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길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이상한 사람과 마주쳤다. A라인 스커트에 잔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는 횡단보도 앞에서 작은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제 자리를 돌고 있었다. 쿵, 쿵, 한발씩 뛰어보기도 하고 천천히 걷기도 하면서. 질끈 묶은 양갈래 머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위아래로 흔들렸다.

늦은 5월의 해는 뜨거웠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던 버스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급변한 온도차에 아마 조금 어지러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그 여자가 횡단보도 앞을 이리 저리 걸어다니는 것을 구경했다. 인도의 빨간색 페이빙 보도블럭은 정비한 지가 꽤 지났는지 불룩 솟아 있거나 훅 꺼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엉망인 길 위에서 천진한 장난을 치는 아이같아서 나는 속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다가 20대 후반인 것이 분명한 그녀의 외모에 순간 괴리를 느꼈다. 이상했다.

바닥만 내려다 보는, 화장기 없는 수수한 그녀의 얼굴에는 이상하게도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신호가 바뀌어 도로를 건너면서 나는 옆을 스쳐가는 여자를 다시 한 번 힐끔 보았다. 그녀는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신이 난 듯 달려갔다.

다리가 새로 생기기라도 한 걸까.


"안녕하세요. 퇴근하시나 봐요."

"아."

연립주택의 1층에 사는 관리인 아가씨가 인사했다. 건물의 1층 현관에 가까이 있는 그 집에는 집주인의 자식들인 두 남매가 관리인 겸 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발코니에 야외테이블을 놓고 다이아몬드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육각별의 게임판에는 초록색과 빨간색의 말들이 어지럽게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얼음을 띄운 아이스티가 두 잔. 줄어든 양이 다른 걸 보니 게임 파트너가 있는 듯했다.

"네, 안녕하세요. 일찍 퇴근하셨네요."

"휴가 냈거든요. 오늘은 집에서 쉬었어요."

실내복 차림의 그녀는 검은색 긴 머리카락을 빙글 돌려 위로 고정했다.

"무슨 생각하고 계셨어요? 어디 부딪칠까봐 계속 지켜봤어요. 아까부터."

"아, 그게."

나는 걸어 온 길을 돌아보며 망설였다. 날씨가 좋아진 탓인지 골목에는 밤낮없이 자전거며 전동킥보드 같은 것을 탄 사람들이 지나다니곤 했다. 한눈 팔며 걷기에는 위험할 수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어떤 여자를 만났는데 좀 이상해서."

"이상해요?"

"어려보이지도 않던데 신이 났는지 빙빙 뛰더라고요. 이렇게."

나는 현관 앞에서 작은 원을 그리며 쿵쿵 걸었다. 바닥을 보며. 바닥을 딛는 발과 굽혔다 폈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다리를 내려다 보며.

"그게 꼭, 다리가 새로 생기기라도 한 것 같아서."

그리고 멈춰서는 멋쩍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미안하다는 듯이. 그녀는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일 것이 뻔했다. 무슨 그런 생각을 하고 사냐며 핀잔을 줄지도 몰랐다.

"아아. 주웠대요. 다리."

발코니의 유리문을 열고 나타난 그녀의 남동생이 말했다. 이쪽은 퇴근을 일찍 한 건지 정장 셔츠 차림에 비뚤어진 녹색 넥타이의 끝단을 셔츠 주머니에 꽂고 있었다. 아이스티를 페트병째로 들고 온 그는 유리컵을 다시 채웠다.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았다.

"네?"

"석주 얘기하는 거니?"

얼빠진 듯 반문하는 나와는 달리 그녀의 물음은 구체적이었다.

"응. 집 앞 골목에서 주웠다고 하더라고. 잘 됐지. 하나로는 불편했을 텐데."

"음."

그의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쪽을 돌아봤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죠? 석주, 저쪽 주택가에 사는 앤데 몇 년 전에 오른쪽 다리를 잃었어요."

"아니, 어쩌다가..."

"아래층에 미친 놈이 살았거든요. 아니 젊은 아가씨가 뭐 얼마나 무게가 나간다고 걷는 소리를 못 참았는지. 자기는 목공한다고 매일 대패질에 톱질에 민폐는 다 끼쳐놓고."

"층간소음으로 다퉜는데 홧김에 다리를 잘라버렸대요. 허벅지 이쪽을 톱으로 갈아서."

동생은 정장바지 위를 손으로 가로질렀다.

"밤늦은 시간이었는데 옆집에서는 싸우는 소리 듣고 그러려니 했대요. 워낙 자주 다퉈서. 한참 지나고 톱질소리에 잠에서 깼는데 소리가 너무 가까웠던 거지. 이상해서 밖으로 나왔는데 현관문 밖으로 피 새어 나오는 걸 보고 신고했어요. 석주는 이미 쇼크로 기절한 상태였고. 반 넘게 잘랐다고 했나. 상처가 심해서 결국 절단했어요."

"그래서 우리 건물도 바닥공사 새로 했잖아요."

"아..."

등 뒤로 땀이 삐질 흘렀다.

나는 이삿집을 알아볼 때 이사 갈 동네의 사건사고까지도 확인해보았다. 장마 때 잠기는 지역은 아닌지, 파출소는 어디쯤 붙어 있는지, 강력범죄가 일어난 적은 있는지, 근처에 사는 성범죄자는 몇이나 되는지. 여자 혼자 살 집을 알아볼 때에는 신경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부동산 사장님은 동네의 치안이 얼마나 좋은지 입이 닳도록 설명했다. 에이, 여기 사는 대부분이 원주민들이라 서로 잘 알고 분위기도 좋아요. 불미스러운 사고로 죽은 사람 하나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아이스티 드실래요?"

그녀는 당황한 내게 차가운 유리컵을 건넸다. 손에 서늘한 기운이 전해졌다.

"다리를 주워서 어떻게 했대? 다시 붙인 거야?"

"응. 자른 지 얼마 안 된 다리여서 부패가 없었대. 석주도 아물었던 자리 갈아내고 이어붙였다나 봐. 뼈 단면이 매끈해서 이음새를 줄톱으로 조각했다더라고. 삼거리 철물점에 최씨 아저씨가 알려줬어. 한옥 부재 끼울 때 홈 만드는 것처럼 요철을 만들어서."

나는 차가운 아이스티를 몇 모금 들이켜고 나서야 더위가 가시고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지금 이 남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고 있잖아.

"저기, 농담이 너무 심하시네요."

헛웃음이 나왔다. 인상을 찡그리며 유리컵을 건넸다. 집주인 아가씨는 컵을 받아들고는 남동생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뭐, 다리를 새로 가진 게 아니라면. 새 신발을 산 거였겠죠. 그 여자."


소설, 시, 에세이를 주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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