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바다에 가자던 그 애는 혼자 바다로 갔다.



김원필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 눈을 뜬 원필의 옆에는 가지런히 개어진 강영현의 니트조끼뿐이었다. 원필은 미친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병원을 나섰다. 뒤에서 누군가 원필의 이름을 크게 불렀지만 원필은 오히려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 건물 앞으로 뛰어간 원필이 본 건 길게 쳐있는 폴리스 라인과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수습하고 있는 사람들과 트렉터였다. 없었다. 강영현이 없었다. 병원복을 입고 허망하게 서있는 원필에 사람들이 이상하다는듯 쳐다봤지만 그냥 그대로 지나쳤다.  

김원필은 무너진 건물을 향해 걸었다. 한 발자국, 또 한발자국. 아스팔트 바닥으로 눈물 자국이 뚝뚝 떨어졌다. 도착하기도 전에 돌을 치우고 있던 수습원에게 저지당했다. 학생, 여기 들어오면 안돼요! 원필이 저를 잡는 손을 뿌리친다. 달려가다 또 제지당하곤 뒤로 넘어진다. 꽉 쥔 주먹 손등에 거칠거칠한 돌멩이들이 스친다. 원필이 일어서지도 못한채 엉금엉금 앞으로 기어간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지금 뭐하는 거냐며 호통을 치며 달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병원에서부터 쫓아온 듯 했다. 강제로 원필을 들어올려 뒤로 끌어내는 사람들을 향해 원필이 고함을 내질렀다. 앞을 향해 손을 마구잡이로 내뻗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한번만요. 제발요. 저기 있단 말이에요.

강영현이 나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내가 그걸 못 들었단 말이에요. 제발요. 제발........








살려주세요.







알게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피차 삶과 죽음, 이곳과 저곳으로 갈라져 있사오나 하나님의 은총 밑에 지나온 것을 더욱 감사합니다. 그러나 고인이 하시던 큰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한 부족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여기에 있는 우리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하늘의 영원한 은총을 베풀어 주사 하늘 영광을 찬양케 하시옵소서.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심을 믿음으로 확인하고 새 소망으로 넘치게 하시며, 실의에 빠진 이에게는 눈을 들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이 땅 위의 것을 보고 실망치 않게 하시고, 바로 지금 눈을 들어 부활의 주를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영현의 유골은 가루가 되어 인천 앞 바다로 뿌려졌다. 영현의 가족들은 빠르게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고작 며칠 화제거리였다. 이건. 뉴스에서 조차 다뤄지지 않은 일. 지역신문에서야 고작 하루 기사거리였던 일이었다. 사람들은 빠르게 잊었다. 노후된 건물이 무너져 사망자 한명과 사상자 한명이 발생했다는 사건은 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별 일 아니었다. 세상은 빠르게 안정되고, 또 흔들리고, 또 안정되었다. 그래서 김원필도 그런척을 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얻은 척 했다. 그래야만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원필은 학교에 갔다. 평소처럼 공부를 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필기를 하고, 쉬는 시간에는 예습과 복습을. 학교가 끝난 후에는 집에 가 자습을 했다. 모의고사를 풀었다. 오답노트를 했다. 찌그러진 동그라미가 가득했고 시험지 끄트머리엔 어떤 이름이 수 없이 적혔다가 이내 검은칠로 바뀌었지만 김원필은 멈추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정처없이 반복됐다. 다들 김원필한테 독하다 그랬다.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지 않냐. 교과서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김원필 뒤로 그런 소리들이 스쳐 지나갔다. 김원필을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은 애초에 단 한명뿐이었으니 원필은 개의치 않았다. 김원필을 누구보다 똑바로 봐주던 이는 이제 없으니까. 김원필이 사실은 눈물도 많고 마음이 여리다는 걸 아는 건 그 애 뿐이었으니까. 


원필은 더 이상 보습학원에 가지 않았다. 그 8층짜리 건물 앞에 서기만해도 몸이 덜덜 떨렸기 때문이다. 괜찮냐고 묻는 학원 선생님의 말에 원필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가며 대답했다. 원필의 표정이 보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애써 웃었다. 그런것 같아요.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아무말이 없었다. ...그래. 짧게 대답한 선생님이 전화를 끊었다. 뚜-뚜-뚜 끊긴 수화음을 들으며 원필은 크게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 내뱉었다. 소매로 벌개진 눈가를 벅벅 닦았다. 다시 펜을 들었다. 





남은 시험에서 모두 전교 1등을 차지했다. 시험이 끝난 날에도 원필은 집으로 돌아가 공부를 했다. 시내를 거닌다던가, 오락실에 간다던가, 떡볶이를 먹으러 갈 수는 없었다. 그저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몸을 잔뜩 웅크리고. 베개 밑으로 손을 넣었다. 시험이 끝난 날이면 꼭 이랬다. 


베개 밑으로 아이보리색 니트조끼가 손에 잡힌다. 원필은 그걸 덜덜 떨리는 손으로 끌고와선 품안에 끌어안았다. 고작 얇은 천 쪼가리인데 한가득 끌어 안고 눈을 질끈 감는다. 조끼위로 강 영 현 석자가 초록색으로 수 놓여져 있다. 텅 빈 운동장에서 저를 보고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며 징징대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것 하나 뿐이다. 강영현을 추억할 수 있는. 강영현이, 강영현이 좀비같이 살아가고 있는 김원필을 살려보겠다고 건내줬던게. 마지막까지 두고 간 게 이거 하나 뿐이다. 김원필은 그걸 품에 안고 등을 잔뜩 구부렸다. 얇은 섬유에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 마쉰다. 이미 강영현의 향은 사라진지 오래라 그저 김원필 방에서 나는 디퓨저향만 감 돌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더 세게 코를 박고 숨을 들이 마쉰다. 그래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김원필은 숨을 쉬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숨을 쉬게 해준 이가 이제 없어서. 옆에 없어서. 그 어디에도 없어서. 







수능이 끝이 났다. 원필은 집에 돌아와 가채점을 하고 문제집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끝이 났다는 허망함과 동시에 막막해졌다. 이제 난 뭘 해야 하지? 애써 저편으로 미루고 미뤄왔던 기억들이 하나씩 밀려 들어와 원필은 눈도 한 번 깜박일 수 없었다.

2학기 때 공부했던 문제집을 정리해 상자에 차곡차곡 담으니 남은건 1학기 때 풀었던 수능특강과 모의고사들이었다. 프린트들을 살펴보던 원필의 손이 급격하게 느려졌다. 펼쳐져 있는 시험지 구석에 낙서들이 가득했다. 강영현이 남긴 것들이었다.



김원필 바보ㅋㅋ

맨날 채점 잘못하고 

집중하는것봐 나도 좀 보지?

ㅋㅋㅋ이거 너 



삐뚤삐뚤한 그림으로 토끼모양을 그려놓곤 이거 너라며 화살표로 표시해놨다. 괜히 부끄러워 확인해보지도 않고 넘겨버렸던 페이지 중 하나 였다. 만약 봤다면 내가 무슨 토끼를 닮았냐고 괜한 썽을 냈을거다.

원필이 세게 페이지를 넘겼다. 다행히 다음 페이지에는 낙서가 없었다. 버려야 한다. 아까처럼 상자에 넣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 원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원필은 낙서가 적힌 모의고사 종이를 두 번 접었다. 상자가 아닌 책상 서랍을 열곤,쌓여있는 물건들을 들어올리고 맨 밑에 종이를 집어 넣었다.


오락실에서 토끼 인형과 여우 인형을 뽑았던 날, 죽어도 토끼 인형을 가져가겠다고 우기던 강영현이 떠올랐다.






졸업식날이었다. 고등학교 생활 하나 끝났을 뿐인데 하나같이 표정이 밝았다. 아쉬운 표정도 여럿 있었다. 몇몇은 머리를 주황색,초록색 같은 색으로 쨍한 색으로 물들였다. 김원필은 여전히 검은 머리였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말씀이 끝이나고 졸업식이 마무리 되자 다들 카메라를 꺼내들어 꽃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원필은 그 풍경을 잠시 눈에 담았다가 조용히 교정을 빠져나왔다. 졸업식에 가기 위해서였다.


원필은 시내를 가로질러 걸었다. 가는 길에 꽃집에 들려 꽃도 샀다. 스토크라는 보라색 꽃이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희운고등학교였다. 같은 날 졸업식을 한 터라 이미 사람들이 빠져나가 교정이 텅 비어있는. 원필이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텅 빈 운동장을 검정색 니트조끼에 줄무니 넥타이를 맨 김원필이. 

원필은 처음 와보는 학교에 헤메다 겨우 3학년 4반 교실을 찾았다. 지나가듯 들었다 기억해 두었던 강영현의 반이었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원필은 텅 빈 교실로 들어섰다. 영현의 자리를 힘들게 찾을 필요조차 없이 맨 뒷자리 책상에 국화와 포스트잇같은 편지들이 가득 놓여있었다.


강영현 인기 많았네. 원필이 픽 웃고는 천천히 영현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로 꽃다발을 올려놓곤 천천히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쓸어보았다. 책상 오른쪽 위에 마카로 대문짝하게쓴 3-4 강영현이 너무 강영현 다워서 웃음이 흘렀다. 원필이 그 글씨를 손으로 어루만지다 입을 떼었다. 



강영현.졸업 축하해.



이건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이어지는 독백이다.



나 아직 너 있는 곳에 한번도 못 갔어. 미리 미안. 찾아 가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네가 같이 가자고 그랬었잖아. 바다에. 그래서 도저히 혼자 갈 수 가 없겠더라. 네가 꼭 같이 가자면서....그래놓고 혼자 가버리고. 네가 생각해도 치사하지? 그래서 못 갔어. 미안해.

근데 넌 어차피 나 안기다리겠지? 우리가..막 그렇게 애틋했던 사이도 아니고. 그냥 학원 같이 다녔을 뿐인데. 너는 인기도 많고, 널 사랑해주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러니까 안 속상하겠지만, 혹시라도 속상해 하지 말라고. 꽃도 주잖아. 이거 추위에 강한 꽃이래. 그래서 봄까지 안 시들 거라고 꽃집 사장님께서 그러더라. 너는 추위 많이 타니까. 꽃말은...안 알려줄거야. 너도 그때 소원 뭐라고 빌었는지 안 알려줬으니까.


나 너 처음 봤을 때 진짜 싸가진줄 알았는데, 얼굴에 멍이나 들어있고. 교복도 똑바로 안 입고. 근데 또 전교 3등이라그러고. 근데 이상하게 네가 나쁜애라는 생각은 안들더라. 

네가 자꾸 맛있는 거 갔다줘서 그래. 너 그거 알아? 나 사실 단 거 안 좋아해. 시험기간에만 사먹는데 네가 자꾸 네스퀵 사다주고, 사탕 갖다주고. 졸리다하면 쿠션 빌려주고. 늦었다고 집 데려다주고. 그러고보니까 나는 너 집도 모르네 맨날 너만 나 데려다줘서. 원래 기말고사 끝나고는 내가 데려다 주려고 했었는데. ....이미 이사 갔지만. 

기말고사 끝나는 날에 또 그 떡볶이 집 가기로 했었잖아. 철권도 다시 뜨기로 하고. 유성우 내린다하면 또 같이 별 보기로 했잖아. 바다도. 수능 끝나면 같이 귀도 뚫으러가기로 했었잖아. 염색도 같이 하기로 해놓고. 그래서 나 아직도 검정색이야 어쩔래. 또, 1월 1일에 민증 이마에 붙이고 같이 술도 먹으러 가자고.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해놓고. 



어떻게 하나도 안 지키냐.

...........역시 넌 싸가지가 맞아. 강영현. 재수없는 강영현. 근데 왜 이렇게 목소리가 떨리지. 진짜 웃기다. 어이없어. 나는 왜 이렇게....네 이름을 부르기가 어려운지 모르겠어. 여기 왜 온지도 모르겠고. 나 진짜 바보같다. 진짜...... 바보 같애.



사실 나는 오늘 너를 졸업하려고 온 건데.



강영현. 너 그건 알았어? 



원필의 목소리가 떨린다. 다리에 힘이 빠져 원필은 책상을 부여잡고 주르륵 주저 앉았다.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하다. 한숨을 토하듯 원필은 말을 내뱉었다. 그 누구도 듣지 못할 독백이자.




....나 너 좋아했었어.




고백이었다.







김원필은 의대에 진학했다. 강영현이 가고 싶어했던 과였다. 또 꾸역꾸역 살아갔다. 학교 기숙사 옷장에는 아이보리색 니트조끼가 걸려있다.



김원필은 괜찮았다. 괜찮고 싶었다. 괜찮을 거라 믿었다. 

딸기우유맛 사탕을 못 먹어도.

해장하라며 선배가 준 네스퀵에 갑자기 눈물을 쏟아도.

세븐일레븐 간판을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려도.

떡볶이를, 오락실을, 토끼와 여우 인형을, 강영현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어도. 괜찮았다. 정말로 괜찮았다. 김원필은 매일 그렇게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김원필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강영현이 나오는 꿈이 악몽일리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김원필은 악몽을 꾸지 않는다.


 강영현은 처음 봤을 때 처럼 상처를 매달곤 교복을 풀어헤친 모습일때도 있었고 마이까지 꼭꼭 챙겨입은 모습일때도 있었다. 아이보리색 니트조끼에 강영현 석자가 가지런히 박혀있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건 강영현은 항상 웃고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강영현은 김원필을 똑바로 바라본 채 웃었다. 그래서 김원필은 죽고싶었다. 

강영현이 웃으며 손을 내민다. 그럼 또 언제나처럼 잡을 수 밖에 없다. 또 그 옥상에 올라간다. 수없이 떨어지는 별똥별들을 보며 강영현이 웃으며 눈을 감는다. 김원필은 소원을 빌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소원을 빌고 있는 영현을 가만히 내려다 본다. 넌 무슨 소원을 빌었어? 그냥 알려주라. 나 그 영화 못 봐 영현아. 보려고 몇번을 노력해봤는데 결국 꺼버렸단 말이야. 착한 강영현은 떼쓰는 김원필에 결국 입을 연다. 너 진짜 눈치 없다니까. 잘 들어봐?

순간 영현의 모습이 흐려진다. 별이 비처럼 내리던 밤하늘의 풍경이 아닌 다 쓰러져가는 건물 한가운데 영현이 있다. 

영현이 무어라 말하는 것이 보인다. 너무 멀다. 영현의 모든 언어가 흐리다. 김원필. 원필아 나는 네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깊은 심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먹먹하게 울리는 고막에서는 강영현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알지 못한다. 


김원필은 아직까지도 강영현을 알지 못한다. 


영현아. 영현아. 이름 하나를 내내 짓뭉개며 새벽을 보낸다. 몸을 둥글게 말고, 명치를 꾹꾹 눌러가며 울음을 삼킨다. 결코 입 밖으로는 내 뱉을 수 없는 이름이다. 평생 알지 못할 이름이다.











김원필은 또 하루를 살아간다. 이미 숨을 쉴 수 없는데도 겨우겨우 코를 박고 숨을 들이쉬며 살아간다. 살아 있다는 게 그런거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거다.










***








“어, 지성아.”  

“뭐야. 오늘 어디가?”  

“아,응.”  



어디가는데? 원필의 대학동기이자 같은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고 있는 지성은 휴일없이 일만 하던 원필의 외출이 신기한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병원 로비에서 딱 마주친 참이었다. 지성은 차트를 확인하며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원필에게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원필은 그저 뒷목을 쓸어내렸다. 어디가냐니까. 다시 한번 되묻는말에 그제서야 입을 뗀다.




바다. 


내 바다를 보러가.







곧 여름이 다가오는 날씨라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도 바닷바람은 시원했다. 열아홉에 머물러있던 김원필은 스물 여덟이 되고나서야 바다에 왔다. 강영현을 만나러. 9년이나 지난 오늘에야 이 곳에 올 용기가 생기다니. 원필은 이런 자신을 보면 강영현이 당장이라도 으이구,하며 꿀밤을 먹여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 너무 늦게 온 거 아냐? 그래봤자 잔뜩 겁만 줘놓고 살살 칠 것이 뻔하지만.

야 근데 바다가 너무 넓다. 납골당에 유치된 것도 아닌 바다에 뿌려진 강영현을 찾기엔 바다는 너무 넓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바다가 이어졌다. 그게 강영현 같았다. 김원필한테 강영현이 그랬다. 너무 넓고, 온 세상을 뒤덮을만큼 파도가 거센 그런 바다. 끝이 없어서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원필은 천천히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이제는 졸업 할 수 있을까? 졸업식때도 못 했던 강영현으로부터의 졸업을 할 수 있을까. 원필은 잠깐 멈춰 앉아 모래를 한움쿰 쥐었다. 손 틈 사이로 모래알갱이들이 흘러 빠져나갔다. 대답은 9년전과 똑같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네. 따뜻한 걸로요.”  

“...김원필?”  

“......” 

“와 진짜 오랜만이다. 나 기억해?”  


한참동안 바닷가를 걷다 들어온 카페였다. 이미 해가 져 어둑어둑해진 탓에 날씨 또한 쌀쌀해졌다. 원필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자마자 어깨를 톡톡 건드는 손길에 뒤를 돌아봤다. 아,잊을 수 가 없는 얼굴이었다. 강영현 옆에 어느날 나타났었던 중단발의 여자애. 미라. 장미라였다. 

...강영현이 좋아했었던 장미라.


“...너도, 강영현 보러 온 거지?”  

“...응.” 

“나 매년 왔었는데. 왜 그동안은 못봤지? 하긴 바다가 너무 넓긴해. 납골당도 없고.”  


강영현 답게. 그치. 미라는 여전히 살가웠다. 그때 그 시절 교복을 입은 모습에서 그저 머리가 조금 더 길어졌고, 교복이 아닌 코트에 긴 치마를 입고 있었을 뿐 예전과 비슷하게 밝은 모습이었다. 나는 많이 변했는데. 걔가 사라진 이후에 나는. 


“....나는 이번에 처음 왔어.” 

“아.” 

“근데 진짜. 바다가 너무 넓더라.” 


 잠시 이야기나 하자며 붙잡은 미라에 카페 안 테이블에 앉은 참이었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쪽 테이블에 앉은 둘은 동시에 바다를 응시했다. 아마 같은 이를 그리고 있을 것이다. 저 멀리서 파도가 밀려와 모래를 적시고 다시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미라는 옛 생각이 나는지 같이 학원 다니던 시절이 기억이 나냐며 물었다. 너 내가 막 손잡고 불편하냐고 물어보니까 완전 당황했었잖아. 강영현 화나서 그 날 수업 재끼고. 미라 특유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카페 내부에 울려퍼졌다. 어떻게 기억이 안 나겠어. 김원필은 그 때 강영현과 몇 번 눈을 마주쳤는지도 기억 한다. 원필이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곤 말했다. 입안이 씁쓸했다.



“그때 강영현이 너 좋아했었잖아.” 



뭐? 야.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미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원필은 미라의 표정에 당황했다. 당연히 아는 줄 알았는데. 당황해서 커피잔을 놓칠뻔한 원필을 본 미라의 표정이 점점 굳어간다. 


김원필. 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걔는. 강영현은.



강영현은 널 좋아했어.


원필은 눈 앞이 아찔해짐을 느낀다. 

무너진다. 

하염없이 무너져간다.







너 진짜 몰랐어? 애초에 내가 니네 학원으로 온 이유가 강영현이 너랑 친해지고싶대서 도와달라고 온 거였는데. 걔 학교에서 맨날 네 얘기만 했어. 


김원필은 가끔 채점을 잘 못해서 문제집 구석구석에 찌그러진 동그라미가 있어. 김원필은 딸기우유맛 사탕을 좋아해. 김원필 네스퀵 좋아하던데. 그래서 내가 원쁠원이라고 구라치면서 챙겨주고 장난 한번 쳤었는데 얼굴 엄청 빨개지더라. 귀여워. 엄청. 


그렇게 얘기하던게 아직도 선해. 김원필 김원필 하도 얘기해서. 너가 자기 피하는것 같다고, 너랑 친해지게 해달라고 하면서 보습학원 오라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너랑 친해지고나서는 빨리 학원 끊으라고 난리여서 진짜 어이없었는데. 야,야 너 내 얘기 듣고 있는 거 맞지? 표정이.....너는 이 날씨에 무슨 감기에 걸렸냐.

아.걔 막 너랑 결혼할 거라고 우겼던것도 생각난다. 걔가 야자실에서 자습하다 말고 핸드폰으로 뭘 엄청 찾아보고있는거야. 보니까 동성혼 합법 나라 찾아보고 있더라. 진지하게 필기노트 맨 앞장에 네델란드,벨기에,덴마크...중얼거리면서 쓰고 있었어. 뭐하냐니까 너랑 결혼할거라고 그러길래 먼저 사귀기부터하라고 장난쳤었는데. 

그냥 그게 생각나네. 걔가 막 완전 자세하게 인생 계획 세웠었거든. 28살. 와 지금이네. 아무튼 28살에 덴마크로 떠날거래. 왜 하필 덴마크냐고 물으니까 덴마크가 동성혼 합법을 제일 먼저 한 나라라더라. 아이는 두 명. 딸 한명 아들 한명씩 입양해서 같이 살거라고. 자기랑은 안닮아도 상관없으니까 김원필이랑은 닮은 구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이름이. 아,이름 뭐로 한다 그랬었지? ...............어! 맞아. 현원이랑 영원이. 자기 이름이랑 너 이름이랑 조합한거라고,



......야.

야 왜그래.

.....김원필. 너 울어?





미안. 미안해. 정말 미안해. 원필은 당황한 미라를 앞에 두고 뒤를 돌아 뛰어갔다. 테이블에서 커피잔이 떨어져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내가, 내가 잘못했어. 주인을 잃은 사죄가 반복된다. 소원 빌지 말걸. 그러지 말 걸. 내가 널 알았어야 하는데. 미안해. 미안해. 

 다리가 고꾸라져 넘어질뻔하면서도 무작정 뛸 수 밖에 없었다. 도망친다. 김원필은. 도저히. 도저히. 이제 알 수 밖에 없어서. 물이 가득 찬 폐부에서 신음이 흘러 나온다.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원필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입을 벌렸다. 울음 소리가 밀려 나와 쩌렁하게 울린다. 꾸역꾸역 미뤄놨던 그 이름 석자가 뛰쳐나온다. 

강영현. 강영현! 강영현!!!! 





김원필은





이제서야





그거 원쁠원인데.

좋아하는 애가 공부를 너무 잘해서.같은 학교 가려고.

당연히 나랑 안 닮았지.

똑같아. 눈치 없는 게.





이제서야






원필아  나는 네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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