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소중히 품에 안고 매장소의 침실에 들어온 린신은 그를 방석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푸른 장포를 걸쳤음에도 잠깐 찬 바람을 쐬서인지, 매장소는 가냘프게 몸을 떨었다. 입술 위에 입술을 겹치자 차갑게 식은 입술이 달달 떨며 가만히 린신을 받아들인다. 

린신은 서둘러 매장소의 옷을 하나 둘 벗기고 머리 장식을 풀어 주었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한참 동안 빗겨주고 세숫물 시중까지 모두 든 후에야 린신은 두꺼운 침의로 갈아입은 매장소를 보료 위에 눕히고 제 옷을 벗었다. 그 사이 매장소는 얌전한 아이처럼 가만히 누워 린신을 지켜보았다. 너른 어깨와 곧은 등,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을.
그렇게 두 사람이 모두 한 이부자리에 등을 대자마자 매장소는 린신의 품에 나긋하게 안겨 들었고 두 팔이 각주의 허리에 감겼다. 정인으로 함께 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이불 속에서 운우지락을 나눈 횟수는 세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이런 사소한 신호 정도야 금방 눈치 챘지만, 린신은 매장소의 손 위에 손을 겹치며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매장소는 금방 빈정이 상했고 서슴없이 그를 비꼬았다.


“아, 우리 각주께서 피곤하시군.”
“나야 괜찮지만, 자네는 랑주에서 금릉으로 가는 동안 몸이 고단할 텐데. 오늘 힘을 빼면 안 되네. 나도 없는걸.”
“자네가 소개해준 의원이 금릉에 올 거라고...”
“안의원이 자네와 함께 녕국후부에 머무는 건 아니잖나. 그동안은 자네 몸은 자네 스스로 지켜야 해.”


린신은 단호했고 매장소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등을 돌려 누웠다. 매장소의 심정을 모를 리 없는 린신이 뒤에서 그를 꼭 끌어안았다.


“다시 만나자고 한 사람은 자네야. 그런데 왜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이러나.”
“몰라. 남초에서 미인 꽁무니만 쫓아다닐까봐 그런가보지.”


린신이 웃는 소리까지도 얄미운지 매장소는 눈을 꽉 감았다.


“물론 남초 미인들을 모두 만나봐야지. 생애 다시없을 재미를 내 어찌 놓치겠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장소의 손이 린신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린신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매장소의 마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걱정 말아. 내가 남초 미인에게 혼이 빠져 자네를 등한시하는 것 보다 장소 자네가 보고 싶어 병에 걸리는 쪽이 더 가능성 있어.”


매장소는 린신을 비웃었지만, 결국 다시 몸을 돌려 린신의 얼굴을 마주했다. 상체를 틀면서 서로의 코끝이 스치고 손가락이 얽혔다. 차갑고 부드러운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손을 떼낸다. 그 후 린신이 정인의 갸름한 턱을 매만지다가 입을 맞췄다. 린신의 입맞춤은 더없이 능숙하고 매끄러웠으며 동시에 매장소가 호흡이 가쁘지 않도록 조절하며 최대한 그를 배려했다. 입술끼리 비벼지고 숨결을 나누는 순간이 달콤하게 지속됐고, 린신은 몸에서 힘이 빠진 매장소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뼈가 불거진 어깨와 긴 팔을 더듬던 손이 가슴팍에 살포시 닿았다. 두꺼운 옷 위로도 미세하게 느껴지는 심장박동을 확인하며 린신이 입술을 달싹인다.


장소, 장소...


그 목소리를 들은 매장소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린신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의 손이 옷 위를 훑고 길고 가냘픈 목덜미며 쇄골에 입맞춤을 할 때에도 매장소는 울음을 삼킨 채 린신을 느꼈다. 밤이 점차 깊어지는데 헤어질 시간은 점점 다가오기만 해서 야속하고 서글프기만 하다.


불면증에 시달린 지 오래된 매장소는 새벽녘에 느껴지는 인기척에도 금방 잠에서 깨어 손을 뻗었다. 길고 하늘하늘한 옷자락이 그의 손가락에 감겼고, 끌어당기는 손길에 순응하여 린신이 고개를 숙였다.


“조금 더 자게. 아침이 오려면 멀었어.”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찌나 감미로운지, 매장소는 그에게서 손을 떼는 대신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어젯밤 내내 자신을 품에 안고 있었던 린신의 몸을 모조리 기억하겠다는 듯 어깨며 가슴팍, 허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린신은 매장소의 손길을 내버려둔 채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고, 그의 손목을 붙잡아 맥을 짚었다.  


“벌써 떠나려고?”
“그래야지.”
“도착하면 전서구를 보내게.”
“날 못 믿어서 그래?”


서운한 척 굴지만 목소리가 실없이 풀려있어, 매장소는 코웃음을 치며 린신의 체향을 맡았다. 그에게선 랑야산의 상쾌하고 싸한 바람 냄새와 미미한 약초냄새가 함께 났다. 매장소의 코끝이 가슴팍을 콕콕 찌르고 그의 손바닥이 상체에서 떠날 줄을 모르자 린신이 빙긋 웃으며 그의 눈두덩이를 가볍게 쓸었다. 아직 어둠이 자리 잡은 방 안에서도 린신의 애정 가득한 눈빛만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종주의 열정이 대단하군.”
“각주가 시큰둥해하니 내가 나설 수밖에.”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며 린신이 매장소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다. 옷 위로 서로를 어루만지고 껴안고, 입을 맞추기만 했을 뿐 그 이상으로는 넘어가지 않던 시간들.


“몸 조심하게.”
“그래.”
“정말로 몸 조심해야 하네. 장소, 살아있어야만 복수를 할 수 있어. 알았지? 내 충고를 꼭 기억해. 자네 염원을 이루려면 반드시 살아있게. 최소한 내가 자네를 보러 오기 전까지라도, 버텨.”


린신이 그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매장소는 눈에 힘을 주어 그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소상히 담아냈다. 당분간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얼굴. 자신의 꿈은 차가운 겨울과 불길로 가득한 지옥도이기에, 그 속에서 린신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때 외에는...


매장소는 린신이 옷을 모두 챙겨 입고 떠나기 직전까지, 그의 얼굴과 훤칠한 몸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탁-소리와 함께 문이 완전히 린신의 잔영을 삼켜버리고 더 이상 그가 보이지 않자 매장소는 그제서야 눈을 감았다. 여전히 몸이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저 아련한 슬픔에 허우적대며 매장소는 이불을 쥐어뜯었다. 이리도 슬프고 버거운데도, 벌써부터 린신을 향한 그리움을 넘어 앞으로의 계획을 되새겨야 했다. 사사로운 감정은 오늘 이후로 버려야만 했다. 이제는 오로지 이 손에 피를 묻힐 날만이...



남초 황궁에 사소한 소문 하나가 팔각 창살과 문을 넘어 입과 입 사이를 뛰놀았다. 뛰어난 법사가 수도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양나라에서는 별도의 기관을 두어 별의 움직임을 꼼꼼히 기록하여 점괘를 내어 나라의 흥망을 가늠하지만, 사주와 법사들을 황궁에 정식으로 입궁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초는 양과는 다르게 미신을 믿는 편이라서, 그 법사는 쉽게 왕부는 물론이요 황궁의 높은 벽까지도 넘어버렸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위풍당당한 자태의 법사는 검은 장포를 걸치고 큰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접선을 들고 다녔다. 머리카락은 까마귀 깃털처럼 보이는 특이한 장신구로 고정시킨 그가 계단을 오를 때마다 길고 풍성한 옷자락이 밤하늘처럼 길게 펄럭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까만데, 왼쪽 귓바퀴에 매달린 은고리와 접선만이 희었다.


온갖 소문과 화제를 매달고 온 법사는 남초 황제와의 대면까지도 일사천리였다. 모든 방면에서 해박하고 말하는 데에 거침이 없으며 사주가 적힌 종이를 한번 읽자마자 거침없이 사주 대상의 과거며 현재 상황에 대해 논하니, 황족들은 앞 다투어 그를 만나기 위해 줄을 대려고 열심이었다.


이 유명한 법사는 수도 근처의 한 저택에서 머물렀는데, 실력은 대단하나 아주 변덕스러워 어떨 때는 평범한 백성이 은자 대신 들고 온 참외를 대신 받으며 사주를 봐주기도 했고, 어느 날에는 아무리 대단한 황족이나 왕이 찾아와도 예를 갖추기는커녕 술을 많이 마셔 몸이 좋지 않다고 핑계를 대며 만남을 회피하기 일쑤였다. 모욕을 당했다며 하인들이 화를 내어도, 이 콧대 높은 법사는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까다로운 법사를 응접실까지 나오게 한 상대는 남초의 능왕 우문훤이었다. 그 유명인사와 마주하자 우문훤은 능글맞게 웃으며 남자를 살폈다. 호남형의 얼굴에 사뭇 어울리지 않는 뱀과 같은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치며 린신이 먼저 말을 걸었다.


“능왕께서 이곳까지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황제 폐하를 제외한 누구라도 법사를 뵈려면 세 번은 허탕을 처야 한다던데, 그래도 난 운이 좋군요.”
“능왕께선 순탄하게 행운을 얻으실 관상이지요.”
“아, 첫마디부터 얻고 싶은 답도 없고. 정말 내 운이 좋나봅니다.”


법사는 빙긋 웃으며 차를 따랐다. 큰 키와 어울리게 큼직한 손은 마디가 불거지고 손가락이 길었지만, 험한 일은 많이 해보지 않았는지 손등이 희고 부드러워 보였다.


“사실 나보단 내 숙부님 때문에 선생을 찾았습니다.”
“숙부라면...성왕 전하 말씀입니까?”


보통내기가 아님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능왕의 눈이 가늘어진다.


“내겐 숙부가 여럿인데, 한 분만을 굳이 언급하는 걸 보니 재미있구려.”
“성왕 전하의 건강이 좋지 못한다는 건, 이 곳에 온지 얼마 안 된 저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사소한 재주를 부릴 필요도 없는 일이죠.”


남자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팔짱을 꼈다. 거침이 없고 오만하지만 자존심 역시 강하여, 제 심기가 거슬리면 표현을 하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선생 말대로요. 숙부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조카인 나는 물론이요 념이까지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요. 어의를 불렀지만 숙부의 병세가 그저 심병이라고만 하니...”
“심병이라고요?”
“그렇소. 숙부께서 쇠약해지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는데, 마음에 병이 생겨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라니 참...”
“제가 의원은 아니지만, 오래 떠돌아다니면서 주워들은 잡지식이 조금 있지요. 성왕 전하께선 거동이 불편하실테니, 제가 왕부를 방문하지요.”


법사는 남초의 왕에게 허락을 구하는 대신 약속을 먼저 정해버리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만족한 사람처럼 환하게 웃으며 차를 권하자, 천하의 우문훤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왕의 곱지 않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차와 과일로 만든 과자를 권했다.


"여기 과자는 맛이 좋더군요.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겠습니다."
"아이가 있으시오?"
"제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워서 아이들이 참 많이 따르지요. 그래서 과자만 보면 알고 지내는 아이들 생각이 나곤 합니다."


지금쯤은 금릉에 있을 누군가가 이 말을 들었다면 아마 성을 냈겠지만, 남자는 뻔뻔하게 웃으며 능왕을 상대했다. 능왕을 통해 성왕의 왕부를 드나들게 된다면, 당연히 그와 우문념은 그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셈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성왕은 법사와의 만남 이후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검은 옷의 법사, 린신은 다소 창백해 보이는 성왕의 얼굴과 그의 옆에 앉아 울상을 짓고 있는 우문념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며 소리없이 웃었다. 부녀가 닮은 것이야 당연한 이치이지만, 린신은 이 두 사람을 빼어 닮은 또 다른 청년을 알고 있었다. 그 청년은 린신의 정인과 함께 금릉에 있으며, 호랑이굴이나 다름없는 그 곳에서 매장소는 어찌 지낼런지...


"이리 심병이 나신 원인은...과거의 인연 때문이겠군요. 남초를 넘어선...성왕 전하. 젊은 시절 타국에 가신 적이 있으십니까?"
"역시 법사라 다르군. 그 일은 아주 오래전, 족히 25년도 더 된 과거이건늘...그래. 자네 말이 맞아. 젊은 시절, 본왕은 양 황실에 볼모로 머문 적이 있었지. 이 남초에는 치욕과도 같은 일이라, 누구도 언급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성왕의 기침 소리가 화려한 응접실 내부를 울렸다. 우문념이 성왕을 부축하고, 손에 손수건을 쥐어주었다.


"그때 일이...내 심병의 원인이란 말인가? 비록 볼모로 지내긴 했으나, 양 황실에서는 날 잘 대접해주었네. 친우도 여럿 사귀었고..."
"평생 마음에 두고 아파할 사건이 있으셨겠지요."


어린 우문념은 영문을 몰라했지만, 당사자인 성왕은 짚이는 바가 있기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훤이에게 자네를 들이지 말라 언질했어야 했는데..."
"가슴 속에 묵혀두시기만 한다면, 그 아픔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썩어 병증이 깊어질 뿐입니다."


성왕은 법사를 부정하지 못하고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왕의 왕부에서 돌아온 린신은 검은 장포를 벗어던지고는 서재에 앉았다. 법사들이 주로 지니고 다니는 방울이 달린 붉은 끈을 풀고 장신구마저 모두 몸에서 빼버린 린신은 투덜거리며 시종에게 과실주를 주문했다. 매장소에게 호언장담했던 대로 그는 매일매일 남초의 색다른 술들을 즐기며 나름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남초의 황족들을 다루는 순간을 제외하고선.


술을 몇 잔 마시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고 린신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내린 후 옷을 갈아입었다. 강호에서 입었던 것과 흡사한, 아주 얇은 연회색의 장포를 걸친 그는 대나무 창살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서탁에 준비된 서신들의 끈을 풀었다. 금릉에 머물고 있는 랑야각의 각원이 보낸 서신들이었다. 린신은 재미난 이야기를 읽듯이 눈을 반짝거리며 쉴새없이 눈을 굴렸다.


"북연의 백리기가 큰 몫을 했군."


린신은 랑야방 고수방에 그 이름을 올리고자 했으나, 매장소가 극구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던 상대를 떠올렸다. 자신의 계획에 필요하니, 절대로 백리기의 존재를 외부로 노출시켜서는 안된다는 매장소의 주장에 자존심 강하고 긍지 높은 랑야각 소각주는 잔뜩 뿔이 나서 며칠간 매장소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매장소가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고, 총관의 따가운 눈초리를 모른 척 한 쪽은 린신이다. 이제는 당시의 서운함보다는, 간접적으로나마 정인의 뛰어난 능력과 재간을 엿볼 수 있어 기쁘고 반가울 따름이다.


"그래. 옛 정혼자이자 친누이처럼 아끼던 여인인데, 황제에게 이용당하게 냅둘리가 없지. 암."


남초 사람들에게 보인 미소며 눈빛은 온전한 거짓이자 가식으로 보일 정도로, 서신을 읽으며 매장소의 행각이며 계책을 평하는 얼굴은 환하고도 무척 즐거워 보였다.


"백리기를 이긴 노비 아이 셋을 자유롭게 하고, 이 아이들은 예황 군주 쪽에..."


린신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그 문구를 두번 더 읽었다. 북연의 고수를 액유정의 노비 아이 셋이 무찔렀다는 사실은 북연의 콧대를 한번에 꺾어버리면서, 동시에 금릉의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화제를 자신 쪽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매장소가 이 방법을 선택한 것 같지는 않다. 분명히..


"과거의 연이 있는 아이려나...내게 사생아가 있단 얘기를 숨겼을 리 없으니, 장소의 아들은 아니고..."


매장소가 들었다면 당장 등짝을 후려 팼을 것이다.


"기왕 소경우의...?"


린신이 그 다음 서신을 꺼내 읽었다. 각원들은 금릉에서 매장소가 불러온 소문들과 크고 작은 화제들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록을 했으나, 막상 린신이 가장 알고 싶었던 내용들은 서신에 실지 못했다. 그들이 녕국후부에 잠입하여 매장소의 맥을 짚고 안색을 확인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수하들을 무능하다고 질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영 마음이 편치를 못해 린신은 입술을 질겅거리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나한테는 도착하자마자 전서구부터 보내라고 하더니, 본인은...'



금릉에 있는 랑야각원들과는 다르게, 매장소의 상태를 린신에게 고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두 명 있다. 그 중 한 명은 비류이나 글을 쓰지 못하는데다 린신에게 비협조적이었고, 다른 사람은 바로 녕국후부에서 머물지는 않으나 근거리에서 몰래 종주의 명을 전해 받고 있는 려강이었다. 그는 강좌맹에서 운영하는 한 찻집에서 머물며 금릉의 흐름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예황 군주의 신랑감을 찾는 경연이 끝이 나고, 군주가 황제에게 죄를 청하는 서신을 올린 직후 려강은 세필붓으로 무엇인가를 적는데 열심이었다.


려강은 무공이 뛰어나고 눈치도 빠른 편이었으나, 등 뒤에서 뻗어온 흰 손을 눈치챌 정도의 경지엔 오르지 못했나보다. 그 손이 서신의 모서리를 짚으며 려강을 방해했다. 려강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종주."


이제는 금릉의 평범한 서생처럼 머리를 단정히 올리고 옥관을 쓴 매장소가 엄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려강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매장소가 시선을 내려 려강이 방금전까지 쓰고 있던 서신을 살펴본다.


"린신에게 보낼 서신인가?"
"예. 린공자께서 종주의 상태를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됐네. 그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어."
"예?"


매장소는 서신을 짚은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고 려강은 붓을 벼루 위에 내려놓았다. 서신을 찢거나 구기진 않았지만, 매장소의 시선은 이미 종이를 찢어발겼다고 해도 믿어질 정도로 차가웠다.


"몸이 허약하고 고뿔에 자주 걸리는 것이 어디 하루이틀인가. 이 정도는 린신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아. 굳이 사소한 일까지 서신으로 적어서 되새겨주지 않아도 되니, 린신에게 남초에서의 상황만 간단히 알려달라고 적어."
"린공자께선 종주의 의원이신데..."
"린신의 약이 남았고, 내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도 아닌데. 유난 떨지 말게."


같은 말을 두 번 하기 싫어하는 종주가 금방 타주를 향해 날을 세웠다. 려강의 행동에 실망하였거나, 린신의 염려를 하찮게 취급하여 이리 매정하게 구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종주를 모셔온 려강은 이를 잘 알았다. 린신과 잠시 헤어지고 금릉에 입성한 이후, 매장소는 그의 계획에 관련된 일에만 촉각을 곤두세웠으며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선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특히나 제 몸 상태에 대해선 더더욱 무관심하여, 려강의 걱정을 샀다. 12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에 가득 찬 예황 군주와 정왕 소경염과의 재회 이후 더욱 그는 제 신체를 경멸하고 증오했다.


"...내가 좀 예민했군."
매장소는 짧은 한숨을 쉬었고,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급히 그에게 다가간 려강이 종주의 등허리를 부축했다. 려강의 두터운 팔에 잠시 기댄 매장소가 덧붙인다.


"아직까진 버틸만 하니, 일을 두번 하지 말란 뜻이었네."
"이 려강이 어찌 종주의 뜻을 모르겠습니까. 하오나 종주...린공자께선 늘 종주를 걱정하고 계시잖습니까. 종주의 말씀대로 공자께서도 종주의 상태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다시 확인하고 싶어하실 겁니다."


뻔뻔하고 능글맞은 소각주의 입을 틀어막거나 주리를 틀고 싶은 적이 더 많았지만, 린신이 매장소를 얼마나 지극히 위하고 연모하는지 잘 아는 려강은 그에게 매장소의 상태를 알리는 쪽이 당연한 도리라고 확신했다. 어찌 되었든 려강은 매장소의 사람. 종주가 명한다면, 이 서신은 찢어버리고 종주의 뜻에 따라야 마땅하지만 그는 린신을 위해 종주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매장소의 차가운 기색이 비교적 옅어지고...짧은 시간이 흐른 뒤.


"...생각해 보겠네. 그건 그렇고 십삼숙부께 그 일을 제대로 전달해 뒀나?"
"예, 종주."


애매한 답을 남긴 매장소는 빠르게 화제를 바꿔버렸다. 려강은 충실하게 매장소의 질문에 답을 했고 매장소는 려강이 쓰고 있던 서신을 재차 확인한다.


'좋은 모습만 전해줘도 모자랄 판국에.'


하지만 처음부터 린신에게는 흉하고 더러우며 지독한 면만을 드러냈었고, 린신도 그런 매장소에게 익숙해진 지 오래다. 새삼 가식을 떨 필요는 없으나...


'글로 내 처지를 알리자니, 너무 비참하구나.'


아프고 병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타인의 글씨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이는 쪽이 더욱 비참하고 서글프다. 매장소는 짧은 한숨을 토해낸다.




(+) 감사합니다!!!

@eiosolu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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