 때마다 만져지던 그 등줄기가 생각나서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동안 네 마음 아무것도 몰랐어. 제발, 화 풀어 아현아.” 



아현은 대꾸가 없다.

지석은 단단히 마음이 상한 아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 했다.



“아현아?”



몸을 들어 아현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녀는 굳게 눈을 닫고 있었다. 



“사람이란 모두 나약한 존재야. 모두 처음에는 상대를 아끼는 마음이 가득해서 내 모든 것을 퍼주지. 하지만 점점 이기심에 서로를 재고 내가 더 가지기 위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입혀. 나도 그랬어. 결국 나도 널 더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기심에 내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었어. 하지만 네가 일깨워 주었어. 내 그 약한 마음과 나 자신 밖에 모르는 추 한 마음을. 우리 그렇게 서로를 붙잡고 그 약함을 이겨내자. 내가 약해질 땐 네가 그 마음을 상기 시켜주고, 네가 약해질 땐 내가 그 마음을 상기 시키면서. 우리 그렇게 다시 힘내자.”



지석이 말을 잠시 쉬었다. 아현은 숨만 고르게 내쉬고 있을 뿐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등 돌린 아현의 모습은 너무도 날카로웠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잔뜩 세우고 누구의 손길도 거절 하고 있었다.



“난 네가 그저 병원 치료가 고되어 불평불만이 늘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오늘 알겠더라. 너도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 거구나 하고.”



이제야 아현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석을 바라보는 눈에 눈물이 그렁 그렁했다. 아현은 지석을 또렷하게 보고 싶었지만, 치료로 현기증이 심해 지는 바람에 눈앞이 흐려서 화가 났다.



“이리와…….”



아현의 말을 들은 지석이 그녀 가까이 움직였다. 아현의 팔이 힘없이 올 라가 지석의 볼을 쓰다듬었다. 마스크 위로 아현의 손이 볼에 닫는 느낌 이 전해져왔다.



하지만 아현은 잠시 팔을 들고 있는 것조차 힘에 드는 듯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지석이 아현의 손 위를 덮어 제 볼 위에 얹었다.



“손이 왜 이렇게 차.” 

“그래, 나 무서워 지석아.”

“겁먹지 마. 15년 전에도 지금도 나는 너 안 떠나.”



결국 아현의 눈에서 물줄기가 흘렀다. 가슴 치며 울부짖을 힘도 없어 아 현은 그저 조용히 눈물만 흘린다. 지석이 아현의 볼을 쓸어내렸다. 건조 한 볼 위로 눈물이 번지면서 잠시나마 볼이 촉촉이 물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에 미소가 번졌다. 



“너 보고 있으니까. 나도 하나도 안 힘들어.”

“착하네. 우리 꼬마.”



두 사람 모두 피식 웃었다.

지석이 제 볼에 비비던 아현의 손을 내려놓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위를 보던 아현의 눈도 지석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혼자 치료 받느라 힘들었지? 미안해.” 

“아니야.”



그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지석은 아현이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짐작할 뿐이었다.



“어지럽다.”



지석이 주머니에 넣어둔 캔을 꺼내 아현에게 짠하고 내 놓았다. 잔뜩 지쳐있는 아현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힘들었지? 네가 좋아하는 오렌지.”



지석은 종이컵을 꺼내서 오렌지 주스를 따랐다. 그녀의 눈이 빛났다. 그 눈빛을 보는 것 만 으로도 배고픔 따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현에게 주스를 건네고 침대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지석인 밥 먹었어?”

“응. 너 나 밥 안 먹고 다니는 것 진짜 싫어하잖아. 밑에 식당에서 먹고 올라왔어.”



하얀 거짓말.



김밥 한 줄을 먹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팔 던 김밥은 내용이 부실해서 그런지 그 사이에 금세 배가 고파졌다. 아까부터 아무 것도 못 먹고 치료 받은 아현이 주스라도 무리 없이 잘 마시는 것은 다행 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으니 배가 등에 붙을 것 같았다. 아현이 주스를 삼키는데 지석은 자신 또한 침이 꼴깍 삼 켜졌다.

 


결국 지석은 아현의 곁에서 내려와 멀찌감치 의자에 가서 앉았다. 괜히 꼬르륵 소리라도 들리게 된다면 거짓말이 들통 날 것 같아서였다.



오렌지 주스 한 캔을 모두 비운 아현이 컵을 내려다 놓았다. 고작 주스 한 캔으로 아현의 얼굴이 조금 더 나아진 것 같았다. 지석의 기분 탓이지 만 말이다. 아현은 이제 좀 기운을 차렸는지 미소를 되찾았다.



아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석은 말없이 그저 이불만 그녀의 목 밑까 지 끌어 올려주었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아현의 오른손은 지석의 양 손안에 따스하게 포개어져있었다.



결국 지석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헤테로 빙의글을 쓰고있는 말린입니다 다른 글들도 종종 쓰고있습니다 읽으면 행복해지는 글을 쓰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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