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미래 날조.







비가 내렸다. 바람 한 점 없이 곧게 내렸다. 하늘은 미친 듯이 어두웠지만 아직 밤은 아니었다. 회색빛, 어쩌면 잿빛일지도 모르는 색깔이 노을을 삼켜버린 날이었다. 평소와 달랐지만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가 내 앞에 나타날 때까지만 해도 그 날은 전혀 특별하지 않았고 내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냥 지나가는 날 중 하나에 불과했을 그 날이 지금도 떠오르는 이유는 아마도,


“네가 아팠으면 좋겠어.”


바쿠고가 울고 있었기 때문일까.





사랑이라는 녀석

Written by. 비에





미도리야는 생각보다 술이 강했다. 잠깐 졸고 일어나 보니 그의 앞에 술병이 너저분하게 깔려 있었다. 아직도 내 앞에 반병의 술이 남아있는 것과는 대비되는 장면이었다. 조금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술이 안 깬 모양이다. 미도리야 쪽의 테이블을 보고 있었더니 곧 그와 눈이 마주쳤다. 미도리야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기울였더니 눈앞이 빙글 돌았다. 함께 돌아간 시선 너머에 취해서 쓰러진 애들이 한가득 들어찼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술잔과 남은 술병을 들고 미도리야의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미도리야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거리를 두고 나와 떨어졌다. 왜지? 묻지 않아도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 나는 술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설마 싶었지만 이 많은 술을 혼자서 다 마신 건가.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버릇이 취기와 함께 튀어나왔다.


“이걸 혼자 다 마신 거야?”

“으응…. 다들 생각보다 일찍 취해서,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그는 옛날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삐죽삐죽한 헤어스타일도, 동그란 눈동자도, 볼의 주근깨도. 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대로였다. 미도리야는 나를 배려해 거리를 두었지만 나는 일부러 그 거리를 좁혔다. 괜찮으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도 술 마셔서 냄새 장난 아닐 테니까 정말 상관없었다.


술기운에 시야가 좁아서 방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이이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그도 참 변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취해서 텐션이 올라간 애들을 조용히 진정시키는 걸 보면 문득 반장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옛날에도 저런 식으로 냉정한 컨트롤러가 되어줬지. 옛날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신경을 마비시킨다. 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의외네.”

“뭐가?”

“이이다도 술이 강했어.”

“응? 아니야. 이이다 군은 술 안 마셨는걸.”

“그런가.”


자신이 취했다고는 해도 사실 속으로는 꽤 부정하고 있었는데 정말 취한 게 맞는 모양이었다. 꾸벅꾸벅 졸았던 것은 대충 기억나는데 그 앞뒤의 기억이 없다. 술이 약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 처음 술을 마셨던 날 나는 술 한 잔에 펄펄 열이 끓었다. 첫 술은 아버지와 함께였고 누나는 불편한 사람과 마셔서 그랬을 수도 있다며 밤새 나를 간호해주었다.


“토도로키 군. 꽤 취했어?”

“그런 것 같아.”

“토도로키 군이야말로 의외네. 되게 잘 마실 줄 알았어.”


미도리야의 눈이 반으로 가늘게 접혔다. 아. 정말 미도리야는 옛날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구나. 그럼 나는 어떻지. 나는 조금 달라졌나. 아니면 나는 아직도 그 날의 토도로키 쇼토인가. 멀리,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눈의 초점을 맞추었다. 흐릿한 눈앞을 선명하게 조정하면서 조금 바랐다. 과거와는 달라진 자신이 비치기를.


옛날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꼭 스쳐가는 장면이 있다. 빗방울이 우산을 때렸던 날. 아주 올곧게 내리며 모든 소리를 집어 삼키던 날.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았고 다음 날로 시간이 넘어갈 때까지 그럴 것이라고 믿었던 날의 기억이었다. 그 날은 비가 왔고 바쿠고의 우산은 젖어 있었다. 우산과 함께 젖은 바쿠고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끝내, 내 앞에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아마 그 녀석은 곧바로 부정하겠지. 빗방울이었다고 끝까지 부정하며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바쿠고의 눈물이라고 믿고 싶다.


초점을 맞추기 위해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유리 안에 비친 나는 없었다. 그 자리는 키리시마가 대신했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키리시마가 헤벌쭉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이다로 인해 금방 제지당했다.


“이거이거, 자는 줄 알고 내버려 뒀더니 아니었네. 토도로키 군, 괜찮아?”

“아.”

“푸하핫―! 토도로키 어어어엄청 놀란 표정! 그래도 변화가 별로 없네. 아. 맞다! 얘들아, 그거 알아? 오늘 바쿠고 못 온다는… 악!”

“벌써 다섯 번은 더 들었다.”

“아하하… 키리시마 군 술버릇은 했던 말 또 하는 건가봐.”


이이다의 주먹이 그대로 키리시마의 정수리에 들어갔다. 울먹거리며 어리광을 부리던 키리시마는 바로 잠들었다. 눈은 그들을 보며 남은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다. 이명이 온 것처럼 귀 주변이 멍해졌다. 소리가 점점 귓가에서, 그리고 몸에서 멀어진다. 나는 그 소리들을 붙잡을 힘도 없이 그대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그곳에는 열여섯의 나와 열여덟의 내가 있었다. 결국 나는 그 때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나. 머리가 울렸다. 속이 답답했다.


“어, 토도로키 군. 어디 가?”

“잠깐. 속이 안 좋아서.”

“같이 가줄까? 괜찮아?”

“미도리야…. 괜찮아. 걱정하지 마.”


너의, 힘이잖아. 아버지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는 척 흉내만 내고 있던 내게, 미도리야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밖을 빠져나가면서 계속 그 말을 떠올린다. 그 말과 함께 느꼈던 감정과 감각과 모든 기억을 끌어올린다. 시험, 합숙, 그리고 다시 체육대회. 골목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품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은 숨을 마신다.


마지막 체육대회에 바쿠고는 출전하지 않았다. 체육대회가 막을 내리고 시상식마저 끝났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은 짙게 깔린 먹구름이 차지했다. 비가 내릴 것 같다는 모두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던 비가 점점 굵기를 키웠다. 학교에도 우산이 없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바쿠고가 왔다.


「토도로키. 나는 네가…,」


바쿠고의 손에는 우산이 있었다. 그런데도 바쿠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있었다. 거세지는 빗방울에 못 이겨 결국 풀려버린 붕대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내게 한 발자국씩 다가올 때마다 바쿠고는 입을 열었다. 입 안에 공기를 넣어 무언가를 토해냈다. 그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나를 향한 올곧은 감정.


눈앞에서 바쿠고가 사라졌을 때 내게 남은 것은 그가 쥐어준 우산뿐이었다. 그는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프고 아파서 제 꼴이 나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내가 젖지 않도록 쥐어준 우산이 모순적이어서 나는 그가 참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렸다. 그게 전부였다. 바쿠고가 한 말은 그 때의 내게 너무 어려운 말들이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 정말 나는 그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내가 되었다.


끝까지 타버린 담배를 발로 비벼 껐다. 무릎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에게서 나는 술 냄새, 그리고 담배 냄새. 역겨웠다. 이런 역겨운 점들만 달라져서 어쩌겠다는 거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그 때도 울 것 같았다. 왼쪽 가슴, 어쩌면 심장일지도 모르는 곳에서 느껴지는 아픔이 눈물을 건드렸다. 바쿠고를 따라 울었다면 조금쯤은 그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그가 하는 말이라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본다. 도시의 밤하늘에는 별이 몇 개 없었다. 없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믿고 보이는 것만 믿으니까. 주변에서 하는 칭찬에도 불구하고 나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라 내가 보고 싶고 보이는 것만 믿었다. 미도리야의 한 마디로 구원받았으면서도 나는 아직도 열여섯의 꼬맹이였다. 열여덟의 내가 나를 비웃는다. 자기도 별반 다르지 않은 주제에.


웃기지도 않은 옛날 기억에 감각이 무뎌진다. 슬슬 일어나야겠다. 옷에 잔뜩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리고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것은 내가 위를 보기도 전에 하늘에서부터 후두둑 쏟아졌다. 비였다. 소나기인지 뭔지 모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 빨리 들어가야…,”


우산 끝이 땅에 끌렸다. 우산이 물을 머금고 추락했다. 투명한 우산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익숙한 것처럼 낯설었다. 처음에 키리시마, 뭐라고 했더라. 바쿠고가 못 온다고 했지. 왜 못 온다고 했더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바쿠고의 얘기가 나왔던 최초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순식간에 사고가 정지한다. 담배를 넣으려던 손이 떨렸다.


“… 바쿠고.”

“토도로키냐. 좀 변했네.”


미안. 바쿠고. 나는 그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    *    *





기억 속의 바쿠고는 늘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미도리야에게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소꿉친구라고 했으니 잘 알 것 같아서였다. 미도리야는 조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잘 모르겠다고 했다. 심각한 문제도 아니고 단순한 호기심정도였기에 나는 거기서 궁금해 하는 것을 멈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끈질기다거나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 이유를 알았어야 했다.


비가 오던 날 한 쪽 팔에 붕대를 감은 바쿠고는 울었다. 내게 우산을 쥐어주고 뒤를 도는 그 때까지도 그는 울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본 바쿠고의 표정 중 유일하게 화가 나지 않은 것이었다. 화를 내지 않는 바쿠고는 너무 어색하고 낯설어서 나는 그가 하는 말에 하나하나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아. 아니, 아니다. 딱 하나. 그 날 바쿠고가 했던 수많은 말들 중 딱 하나에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지자. 그래. 열여덟, 반 년 동안의 연애는 겨우 한 마디에 끝났다. 좋아한다고 말하기까지는 그렇게 힘들고 아팠는데 헤어지는 것은 너무 쉬웠다. 겨우 말 한 마디 주고받은 것이 전부였는데, 겨우 그 하나가 모든 함께했던 시간을 휩쓸었다. 마치 폭풍처럼. 함께했던 시간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내 안을 게워냈다. 그렇다면 텅 빈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대체 무엇으로 너를 대신해야 해? 너는 나보다 똑똑하니까 알려줘. 알려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내가 할게.


“… 내가, 감당할게…….”

“깜짝이야. 갑자기 일어나서 무슨 소리야. 속은 좀 괜찮냐.”


바쿠고?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 바쿠고다. 급하게 눈을 떠 흐린 초점을 맞췄다. 아직도 조금 흐릿하고 주변이 조용한 듯 시끄러웠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바쿠고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하지만 조금은 달라진 얼굴이 눈동자에 가득 들어찼다.


“야. 토도로키. 너 괜찮냐고.”

“… 미안.”


낯설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호칭도, 얼굴도. 모든 것이 그냥 봐서는 눈치 채지 못할 만큼만 달라져서 더 낯설었다. 차라리 나도 달라졌다면 싶었다. 조금이라도 열여덟의 토도로키 쇼토와 다른 모습이었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스스로 말해놓고도 이런 기분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좋은 쪽은 아닌, 그런 기분. 속에서부터 울컥 올라오는 기분이 심장을 뜯어먹는다. 끝에서부터 조금씩 아주 천천히 갉아서 뜯고 씹어 삼켜버린다.


“기사님. 저기 세워주세요. 계산은 이걸로 해주시고요.”

“…… 택시?”

“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냐.”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그럴 여유 따위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흐릿한 풍경만이 눈에 들어오는 척할 뿐이었다. 초점은 그 이후로도 계속 돌아오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린 뒤에는 코앞에 있는 바쿠고의 얼굴마저 흐릿했다. 마치 각막 바로 위에 안개가 낀 것 같은 답답함이었다.


“좀 걷자. 데쿠 녀석한테 네 집 주소 물어봤어.”

“아…. 미안.”

“괜찮아. 네가 그렇게 쓰러진 데에는 내 책임도 있는 것 같으니까.”

“나, 쓰러졌었어?”

“기억 안 나?”

“미안.”


우산 끝에서는 빗방울이 흘렀다. 바쿠고는 우산을 접고 있었고 나는 담뱃갑을 품 안에 넣으려고 했다. 거기에서부터 기억이 없다. 눈에 보이는 장면은 없고 몇 개의 목소리가 왔다 갔다 한 것은 기억한다.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내 주소를 묻는 바쿠고와 곤란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알려준 미도리야일 것이라고 짐작만 했다.


“어, 우산.”

“우산? 아. 이런. 안 가져왔다. 뭐, 어때. 이제 비도 안 오는데.”


깨고 나서부터 계속 정신이 없어서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는데 하늘에서는 비가 그쳤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비가 그쳤는지도 모를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을 텐데. 문득 누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처음 아버지와 술을 마셨을 때 겨우 한 잔으로 열이 올랐던 날 누나는 말했다. 불편한 사람과 마셔서 그렇다고. 그 말대로라면 아직도 취기가 가시지 않는 것은 바쿠고 때문이다.


이 울렁거림은 모두, 전부, 너의 탓이다.


“욱…, 우욱.”

“어? 야, 야야. 너 괜찮아? 토할 것 같아?”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일렁인다. 눈앞에서 온갖 감정의 이름이 일렁였다. 내가 읽을 수 없는 단어가 형태를 얻어 나를 괴롭힌다. 괴롭다. 괴롭다고, 빌어먹을. 토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이 빌어먹을 감정을 토해낼 수만 있다면 나는 몇 번이라도 손가락을 목구멍 끝까지 쑤셔 넣을 것이다. 그 동안에는 숨을 못 쉬어도 좋으니까 제발. 바라고 바랐다. 나는 바쿠고가 옆에 있는지도 잊고 두 손을 모았다.


“토도로키.”

“하…, 아, 아아….”

“나 좀 봐.”

“미안, 미안… 나, 는 괜찮으니, 까…, 이제 그만, 가. 가, 바쿠고.”

“너 오늘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다섯 번 했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그곳에는 분명 바쿠고가 있을 테니까. 아무리 흐릿한 시야라도 그 속에 바쿠고가 들어차면 나는 분명, 그 때 하지 못했던 말을 할 게 분명했다. 나도 예상할 수 없는 말들. 미련이 덩어리 져서 딱딱하게 굳은 감정. 썩고 곪아서 비틀어진 감정은 추하고 더러웠다. 내 것을 내가 봐도 이렇게 끔찍한데 이걸 어떻게 너에게 보여줄까.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어서 입을 닫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모두 닫았다.


바쿠고는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안았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손으로 내 뒷머리를 눌렀다. 나는 그 품안에서 나오고 싶어 버둥거렸지만 그는 날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뒷머리를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결국 나는 벗어나기를 포기하고 몸에 힘을 풀었다. 몸에 힘을 푼 것뿐인데 마음도 가벼워졌다. 바쿠고 앞에서 주었던 모든 긴장과 허세가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가벼웠다. 가볍고 역겨웠다.


“이제, 됐어. 진정 됐어.”

“그 날 내가 너한테 했던 말들, 기억하냐.”


비가 내리던 날 우산을 쓰지 않은 바쿠고는 천천히 걸음을 끌었다. 그에 우산도 함께 끌려왔다. 질렸다고 했다. 나한테 질린 게 아니라 나랑 하는 연애가 질렸다고 했다. 나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나와 함께하고 싶지만 동시에 그 시간들이 자신에게는 버겁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 때의 바쿠고는 정말로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젠 나도 잘 모르겠다. 헤어질까.」


아아. 그래. 그랬었지. 바쿠고는 헤어지자는 결정을 뱉기 전 내게 선택권을 주었다. 내가 선택하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 때의 바쿠고가 낯설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했다. 바쿠고는 헤어지자고 했고 나는 그러자고 했다. 열여덟의 연애가 끝났던 순간 바쿠고는 내 손에 우산을 쥐어주며 말했다.


「네가 아팠으면 좋겠어.」


나도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쿠고. 결국 너와 나는 같은 것을 바랐다. 그런데도 두 개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 때문에. 열여덟의 나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스물여덟의 나는 어떻지. 지금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바쿠고를 보고 있지. 어떤 이름의 감정으로 바쿠고의 품안에 있는 거지.


“바쿠고. 그 때 하지 못했던 말이 있어.”

“하지 마.”

“나도 내가,”

“하지 말라고.”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뒷머리를 누르는 손에 힘이 빠졌다. 그 손은 스르륵 내 등을 쓸고 끝내는 나와 떨어졌다. 동시에 나를 누르던 압력도 사라져서 나는 그대로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아픈 건 난데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 바쿠고였다. 그 때도 그랬다. 이별을 통보 받은 것은 내 쪽인데 울고 있었던 건 바쿠고였다. 나는 그가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그를 힘들게 하고 버겁게 했던 시간만큼 내가 아프기를 바랐다. 비록 그 시간은 이별이 쌓은 폭풍이 부숴버렸어도 내 기억 속에는 남아 있으니까. 기억 속의 시간이 바쿠고 대신 나를 아프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때도 지금도 아픈 건 늘 바쿠고의 몫이다.


“울지 마. 바쿠고.”

“안 울어.”


오늘은 비도 내리지 않는데 바쿠고는 울지 않는다고 한다. 핑계거리도 없는 주제에 허세 부리는 점은 변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낯선 바쿠고와 익숙한 바쿠고가 겹쳐서 눈앞에 일렁인다. 아아.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혀 아래에서 무참히 부서졌다.


“너를 좋아했어. 빌어먹게도 너를, 정말 좋아해서, 나는….”

“미안해.”

“토도로키. 나 아파.”


키리시마는 바쿠고가 다쳤다고 했다. 빌런과의 싸움에서 크게 부상을 입어 일주일간 입원했다가 어제 겨우 퇴원했다고 했던가.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후유증은 남는다고도 했던 것 같다. 굳이 본인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웃옷을 들어 올리면 살 위로 붕대가 칭칭 감겨 있을 것이 분명했다. 보이지 않는 곳의 상처와 가로등 불빛 아래 작은 상처들이 그의 부상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기 온 건…, 네가 있을 것 같아서.”

“바쿠고.”

“오늘을 마지막으로 하자고 결심했다. 마지막으로 네놈 낯짝을 보고, 끝내자고.”

“있잖아, 바쿠고.”

“십 년이다, 멍청아. 우리 둘 다 십년 동안 뭐 한 건데. 젠장.”


그 날 바쿠고의 눈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졌다. 빗방울인지 눈물방울인지 모를 그것은 볼을 타고 흘러 턱 끝에서 떨어졌다. 그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바쿠고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쿠고를 따라 울면 그를 조금쯤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날 바쿠고의 눈에서 떨어진 것은 빗방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따라 울 수 없었던 거였다.


“바쿠고. 내 말 좀, 들, 어봐.”


지금 이 시간 그의 눈에서는 진짜 눈물이 떨어진다. 그리고 내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진다. 십년이라는 시간이 쌓아올린 눈물은 너무 많다. 폭풍조차 그 눈물들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통해 감정을 쏟아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쿠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너도 내가, 아프길, 바랐고. 나도, 내가 아프, 길 바랐잖, 아.”


이제야 겨우 취기에서 벗어나 너를 똑바로 볼 수 있었는데 다시 눈앞이 흐려진다. 눈을 깜빡이면 눈물이 떨어져 조금 선명해졌다가도 다시 차오르는 탓에 나는 끝까지 네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래도 네가 변했다는 것은 안다. 아직도 열여덟 그대로인 나와 스물여덟의 네가 마주한다. 열여덟의 너는 내가 아프길 바랐다. 열여덟의 나도 내가 아프길 바랐다.


그게 십년이나 지나서야, 우리는.


“바라는 거, 이루어졌어….”


나는 아직도 어리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네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니까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친구로서든 연인으로서든 동료로서든 마찬가지겠지. 그럼에도 나는 우리의 관계가 여기에서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 새로운 소원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가, 내 품에서 울던 날에 비는 소원.


드물게도 무수히 많은 별이 보이던 밤. 비가 내렸다가 그친 날의 밤, 스물여덟의 나는 그를 껴안고 울고 웃으며 소원을 새긴다. 이제야 이름을 찾은 사랑이라는 녀석에. 한 글자 한 글자씩 소원의 말을 적는다.









쓰고 싶은 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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