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서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첫 번째로 든 생각은 안도감이었다. 지금의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 그의 눈동자를 우유니 소금 사막 같다고 했던가. 한 가지 달라졌다면 이뿐이었다. 조금 더 깊어졌다고 해야 할까. 원래도 무척이나 깊었지만 지금의 눈동자는, 10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간 듯 끝이 보이지 않는 물속을 보는 것처럼 아득하다. 그의 앵두 같은 입술도 그대로였다. 이도 달라졌다면 더 이상 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것뿐이다.


"…."


그의 침묵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이제야 내 눈앞에 나타났냐고. 그러나 이건 내가 되묻고 싶은 말이다. 도대체 어디 숨어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냐고.

나는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말을 다시 꺼내어 곱씹었다. 마음 속에서 작은 것들이 조금씩 자라나 풀처럼 무성하게 뒤덮는 것,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거라….

어쩌죠, 할머니. 그 작은 것들이 이미 풀처럼 무성하게 자라나 제 마음을 덮어버렸는걸요.

그가 떠나고 제 마음은 풀이 무성한 채로, 그대로 굳어 있었는데,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들어 조금씩 없어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를 다시 마주하니까 시들어 죽은 줄 알았던 풀들이 꼿꼿하게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어요. 처음보다 더 무성하게, 더 빽빽하게.

이제 그만 자랐으면 좋겠는데. 어쩌죠, 할머니. 더 이상 자라면 제 몸이 풀로 꽉 차 터져버릴 것만 같아요. 심장이 시큰거려요.


어쩌죠, 할머니.

10년이나 지났는데도,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데도,

저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나 봐요.





- 마음 속에서 작은 것들이 조금씩 자라나 풀처럼 무성하게 뒤덮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w. 라월





"마음 속에서 작은 것들이 조금씩 자라나 풀처럼 무성하게 뒤덮는 것,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거라…."



따뜻한 입김이 하얀 물방울이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 말은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항상 날 볼 때마다 중얼거리시던 말이었다. 내가 태어난 후 할머니를 만나고,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이 그 말이었다. 할머니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아니 한글조차도 모르는 갓난 아이였던 나에게 항상 말씀하시곤 하셨다. 맞벌이로 바쁜 엄마 아빠로 인해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내가 제일 먼저 한 말도 저 말이었다. 거의 칭얼거리는 듯한 옹알이로 말해서 비록 알아들은 건 할머니뿐이었지만.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때도, 결국 찾지 못했다. 깨끗한 물처럼 너무나도 순수할 때라 저 말을 마음속에 늘 새기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찾을 수 없었다. 되게 순수한 마음으로, 나는 궁금해했다. 마음에서 자라나는 작은 것들이 뭔지 궁금해했고, 그게 왜 풀처럼 자라나는지도 알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 당시 나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깊이 있는 생각을 하지 못할 때였으니까. 어렸을 때 나는 표면적인 것이 궁금했을 뿐이었지, 추상적인 건 풀어보려고 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러라고 시키지도 않았으니까. 가끔씩 만나는 할머니만 그렇게 말씀하셨다. 올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꼭 알아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할머니는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아름답게 미소 지으셨다. 할머니의 고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주름도 함께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내 어린 마음이 점점 자라나면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도 함께 사라져갔다. 그러면서 할머니의 말씀도 내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내 기억 속에서 작은 파편처럼 존재했을 뿐이었다.

중학생 때 할머니의 말씀은 이미 기억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뵌 지도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중학생으로 살아가면서 생각할 게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주위에서 쏟아지는 기대와 시선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생각이라는 자체를 하지 않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꽃샘추위가 꽃을 샘내는 것도 모자라 얇은 옷을 입는 것도 샘내면서 서늘한 바람을 계속 불러오는 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정말 마지막, 삶의 끝자락에서도, 할머니는 나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셨다.



"마음 속에서 작은 것들이 조금씩 자라나 풀처럼 무성하게 뒤덮는 것, 그게 무엇인지, 꼭, 알아내거라…."



그 말을 끝으로 할머니의 손은 더 이상 나를 쓰다듬지 못하고, 떨어지는 낙엽처럼 아래로 힘없이 내려앉고 말았다. 낙엽이 촉촉한 땅에 수북이 쌓이는 것처럼 할머니의 그 말씀도 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슬슬 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하는 3학년의 어느 여름 날,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 책상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1교시는 한문,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그냥 평범한 과목이었다. 재미있지도, 그렇다고 지루하지는 않은. 45분을 무난히 넘어갈 수 있는. 나에게는 그저 그런 과목일 뿐이었다. 담임 선생님이기도 한 한문 선생님은, 문 밖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말씀하셨다.



"잠시만, 오늘 전학생이 있어서 데리고 올게."



고요한 검은 바다처럼 조용하던 반은 한문 선생님의 한 마디로 인해 빠르게 소란스러워졌다. 한참을 전학생이 누군지에 대해 토론하던 친구들은, 낯선 실루엣이 보이자마자 하나 둘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교탁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그의 단정한 검은 머리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그의 눈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우유니 소금 사막을 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듯했다. 가장 못생겼다는 나이대인 중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부드러운 피부와 앵두 같은 입술도 나의 시선을 잡아놓기에 충분했다. 많은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며 그는 한문 선생님 옆에 바르게 섰다.



"이 잘생긴 친구의 이름은 박지훈이야. 지금은 수업이 늦었으니 소개는 나중에 하자. 괜찮지, 지훈아?"



잘생겼다는 말에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어여쁘게 웃던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다니엘 옆자리가 비었으니까, 저기로 가서 앉으면 돼."

"…네."



목소리마저도 아름다운 그가 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너무나도 빤히 바라본 탓이었을까, 그는 볼에 꽃 핀 장미처럼 얼굴을 살짝 붉히며 아름다운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그가 내 옆자리로 다가와 앉으려고 하자 꽃처럼 향기로운 그의 체향이 나에게로 번졌다. 나는 그의 매력적인 향기에 매료되었다. 그가 몸을 의자에 앉혔을 때, 그의 앵두 같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싱그러운 눈웃음과 함께.


"안녕?"


나는 차마 인사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천사 같은 그가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릴까 봐. 대답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게 머쓱했는지 그는 헤, 웃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문 책을 꺼냈다. 그새 한문 선생님은 수업 준비를 마치고 스크린 앞으로 다가갔다.


"자, 오늘은 신습한자 배우는 거 맞지?"


여기저기서 친구들이 네, 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그는 필통까지 다 꺼내고서야 그의 아름다운 눈을 선생님 쪽으로 향했다.


"여기를 봐. 첫 번째 한자는 사랑할 자야."


한문 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귓가로 희미하게 들어왔다.



"풀 초에 작을 요자, 그리고 아래에는 마음 심."



한문 선생님을 계속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나였다.



"그래서 얘는 이렇게 보면 돼."



박지훈. 가슴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던 그의 이름표가 작게 반짝였다.



"마음 속에서 작은 것들이 조금씩 자라나 풀처럼 무성하게 뒤덮는 것, 그게 사랑이야."



만난 것 같아요, 할머니.

아름다운 눈을 가진 그는 나를 넓은 들판에 자그마한 풀꽃을 보듯이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   *   *





지금 그가 내 눈앞에 서있다. 1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그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그의 푸른 초원처럼 맑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다니엘."


나는 기도했다. 그도 나와 함께 넓은 초원을 함께 키워갈 수 있기를. 서로를 사랑하며 초록빛 밖에 없던 초원에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수 있기를.


"안녕."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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