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나 때문에 너무 늦는 거 아니에요?”

“……응? 아아, 괜찮아. 어차피 가서 기다려야 하고…… 어쩔 수 없지.”

조수석에 앉은 시호가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답했다. 운전 중인 후루야가 슬쩍 시호를 곁눈질했다. 무슨 약속이 있다고 했다. 주말이면 무조건 집콕인 시호가 약속이라니 보기 드문 일이었다. 덕분에 후루야는 시호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급하게 경찰청으로 불러내 부려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대신 볼일이 끝나면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 달라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샴푸 바꿨어요?”

“응? ……샴푸? ……으응, 아니. 왜?”

약속 상대와 라인이라도 주고받는지 시호는 도통 화면에서 눈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후루야의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아까부터 대답이 반 박자씩 느렸다.

“향이 바뀐 것 같아서요. 재스민 향도 나는 것 같고… 상큼한 과일 향도 좀 나는 것 같고…….”

후각에 정신을 집중하며 후루야가 말했다. 사실 오늘 만날 때부터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밀폐된 공간인 지금은 더더욱. 화사한 재스민 향과 상큼한 레몬 향이 어우러져 그리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은은한 향기. 왠지 샴푸는 아닐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건.

“아아. 향수 냄새일걸?”

그렇다. 향수.

만개한 순백의 재스민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향이었다. 꽃향기라고는 하나 톡 쏘는 법 없이 오히려 포근함이 느껴질 정도로 잔잔했다. 시호의 전신을 감싼 우아한 향기는 후루야의 취향에 꼭 들어맞았다.

“향 되게 좋네요.”

“그렇겠지. 이거 후루야 씨가 고른 거잖아.”

시호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후루야는 금시초문이었다. 시호한테 향수를 골라 준 적이 있었나 기억을 뒤적여 봐도 향수는 기억나지 않았다. 옷이나 가방이라면 몰라도.

“내가요? …기억 안 나는데.”

“뭐, 벌써 2년 전이니까.”

2년 전이라. 어렴풋이 기억났다. 후루야는 그때 백화점 1층 매장을 돌아다니며 머리가 아플 정도로 시향지를 맡고 다녔다. 이제 막 대학생인 여동생에게 줄 선물이라고 하자 직원은 반색을 하며 이런저런 향수를 추천해 줬다. 나이를 의식해서인지 아무래도 시트러스 계열의 추천이 많았지만 무작정 달달하고 상큼한 향은 시호의 이미지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후루야의 취향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플로럴 계열을 고르자니 호불호가 강한 점이 걱정이었다. 강렬한 꽃향기가 자칫 역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르고 고른 끝에 가장 플로럴하지 않은 플로럴 계열로 타협을 봤다. 

향은 기억에 남기 쉽지 않아 몰랐지만 이제 와서 맡아 보니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후루야의 생각일 뿐 시호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같은 향수를 2년이나 쓰고 있다면 그다지 애용한다는 뜻은 아닐 테니까.

“그걸 아직도 다 못 썼어요? 그렇게 맘에 들지는 않았나 봐요?”

후루야는 별 뜻 없이 물었다. 애초에 자기 취향 가득한 선물이니 시호가 즐겨 쓰지 않아도 어쩔 수 없었다. 후루야에게 시호를 위한 선물이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았다. 이왕 주는 거 시호도 기뻐하면 좋지만 맘에 들어 하지 않아도 그뿐이었다.

“뭐? 아냐. 내가 이거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껴 쓰려고 특별한 날에만 뿌려. 안 그래도 거의 다 써서 오늘 큰맘 먹고 뿌리고 온 거야.”

“아… 그래요?”

시호의 재빠른 부정에 후루야는 얼떨떨했다. 맹세코 생색을 내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변명에 가까운 시호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일단 선물을 맘에 들어 하는 건 기뻤다. 쓰는 것조차 아까워 특별한 날에만 뿌려 주는 것도 기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냥 기쁘지가 않았다.

“응. 이거 찾아보니까 엄청 비싼 거더라? 또 사고 싶은데 엄두를 못 내겠어.”

왜지. 왜일까. 후루야는 레인보우 브리지 위를 달리며 생각했다. 왜 불과 몇 분 전까지 기억도 못 한 향수 때문에 이렇듯 마음이 복잡해지는가. 그나저나 왜 기억을 못 했지? 그거야 간단하다. 시호가 향수를 뿌린 적이 없었으니까. 정확히 말해 후루야와 만날 때는 뿌린 적이 없었으니까.

“이거 뿌리면 다들 뭐 쓰냐고 물어봐.”

시호는 특별한 날에만 이 향수를 뿌린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후루야와 만나는 날은 ‘특별한 날’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오늘은 예정에 없는 만남이었으니 제외. 더군다나 시호에게는 이후 다른 약속이 잡혀 있었다. 향수를 뿌릴 만한 아주 특별한 만남이.

“아. 근데 향이 좀 심해? 너무 많이 뿌렸나? 민폐는 아니겠지?”

“…….”

후루야는 멍하니 앞차와의 간격을 유지했다. 도쿄만 너머 탁 트인 전경으로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기억을 더듬어 본다. 당시 시호에게 선물해 준 향수는 저용량이 출시되지 않는 라인이었다. 그래서 골랐던 게 아마 75mL. 사람들이 보통 30mL나 50mL를 선호하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한 양이다. 그 많은 양을 거의 다 쓸 때까지 시호는 한 번도 뿌려 주지 않은 것이다. 후루야의 앞에서.

“…후루야 씨?”

시호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생각에서 빠져나와 후루야의 초점이 분명해졌다.

“미안. 뭐라 했어요?”

“응? 아냐, 아무것도.”

시호가 서둘러 고개를 내젓고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손가락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후루야는 다시 그녀를 곁눈질하고 초조함에 사로잡혔다. 어느덧 수도고속도로를 벗어나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목적지는 오다이바에 위치한 기업의 쇼룸. 아까 전만 해도 별 생각 없었는데 이제 와서 괜히 여기까지 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시호 씨. 근데 여기는…….”

“아, 미안. 잠깐만.”

상대에게 전화가 온 듯했다. 후루야는 초조한 손길로 핸들을 두드렸다. 이제 우회전만 하면 도착이었다.

“여보세요. 벌써 도착했어요? 사람 없죠? ……네? 벌써? 큰일 났네. ……저 다 왔어요, 3분 뒤면 도착. ……응. 알았어요.”

시호가 긴박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목적지인 건물이 앞 유리창 가득 들어찼다. 시호는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기세로 소지품을 챙겼다. 그 와중에 주차장으로 진입하려는 후루야를 저지하고는,

“나 그냥 여기서 내려 줘!”

하고 외쳤다. 얼떨결에 후루야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빠르게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 문을 연 시호를 바라보며 후루야가 다급하게 말했다.

“시호 씨. 근데 여기는…….”

“태워 줘서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쾅.

다다다다. 굽 있는 구두를 신은 채 시호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물론 후루야가 보기에는 뛰나 걸으나 매한가지였지만 그보다는 시호가 필사적인 모습이 신기했다. 그럴수록 후루야는 미처 꺼내지 못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 “시호 씨. 근데 여기는…….”

무슨 일 때문에 왔어요?

어느새 시호는 건물 앞쪽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후루야가 차를 출발시켰다. 좁다란 길을 따라 직진하며 그는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아까 시호와 향수 얘기를 나눌 때부터 잔물결처럼 일렁이던 찝찝함이 점차 극대화하고 있었다.

후루야는 당황했다. 불쾌함의 정확한 원인을 몰라서다. 그는 여태 시호를 위한 선물을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딱히 가격을 신경 쓴 적도 시호의 반응을 기대한 적도 없었다. 무슨 선물을 했는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가끔 시호가 신경 써서 선물 받은 옷과 가방을 잘 매치해 보여 줄 때도 진심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뿐.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이 불쾌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왜 시호가 자기 앞에서 향수를 뿌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거슬리는 것인가. 선물에 생색을 내고픈 마음은 없다. 언제 어디서 향수를 뿌리든 그건 시호의 자유다. 펑펑 쓰든. 아껴 쓰든. 매일 쓰든. 특별한 날에만 쓰든.

차가 다시 다리 위로 진입했다. 복잡한 철골 구조가 제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후루야는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시호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미처 꺼내지 못한 말이 이번에는 머릿속을 맴돌았다.

─ “시호 씨. 근데 여기는…….”

무슨 일 때문에 왔어요? 누구 만나러 왔어요? 향수 뿌릴 정도면 꽤 중요한 약속인가 봐요? 아까 통화한 사람이 만나는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 나도 아는 사람이에요?

……둘이 무슨 사이? 


***


오랜만에 만난 미야노의 상태는 영 아니올시다였다. 쿠도는 제 예상과 빗나간 그녀의 저기압에 하려는 부탁을 망설였다. 이제는 상대의 컨디션을 고려해 가며 부탁할 만큼 쿠도는 조금 어른이 됐다. 물론 그마저도 미야노의 푸념을 듣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보나 마나 뭐 부탁하러 부르셨겠지? 어디 그동안 사람 부려먹는 스킬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좀 볼까?”

토요일 오전 11시. 그리 이른 시각은 아닌데도 미야노는 부스스한 머리에 퀭한 눈이었다. 연락을 받자마자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한 뒤 로퍼를 직직 끌고 나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기압의 원인은 수면 부족인가. 아니, 수면 부족은 늘 있는 일이다. 단순히 수면 부족이라 설명하기에는 그녀의 태도가 평소보다 배는 날이 서 있었다.

“너 말이야…… 뭔 일 있었어?”

빨대로 유리잔 속을 휘휘 저으며 쿠도가 말했다. 미야노는 말없이 쿠도를 노려볼 뿐이었다. 아니, 물어본 것뿐인데 그렇게 화낼 건 없잖아.

“있다면 어쩔 건데?”

“예상 밖이네. 엄청 들떠 있을 줄 알았더니. 히고 선수 약발이 벌써 다했나?”

빅오사카 히고 선수의 토크쇼 겸 팬 사인회. 그 전부터 미야노가 하도 설쳐대는 바람에 쿠도는 날짜까지 기억했다. 운전기사가 필요했는지 박사님까지 끌어들인 미야노는 2명분의 사전 응모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높은 경쟁률을 뚫었다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미야노의 표정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그래. 그거. 그게 문제라고, 그게!”

탕! 미야노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쿠도는 기겁을 하며 반사적으로 두 개의 유리잔을 거머쥐었다.

“뭐야, 왜 이래?”

“쿠도 군. 나 완전 사기당했어!”

미야노가 팔꿈치를 테이블에 붙인 채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에 쿠도는 크게 당황했다. 히고 선수 얘기하다 갑자기 사기라니. 이야기의 흐름이 전혀 납득되지 않았다.

“‘출연 선수는 예고 없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한 줄 딱 써 놓으면 다야? 그것도 쥐꼬리만 한 글씨로! 팬을 농락하는 데도 정도가 있다고!”

“뭐야… 히고 선수 못 만난 거야?”

“그래! 사나다 선수만 실컷 보고 왔다고!”

과연. 이건 정말 화날 만했다. 쿠도는 마땅히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눈알을 굴렸다. 지금 미야노의 심정은 같은 오타쿠인 쿠도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상 인물이긴 하지만, 만약 셜록 홈즈 팬 사인회를 갔는데 홈즈 대신 왓슨만 나왔다면? 당장에라도 드러눕고 시위해야 할 판국이었다.

“현장 분위기 장난 아니었겠는데? 뭔 일 없었어?”

“별일 없었어. 사나다 선수도 꽤 인기 많고 성격도 붙임성 좋고. 오히려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는걸 뭐. 나만 혼자 씩씩댔지.”

가끔 미디어에 비치는 사나다 선수의 모습은 확실히 쾌활하고 명랑했다. 자칫 주최 측이 비난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넉살 좋게 분위기를 조율해 나갔을 그의 노고가 눈에 훤했다. 쿠도는 중간에 낀 그의 입장을 헤아리며 아이스 커피를 쭉 들이켰다.

“완전 실망했겠네. 너 엄청 기대하고 있었잖아.”

아무래도 연고지가 그쪽이다 보니 팬 사인회 같은 빅오사카의 행사는 오사카 지역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 드물게 도쿄에서 열린, 그것도 토크쇼까지 겸한 히고 선수의 팬 사인회. 미야노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거하게 맞아 버렸으니.

“몰라. ……완전 짜증 나.”

이렇게 잔뜩 날 서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쿠도는 빨대를 질겅질겅 씹으며 고민에 빠졌다. 그리 급한 부탁도 아니었고 오늘은 근황 보고받은 셈 치기로 할까. 실의에 빠진 사람을 눈치 없이 부려먹지 않을 만큼 쿠도는 조금 어른이 됐으므로.

“그래서? 시킬 일이 뭔데?”

“아냐. 내가 알아서 할게.”

“뭐야. 말해.”

“지금 네 상태 봐서는 시키기도 좀 미안하고.”

“상관없어. 벌써 2주 전 일이고.”

아니, 완전 상관 있는 것 같은데…….

쿠도가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자 미야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빨대를 만지작거렸다.

“진짜야. 히고 선수야 내가 나중에라도 오사카든 어디든 직접 가서 보면 되니까.”

“너 말이야. 그렇게 폐인 같은 모습 하고서 괜찮은 듯 말해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거든?”

쿠도는 옛날부터 미야노의 부정적인 감정에 예민했다. 매사 분석적인 시선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미야노의 감정은 알기 쉬웠다. 두려워하거나 불안에 떨거나 외로워하거나 자기혐오에 빠지거나. 미야노가 느끼는 감정이란 대체로 이런 범주였다. 조직이 완전히 세력을 잃고 나서는 차츰 감정 표현도 다채로워졌으나 그녀는 여전히, 되돌이표처럼 금세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들었다.

쿠도가 보기에 미야노는 지금 매우 익숙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미약한 자기혐오. 소위 삽질. 주최 측의 사정으로 히고 류스케를 못 본 것이 어째서 자기혐오로 연결되는지 알 길이 없으나 원래 당사자의 고장 난 사고 회로란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진짜 괜찮다니까.”

“됐네요. 오늘은 그냥 네 안부 물어본 걸로 만족할게.”

“……너도 후루야 씨 닮아가니.”

미야노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다 마치 해선 안 될 말을 했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쿠도는 미야노가 꺼낸 말보다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태도에 집중했다.

그의 신분을 생각하면 후루야 레이라는 본명을 언급할 때마다 주춤하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여태 그런 세심함 따윈 내다 버렸던 미야노가 어째서 말조심을 하는지 쿠도는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후루야 씨랑 무슨 일 있었어?”

역시 탐정의 촉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흔들리는 미야노의 동공은 마치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기는. ……없어.”

“정말?”

“정말. ……아마도.”

무슨 일이 있었군. 흐음. 쿠도는 팔짱을 낀 채로 몸을 한껏 젖혔다. 뭐든 들어줄 테니 일단 말해 보라는 태도였다. 미야노도 의중을 읽었는지 공연히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저기.”

“응.”

“……최근에 후루야 씨랑 연락한 적 있어?”

“후루야 씨랑?”

쿠도가 살짝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쿠도는 후루야와 연락하지 않는다. 안 한다가 아니라, 못 한다. 번호조차 모른다. 아무리 쿠도가 경찰과 자주 얽힌다지만 공안 쪽 안건까지 건드리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그나마 경시청 소속인 카자미를 통해 예의상 안부를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다.

“없는데.”

“……그래.”

“그리고 후루야 씨는 네가 더 잘 알겠지.”

무엇보다 쿠도가 어이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미야노는 후루야의 사적인 연락처를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얼핏 듣기로는 과거의 인연 때문이라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비교적 가까운 사이라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렇겠지.”

미야노가 듣는 사람마저 힘이 쭉 빠지도록 기운 없이 대답했다. 쿠도는 직감적으로 보통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조금 전 쿠도가 감지한 미야노의 자기혐오는 아무래도 후루야 때문인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

“아니야. 그냥…… 나 혼자 좀 신경 쓰인달까.”

“그러니까 대체 뭐가?”

“그러니까, ……연락이 없어.”

“무슨 연락?”

“아이참. 그냥 그런 거 있잖아. 잘 지내냐 라든가. 밥은 먹었냐 라든가.”

“……네?”

쿠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슨 거창한 연락인가 했더니 그냥 안부 인사일 뿐이잖아. 그렇다면 뭔가 이상했다.

“너랑 후루야 씨… 사귀는 사이였나?”

“뭐? 무슨 엉뚱한 소리야.”

시원스럽게 부정당하는 걸 보면 연인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이상했다. 특별한 용건이 없는 상대에게서 오는 연락의 빈도를 신경 쓰다니.

“뭐, 많이 바쁜 것 아냐? 후루야 씨니까.”

“아무리 바빠도 연락은 꼬박꼬박 해 줬단 말이야. 2주 동안 못 받은 적은 처음이야.”

“그럼 네가 먼저 해 보면 되잖아.”

“…….”

미야노가 형용하기 힘든 표정으로 쿠도를 바라보았다.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쿠도는 점점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대체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생겨먹은 것일까.

“설마, 먼저 연락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겠지?”

쭈뼛거리는 미야노의 태도를 보니 정답인 듯싶었다. 쿠도는 생각에 잠겼다.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본다. 후루야와 미야노의 인연이 시작된 때는 조직이 세력을 잃고 난 이후. 정확히는 코드 네임 셰리의 신병이 공안 측으로 넘어간 뒤부터였다.

보호관찰 처분으로 면담이니 교육이니, 프로그램을 받는다고 했다. 그때 담당자가 바로 후루야 레이였다. 잦은 빈도의 연락은 아마 그때부터 생긴 습관이겠지. 늘 후루야가 먼저 연락하는 패턴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뭐… 해 본 적 없어도. 이번에는 그냥 먼저 해 보면 되잖아? 간단하네.”

“그렇긴 한데…….”

미야노는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며 손을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무언가를 강하게 망설이는 듯했다. 쿠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만약 보냈는데 답장을 안 주면 어떡하지?”

“…….”

하아. 쿠도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고구마를 한 오백 개는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너무 미야노스러운 걱정이라 그 와중에 웃기기까지 했다.

“너 여태까지 후루야 씨 연락 안 받은 적 있어?”

“음… 아니. 못 받았을 경우에는 나중에 다시 연락하거나, 뭐…….”

“그럼 후루야 씨도 똑같겠지. 일단 해 봐.”

미야노는 여전히 망설였다. 그러나 미야노를 다루는 법은 쿠도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긴. 나 같아도 연락 한 번 먼저 안 주는 사람, 괘씸해서 멀리하고 싶을지도.”

미야노의 동공이 크게 물결쳤다. 아무래도 위기의식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는 언뜻 사람을 멀리하는 것 같아도 일단 자기 영역으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애착을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그 안에는 물론 후루야도 포함될 것이다. 그런 사람을 자기 잘못 때문에 잃는다고 생각하면 견디기 힘들겠지.

상대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수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미야노도 슬슬 배울 필요가 있었다. 상대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방법을. 게다가 상대는 절대 그 손을 뿌리치지 않을 후루야 레이니까, 쿠도는 안심이었다.

“……쿠도 군. 나 먼저 가볼게. 커피 잘 마셨어.”

미야노가 기세 좋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어. 쿠도가 대충 한 손을 들어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미야노가 사라졌다. 쿠도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다 문득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하려는 부탁은 얘기도 못 꺼냈네.

“뭐, 상관없지만.”


***


시호는 팝콘을 든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약속 시각이 지났는데도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와야 발권도 할 텐데. 마음이 조급해졌다. 결국 비치된 테이블에 앉아 시호는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라인을 실행하니 그와 주고받은 메시지가 보였다.

영화 줄거리를 서로 묻고 답하는 내용. 다음으로는 영화관의 위치와 상영 시각, 영화가 시작하기 20분 전까지 만나자는 내용. 후루야와 이렇게 긴 메시지를 주고받은 적은 처음이라 시호는 조금 어색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뜸한 연락에 내가 뭘 잘못했나 땅을 파던 시호였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어쩌다 보니 그와 영화를 보게 됐다.

발단은 시호의 통화였다. 쿠도와 만난 날 시호는 집으로 돌아가 후루야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차피 받지 않으리라는 체념을 담은 시도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신호음이 3번 울리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됐다. 당황한 시호가 처음 내뱉은 말은 ‘어? 받네?’였다. 후루야는 후루야대로 시호에게 처음 걸려온 전화에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아마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안 모양이었다. 딱히 별일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시호의 용건을 물었다. 일련의 반응을 보고 시호는 절실히 느꼈다. 정말 내가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기는 없구나. 나름 용기를 낸 전화가 이토록 특수한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냥 잘 있나 확인차 전화를 걸었다고 하자 그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일요일 날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또 부려먹을 생각이시군, 괜히 전화했다. 슬쩍 후회가 밀려올 때. 그가 말했다.

─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같이 봐 줄 수 있어요?”

그렇게 해서 시호는 지금 팝콘을 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보고 싶은 영화라니. 그 사람한테도 보고 싶은 영화라는 게 있구나. 시호는 혼자 감탄했다. 그날 이후 먼저 연락하는 일에는 두려움이 사라졌기에 시호는 지금쯤 어디냐고 물어볼 요량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뒷덜미로 이상한 느낌이 전해졌다. 간질이듯 건드리듯 무언가가 바싹 다가와 있는 기척. 히익. 그게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시호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시호 씨?”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후루야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하고 있었다.

“후… 후루야 씨?”

“미안. 놀랐어요?”

“아니… 응, 조금….”

조금 정도가 아니라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시호는 놀란 가슴을 손으로 쓸어 내렸다. 아니, 거리가 이렇게 가까워질 때까지 말 한마디 없을 건 뭐람.

“발권하고 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아냐. 같이 가.”

시호가 팝콘을 들고 일어섰다. 후루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 어지간히 이 영화가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시호 씨. 오늘 향수 뿌렸네요?”

“응? 그래도 일단 외출이니까.”

오늘은 드물게도, 아니 생각해 보면 처음으로, 업무 아닌 일로 그와 만나는 날이었다. 그래서 향수도 뿌릴 수 있었다. 평소에는 그에게 민폐가 될까 봐 뿌리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민폐였을까 시호는 걱정이 들었다. 일일이 향에 민감한 걸 보면 아무래도 자신에게 옮을까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미안. 다음부터는 안 뿌릴게.”

“네?”

“향 옮을까 봐 신경 쓰이는 거지? 오늘은 괜찮을 거라 생각해서 뿌렸는데 아무래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좋은데요. 어울려요.”

후루야가 시호의 말허리를 자르며 대답했다. 이상하리만치 필사적인 태도에 시호가 두 눈을 깜빡였다. 의아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가 멋쩍게 웃었다. 답지 않은 수줍은 미소였다.

뭐야 이 남자. 아까부터 방긋방긋 웃기만 하고.

“그나저나 의외네. 당신이 이런 영화를 다 보고 싶어 하고.”

천하의 후루야 레이는 어떤 영화를 보고 싶어 할까. 답은 뜻밖에도 세간에서 화제인 로맨스 영화였다. 그것도 여자들 사이에서는 절대 남자친구나 관심 있는 남자와 함께 봐서는 안 될 영화로서 의견이 분분한.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가 워낙 예쁘게 등장한다고 했다. 물론 시호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였지만.

그러네요. 어느새 발권을 마친 후루야가 대답했다. 그가 체감상 길게 시호와 눈을 맞추었다.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러니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면서 그가 또 웃었다. 무릇 여러 여자를 홀렸을 혹은 울렸을 미소였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살짝 처진 눈꼬리와 맞물려 따뜻한 인상을 자아낸다. 혹시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누가 봐도 착각할 만한 미소.

“당신도 역시 사람이었구나.”

시호는 색다른 그의 일면에 과학자다운 흥미를 느끼며 팝콘을 입에 넣었다.

“아 참. 그거 알아? 이거 관심 있는 남자랑 절대 보면 안 되는 영화래.”

지정된 자리에 앉아 광고를 보며 시호가 말했다. 팝콘을 집던 후루야가 멈칫하며 시호를 쳐다보았다.

“…왜요?”

“여주인공이 너무 예뻐서. 영화 끝나고 나면 비교당한다나 뭐라나.”

“아아.”

긴장이 풀린 사람처럼 후루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마저 팝콘을 집어 우물거리다 별안간 그가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물었다.

“괜찮겠어요? 시호 씨.”

후루야가 무엇을 묻는지 단박에 알 것 같아서 시호는 픽 웃었다.

“배우 얼굴 이겨서 뭐 해, 얼굴로 먹고살 것도 아닌데. 게다가 나는 관심 있는 남자랑 보러 온 것도 아니고.”

“……흐음.”

후루야가 애매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지만 딱 잘라 웃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시호 씨는,”

말에 틈이 생겼다. 순간 느껴지는 머뭇거림에 시호는 무심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친구 있어요?”

그때 조명이 완전히 어두워지며 스크린이 넓어졌다. 웅장한 음향과 함께 오프닝 크레디트가 영화의 시작을 알렸다. 영화가 시작했어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다소 어두웠지만 희미한 반사광은 상대의 표정을 알아보기에 충분했다. 배급사, 투자사, 제작사의 리더 필름이 이어지며 중간중간 암전과 적막이 끼어들었다.

후루야의 진지한 얼굴이 어둠에 물들었다가 희미하게 빛나기를 반복했다. 그는 계속해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슬 도입부가 시작될 기미가 보여 시호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없는데.”

그가 오른쪽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 올리며 웃었다. 덩달아 오른쪽 눈이 살며시 휘었다. 그의 눈동자는 희미한 빛을 받아 어두운 바다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그 말뿐이었다. 후루야가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저 영화에 집중하겠다는 듯 꾹 다문 입술이 고집스러웠다. 그의 옆얼굴로 오묘한 빛의 음영이 드리운다. 시호는 차츰 정신이 또렷해졌다.

평소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여태 눈치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완전히 눈치를 챘다고 생각한다. 시호는 이전까지 그를 어떻게 여겼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남자로 여긴 적은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부터 남자로 여길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글쎄. 모르겠어.

배우의 첫 대사가 들리면 시호는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스크린 가득 소문의 여배우가 청초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를 두고 떠도는 말이 왜 그리 많은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예뻤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시호는 그녀를 보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신경이 쓰였다. 이 영화가 끝나면 저 배우와 비교될 자기 모습이.

이 영화는 관심 있는 남자와 절대 보면 안 된다는 불특정 다수의 조언이 떠올랐다. 설마 내 얘기가 될 줄이야. 시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뒤늦게 요동치는 심장에 정신이 다 사나웠다. 영화 내용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2시간 15분. 엔딩 크레디트를 제외하면 약 2시간이다.

2시간 동안 멀쩡히 버틸 수 있을까? 아니, 2시간 후가 더 걱정이다. 과연 어떤 얼굴로 그를 마주해야 할까. 

영화 타이틀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오프닝 테마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비로소 세간의 화제인 로맨스 영화의 막이 올랐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로맨스에도, 보이지 않는 막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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