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첫 변신 마법 –아기 때의 변신을 아는 것은 세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에 무사히 성공한 것을 계기로, 로키의 마법은 영역을 넓혀갔다. 변신과 환상은 비슷하면서 아주 약간의 차이가 있는 부문이었다. 로키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고 꾸미는 환상 마법에도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더 작은 어린아이일 적, 손에서 만들어낸 나비보다 배는 정교하고 배는 사실적인 마법이 그의 손에서 피어올랐다. 그리고 마법에 빠지게 되면서, 로키에게는 가벼이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환상 마법이든 변신 마법이든 디테일이 중요했다. 변하고자 하는 것, 혹은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을 최대한 ‘진짜’처럼 보이는 것이 마법의 포인트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로키는 보이는 모든 것―심지어 거울 속의 자기 자신까지도―을 깊게 관찰했다.



이것은 토르에게는 나름 편리한 일이 되었는데, 동생이 보고 싶을 때 정원으로 뛰어가면 만사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복도에 나란히 선 문을 하나하나 열어본다거나, 거대한 도서관을 뒤진다거나, 로키의 방이나 침대 밑을 살필 필요가 없어졌다. 무작정 정원으로 뛰어가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하면 정원에 쪼그려 앉아 날아다니는 벌레나 개구리, 뱀, 풀을 뜯는 토끼 등을 구경하는 동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동생을 찾으러 온 그는 찾는 이 대신 예쁘고 작은 녹색 뱀을 발견했다. 눈이 빨간 뱀은 눈처럼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꽃줄기에 몸을 감고 있었다.



“너 정말 예쁘구나.”



토르는 감탄했다. 구슬처럼 반질거리는 눈이 예쁜 뱀이었다. 가느다란 몸도 만지면 매끄러울 것처럼 보였다. 뱀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자 별 저항 없이 손에 감긴다. 온순하기도 하지. 토르가 씩 웃었다. 로키에게 보여줘도 좋아할 것이다. 로키도 뱀을 좋아했다. 최근에는 며칠이나 뱀만 관찰하고 있었고. 토르는 이 작은 뱀을 동생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줄 것이 있다며 뱀을 내밀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올려다보겠지.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을 붉히며 고맙다고 할지도 몰랐다.



“……크흠!”



그가 오딘의 헛기침을 따라했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목을 긁는 소리를 내어 진정하려는 의도였지만, 글쎄, 마음먹은 대로 심장이 진정되지는 않았다. 동생이 웃는 모습을 상상하다 혼자 붉어지는 꼴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람. 토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작은 뱀이 들려있었으므로, 토르의 범상치 않은 힘은 뱀에게까지 전해졌다.



“앗! 아, 미안하다. 미안해.”



뱀이 몸부림을 쳤다. 놀란 토르가 허둥지둥 뱀을 풀밭에 놓아주려 했을 때, 익숙한 마력이 터졌다. 익숙한 목소리가 유쾌하게 들린다.



“하! 그건 나였어, 토르!”

“헉.”



로키가 그의 갈비뼈 사이를 찔렸다. 진짜 칼은 아니었고, 그가 선물한 나무로 만들어진 단검이기는 했지만…… 어찌나 세게 찔렀는지, 숨이 다 안 나왔다. 토르가 가슴 아래쪽을 붙잡고 뒤로 넘어져 헐떡거리자 누운 배 위에 올라탄 로키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는다. 눈이 휘어지고, 말랑한 볼살이 떨리고, 통통한 입술이 위로 치솟았다. 조금 전 상상한 바로 그 웃음이었다.


별보다 반짝이고 태양보다 눈부신 것이 쏟아졌다.



“이렇게나 쉽게 속다니! 형이랑 마법은 영 꽝인가 봐.”



토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눈이 부셨다.



“형? 토르?”



화를 내거나, 바로 몸을 일으켜 반격해올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토르는 바닥에 누워 있기만 한다. 로키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걷혔다.



“왜 그래? ……많이 아파?”

“…….”

“뭐야. 왜 그러는데…….”



로키는 감정의 변화폭이 큰 편이었다. 잘 웃다가도 입을 다물고, 혼자 안으로 파고드는 일이 잦았다. 좋게 말하자면 감수성이 풍부한 것이었는데, 그의 감정은 특히나 그 대상이 ‘토르’일 때 더욱 잦고 크게 요동쳤다. 반응 없이 가만히 누워 있는 토르 때문에 로키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토르? 혀엉? 화났어? 로키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맑은 물에 떨어진 물감 한 방울처럼 선연했던 밝음은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토르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에게 닥쳤던 당황은 차치하더라도, 일단은 동생을 달랠 때였다. 머리를 푹 숙인 로키는 숫제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웃음도 그러했지만, 로키의 우는 얼굴은 더더욱 심장에 좋지 않았다. 볼 때마다 마음이 미어졌다.



“으, 헉, 너무 아파서, 말이 안 나와.”

“…….”

“이번 장난은 정말 놀라웠어, 로-”



잽싸게 아픈 척을 하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지만, 로키는 말을 맞출 기분이 아닌 듯했다. 발끝을 향했던 눈이 올라오고, 토르는 그득그득 물 고인 눈을 마주해야 했다. 눈물에 녹색 눈동자가 담겨 있다. 구슬 같은 물방울이 투욱 떨어진다. 로키가 토르를 노려보았다. 입술은 일자가 되고 손은 동그랗게 말려 주먹이 된다. 아니, 울리려는 건 아니었는데. 토르가 변명하기 위해 무어라 입을 떼려는 순간, 로키의 모습이 사라지고 고양이가 나타났다.


고양이는 폴짝 토르의 배에서 뛰어내리더니 정원을 마구 달려 사라졌다.



“로키!”



목 놓아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 일 났군. 토르가 살짝 일으켰던 머리를 다시 땅에 박았다. 윽. 뒤통수도 뒤통수지만 찔린 곳이 욱신거렸다. 마음을 가다듬은 토르는 가슴의 통증을 무시하며 조심조심 일어났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갈비뼈 부근이 뜨끔거려 보폭을 크게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종종거리는 모양새로 정원을 따라 걸었다.



“로키?”



대답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겠지. 토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화를 냈다면 울지 않았을 것이다. 동생은 무관심을 제일 싫어했고, 그것에 제일 격렬하게 반응했다. 뭐 하는 거냐고 버럭했어도 눈을 접고 웃으며 허리에 매달렸을 텐데. 그런 애를 울렸으니. 착잡했다. 토르가 코를 문질렀다.



이게 다 로키 때문이야. 괜히 심술궂은 생각이 들었다. 예쁜 뱀을 로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로키의 웃는 얼굴을 생각했다가. 오, 해맑게 웃는 얼굴을 상상하자 또 심장이 뛰었다. 토르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토르는 발을 질질 끌며 정원을 반 정도 횡단했고, 마침내 바라던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직도 쑤시는 왼쪽 갈비뼈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면, 나무 위에 검은 뭉치가 올라가 있는 것이 보인다.



토르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팔짱을 꼈다.



“로키. 이런 곳에 있다고 내가 못 찾는 건 아니야.”

“…….”

“미안해. 정말로, 그냥 너무 아파서 잠깐 굳어버렸어. 지금까지 네가 찌른 것 중에 오늘이 제일 아팠다고.”

“…….”

“화가 난 거면 받아줄게. 그러니까 일단 이리로 내려오는 게 어때? 쭉 그렇게 있을 수는 없어. 곧 수업이 시작할걸. 여기서 너랑 이렇게 계속 있다가는 늦어서 혼이 날 거야.”



고개를 뒤로 젖히자 나뭇잎 사이로 꼬리 끝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토르는 이것을 청신호로 받아들여 나아갔다.



“아까 뱀으로 변한 것 말이다. 그거 아주 멋졌어. 어머니에게도 보여드리자! 좋아하실 거야! 음, 아버지도.”

“…….”

“하인들을 놀라게 하는 것도 가능할 테고.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내가 널 손에 잡고 들어가면 다들 기겁할걸. 아니면 널 주머니에 숨기고 헤임달한테 가볼까? 이번에는 헤임달도 놀랄지 몰라.”



고양이가 몸을 풀고 고개를 내밀었다. 눈이 마주친다. 아래를 지그시 응시하는 눈이 젖어있었다. 토르는 재차 양심이 쑤시는―대체 어디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것을 느꼈다.



“로키? 얼른.”



같이 돌아가자. 오늘 뭘 배웠는지도 알려줄게. 구슬리는 목소리를 내자 커다란 눈이 깜빡깜빡했다. 토르는 씩 웃으며 팔을 벌렸고, 로키가 품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머뭇대던 고양이가 토르의 팔 안으로 뛰어내리는 것은 조금 뒤다.



“정말 미안해. 그리고 아까 그건 최고였어.”

“……멍청이.”



눈 깜작할 새 사람으로 돌아온 로키가 토르의 목에 팔을 두르고 소곤댔다. 형은 바보야. 헤임달을 어떻게 놀라게 하겠다는 거야? 우리가 지금 이러는 것도 보고 있을걸. 토르는 로키의 엉덩이를 받치고 궁을 향해 걸었다. 설마, 헤임달이 모든 것을 본다고 해도 이것까지 보고 있을까? 로키가 축축해진 뺨을 토르의 목에 문질렀다.



“보고 있을걸? 으음, 아마?”



토르는 못된 장난을 계획할 때의 톤을 냈다.



“그럼 한 번 시도해볼까?”



두 사람이 이마를 맞대고 키득거렸다.



며칠 뒤, 뱀을 손에 들고 바이프로스트까지 뛰어간 토르가 헤임달에게 이것 보라며 내밀었지만, 헤임달은 미동도 안 했다.



“돌아가시죠. 왕자님들. 저는 진실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것을 봅니다.”



토르와 로키는 소득 없이 긴 다리를 되돌아가야 했다. 터벅터벅 걷는 두 개의 작은 뒷모습에 헤임달의 입술이 살짝 흔들린 것은 비밀이다.









로키의 재능은 마법에서 강력한 빛을 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법만 배운 것은 아니었다. 다루는 셰이드의 양이 늘어날수록, 숙련되어 갈수록 로키가 긴 잠에 빠지거나 쓰러지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마침내 로키가 토르와 수업을 받는 것이 가능해졌다. 지루한 수업에 일행이 생기자 토르는 아주 기뻐했고, 로키도 형과 나란히 할 수 있음에 기뻐했다. 두 사람의 기쁨은 처음으로 같이 연무장으로 향했을 때 최고에 이르렀다.



이제 로키는 뱀으로도 변할 수도 있었고, 첫 목표였던 사자로도 쉽게 변할 수 있었다. 다만 사자는 한 번의 시도 이후로는 변신 대상에 오르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몸집이 커 여기저기 부딪히며 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뱀이나 고양이가 훨씬 나았다. 토르를 놀라게 하는 건 아주 성공적이었지만. 로키가 어깨를 으쓱했다.



로키는 제가 아닌 다른 것을 다른 형태로 바꾸는 기술도 배웠다. 무생물을 생물로 변신시키거나, 다른 사람을 다른 모습으로 만들거나. 후자의 연습 대상은 대개 토르가 되었는데, 아직 불안정한 게 흠이었다. 기습으로 개구리가 되었던 토르는 십 분 만에 원래대로 돌아와 로키에게 주먹으로 보복했다. 그건 정말 아팠다. 로키가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전자는 금세 그의 것이 되었다. 복도에 장식된 꽃병을 한 시간째 노려보던 로키가 물결처럼 퍼지는 녹색 셰이드를 보고 씩 웃었다. 곧 그의 팔에 커다란 토끼가 안겼다. 로키는 토끼로 변한 꽃병을 끌어안고 토르에게로 달려갔다. 자랑스럽게 동물을 내밀자 검을 휘두르고 있던 토르가 눈썹을 구긴다.



“이게 무엇인데?”

“토끼.”

“뭐라고?”

“저번에 숲에 갔다가 와서 토끼를 못 가져온 게 아쉽다고 했잖아.”



토르는 땀을 닦는 척 눈을 비볐다. 그런 말을 하기는 했는데. 그건 활로 토끼를 못 맞춰서 한 소리였다. 이렇게 산 것, 더군다나 토끼가 아닌 것을 토끼랍시고 받아 들며 환호할 일은 아니었다. 토르가 명백하게 토끼가 아닌, 꼬리는 두툼하고 눈 주위는 시커먼…… 라쿤을 쳐다보았다. 야생 라쿤이라면 저를 잡은 어린 손 따위 물어뜯고 냅다 달아날 텐데. 손의 주인이 저를 만들었다는 걸 알긴 하는 모양이었다. 수염을 늘어뜨린 채 인형처럼 안겨있으니.


토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검을 한쪽 어깨에 걸친 자세로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이 토끼는 뭐가 변해서 된 거지?”


로키가 눈을 도로록 굴렸다.


“……내가 잡은 건데?”

“거짓말하지 마.”


엄한 말투에 로키가 토르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복도에 있던 꽃병.”



토르가 어깨를 으쓱하고 로키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어머니가 빗겨준 머리가 산발이 되자 로키의 눈매가 뾰족해진다. 토르는 짐짓 엄하게 충고했다.



“꽃병을 장식한 사람도 그게 없어진 걸 보면 너처럼 화를 낼 거다. 돌려놓거라. 알겠지? 토끼는 다음에 같이 사냥을 가서 잡기로 하고.”



그는 어머니가 아시면 기겁할 약속을 했다. 로키는 아직 사냥을 허락받지 못했다. 다행히도 로키는 쉽게 낚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짝이는 시선을 쏜다. 토르가 어깨에 올렸던 칼을 내리며 얼른 돌아가는 손짓을 했다. 일단은 로키를 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로키. 돌아가라니까.”



한 번 더 말했는데도 로키는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라쿤이 이 상황이 졸린 듯 눈을 끔뻑거리다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고, 끝끝내 로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지개를 켜느라 바동거리는 라쿤을 세게 안으며 수긍한다.



“알겠어.”



토르는 로키의 마음이 바뀔까 냉큼 어깨를 두드리고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로키? 아직 자유롭게 이곳에 들어올 수는 없다고 했지?”

“응.”



로키가 라쿤을 안은 채 터덜터덜 돌아갔다. 작아지는 뒷모습과 토르의 한숨이 신호가 되어, 숨죽이고 있던 다른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에는 웅성거림도 섞여 있었는데, 반은 로키에 대한 말이었고, 반은 토르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후자만이 긍정적이었다.



토르가 바람 소리가 나도록 검을 휘두르고, 연습용 허수아비가 망가질 정도로 세게 내리치자 뒤를 따르던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 비웃는 말들은 누군가의 마음에 깊게 여파를 남겼다.



“…….”



제기랄. 토르는 그의 다음 대련 상대를 일방적으로 두들겼다. 그 자식은 로키를 제일 안 좋게 보는 놈이었다. 어찌나 수군거리는지, 주의를 준 적 있는데도 로키를 볼 때마다 비웃었다. 지금도 그랬다. 로키가 채 이곳에서 나가기도 전에 비웃음을 날렸다. 토르가 어금니를 꽉 물었다. 푸른 눈에 화가 넘실거렸다.



그의 가족과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궁의 사람들은 좀, 무례하고도 멍청했다. 아스가르드의 두 번째 왕자를 향해 감히 그딴 말을 놀리다니. 차라리 궁 밖의 백성들이 나았다. 그들은 로키의 마법에 대한 소문에도 올마더의 재능을 물려받았다고만 여기고 넘어갔다. 이곳의 귀족들처럼 로키와 저를 비교한다거나, 로키의 마법을 폄하한다거나, 로키의 단검을 비웃지 않았다.



토르는 궁에 은은하게 맴돌던 그 음침함을 처음으로 목격한 날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날은 토르가 처음으로 진검을 휘두른 날이었다.




다년간의 연습으로 목검에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실제 검은 손에 잡히는 느낌부터 달랐다. 날의 번쩍임과 섬뜩함은 나무가 가진 투박함에서는 나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주춤하는 토르에게 오늘 하루 그를 가르치기로 한 기사가 “전사는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피 흘리는 것을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고, 토르더러 냅다 그에게 덤벼보라고 했다. 물론, 결과는 당연히 토르의 패배였다. 있는 힘껏 달려들어 급소를 노리던 토르는 자신이 쥔 검이 그의 옷을 찢는 것에 당황해 빈틈을 내어주고 말았다. 검을 놓치고 엉덩방아를 찧은 토르를 보며 기사가 빙글빙글 웃었다.



“다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왕자님. 그것은 영광입니다. 그리고 올파더는 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하지요.”


토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자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울컥 차오르는 분을 삭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턱짓이 날아온다.


“그래도 끝까지 검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군요. 처음치고는 잘 하셨습니다. 왕자님은 시간이 흐르면 분명히 훌륭한 전사가 되실 겁니다. ……훌륭한 왕도요.”



토르가 땅을 짚으며 일어나려다 주춤했다. 손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세게 쥔다.



“아직 그런 말을 하긴 너무 이른 거 아닌가? 내가 천 살이 되기까지도 수백 년이 남았고, 왕자는 그대 앞에 있는 한 사람만이 아니지.”

“호오? 손장난에 열중해 있는 작은 왕자님을 그렇게까지?”

“로키는 내 동생이야.”



토르의 눈에 분노가 들어찼다. 위협적으로 말을 짓씹자 앞에 선 남자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얄궂은 미소를 건다.



“이런. 고결한 집안에 제가 감히 그릇된 혀를 놀렸군요.”

“시간이 끝났군. 나는 돌아가겠어.”

“하지만 전하, 아셔야 할 겁니다. 궁 안의 모든 이, 그리고 궁 밖의 모든 이는 이미 수백 년 후의 미래를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흠, 작은 왕자님마저.”



눈앞이 붉어졌다. 오딘은 그에게 화를 안으로 삭이고 삼키는 것에 능숙해져야 한다고 하였지만, 동생에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바닥을 뚫고 낮아졌다.



“그대. 바나헤임에서 온 자였던가. 오늘부로 다시는 왕실에 관여하지 못하게 될 거야.”

“아, 영광이었습니다. 슬프지만 저는 내일 돌아가기로 되어 있어서 말입니다. 왕자님의 명은 이미 실현된 것 같군요.”

“…….”



화가 났다. 야비하게 입을 놀리는 저자를 무릎 꿇리고 싶었다. 머리끝까지 분노가 일자 온몸의 세포가 감정을 따르라며 아우성쳤다. 토르는 충동적으로 그의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분노와 타협해, 아스가르드를 떠난다는 저자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무언가를 선물하기로 했다. 그에 대한 감명 깊은 인상 같은 것.



토르는 돌아가는 척 몸을 돌렸다가, 그대로 검을 휘둘러 그자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댔다. 반사적으로 검을 뽑은 기사가 토르를 막아내려 했지만, 토르가 아주 조금 빨랐다. 칼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분노가 토르를 두렵지 않게 했다.



“그런 식으로 입을 놀렸다가는 어느 곳에 있든지 명을 재촉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아두고. 그대를 기억해 두겠어.”



말에 맞추어 천둥이 울었다. 어둑해지는 주위에도 불구하고 토르는 검을 따라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얕지 않으나 깊지도 않은 상처가 검을 적신다. 그 피마저 보고 싶지 않았다. 검을 물리는 척 공중에 크게 휘둘러 피를 털어내자 기사가 창백해진 얼굴로 목을 감싼다. 칼날에서 떨어진 핏방울은 주인의 얼굴에 떨어졌다. 점점이 피로 물은 볼을 갖게 된 기사를 토르가 노려보았고, 이와 비례해 천둥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번개도 잇따랐다. 우르릉. 심장박동처럼 친근한 천둥이 담대함을 불러왔다.



“천둥과 번개는 세계를 가리지 않지. 이 또한 그대를 기억하게 될 거야.”


토르가 나직이 경고했다.


그는 소리가 나도록 검을 세게 내던진 뒤 다친 기사를 무시하고 정원으로 갔다. 진탕 엉망이 된 속을 풀고 싶었다. 이 시간이라면 로키가 정원에 있을 터였다. 그리고 토르는 풀숲 아래 동그랗게 몸을 만 검은 고양이를 발견했다. 어깨에서 힘이 빠지며 탈력감이 들었다.


“로키.”


토르가 속삭이자 고양이의 귀가 움찔하더니 눈꺼풀이 서서히 위로 올라간다. 그 아래, 보고 싶었던 눈동자가 있다.


“여기 이러고 있는 걸 보니…… 그가 또 널 괴롭혔군. 그렇지?”

“…….”



로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앞발에 코를 묻고 꼬리만 흔들 뿐이다. 토르가 웃으며 수풀 아래에서 로키를 끄집어냈다. 먀악! 냑! 하악질은 통하지 않았다. 토르가 로키의 얼굴에 볼을 비볐다. 떨어지라며 얼굴을 밀어대는 발바닥에도 웃음만 났다.



“나도 오늘 짜증 나는 일이 있었어. 그래서…… 아버지께 혼날지도 모르겠구나.”



녹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다음 순간, 사람으로 돌아온 로키가 토르의 뺨을 쿡쿡 찔러댔다.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검술 연습을 하는데, 오늘 갑자기 기사단장이 아닌 다른 이가 날 맡게 되었거든. 진검을 쓰자고 해서 알겠다고 했지. 그런데…… 싸우는 도중에 화나는 말을 하길래. 그의 목에 좀, 상처를 냈다.”

“와. 멋진데. 그런데 그런 거로 아버지가 형을 부르지는 않을걸.”

“수업이 다 끝난 뒤에 기습했지.” 토르가 덧붙였다.

“오. 그건…… 음. 확실히 저녁 식사 이후 아버지께 소환될 일이군.”


로키가 심술궂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래서? 넌 여기 또 왜 있었는데?”

“누구의 추측이 맞아.” 로키가 어깨를 으쓱했다. “티르가 또 마법이 어떻다는 둥, 이러니까 늦게 자라는 거라는 둥 짜증나는 소리를 해 대길래 그의 시계를 개구리로 바꾼 다음 도망쳤거든.”

“흐음. 고작 그것뿐이냐?”

“만지면 손이 퉁퉁 붓는 독개구리로. 물론 그는 그 사실을 몰랐고, 사방을 뛰어다니는 시계를 몇 번이나 두 손으로 잡아채려 했고, 만졌지. 한…… 네 번쯤?”


로키가 키득키득 웃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얼굴도 문질렀지. 바로 비명을 지르더라고.”



토르는 로키의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못된 말을 하는 귀족 따위 그런 꼴을 당해도 쌌다. 검에 목이 찢긴 그 무례한 기사처럼.



“그것도 저녁 이후 아버지께 소환될 일 아닌가?”

“얼마나 즐거운 일이야. 두 형제가 같은 날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다니. 아버지도 우리의 사이좋은 모습에 기뻐하실 거야.”


로키가 극적으로 말하며 눈을 찌푸렸다.



토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직전까지 안개처럼 혼란스럽던 마음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맑았다. 그는 로키를 끌어안았다. 이제 로키에게서는 더 이상 우유 냄새나 분 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를 진정시키는 냄새가 나는 건 확실했다. 토르가 로키의 어깨에 입술을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네가 내 동생이라 다행이야.”

“뭐야. 갑자기 낯부끄러운 말이나 하고.”

“그렇다는 거다. 그냥.”



로키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꿍얼거리며 토르를 마주 안아왔다. 그 귓가가 붉은 것은 토르에게만 보였다.



“…….”




옛일을 생각하자 팔에 힘이 더 실린다. 토르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날 두 사람은 사이좋게 오딘에게 혼났다.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왕자에게 마땅한 품위와 행동거지에 대한 연설을 들은 뒤에나 풀려날 수 있었는데, 마침내 설교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을 때 로키가 토르를 보며 짓궂게 웃었다. 토르도 로키를 또 끌어안으며 웃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 즈음, 로키가 몰래 아버지의 고함이 들리지 않게 두 사람의 귀에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비밀이야. 알았지? 로키가 속삭였고, 심장이 두근거렸고,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둘만의 비밀.



로키는 그 뒤로도 궁을 거니는 사람들에게 마법을 사용한 장난을 자주 쳤다. 들키면 혼이 났지만, 토르도 로키도 그들이 괴롭힘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녹색 셰이드에 쫓기는 이들은 모두 로키를 비웃거나 마법을 폄하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로키는 곧 숙덕이는 이들에게 마법을 자랑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열심히 수련에 매진했다. 마법에도, 다른 학문에도, 검술에도. 로키는 장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단검을 날리는 것을 더 좋아했지만, 이것도 구설수에 올랐다. 토르는 정말로, 저와 로키를 비교하는 이들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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