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크리스마스였다. 그리고 에스더는 죽어라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뛰는 게 특히 중요했다. 발자국도 남지 않게 나뭇잎 위로만 골라 도망치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에스더는 오던 길에 보초를 서던 독일군 심장에 박아 놓고 온 단검 한 자루를 기억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천 조각을 손잡이에 감은 것이었다. 단검이야 다시 지급되겠지만 천 조각이 아까웠다. 단검을 회수하고 증거인멸도 하면 천도 얻고 도망칠 시간도 벌 수 있었지만, 에스더에겐 불행하게도 때마침 자리를 비웠던 동료 병사가 돌아오는 중인 데다가 교대 시간이었다. 초소로 다가가던 에스더는 소리 없이 놀라 도망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줄곧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줄곧 달릴 수는 없었다. 에스더도 인간이었으므로.


목표는 양측 군사들이 대치하고 있는 지역. 한 번 대치선만 뚫으면 초소까지는 하루 남짓밖에 안 걸린다. 빠르게 걸으면 반나절만에 갈 수도 있었다. 군사대치지역까지 500미터도 안 남았음을 알려주는, 특이한 모양의 나무뿌리가 길가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 에스더는 뛰었다. 흰 눈이 뛴 자국을 따라 패여서 젖은 흙을 드러냈다. 숲 속의 산토끼가 불쑥 튀어나와 전쟁을 못 느끼고 두리번거리다 에스더에게 놀라 제 굴로 사라졌다. 약 300미터를 그렇게 달린 에스더는, 대치선이 눈에 들어오자 아무 나무에나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저 대치선을 눈에 띄지 않게 뚫어야 했다. 전투가 시작하면, 적군 참호를 따라서 이동하는 거다.


에스더는 가지고 있는 물자를 점검했다. 웰로드 소음권총에 탄알 7발, 콜트 M1911A1권총에 탄알 8발, 단검 두 개. 세개 들이 단검띠에 있는 빈자리 하나를 보고 에스더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저승가버린 그 군인과 눈만 안 마주쳤어도 스파이 완전무장으로 싸울 수 있었는데. 하지만 지나간 건 지나간 거였다. 에스더는 앉아서 적당한 오후가 되길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해가 적당히 나무 끝자락에 걸렸을 때. 영국군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스더는 독일군이 등지고 있는 언덕 등성이에 있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일어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영국군에게 있어서, 그날의 공격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것이었다. 에스더는 가슴에 오른손을, 등 뒤로 둘러맨 보자기에 다른 손을 얹었다. 가슴께의 안주머니에서 문서 하나와 작은 오르골 하나가 바스락 덜그럭거렸고, 보자기 안에서 독일군복 두 벌이 유난히 튀어보이는 것 같이 느껴졌다.


잠시 호흡을 고르면서 공세를 느낀다. 하나, 둘, 커지는 함성소리가 제 옆에 있는 것마냥 생생히 들려올 때까지. 마침내 때가 오자 에스더는 콜트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서 적군이 없는 취약점을 찾았다. 독일군들은 거의가 후퇴하는 중이었지만, 참호 최후방에도 빈 곳은 있었다. 에스더에게는 독일군 세 명이 모여있는 참호 한구석이 그랬다. 그녀는 참호 안으로 뛰어내리며 먼저 독일군 두 명의 머리에 정확히 한 발씩을 꽂아주었다. 나머지 한 명이 콜트 권총의 소음에 돌아보았지만, 바로 미간에 단검이 꽂혀 입을 다물게 되었다. 에스더는 그 자리에서 몇 초 더 대치한 다음, 주위를 돌아보고 나서야 단검을 회수하러 죽은 병사에게 다가갔다.


죽은 병사는 눈도 채 다물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 단검을 뽑자 날에 막혀 나오지 못한 피가 꿀렁거리며 배출되었다. 에스더는 무표정으로, 단검을 군복에 문질러 닦으며 시신에게 등을 돌렸다. 너무 많은 죽음. 에스더가 죽음을 무감각하게 대하는 자신에게 놀라지 않기 시작한 지도 벌써 몇 달째였다. 그녀는 다시 총을 고쳐쥐었다. 그리고 전장에 나갔다.


왼쪽, 오른쪽. 스파이 에스더에게는 전장이 낯설었다. 너무 많은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총알이 날아다니고, 사람이 죽어나갔다. 스파이 합동작전이라도 하면 적어도 어디에서 누가 뭘 하는지 알기라도 하지, 무작위적인 사태 발생은 에스더의 전문이 아니었다. 왼쪽, 오른쪽. 하지만 에스더는 적응하려고 애썼다. 어차피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물건을 안전하게 가지고 초소로 대피하는 것이지 싸우는 게 아니었다.


영국군 한 명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에스더 리베라!"


그리고 수많은 다른 적군들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저 멍청한 놈.


에스더는 본능적으로 엎드리며 단검 하나를 빼서 던졌다. 단검 하나가 앞에서 돌아보던 적군 하나에게 가서 꽂혔고, 거의 동시에 뒤에서 누군가가 총알로 동일한 군인 머리를 구멍내버렸다. 알고 보니 에스더가 속으로 외친 말을 똑같이 중얼거린 병사가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에스더 주변에 있는 병사 몇이 순식간에 죽어버렸고, 그 대가로 연합군 병사 몇도 목숨을 바쳤다. 죽은 몇 명에는 방금 전 에스더의 풀네임을 외쳐 독일군들을 끌어모은 얼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에스더 주위는 군사밀집지역이 되었다. 독일군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보호하려고 몰려나온 연합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에스더 귀에 대고 속삭거렸다.


"물건은 가져오셨습니까?"


"가져오지 않았으면 내가 여기 있지 않았겠지."


딱딱한 말투로 대답한 에스더는 속삭인 병사를 밀치고 연합군 초소 쪽으로 가는 길을 달려나갔다. 또 다시 달려야 했다. 독일군 참호는 복잡했지만 에스더의 머릿속에는 언덕 위에서 직접 본 조감도가 남아 있었다. 길을 확인해 가면서, 에스더는 달렸다.


끝없는 달리기의 결과로, 에스더는 전투 결과보다 더 빠르게 장교들의 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의 죽을상이었다. 군화는 피 범벅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채 보지 못한 총알 하나가 독일군 참호에서 에스더의 팔을 스쳐서 군복도 찢어져 있었다. 장장 3주간의 쉼없는 임무와 끝없는 달리기에 지친 에스더가 창백하고 핼쓱한 얼굴로 장교 막사를 열어젖혔다. 단호한 손놀림이었다.


덜컹, 덜컹,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지옥에서 돌아온 듯한 에스더의 깜짝 등장에 놀란 장교들이 단체로 움찔거리며 의자를 흔들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스더는 헐떡거렸다. 어쨌건 자기 숨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헐떡거리며 둘러보는 눈빛이 지나칠 정도로 희번뜩해서, 장교들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에스더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막사 안에 들어왔다. 바짝 말라붙은 입이 열릴 때, 장교들은 숨마저 삼켜야 했다.


"... 브리핑하기에 앞서."


앞서, 뭐? 장교들은 에스더의 입만 주시했다. 갈증에 말라비틀어진 입. 에스더는 입술을 침으로 한 번 축이고 말을 이었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에스더가 한 말은 다음과 같다.


"물 한 잔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장교 하나가 마시던 컵을 내밀었다. 에스더가 그 컵을 받아 오랜만의 맥주를 원샷하는 군인의 마음으로 한 번에 들이켰음은 물론이다.


*


"콜린스, 콜린스!"


공군 대위 파리어가 장교 막사에서 나오는 에스더를 본 후 찾은 건 소위 콜린스였다. 금발, 푸른 눈, 하얀 얼굴. 눈에 확 띄는 외모를 하고 있는 그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대위님?"


콜린스의 눈이 다소 동그래졌다. 그토록 급하게 달려오는 파리어를 본 적이 몇 번 없기 때문이었다. 스핏파이어를 타고 달려가는 파리어라면 모를까. 그는 임무가 있나, 하고 긴장했지만 곧 이어지는 파리어의 말에 주책없이 환하게 웃고 말았다.


"에스더가 왔군."


주책 없이, 에 주목해보자. 콜린스는 행복해서 눈마저 풀릴 지경이었다.


"입 좀 다물지."


"헛."


콜린스는 입술을 말아넣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눈빛으로 물었다. 에스더 어디 있는지 말해주시겠습니까? 되도록이면 빨리 말입니다.


"장교 막사에서 나오는 걸 봤네. 아마 지금쯤 자기 개인 막사에서 쉬고 있을 거야."


"전 안 만나러 오고 말입니까?"


"넌 근무 중일 시간 아닌가. 에스더가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리고 많이 지쳐보였어.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마지막 말은 콜린스가 듣지 못했다. 많이 지쳐보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에, 바로 파리어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에스더의 막사가 있는 쪽으로 달려나갔으니까. 파리어가 콜린스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고,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심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에스더는 품 속에서 오르골을 꺼내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군복과 문서는 장교들에게 넘겨주고 왔다. 군복 두 벌 중에 하나는 에스더, 나머지 하나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소속 스파이의 것이었고, 문서는 독일군 암호로 작성된 기밀이었다. 하지만 오르골은 다르다. 오르골은 에스더가 매번 임무를 나갈 때마다 챙겨오는 기념품의 일종이었다.


전장에서 오르골은 꽤 희귀하다. 희귀함 정도로 따지면 가족 정도로 희귀하다. 누가, 어떻게 그 빡빡한 독일군 내부로 오르골을 반입할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독일군 초소에는 오르골이 있었고 이제 그건 에스더 소유였다. 에스더는 오르골을 들고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태엽을 감는 장치가 한쪽에 있었지만 그걸 감아도 뚜껑은 열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수동으로 해야 하는 구조인 듯싶었다.


에스더가 오르골 뚜껑에 손을 얹었을 때, 에스더의 막사 입구가 박력있게 열렸다. 에스더는 뚜껑에 손을 올려놓은 그대로 멍하니 막사 입구를 바라보았다. 금발에 키가 참 크기도 한 콜린스가 비장하게 행복한 표정을 하고 그곳에 서 있었다.


콜린스가 에스더의 막사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들락날락했다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개인 막사를 쓰는 사람은 병영 전체에 에스더 하나밖에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높은 계급, 예를 들면 사령관 수준의 장교가 아니고서야 개인 막사를 쓸 수는 없었다. 에스더가 예외인 이유는 그녀가 MI6에서 파견된 스파이 인력이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쨌건, 빠르게 에스더의 막사를 찾은 파리어는 '비장하게'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에스더에게로 다가왔다. 그 표정이 어찌나 엄숙하던지, 에스더가 문득 자신을 보고 놀라 얼어붙은 장교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당당한 발걸음으로 다가온 콜린스는 에스더를 품에 꼭 껴안았다.


"콜린스. 잠깐만. 나 이거 오르골 ..."


"보고 싶었어, 에스더."


다정한 말. 따스한 온도. 눈 옆으로 보이는 금발과 입술에 맞닿는 목덜미. 에스더는 오르골을 슬쩍 옆에 내려놓고 콜린스를 마주 안았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나 괜찮아. 살아 있어."


"고마워, 살아 있어줘서."


또 따뜻한 말이다. 몇 주 만에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에스더는 애써 콜린스를 밀어내었다. 순순히 밀려나준 콜린스는 의자를 가져와 침대에 걸터앉은 에스더 앞에 앉고는, 지친 에스더를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콜린스 눈에 에스더는 엉망이었다. 온통 때가 묻어있질 않나, 눈그늘이 진하게 져있질 않나, 총알이 스친 팔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고 ... 그래도 사랑스러운 건 콩깍지가 끼었기 때문일까. 콜린스는 진지하게 자신의 미적감각을 고심했지만 결국 에스더가 예쁘다는 쪽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었다.


에스더 눈에 콜린스는 완벽했다. 그 푸르디푸른 눈동자 밑에는 피곤한지 눈그늘이 져있었지만 제 눈그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피부가 백옥같이 티끌 하나 없었다. 매일 훈련하고 비행기를 타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운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금발은 언제나처럼 밝았다. 마치 불 하나가 머리카락에만 켜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팔. 에스더를 안아준 ... 그 팔.


"왜 이렇게 고생했어."


콜린스가 말했다. 에스더가 질세라 받아쳤다.


"너 대신 내가 고생한 거야. 너 전쟁 조금만 하고 바로 집으로 가라고. 내 어머니 만나뵈어야지."


콜린스가 웃으며 에스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빗지 못해 거친 머리칼이 손에 엉켰다가 이내 풀어졌다. 이마에 입을 맞춰준 콜린스는, 에스더가 들고 있던 오르골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이번 기념품은 오르골로 가져온 거야?"


"아, 응."


에스더는 오르골 뚜껑을 젖혔다. 안에서 뭔가가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인형이 있었는데 뽑혀 나간 듯 싶었다. 간질간질한 느낌의 음악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음악은 어느 순간 톡톡 튀다가도, 어느 새 가라앉아 흐르곤 했다. 물살이 굽이치다가 갑자기 숲을 표현하곤 했다. 준구난방으로 어지러웠지만 전쟁터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감성적이었다. 마치 ...


"왈츠네."


콜린스가 말했다. 에스더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쿵, 짝, 짝, 하고 계속되는 게 잔잔한 왈츠음이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음악을 듣는데, 갑자기 콜린스가 에스더 손을 잡아왔다.


"출 줄 알아?"


"뭐, 여기서 추자고?"


에스더가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콜린스는 진심이었다. 그는 지친 에스더를 부드럽게 에스코트해 일으켜주고, 오른손을 맞잡곤 왼손을 에스더 어깨에 감은 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될 게 뭐가 있어."


에스더는 대답없이 발을 옮겼다. 하나, 둘, 옮기는 발이 콜린스의 것과 맞물려 왈츠 스텝을 만들었다. 둘은 한 몸처럼 움직였다. 중간에 콜린스가 에스더를 한 바퀴 돌렸을 때도, 에스더가 박수를 치면서 콜린스 주변을 가볍게 돌았을 때도, 마침내 에스더가 열심히 감아놓은 태엽이 끝나자 콜린스가 지친 에스더를 가볍게 들어올려 침대에 눕혀주고 잠들 때까지 손잡아 주었을 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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