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둘만의 방> 중 첫 번째 이야기,

‘둘만의 방’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술관에 가 보신 적 있으신가요. 벽마다 공간마다 자리 잡은 수많은 작품들이 관람객들을 반기는 곳. 그것들은 네모나고 납작한 액자 속에 든 그림일 수도 있고, 어떤 상념이나 존재를 형상화한 입체적인 조각일 수도 있고, 혹은 그런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무엇일 수도 있겠지요ㅡ일례로 얼마 전엔 미술관에서 피아니스트 없이 절로 연주되는 피아노를 본 적도 있답니다ㅡ.

처음 <둘만의 방>을 읽었을 땐, 작중에서 ‘내’가 쓴 극의 배경이 하필 미술관인 이유가 궁금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두 주인공이 겨울밤 하루 내 갇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공간이라면 미술관이 아닌 다른 곳도 있지 않겠어요? 관공서일수도 있고, 도서관일수도 있고, 무언가 공간은 많았을 텐데.

김이듬 시인의 <겨울 휴관>을 읽고서도 그 부분은 내내 절 따라다녔어요.

왜 미술관이었을까?

 

“헤어진 연인은 그렇게, 휴관을 맞은 겨울 미술관에 갇히게 된다.”

  

극중에서 미술관에 갇힌 옛 연인들과 달리, 현실에선 ‘나’와 ‘너’가 마주치고 마는 곳은 다름아닌 ‘내’가 일하고 있는 극장이었습니다.

과거의 ‘우리’를 그려낸 작품, <둘만의 방>을 준비해 올리려 애쓰고 있는 공간. 저는 그 극장도 하나의 미술관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함께 즐겨 보던 작품 앞에서 마주한 옛 연인처럼, ‘우리’를 떠올리며 그려낸 극이 펼쳐지고 있는 곳.

 리뷰 초반에 말씀드렸듯이 작품이란 건 꼭 형체나 경계가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마임이나 그림자를 전시하기도 하는 마당이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꼭 그 극장이 미술관처럼 여겨지더라는 거예요.

  

전시작,

 과거의 우리.

 (제목: 둘만의 방)

 

관람객,

 ‘너’와 ‘나’.

  

그러면서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대해 납득했죠. 하나의 중의적인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어요.


그래서 그 미술관을 찾은 ‘너’는 ‘내’가 연출하고 무대에 올린 극, <둘만의 방>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오래전에 자신의 이별 통보로 헤어졌던 이가 여전히 날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까요? 아니면 자신이 처해있는 난처한 상황이 먼저 떠올랐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너’는 어쩌면, 그 극을 보고 과거를 떠올리고 있지 않았을까요. 자신이 흔들릴 것 같은 불안과 잠든 ‘내’ 얼굴을 볼 때면 물밀 듯 밀려왔던 두려움들, 행복했기에 두려웠던 순간들과 도망치기 위해 존재했던 시간들요.

그런 걸 떠올렸기에, 그랬기에 함께 손잡고 온 아이를 자신의 딸이라고, 남편이 있다고, 지나다 우연히 들렀다고… 그런 말로 몇 겹의 포장을 둘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려워서요, 다시 과거가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을 테니까.

  

‘나’는 그런 ‘너’에게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을 품었을 겁니다. 붙잡고 싶었을까? 저 자신도 확답할 수 없는 감정의 편린에 눌려 “자주 가는 가게가 있다”며 말을 꺼내는 모습이. 그리고 정기 휴일인 탓에 이만 가 보겠다는 ‘너’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순간이. 그 언젠가 너를 보내고 나서 맡았던 ‘슬픔의 냄새’에 코가 반응하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이 전부 글을 읽는 제게도 살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팸플릿을 밟고 걸어갔다는 대목에서는 조금 침음을 삼켰습니다. 이 전시ㅡ‘너’와 ‘나’에 대한 전시ㅡ를 꼭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 같아서요. ‘내’가 바람결에 굴러온 팸플릿을 밟으면서 느꼈을 미묘하게 씁쓸한 감정이 제게도 느껴지는 기분이었기 때문에요.

씁쓸할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옛 연인을 재회했는데 딸의 손을 쥐고 나타났잖아요. 도저히 미워하려 해도 못할 만큼 웃음과 귀여움을 품은 아이.


그러다 ‘너’를 한 번 더 만나고 집에 데려간 후, 칫솔이라는 아주 사소하고도 내밀한 물건이 집에 남아버린 후.

‘나’는 생각합니다.

깨닫습니다.

  

‘변한 것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나는 변하기도 했고, 변하지 않기도 했다. 가장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건 내가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불현 듯 나는 그 사실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네가 모르는 곳에서 변할 것이고, 변하지 않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모르는 곳에서 너를 계속 사랑할 거였다.’

  

그 직후 <둘만의 방>의 대본이 고쳐졌지요. 서로를 등진 채 걸어 나가는 결말이 아니라,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 입구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저는 이 부분에서 이 미술관의 큐레이터이자 주관자였던 ‘내’ 마음이 확고하게 방향을 잡았다는 걸 느꼈어요.

  

‘어떤 마음은 변했지만, 어떤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지.’

  

널 계속해서 사랑하고야 말리라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요. 확신하듯이, 그렇게.

사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다른 무엇도 아니고 딸이 있고 가정이 있다고 알고 있던 옛 연인을 향해 ‘너에 대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명명하는 행위가.

쉬울 수가 없죠, 절대. 그런데도 절절하게 느끼고 만 거예요. 생각하고 만 거죠. 그랬으니 오죽하겠어요, 마음을 정리하자 행동의 양상도 범위도 달라지고야 맙니다.

아프다는 ‘너’를 찾아가는 일 따위, 아마 이전의 ‘나’였다면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얼마 전 석양 속으로 작아지는 ‘너’를 볼 때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겠지요.

그러나 이젠 달라졌습니다. ‘너’의 직장을 찾아가도 보고, 문병을 핑계로 집을 물을 줄도 알아요. P에게서 무언가를 묻고 죽과 과일 따위를 사가는 것 마저도. ‘너’에게 전화해 찾아가도 되겠느냐고 묻기까지 하지요.


 어떤 전시를 보자면요, 처음 작품을 보았을 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다가 그 전시 의도나 해설을 보고 나면 감탄을 터뜨리게 하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 역시 그랬어요. 예전엔 아마 전부 보지 못했을 부분들일 거예요. 하나씩 눈에 들어오는 ‘너’의 변하지 않은 것들과 너다운 모습들. 과거의 아픔이나 회피에 가려져 있었을 그런 것들이 이제는 선명하게 눈앞을 채우고 웃음을 짓게 만든다고 말하는데, 참 비교되지 않나요. 자신의 사랑을 확신하기 전과는.

그런 방향이, 올곧은 시선이 결국은 '너'마저 되돌아보게 만든 걸까요. 둘이 마침내 사랑을 다시 이야기하고, 말로써 완성될 수 없는 마음들을 그러모아 서로의 품 안을 채워주려 노력하게 되었을 때. 기묘한 충족감이 제 가슴속을 빠듯하게 채우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상하게도요.


그리고 얼마 뒤 ‘나’는 다음 극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미술관의 전시품들은 보통 일정 시간을 주기로 교체되고 새롭게 배치되곤 하잖아요. 꼭 그런 것처럼 <둘만의 방>도 어느덧 상연 종료를 앞두게 된 거였습니다.

 

그 지점에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름도 참 명확했다는 느낌.

<둘만의 방> 이라니.

방. 방이라는 건 뭔가 한정되고 네모나게 나누어떨어지는 공간이라는 느낌이잖아요. 그 극이 곧 끝난다는 건, 그동안 갇혀 있던 틀에서,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그 끝을 알 수 있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다는 뜻 같기도 했어요. 둘의 한계가 더 확장된다는 이야기같기도 했고요.


그렇게 <둘만의 방>을 떠나보낸 그들만의 미술관에서 ‘너’와 ‘나’라는 관람객이 마주할 새로운 전시는, “영원한 사랑을 꿈꿨고 마침내 영원을 실현한 사람들의 이야기.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에 관한 이야기.”라니.

그거야말로 공간의 범주로는 담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요. 방은 커녕 어떤 한 곳에 얽매일 수 없는 이야기잖아요. 쭉 걸어나갈 여정의 이야기이니까요.

다시 말해 “우리의 미래”.


그러니 저는 웃음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누군가 사랑한 미술관의 그 전시는 앞으로도 계속. 휴관일 없이 전시될 예정인 듯하기에.

언제까지고 함께, 또 같이.


 

추신 - 아래에 덧붙이는 시는 박세미 시인의 ‘빈집에 갇혀 나는 쓰네’라는 시예요. 기형도 시인의 ‘빈집’을 향한 트리뷰트 시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둘만의 방>이라는 이름을 곱씹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시입니다. <어느 푸른 저녁>이라는 시집에 실려 있습니다.

 

빈집에 갇혀 나는 쓰네

                               박세미


빈집에 초대되었습니다

힘겹게 잠겨 있던 문을 열고 들어와

스스로를 가두고 나는 씁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검은 개처럼

허옇게 변해가는 빨래처럼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길고 축축한 혓바닥이 되어 온종일 벽을 핥아대도

반쯤 잘린 귀가 되어 천장을 훑고 다녀도

비어 있는

비어 있어

유지되는 모두의 가여운 집

 

인사는 말자

저녁마다 산책을 떠났다가

돌아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빈집에 갇혀

나는 쓰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초대하는



추신 2 - ‘너’의 조카인 아이가 빨간 장미색 구두를 부딪힐 때, 그 때 우리는 모두 마법에 걸렸을지도요. 그 옛날 캔자스 출신의 어느 여자아이가 그랬듯이.

*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start=short&itemid=220680108

둘만의 방 - 골방의 초핀 작가님



@nynyp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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