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소녀는 잠시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에 떨어진 나무 그늘이 진해져 있다. 세상의 빛깔은 청회색, 초저녁이다.

 

야마사키 부인 댁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해가 남아 있었다. 수십 번을 넘어 다녀 익숙한 산길은 반 시진이면 끝날 것인데, 한 시진이 가까워 오도록 마을이 보이지 않고 있다.

 

새가 울었다. 소녀는 머리 위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검은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품 안의 꾸러미를 꼭 끌어안는다. 안에는 찹쌀떡이 들어 있다. 야마사키 부인에게 선물로 받은 것이다. 며칠 전에 선생님의 간식을 자신이 날름 먹어버렸으니 잘 됐다 싶었다. 얼른 선생님께 가져다드리고 싶은데. 거기다 슬슬 저녁 지을 준비도 해야 할 시간인데…….

 

소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행방불명 神隠し

 

 

 

 

“선생님, 한 번 들어보셨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울타리 수리 건으로 찾아와 말을 붙여 온 이웃집 아주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이것저것 수다를 떨다가, 이야기가 끝날 무렵이 되자 슬그머니 새 화제의 운을 떼었다.

 

“예, 말씀하시죠.”

 

도이 한스케는 아주머니의 찻잔에 새 차를 따르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키리마루, 이제 열여섯이 되었지요.”

 

“아… 그러네요.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다.”

 

“애가 참 예쁘고 싹싹한데다 똑똑하고 야무진 것이, 인기가 참 많아요.”

 

“뭐, 워낙 잘 돌아다니고 말도 잘 붙이는 애니까요.”

 

도이는 주전자를 놓으며 선선히 대답했다. 키리마루는 도이 한스케가 가족처럼 돌보고 있는 여자아이다. 벌써 여섯 해나 지났나……. 새삼 감개무량을 느끼고 있는 도이를 향해 아주머니는 은근한 화제를 계속 이어갔다.

 

“이제 슬슬 결혼 얘기도 나올 나이예요. 선생님은 모르시겠지만 벌써 여러 여럿이 눈독을 들이고 있습디다.”

 

“……그래요?”

 

“그중에 진짜 좋은 혼담 자리가 있다우. 한 번 들어봐요. 산 너머 마을에 도시락 가게가 있는데, 이 가게가 규모는 작지만 제대로 알부자래. 거기 후계자 외동아들이 좀 몸은 약하지만 점잖고 성실한 것이 아주 괜찮다우. 그런 도련님께는 키리마루같이 활발한 처녀가 어울리지.”

 

“…….”

 

도이는 대답하기가 곤란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키리마루에게 혼담이 들어오다니, 이 또한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보아온 그 아이에게 낯선 남자와의 혼담을 연결시키자니 영 부자연스러웠다. 감정이 순간 복잡해져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사실, 키리마루한테도 슬쩍 운을 띄워 봤는데…….”

 

도이는 찻잔을 입에서 떼고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그 애는 아직 그런 거 생각 없다고, 도이 선생님이 혼인하시기 전까지는 자기가 돌봐 드리고 싶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아주머니는 이번엔 도이에게 이어지는 혼담을 꺼냈다.

 

“그러니 말인데, 선생님, 이번에 저기 수로 근처 통 가게 집 딸이…….”

 

아무래도 아주머니가 오늘 중매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사실 울타리 수리나 그 무엇보다 이쪽이 용건이었던 걸까. 도이는 곤란한 얼굴로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뇨, 아직은,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이는 한참의 실랑이를 치러 가며 마음 편치 않은 호의를 거절하느라 애를 꽤나 먹어야 했다.

 

“하지만, 선생님, 키리마루도 곧 졸업이지요? 그전까지 그 애도 선생님도 무언가 정하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아주머니는 무거운 엉덩이를 겨우 떼어 일어나며 말을 늘였다. 도이는 “감사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연신 웃어 가며 아주머니를 사립문까지 배웅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라는 말을 마지막까지도 이웃이 간곡히 남기는 것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조금 끄덕여 보였다. 위가 조금 아파왔다.


 

*

 

 

도이는 저녁 밥상을 차렸다. 원래 오늘은 키리마루가 당번인데, 돌아오질 않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키리마루는 아까 낮에 야마사키 부인을 도우러 갔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부인이 허리를 다쳐 집안일을 잘 못 돌보고 있다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키리마루는 야마사키 부인이라면 수고비를 두둑이 챙겨 주실 거라고 신나 하며 떠났다. 그것이 이렇게 늦어지는 걸 보면 아마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고 붙잡혀 있는 모양이지. 그 애는 말주변이 뛰어나고 눈치가 재빨라서 좋은 대화 상대가 되니까. 얘기하다 보면 이쪽의 정신이 하나도 없어질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적적한 부인에게 좋은 말벗이 될 것이다.

 

그래도, 그 사이 혹시라도 키리마루가 돌아오면 같이 먹자 싶어 밥상을 잠깐 미뤄 두고, 도이는 서책을 펼쳤다. 읽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책에 빠져, 문득 절에서 치는 종소리를 무심히 세어 보다가 마지막 반향에 정신을 차려 보니 벌써 이경(二更)이 지났다. 저녁은 이미 차게 식었다. 이경이라니, 이것은 너무 늦다.

 

도이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서책은 덮어 옆으로 내려놓고, 조금 초조한 마음이 되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키리마루가 부업으로 가져온 바느질거리며 서책 필사본이며 말린 약초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이 녀석은 대체, 기다리는 사람 생각을 해야지. 도이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일어나, 등롱을 찾아 들고 조리를 꿰어 신어 밖으로 나왔다.

 

밤중이다. 그래도 여름의 흔적이 남은 밤이라 마을에는 늦은 저녁 목욕 다녀온 사람이며 산책하는 사람 여럿이 지나다니고 있고, 아직 문을 연 가게도 꽤 있었다. 도이는 거리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야마사키 부인의 집으로 가볼 생각이었다. 혹시 그 댁에 붙잡혀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야마사키 부인은 키리마루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니까, 밤새 괜찮은 신랑감들의 명단이나 읊어 주려는 건 아닌가 싶다.

 

어느새 마을 끄트머리의 산길에 들어섰다. 야마사키 부인 댁으로 가려면 야트막한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 본래 인적이 많기 때문에 위험한 길은 아니다. 지금도 허리에 찬 칼을 덜그럭거리는 방랑 무사나 석장을 짚은 행각승, 보따리 짐을 진 상인 등 여러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다. 도이는 그들과 스쳐 가며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밤에 젖은 흙과 풀 냄새, 벌레가 찌르르 우는 소리가 선선하게 들려왔다. 역시 마을보다는 숲 쪽이 한결 시원했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를 헤집는 바람 소리며, 수풀 속에서 깜박이는 반딧불이며,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석등 빛이 길을 비춘다. 도이는 등롱을 끌까 싶었으나 나중에 다시 불붙일 것이 귀찮아 그대로 두었다. 키리마루가 보았다면 기름을 아끼라며 분명 잔소리 했을 것이다.

 

언덕을 다 올랐을까. 일순, 등롱의 불이 꺼졌다.

 

목덜미에 으스스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도이는 목을 움츠렸다. 걸음을 늦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등롱은 꺼졌지만 밝은 달빛과 석등의 불빛에 잘 다져진 길이 들풀 사이로 일렁이며 보인다. 도이는 스산함을 떨쳐내고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야마사키 부인 댁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니, 반가워하면서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온 부인은 도이의 말을 듣고 놀란 얼굴을 했다. 키리마루는 해지기 전에 떠났다는 것이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냐고 도리어 걱정스럽게 되물어 왔다. 도이의 얼굴에서 순간 핏기가 가셨다. 키리마루를 보면 연락해 달라 부탁하고 집을 등졌다.

 

언덕길을 오르는 도이의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대체 어딜 간 걸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유괴나……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겠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시 켠 등롱의 불빛이 잘게 떨렸다. 어서 찾아야지. 우선은 마을에 가서 순찰대에 알리고…… 이웃집이나 가게나 들를 법한 곳을 모두 찾아봐야 한다. 좀 더 빨리 와 봤어야 했다. 더 빨리, 어서, 서둘러 와봤어야 했다. 그는 자신을 질책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언덕 위에 다다랐을 때 다시, 등롱이 스르륵 꺼졌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도이는 멈추어 섰다. 곧이어 찬 손이 목덜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듯한 감각에 소스라쳐 주위를 둘러보니 지나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분명 어깨를 스쳐 지나갔던 행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시야에서 사라질 리가 없는데 아무도, 아무도 없다.

 

어른거리는 불이 보였다. 석등 빛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저편에서 행인이 들고 오는 것인가 싶어 반가웠다. 그러나 그 또한 아니었다. 희푸른 불이었다.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고 똑바로 타오르고 있다. 한 개, 두 개…… 갑자기 수가 늘어나 왼편의 수풀에서 줄지어 작게 흔들리며 마치 어떤 행렬처럼 천천히 움직여 간다. 도깨비불인가. 요괴가 장난치려 사람의 눈앞에 미혹의 등불을 켠다는 괴담 속의 불꽃이다.

 

기이한 일에 두렵기도 했으나, 멍청히 서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서 키리마루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몸이 움직여지지를 않았다. 식은땀이 관자놀이에 맺혔다. 밤의 산바람이 머리칼을 차갑게 흔들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그는 곁에서 어른거리는 도깨비불로부터 힘겹게 눈을 돌렸다. 석등 불은 꺼지고 달이 구름에 덮여 나무와 수풀 그늘에 덮인 길은 나락처럼 어두웠다. 


기이한 불덩이의 행렬은 왼편에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도이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떼었다. 멈추어 서면 안 된다. 쓰러지면 안 된다.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휴대하고 있던 수리검을 꺼내어 손등에 상처를 냈다. 핏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그 통증에 감각이 돌아왔다. 멎지 않은 핏방울이 다시 툭, 툭 떨어지는 그 발치에서, 그는 낯익은 것을 보았다.

 

달빛에 반짝이고 있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머리 장식이었다. 붉은 동백꽃 모양의 은장식이 달린 장신구. 그 애가 열네 살이 되었던 생일날 도이가 사 주었던 것이다. 그 애는 돈을 워낙에 아껴 장신구를 사는 데에도 인색했으므로 도이가 월급을 쪼개어 하나둘 자그마한 것들을 선물하곤 했었다. 이것을 받았을 때 그 애는 선생님도 참, 하고 핀잔을 주었더랬다. 이런 건 저한테 별로 필요 없으니까 기왕 사오실 바엔 먹을 걸 사오시라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밖에 나갈 때 머리에 자주 꽂고 다니는 것을 보아서, 그래도 마음에 들었나 보다고 안심했던 것이었다.

 

도이는 그것을 잠자코 움켜쥐었다. 스산함을 애틋함이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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