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옆 작은 공터에 멀뚱히 서있던 남자는 자신을 ‘렌고쿠 쿄쥬로’라고 소개하고는 손수건에 쌓인 은장도를 내밀었다. 깨끗하게 세척을 한 것인지 세월이 흘러 손때가 묻어 있던 것이 새것 처럼 빛났다.  


“내 피를 닦다 보니 묻지도 않고 세척해버리고 말았다. 미안하군.”


물건을 깨끗하게 해주고도 의사를 묻지 않았다고 사과를 하는 사람이라니…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받는 동등한 존중과 대우가 낯설었다.


“아. 감사합…”


하지만 칼을 받으려고 손을 뻗자 렌고쿠는 내밀었던 그것을 다시 자신의 손에 쥐고는 뒤로 물렸다.


“검사로써 나름대로 다양한 검을 보았다고 생각했다만, 이것은 처음보는 종류의 칼이더군. 이것은 무슨 용도지? ‘그런’ 용도의 칼인건가?”


검을 다루는 사람이구나.


내 손을 잡았던 렌고쿠의 거친 손의 감촉이 기억 나 얼굴이 붉어지려고 하던 찰나, 직접적인 단어 선택은 피했지만 렌고쿠는 그것이 자결용이냐고 물었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눈은 ‘그런’용도면 돌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서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왜 웃지? 나는 진지하다만.”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지 렌고쿠는 의아한 듯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젓고 작게 미소지었다.


“나리의 따뜻한 마음이 기뻐서 웃었습니다.”

“렌고쿠.”

“…네?”

“렌고쿠 쿄쥬로 라고 이름을 분명 알려줬네만.”


렌고쿠의 태양을 닮은 눈동자는 너무 투명하고 올곧아서, 오히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네, 렌고쿠씨. 죄송해요.”

“죄송할건 없다. 그래서 이 칼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겁니다. 조부께서 물려주신 거에요. 이제 그만 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안심이다.”


손수건 위의 은장도만 집어가려고 하는데, 렌고쿠가 멀뚱히 손을 내민 채 계속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렌고쿠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작은 꽃이 수 놓여진 하얀 손수건은 이 남자가 쓰기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이것도 가져갔으면 한다. 소중한 칼을 더럽힌 것에 대한 사죄네.”

“아뇨. 오히려 사죄를 드릴 건 저입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소녀를 위해 산 것이다. 받아줬으면 좋겠군.”

“아…”


나를 위해 샀다는데 받지 않기도 애매해서 조심스레 렌고쿠의 손 위에 있는 손수건을 집어 들고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사양 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음. 소녀, 이름이 뭐지?”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무심코 반문하다 반문할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 나라에서 쓰고 있는 이름을 말해주자 렌고쿠는 미소지은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 듯 하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 제 손을 턱밑에 가져다 대었다.


“제 이름에 무슨 문제라도…?”

“음, 그것이… 오해하지 않고 들어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렌고쿠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상처를 치료해주던 동료가 그 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이 나라의 것이 아니더군.”

“아.”

“소녀는 분명 이것을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만… 틀렸다면 부디 용서를 바란다.”

“아닙니다. 나리…아니, 렌고쿠씨가 맞습니다.”


그의 시선은 나를 꿰뚫는 것 같아서 이상하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은 현재 이 나라에서 아는 이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 나라에서 내게 바라는 것이기도 했고, 분하지만 그것이 내 삶에 더 도움이 되는 것도 맞았다.

원해서 쓰는 이름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마치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인 양 묻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사는 이상 제가 ‘진짜’ 이름을 사용할 일은 없을 듯싶습니다. 사용하지도 못 할 이름, 다른 이에게 알려줘서 무얼 합니까.”


어느 나라의 것인지 렌고쿠가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일부러 ‘진짜’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자 렌고쿠의 표정이 굳어졌다.


검사라고 했지. 섣불리 기분을 상하게 하면 칼에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빌빌거리는 것에는 이제 슬슬 진절머리가 나고 있었다. 렌고쿠의 시선이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은장도를 쥐고 있는 내 손으로 향했다가 다시 내 얼굴을 향했다.


“그렇군. 무심했다. 사과하지. ”


나는 사과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여느 제국민들처럼 강한 제국 따위를 외치며 칼을 벼르고 있을까. 무예를 하는 이들 중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다고 들었다. 해봐야 아무 쓸모 없는 부질없는 고민이었다. 이 남자를 붙잡는 게 아니었는데, 잠시 분위기에 휩쓸려 헛된 꿈을 꾸고 말았다.


“제가 제국민이 아니라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렌고쿠씨가 아실 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밝혀지면 살아가기가 힘들어져서요.”

“음. 알겠다.”

“이것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만 자리를 뜨려는데, 렌고쿠가 다급히 내 손목을 잡았다.


“(-)”


조심스러운 손길은 내 손목을 잡고는 금방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여인을 대하는 것에 있어 다른 이들에 비해 조금 더 보수적인 편인지 렌고쿠는 첫만남부터 신체접촉에 상당히 조심스러워 하는 것이 느껴졌다.


“꽃, 좋아하나? 꽃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을 알고 있는데, 함께 하는 건 어떤가.”

“네?”

“내일, 그대만 괜찮다면 또 찾아와도 되겠나.”


명백히 호감을 표하는 말에 되묻는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붉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렌고쿠에게도 그것이 보이겠지.


“내일 오전, 내가 그대를 데리러 와도 괜찮겠나.”


이제와서 거부할 재간도 없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렌고쿠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는지 활짝 웃으며 크게 웃었다.


“그럼, 데리러 내일 다시 오겠다. ”


그리고 렌고쿠는 빠르게 눈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화려한 사람이었다. 의복과 머리카락, 외형의 모든 것도 그러했지만 그것뿐이 아니라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남일 뿐이었지만, 올곧은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학교를 갔는지, 수업을 들었는지, 집에 왔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루종일 내일 있을 렌고쿠와의 만남을 생각할 뿐이었다. 길을 가다보니 화려한 기모노가 가게 유리창 너머 전시되어 있었다. 두번의 만남에서 렌고쿠는 전부 양복(洋服)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곁에 누군가 서 있다면 저런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여자인 편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아주 잠시, 그의 옆에 기모노를 입고 서있는 자신을 상상하다 끔찍한 자기 혐오감에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어떤 세상이든 살아남은 자가 이기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때로는 삶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죽어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나지만, 그래도 가슴 한 켠에 항상 품고 있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의복은 그런 나의 작은 고집이었다.


정말 필수불가결한 상황이 아니면, 나는 항상 양복을 고집했다. 신여성을 표방하는 여학교라 교내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듯 보였지만, 거리를 걸으면 그것이 환상인 것 마냥 모두들 기모노차림이라 내가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는지 확실히 느껴져서 이질감이 들었다.

옷장을 열어보며 한참을 고민하다 양복과 기모노 그 사이 어딘가의 애매한 옷을 집어 들었다.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는 일본의 명문가 안주인이 선물해준 것이었다. 어디나 상류층들의 삶은 화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 또한 고국에서는 마찬가지였던 주제에, 지금 이렇게 있는 것도 누구의 덕분인지 뻔히 알면서도 괜히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나라고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와서 이런 것에서 정의로운 척, 깨어있는 척하는 자신이 역겹게 느껴졌다.


결국 다음 날 아침, 나는 그의 눈동자와 닮은 붉은 색 하카마를 입고 그를 맞이했다. 내 복잡한 속을 알 리 없는 렌고쿠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는 여태 보았던 그 양장을 입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 나와주어서 고맙다.”

“만나기로 약속한 거 아니었나요?”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째서요?”


내가 싫은 티를 냈을 리가 없었다. 복잡한 마음과는 별개로 그가 싫지 않았으니까.


의아함에 되묻자 렌고쿠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물었다.


“내가 밉지 않은가?”


일본인인 자신이 밉지 않냐는 의미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지만,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라서 잠시 고민하자,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질문은 취소하지.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다.”

“아뇨.”


올바른 사람. 미워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밉지 않습니다. 곤란할 정도로요.”


내 대답에 그의 큰 눈이 조금 더 커지는 듯 하더니 이내 그가 환하게 웃었다.


“그런가! 그거 큰 일이군!”


정말 기쁘다는 듯 그의 뺨이 조금 붉어져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와 같이 뺨을 붉히며 웃었다. 봄바람이 살랑이는 아름다운 날이었다.

현생이 방해하지 않을 때, 쓰고싶은 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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