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측에서 제공해 준 옷으로 갈아입고 잠시 침대 위에 앉아 있으려니 갑자기 문을 가볍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쭈뼛쭈뼛 나가서 열어준 문 앞에 서 있던 건 정문 앞에서 봤던 그 도베르만 경비원.

“점심 배달 왔습니다.”

그는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톤으로 말하면서 한쪽 손에 쥐고 있던 하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어디서 도시락이라도 사서 온 모양이었는데, 분명 편의점 도시락이겠거니 하고 받아서 슬쩍 들여다본 그 봉지에 제법 유명한 도시락 체인점의 로고가 찍혀 있어서 살짝 놀란 나였다. 게다가 도시락 구성도 의외로 화려하단 말이지. 이거야 원, 돈깨나 들었을 것 같은데.

“여긴 따로 구내식당 같은 건 없습니다. 상주하고 있는 인원이 거의 없어서... 애초에 임상이나 생동성도 보통은 병원에 위탁해서 하는데, 이번에는 그 정도로 실험 규모가 크지도 않아서 특별히 여기서 진행하는 겁니다.”

“아...”

“그래서 어... 아무래도 실험이 끝날 때까지 계속 도시락을 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대신 메뉴만이라도 최대한 다양하게 바꿔 드리겠으니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까까지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그냥 넘기긴 했는데, 도베르만 경비원의 말을 듣고 찬찬히 곱씹어 보니 아무래도 내가 처한 상황이 그다지 일반적이지는 않은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몇 번인가 했던 생동성 알바는 검사부터 전부 병원에서 맡았고, 검진 결과가 멀쩡하면 다시 지정 병원에 입원해서 실험을 진행했단 말이지. 그런데 이번 임상인가 뭔가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긴 했다. 병원도 아니고 제약사 연구소 지하에서, 심지어 전파까지 끊어져서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하는 임상시험이라니.

“점심은 앞으로도 이맘때쯤일 거고, 저녁 시간은 6시 30분입니다. 그리고 저녁 메뉴는... 어, 일단은 저희 측에서 고르겠습니다만, 혹시 따로 먹고 싶으신 게 있으면 김 책임님께 말씀해 주십시오. 저쪽 벽에 인터폰 보이십니까? 그거 김 책임님 핸드폰이랑 직통입니다.”

“아, 예...”

하지만 이제 와서 무르기에는,

“그리고...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입금받으실 계좌번호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김 책임님께서 아까 물어보는 걸 깜빡했다고 하셔서.”

“... 네, 잠시만요.”

이미 받은 150만원도, 2주 뒤에 받을 나머지 잔금도,

“화나은행 892-826974-...”

정말이지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어지간한 건 다 참아줄 수 있을 정도로.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계좌번호를 불러 주고 도베르만 경비원을 보낸 나는 텅 빈 책상 위에 도시락을 늘어놓고 그 앞에 털퍼덕 걸터앉았다. 본격적인 안락의자보다는 못 해도 사무용 의자 레벨에서는 충분히 차고 넘칠 정도로 푹신한 의자에 등이 척 감겨들자 긴장이 스르르 풀리면서 마음이 좀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휴우.”

낮은 한숨과 함께 봉지 속에서 나무젓가락과 플라스틱 숟가락을 주섬주섬 꺼내 드는 나. 나무젓가락이 제법 고급이었는지 힘을 조금 주니까 아주 매끈하게, 절취선 그대로 뚝 잘리면서 경쾌한 소리를 냈다. 물론 가루가 날리거나, 매끄럽지 않게 잘려서 미세한 나무 파편이 부스러기처럼 붙어 있다거나 하는 기분 나쁜 일도 없었고.

“음...”

젓가락에서부터 나쁘지 않았던 그 느낌을 그대로 이어가기라도 하듯, 도시락 역시 브랜드 값어치를 충분히 했다. 편의점 김밥이나 도시락을 애용했던 내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로 풍부하고, 또 건강한 느낌이 드는 맛. 좋지 않은 재료를 조미료 맛으로 감춘 느낌도 일절 없었고, 다채로운 메뉴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풍미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내가 지금껏 누려본 적 없었고, 앞으로도 최소한 대학을 벗어나 좋은 직장을 얻어 자립하기 전까지는 누릴 수 없을 소소한 행복.

‘2주 동안 계속 이런 식사라... 나쁘지 않을지도.’

생동성 알바 때마다 먹었던, 편의점 즉석식품보다야 확실히 건강하긴 했지만 맛은 더럽게 없었던 병원 밥에 비하면 정말 과분할 정도의 사치였다. 보안 어쩌고 하는 명목으로 조건이 꽤 빡빡한 편이었던 이번 알바를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하나 생긴 것 같아 절로 마음 한구석이 따스하게 물드는 기분. 덕분에 나는 처음 몇 젓가락은 음미하면서, 그러다가 어느 샌가부터는 허겁지겁 음식을 입 속으로 밀어다 넣으며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식사를 끝마쳤다.

“하아.”

즐거운 시간도 이것으로 끝이고, 이제부터 저녁까지는 꼼짝없이 지루하게 보내야 한다는 현실이 나를 무겁게 덮쳐왔다.

‘밤에 못 잘 테니까... 지금은 자지 말자.’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가도 훨씬 더 무료할 밤을 걱정하며 다시 벌떡 일어선 나는,

‘만화나 좀 볼까.’

내가 여태껏 누려본 적이 없었던 또 다른 사치로 손을 뻗었다. 책상 옆쪽 벽면에 딱 붙어 있는 제법 높다란 책꽂이 맨 위쪽 칸에 살짝 삐뚤빼뚤하게 꽂힌, 이름은 들어봤지만 정작 볼 기회는 없었던 유명한 만화책. 다행히 까치발을 들지 않고도 아슬아슬하게 손이 닿아서 딱히 위태로운 상황이 연출될 일 없이, 제일 구석진 곳에 있던 1권을 뽑아올 수 있었다.

‘이건 좀 좋을지도.’

느려터진 싸구려 노트북과 액정 깨진 구형 스마트폰으로 버텨야 했던 지난번 생동성 알바가 떠오른 건 아마도 필연이겠지. 인터넷이 안 되는 건 여전히 유감이긴 했지만, 이제는 그래도 아예 못 버틸 정도는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맛있는 식사, 넘쳐나는 볼거리, 푹신한 의자와 침대.

‘인터넷 안 되는 것만 빼면... 진짜 꿀알바잖아. 대박.’

그리고 결정적으로 돈. 900만원이라는 엄청난 페이 앞에서는 단점도, 장점도 모두 빛이 바랬다. 아예 선택권이 없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말이지.

‘이건... 오늘은 한 10권까지만 보자. 최대한 아껴 봐야 해.’

물론 2주는 제법 긴 기간이어서 나름대로 ‘콘텐츠 고갈’이 일어나지 않게끔 안배를 해둬야 했지만,

‘뭐, 볼 거 다 떨어지면 그땐...’

사실 그쪽도 그다지 걱정되지는 않았다.

‘전화하면 되잖아.’

내겐 아까 도베르만 경비원이 알려준, 곰 연구원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인터폰이 있었으니까.

 

 

스스로와 약속했던 대로 만화는 딱 10권까지만 보고, 그 이후로는 과월호 잡지를 보며 침대에서 뒹굴대고 있노라니 어느새 벽에 걸린 시계가 6시 30분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6시 30분이 되자,

“가람씨!”

이번에는 도베르만 경비원이 아닌 다른 목소리가 문 저편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아, 안녕하세요.”

“저녁 갖고 왔습니다. 이번에도 도시락이라서 죄송해요.”

다름 아닌 곰 연구원. 이제 ‘공식적으로는’ 퇴근한 뒤였는지 하얀 실험복 가운 대신 운동복 차림이었다. 거의 핫팬츠에 가까운 파란색 반바지까지는 그럭저럭 봐줄 만했지만, 상체에 쫙 달라붙어 근육질 몸매를 대놓고 드러내 보이는 시꺼먼 컴프레션 반팔 셔츠가 아무래도 좀 남사스러워서 눈을 슬며시 돌릴 수밖에 없었던 나는,

“네, 감사합니다.”

짤막하게 인사하면서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도시락 봉지를 건네받았다. 아까와 똑같은 도시락 체인점 로고, 하지만 좀 더 묵직한 무게감과 약간 다른 형태의 플라스틱 용기.

“식후 30분 뒤에 약 드시는 거 잊지 마세요.”

눈 둘 곳이 도통 없어 민망해하던 내게 그 탄탄한 가슴을 앞으로 척 들이대면서 이렇게 덧붙인 곰은,

“뭐, CCTV도 있으니까... 안 드시는 것 같으면 제가 인터폰으로 연락할게요. 설마 잊어먹진 않으시겠지만.”

빙그레 웃으면서 내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덕분에 방금 전까지 어디서 운동이라도 하다 온 모양인지 곰에게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땀 냄새가 내 코를 마구 후벼대는 중.

“휴, 땀 좀 뺐더니 개운하네. 그럼 내일 아침에 뵐게요.”

손바닥 육구에도 땀이 흥건하게 묻어 있던 터라 내 옷에 흠뻑 젖은 자국을 남겼던 그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는지 겸연쩍게 웃으면서 서둘러 방을 나섰다. 하지만 그 짧은 방문 탓에 내 머릿속이 그야말로 난장판, 그 자체가 되고 말았음은 끝내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연구원님... 설마 게이는 아니겠지?’

일부러 그랬다고 해도 믿어질 정도로, 아주 노골적으로 수컷의 냄새를 내게 풍겨대던 그의 모습에서 아주 조금이나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나는 고개를 휘저으면서 그 의심을 마음속에서 얌전히 몰아냈다.

‘아니, 그냥 그런 개념 자체가 없을 거야. 남자가 남자한테 끌릴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는 거라고.’

오히려 같은 남자이기 때문에 더 스스럼이 없어서 이런 모양새가 됐으리라는 게 보다 더 합리적인 추론이었으니까. 사실 나도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내가 여자보단 남자 쪽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 참고로 인간과 수인, 양쪽 모두 가능했다 – 자각했던지라 경험이 일천해서 그다지 확신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까 그건... 엄청났어, 진짜.’

하지만 톡 쏘는 땀내를 풀풀 풍겨대던 곰 연구원의 탄탄한 몸이, 얇은 쫄티 한 장으로 꽁꽁 싸맨 그 대흉근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것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평범한 일반인의 영역에 있으리라고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 죄스러운 욕망을 떨쳐낼 길이 없었던 것이다.

‘밥 먹기 전에 한 발 뽑을- 아, 맞다. CCTV 있다고 했지. 젠장.’

하지만 그 진득한 욕정을 청춘의 한순간에 흘려보낼 기회조차 CCTV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 앞에 철저히 박탈당하고 만 나는,

‘그냥 닥치고 먹기나 하자...’

대신 식도락으로 어떻게든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저녁 메뉴는 민치가스를 메인으로 한 전형적인 일식이었는데, 담백하고 정갈한 맛 덕분에 마음을 좀 가라앉힐 수 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약도 먹어야지.’

그렇게 점심보다는 좀 느긋한 속도로 식사를 끝마친 나는 캐리어에서 한낱 전자시계로 전락하고 만 핸드폰을 꺼내고는 정확히 30분짜리 타이머를 맞췄다. 앞으로 2주 동안은 이런 용도로만 쓰이게 될 가엾은 녀석.

‘돈 들어오면 핸드폰이나 바꿀까.’

깨진 액정 덕분에 터치도 드문드문 안 될 때가 있었던 그 낡아빠진 스마트폰을 거의 노려보다시피 쳐다보던 나는 이내 책상 위에 핸드폰을 엎어두면서 고개를 푹 묻고 엎드렸다. 둥그런 벽시계에서 나는 째깍째깍 초침 소리만이 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전부, 아마 약 먹을 시간을 알리는 타이머가 울리기 전까진 계속 그러할 터였다.

‘플래그십 폰으로... 한 세대 구형 정도라면 사도 되지 않을까.’

900만원이라는 돈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통이라 할 수 있었던, 아주 사치스러운 생각마저 머릿속 한가운데에 담은 채로,

‘태블릿은 너무 많이 나갔고... 그래도 노트북은 좀 바꿔야겠어. 인터넷 탭 몇 개만 열어놔도 엄청 버벅거리잖아. 조별과제 할 때마다 좀 민폐였다고, 솔직히.’

나는 그렇게 2주 뒤의 미래를 술술 계획해 나가기 시작했다. 핸드폰 타이머가 시끄럽게 울려대서 황급히 끄고, 도시락에 딸려 왔던 500ml짜리 생수와 함께 봉지에 들어 있던 좁쌀만 한 알약을 꿀꺽 삼키기 전까지만.

‘약이 엄청 작네.’

그 모든 미래 계획의 기반이 될 나의 ‘임상시험 알바’는,

‘덕분에 삼키기는 쉽지만...’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furry m/m writer

Fur-Abyss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