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양요섭 - 그래도 나




 

나는 아직도 한겨울이 되면 그 애의 사각거리던 연필 소리를 기억한다.

 

 



이런 시





천재. 선천적으로 타고난,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 천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고, 본인이 천재라고 주장하는 사람 또한 많다. 하지만 진짜 천재는 극소수. 그 희소성이 천재라는 타이틀을 더 빛나게 만들어 주는 건 아닐까.


나재민은 천재였다. 자칭 천재가 아닌, 모두가 인정하는 천재. 사실 문학계 쪽엔 크게 관심이 없어 가끔 신문이나 인터넷 문화란에 올라오는 기사들의 타이틀을 보고, 아 얘가 천재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평이 얼마나 좋은지 나쁜지는 잘 모른다. 그냥 언론을 통해 나오는 것들을 보며 대충 유추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재 시인 이상의 환생. 유독 자주 나오고 제일 거북해 보이는 미사여구였다. 고등학생 때 역시 문학에 크게 관심이 없던 터라 이상이라는 작가도 사실 처음엔 누군지 잘 몰랐다. 인터넷에 대충 검색해 보니 모두가 떠들썩하게 떠들던 시대의 천재라고 말했다. 그런 사람과 나재민이 견주어지는 걸 보니 얘도 보통은 아니구나, 또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천재 시인~”



한 번은 그를 놀려주고자 만났을 때 천재 시인이라고 장난을 친 적이 있었다. 어떤 장난을 치든 간에 항상 웃는 얼굴로 받아주던 나재민은 그날따라 표정을 미묘하게 굳혔다. 그런 거 아니야. 삽시간에 가라앉는 얼굴에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이내 본인도 놀랐는지 표정을 푼 나재민은 손을 잡아 오며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그게 아니라……. 나 천재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재민은 천재가 되기 싫구나. 남들은 가질 수 없어 안달인 그 이름을 나재민은 버리려 했다.



“재민아, 저번에 내가 너한테 천재…… 라고 장난쳤을 때.”

“그때 왜?”

“음…….”



어김없이 나재민을 만난 날, 뜸을 들이다가 나재민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려 했다. 너는 왜 천재가 되기 싫은 거야? 나재민은 마시고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한 번 쭉 빨아당기고 내려놓았다.



“시작도 전에 출발선을 그어버리는 것 같아서 싫어.”

“응?”

“나는 아직 여기 서 있는데, 사람들은 저기 앞에 출발선을 그려놓거든.”



시작도 전에 그 출발선에 맞추려면 진짜 출발했을 때 이미 숨이 턱 끝까지 차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막 레이스를 마친 사람처럼 나재민은 숨이 벅차 보였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로 약속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일 앞으로 다가왔다. 거리는 빨간색과 초록색의 물결로 뒤덮였다. 여기가 한국인지, 산타 마을인지 모를 정도였다.


거리에는 캐롤만 주야장천 흘러나왔다. 크리스마스 연금을 노리는 수많은 가수의 캐롤풍 신곡들도 많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 정말 들을 만한 건 몇 곡 되지 않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결국은 머라이어 캐리와 Wham!의 라스트 크리스마스밖에 들을 게 없었다.



“이것도 사자!”

“너 사고 싶은 거 다 사.”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나재민의 작업실 겸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부모님 계신 거 아니야? 집 따로 구했어. 고개를 젓는 나재민에게 뭔가 미안해졌다. 나만 괜찮아졌네.


크리스마스 당일이 되면 거리에 사람이 많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해 미리 살 것들을 사러 나왔다. 크리스마스 날 해먹을 음식들, 트리 장식할 것, 그리고 서로에게 줄 선물. 사실 선물 같은 건 하지 말자고 미리 못 박았지만 둘 다 몰래 선물을 사려다 들켰다. 결국 딱 한 가지씩만 사기로 했다.



“한 시간 뒤에 여기서 보는 거다?”

“알겠어. 길 잃지 말고 조심해서 갔다 와.”



내가 무슨 애야? 손을 맞잡았다 다시 놓았다. 잠깐 떨어지는 건데도 손을 놓는 게 아쉬웠다. 매일 이래서 어쩌지. 언젠가 나재민이랑 함께 살게 될 날이 온다면……. 얼굴이 붉어진다.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 좋겠다.


모퉁이를 돌아 한 소품샵에 들어갔다. 글을 쓰는 나재민에게 노트와 매일 쓸 수 있는 일기장, 연필, 그리고 만년필을 주고 싶었다. 바래지고 싶어서 연필을 쓰는 나재민에게 주제넘은 부탁일지 모르지만 나와 함께한 하루만큼은 바래지지 않게 잉크로 새겨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재민이 처음 냈던 책의 표지 색과 같은 먹색의 만년필을 골랐다.


전부터 생각해 둔 선물이라 선물 사는 시간은 짧았다. 아직 40분이나 남아있었다. 그동안 뭘 할까 싶어 이곳저곳 구경을 하려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아무 데도 갈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그냥 먼저 가서 기다리지, 뭐.


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다들 표정이 들떠있었다. 지금 내 표정도 그럴까? 주머니에 넣어둔 손을 꺼내 볼을 손등으로 쓸었다. 크리스마스에 오늘처럼 뭔가를 기대하고 준비한 건 처음인 것 같다.



“어……!”



나재민은 미리 와 있었다. 아직 30분은 남았는데? 내가 언제 올지도 모르면서 이 추운 날씨에 바깥에 저렇게 서 있는 게 미련해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울컥했다. 생각해 보면 나재민은 언제나 먼저 와서 나를 기다렸지. 항상 언제 왔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아 대체 언제 온 거냐 물어보면 늘 웃으며 방금 왔다고 했는데 매일 저렇게 와서 기다렸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나재민의 모습은 낯설었다. 춥지도 않은 건지 한 손에는 내 선물을 들고 있었고 한 손은 핸드폰을 들고 서 있었다. 손 시릴 텐데 넣고 있지. 본의 아니게 나재민을 염탐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딱히 어딘가에 몸을 숨기지도 않았는데 인파가 너무 많아 가만히 서서 쏟아지는 군중들 사이로 나재민을 바라봤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네가 바로 보여.


10분이 넘어갔다. 나재민은 시간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아직 20분이 남아있었는데 나재민은 벌써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너는 항상 그런 모습으로 나를 기다렸던 거야? 멀리서 봐도 나재민의 손이 빨갛게 얼어있었다.


또 10분이 넘어갔다. 나재민은 여전히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를 기다렸다. 길 잃은 강아지처럼 주인을 기다리듯이.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그저 보기만 해야 했다.



재민이

수신 거절



핸드폰을 만지더니 곧 전화가 걸려 왔다. 핸드폰 액정에 뜨는 이름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고개를 들어 나재민을 보면 빨갛게 부르튼 손으로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댄 채 주위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넌 어딘데.”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기 무섭게 표정이 없던 나재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입꼬리를 올려 말하는 얼굴을 보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재민아.



-나는 이제 선물 사서 거의 다 왔어.



거짓말. 너 30분 전부터 떨고 있었잖아.



“아…… 진짜? 나도 거의 다 왔어.”

-조심해서 천천히 와. 추우니까 손 시리지 않게 주머니에 넣고.



네 손은 벌써 빨갛게 부르텄는데 왜 넌.



-잠깐 떨어져 있었는데 보고 싶네.



재민아. 넌.


전화를 끊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로 걷다 걸음을 점점 빨리했다. 나중엔 뜀박질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부딪히는 사람들에게 사과하며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재민아.


갑자기 전화가 끊겨 영문을 모르던 나재민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숨을 몰아쉬며 나재민의 근처까지 와 달려갔다. 고개를 돌린 나재민은 눈이 마주치자 한껏 웃었다. 그대로 나재민에게 달려가 안겼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꼭 안아주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어왔다. 재민아.



“무슨 일 있어?”

“재민아, 너.”

“응. 말해봐.”



품에서 벗어났다. 나재민은 순순히 놓아줬다. 그대로 나재민의 손을 붙잡았다. 너 손등 왜 이래? 빨갛게 부르튼 제 손을 나재민에게 보였다. 나재민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핸드크림을 안 발라서 그런가 봐~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곤 곧바로 내 손을 들어 확인했다. 넌 괜찮아? 이 와중에도 넌.



“너 언제부터 와서 기다렸어?”

“나 방금?”

“방금 온 사람 손이 이럴 수가 없잖아.”



진짠데~ 나재민은 웃었다. 난 늘 그 웃음에 져줬다. 오늘도 그래야 하나. 나재민은 빨간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 제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도 연신 손이 차가워질세라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줬다. 네가 이럴 때마다 나는 바다에 빠져버리는 것 같아.


오늘은 넘어갈 수 없었다. 늘 네 웃음에 졌던 나지만, 오늘은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까 다 봤어. 너 여기서 30분 전부터 기다리는 거.”



나재민은 말이 없었다. 묵묵히 내 말을 들었다. 이것마저도 나를 위해 배려하는 것 같아 또 귓불이 뜨거워졌다. 목이 칼칼하다. 



“재민아.”

“응.”



말없이 안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나재민은 팔을 뻗어 나를 그대로 감싸 안았다. 저 사람들 봐. 주위를 지나가며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참을 꼭 안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넌지시 물었다. 너 맨날 그렇게 일찍부터 기다린 거야? 나재민은 가만히 걷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오래는 아니야. 걱정을 덜어주려는 건지 뒷말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 그렇게 일찍부터 기다려? 나는 시간 맞춰서 오잖아. 나재민은 맞잡은 손을 한 번 더 고쳐잡으며 웃었다.



“모든 일에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그래도…….”

“굳이 이유를 붙여야 한다면 너니까 괜찮은 거야.”



마주 잡은 손이 어느새 따뜻해졌다.

























“작가님.”



수정한 글을 들고 출판사로 갔다. 크리스마스가 머지않아 일정이 촉박했다. 이번에 통과 받지 못하면 책을 낼 수 없다. 직원에게 미리 연락했더니 버선발로 마중을 나왔다. 추우시죠, 얼른 들어오세요! 그쪽이 더 추워 보이는데. 대꾸는 하지 않고 부산스러운 직원의 뒤를 따랐다. 회의실에 도착해 원고를 넘겨줬다. 담당 직원은 글을 읽다 원고를 내려놓았다. 회의실 안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직원은 머뭇거리며 재민을 불렀다.



“글 수정해 오시겠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어…….”

“말씀하세요.”

“전이랑 크게 다를 게 없네요.”



예상은 했다. 그날 밤, 그 등을 바라보며 글을 놓겠다고 마음먹은 이후로 이런 반응을 수천 번 더 생각해 봤으니. 재민은 담담했다. 하지만 손끝이 살짝 떨리는 건 숨기지 못했다. 출판사 직원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재민을 바라봤다.



“제가 개인적으로라도 작가님 팬이라 그러는데, 혹시 요즘 들리는 얘기 들어보셨어요?”

“어떤 거요?”

“아, 작가님 이쪽 일들 관심 없으셨죠……. 그, 문학계에서 요즘 작가님 얘기 많이 나와요.”



그런데요? 눈빛으로 직원을 채근하니 직원은 재민의 눈치를 봐가며 말을 이어갔다. 등단했을 때보다도 못하다고……. 지금 쓰시는 글들이 삼류 소설보다 더 나쁘다고 하더라고요.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듣는 것에는 별수 없었다. 재민의 눈이 흔들렸다. 아 저는 물론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요……! 애써 덧붙이는 직원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닌 제게 천재 시인이니, 이상의 환생이니 하는 것들을 붙여준 건 자기네들이면서 이제 와서 삼류 문학 작가라고 비난하는 꼴이. 단순 시팔이 작가라고 치부하는 게 재민은 살짝 기분이 나빴다. 노인네들이 잡아먹은 그 좁은 판에서 조금 기세가 주춤한다고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게 우스웠다.


사실 제 평에는 관심이 없는 재민도 언뜻 들은 것이 있어 알고 있었다. 근래 문학계에서 자신의 평이 어떤지. 매일 쏟아져 나오는 문화계 기사에서는 재민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천재 시인 이상의 환생이라 불리던 젊은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 

시팔이 보다 못한 글 

나재민 시인, 젊은 패기의 실종? 

김수훈 작가, “한 번 떴다고 자만하는 꼴은 타락의 지름길”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저기요, 가만히 있던 저에게 이상한 장신구를 달아준 건 당신들이에요. 재민은 제게 닥친 혹평과 비난보다 혹시나 이 기사를 접할 그녀를 먼저 걱정했다. 보고 나면 걱정할 거야. 재민은 그게 더 신경 쓰였다.



“부르셨어요.”

“망할 놈의 새끼.”



오랜만에 부모님에게서 호출이 왔다. 아버지가 급하게 찾는다는 말 하나를 남기고 전화를 끊겼다. 유학 이후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집 앞에 서니 남의 집에 온 것처럼 낯설고 불편했다. 거대한 검은색 철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언제 또 바뀐 건지 새로운 아주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들리는 건 욕이었다. 슬리퍼를 채 신기도 전에 들려오는 아버지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재민도 모르게 웃음이 픽 나왔다. 더 이상 열아홉의 어린애가 아니었다.



“왜 부르셨어요?”

“글을 쓴다고 했으면 끝까지 잘 갔어야지 지금, 이 꼴이 뭐냐? 집안 말아먹을 짓이면 가리지 않고 다 하고 다니는구나.”

“그거 때문에 부르신 거예요?”

“미친놈. 태평하게 그런 소리가 나오냐? 너는 집안의 수치야!”



재민은 5년 동안 성장했다. 소년에서 어른으로. 재민이 크는 동안 아버지도 늙어갔다.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크게 호통칠 때마다 얼굴에 있는 주름들이 함께 움직였다. 아, 아버지. 언제 이렇게 늙으셨어요.



“글쟁인지 뭔지 허락해 줬던 이유가 뭔 줄 알아? 네가 천재 소리를 들어서야. 그나마 너를 용납해 주고 인정해 주려고 노력했건만 결국 또 네가 모든 걸 망쳤다. 망할 새끼.”



아버지는 언제나 몸에 화가 많으셨다. 오늘도 결국 그 화를 참지 못했는지,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던 그날처럼 골프채를 가져왔다. 그 모습을 보며 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버지, 저는요. 이제 글을 쓸 수가 없어요. 이렇게 화내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이에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아들의 좌절을 보고 기뻐할 그 괴물 같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고, 아무리 이제 글을 안 쓰기로 마음먹었다지만 제 입으로 뱉긴 어려웠다. 어쨌거나 재민에게 글은 유일했고 확실한 그만의 도피처였으니까.


그냥 그렇게 맞았다. 이상하게 맞는데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버지의 힘이 노쇠해져서인지, 재민이 커져서인지 몰랐다. 맞는 동안 재민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녀가 보고 싶다. 새로운 도피처였다.



“다시는 집안에 발도 들일 생각 마라. 오늘부로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니까.”



제풀에 지쳐 아버지는 폭행을 거뒀다. 숨을 헐떡이며 말하는 꼴이 제법 우스꽝스러웠다.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한 번 맞아서 끝낼 수 있는 인연이었다면 진즉 그렇게 했을걸. 여전히 어머니는 나와보지 않으셨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아버지를 봤다. 한 손에 골프채를 쥔 채로 소파에 기대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앞으로 걸어갔다. 썩 꺼지라니까 왜 또 기어 오냐. 말투는 거셌지만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많이 늙으셨으니, 앞으로 건강 관리 열심히 하세요.”

“뭐라고?”

“아버지도 예전 같지 않으신 거 알잖아요. 자식으로서 마지막 걱정이에요. 건강하세요.”



재민은 얼빠져 있다 호통치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집을 빠져나왔다. 아- 후련하다. 이제야 숨을 쉬는 것 같다. 차 키를 꺼내 들어 잠금을 풀려 할 때 커다란 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라도 아버지한테 가서 빌어.”



비싼 퍼를 두르고 어머니가 나왔다. 재민은 그 모습에 잠시 하, 하고 숨이 터져 나왔다. 분명 맞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아버지에게 가서 빌란다. 제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요? 이 집안의 돌연변이인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어머니 저는요, 아버지한테 골프채로 맞은 상처보다 말로 입은 상처가 더 아파요. 여전히 곪아있어요. 죽을 때까지 저를 괴롭힐 거예요.


말없이 어머니를 보다 차로 걸어갔다. 재민아.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가 재민의 이름을 불렀다. 우뚝 걸음이 멈췄다. 너 착한 아이였잖니,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결국엔 또 내가 잘못했군요. 뒤를 돌아 어머니의 눈을 쳐다봤다. 새까만 눈동자가 짙어 그 속이 보이지 않았다. 가만 보다 고개를 꾸벅 숙여 묵례했다.



“어머니도 건강하세요.”

“나재민.”

“아버지한테 너무 맞추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어머니도 사람이잖아요.”



행복해지세요. 재민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12시가 되자마자 케이크에 초를 켰다. 사실 이브날 저녁부터 함께 있어서 사실상 이틀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과 같았다.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재민은 초코케이크를 사 왔다. 부쉬 드 노엘. 통나무처럼 생긴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사진 찍어 줄게. 핸드폰을 집어 든 나재민은 찰칵찰칵 셔터음 소리를 내며 열심히 찍었다. 아 얼굴 이상하니까 찍지 마. 안 이상해~



“왜 나만 찍어. 같이 찍자.”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하나, 둘 하면 찍는 거야. 찰칵. 찍힌 사진을 봤다. 사진 속에는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는 내 얼굴과 그런 내 얼굴을 보고 웃는 나재민이 있었다. 화면을 봐야지! 괜히 팔을 때렸다. 알겠어, 다시 다시. 이번엔 제대로 나왔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우리 둘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나 이거 보내줘! 사진을 확인하는 나재민의 옆에 앉아 말했다.


나재민은 우리 사진을 배경 화면으로 바꿨다. 아 뭐야, 배경 할 거면 더 예쁘게 찍었지. 툴툴대자, 나재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좋아.


케이크 먹을래? 이미 케이크 칼로 자르고 있으면서 예의상 물었다. 나재민은 놓치지 않고 이미 자르면서 왜 묻는 거냐고 놀렸다. 한 마디도 지지 않지.



“케이크 먹으면서 영화 보자.”

“우리 영화는 같이 안 보기로 했는데~”



능글맞게 얘기하는 나재민을 보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안 볼 거면 말고. 아 볼래~ 보고 싶다~ 옆으로 성큼 다가와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는 나재민을 보며 웃었다. 한 번만 봐주는 거야.



“보고 싶은 거 있어?”

“나 저번에 이거 보려다가 못 봤거든.”



미 비포 유. 개봉한 지 2년이 지난 영화였다. 이게 보고 싶었어? 고개를 끄덕였다. 책으로 읽은 적 있는데 재밌었거든. TV 앞으로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들고 가 리모컨을 만졌다. TV 앞에서 열심히 리모컨으로 조작하는 동안 나재민은 내가 조작하는 걸 보며 입꼬리를 올리다 따뜻한 밀크티를 타서 가져왔다.


영화가 재생되고 나재민을 따라 소파에 몸을 기댔다. 옆에 꼭 붙어 앉아 한 명은 밀크티를 마셨고 한 명은 케이크를 잘라 먹었다.


극 중 남자 주인공은 시작부터 사고를 당해 목 아랫부분이 모두 마비됐다. 잘 나가던 사람이 한순간에 추락하는 장면을 보니 내 마음이 더 불편했다. 책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시각적으로 보니까 더.



“자기가 좋아하던 일 못 하게 되는 건 진짜 슬픈 것 같아.”



나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넌지시 질문이 돌아왔다. 내가 만약에 글 못 쓰게 되면, 어떨 것 같아? 목소리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할 수 없게 모호했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생각하다 문득 글이 나재민에게 어떤 의미인지 떠올라 금방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슬플 거 같아. 네가 그랬잖아, 글은 네 자기해방의 도구라고. 그게 사라지는 거니까 슬플 것 같아.”



나재민은 가만히 말을 들었다. 곧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일 있나? 심상치 않은 얼굴로 나재민을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나재민은 자기 말고 영화를 보라며 얼굴을 돌려줬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영화 다 보고 나면 물어봐야지.


결말로 치달을수록 코가 맵게 느껴졌다. 결말을 다 알면서도 이러고 있는 게 조금 웃기기도 했다. 곁눈질로 나재민을 보니 생각보다 영화가 괜찮았는지 꽤 집중하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나재민의 눈가는 건조했다. 나만 눈물 나나 봐. 눈을 비비는 척 고인 눈물을 쓱 닦아냈다.


눈물을 닦은 게 소용없었다. 남주인공이 죽을 때 나는 거의 지인이 죽은 것처럼 울었다. 티 내기 싫어 소리 없이 조용히 눈물만 흘리다가 코가 막혀 킁, 하는 소리를 냈을 때 나재민은 고개를 돌려 우는 내 얼굴을 봤다. 살짝 창피해 고개를 돌렸다. 놀리는 거 아냐? 괜한 걱정을 할 때 나재민은 소파에서 일어나 휴지를 들고 왔다.



“많이 슬펐어?”



놀릴 줄 알았는데 반대편을 보고 있던 내 얼굴을 살며시 돌려 눈가를 휴지로 살살 닦아줬다. 젖은 눈으로 나재민을 의아하게 쳐다보자, 나재민은 웃으며 말했다. 또 이상한 생각했지. 대답 대신 코를 킁, 하고 마셨다.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 어떡해~ 나재민은 한 팔로 감싸 안더니 고개를 숙여 내 얼굴을 계속 확인했다.



“이 뒤가 더 슬픈데 어떡하지?”

“너 이거 봤어?”

“전에 봤던 거야.”



감싸 안은 팔로 어깨를 쓰다듬으며 나재민은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시선은 끝까지 나에게 고정된 채로 그만 슬플 때까지 울라며 토닥였다. 너 때문에 더 눈물 나는 거 모르지. 원래 울고 있는 사람한테 저런 말 하면 더 눈물 나는 거 알면서 저러는 거 아냐? 맥없이 코만 킁킁댔다.


결국 울어버렸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재민은 웃으며 나를 안아주기 바빴다. 괜찮아? 반도 못 마신 밀크티를 뒤늦게야 홀짝이며 귓가에서 들리는 나재민의 웃음소리를 배경음 삼아 몸을 기댔다. 갑자기 이렇게 기대면 떨리는데? 능청스럽게 구는 태도에 몸을 빼려 하자 아니야, 좋아 좋아. 하며 다시 원 상태로 돌려놨다.



“같이 있으니까 좋다.”

“나도.”

“아 너 영화 본 거라면서 왜 말 안 했어?”

“네가 보고 싶은 거였잖아.”



너무 당연한 이치라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얼굴이 사랑스럽다. 너 없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너무 좋다.



“아, 맞다.”

“응?”

“너 요즘 진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걱정돼. 요즘 들어 자꾸 의미심장한 말이나 행동이 몇 번 보이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혹시 미팅할 때 담당자가 뭐라고 했어? 나재민은 그냥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


나재민은 아이러니하다. 표정에 모든 게 드러날 때가 있으면서도 모든 걸 감춰버리기도 한다. 가령 추운 거리에서 나를 봤을 때 얼굴에 번지던 반가움이라든지, 지금처럼 하나도 모르겠는 얼굴을 할 때라든지. 나재민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할수록 가끔은 아직 잘 모르는 게 많구나 싶을 때가 자주 있다.


걱정 안 해도 돼. 입버릇이라고 말하면 입버릇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하는 말이다. 이상하게 나재민의 말에는 따를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한참 걱정하다가도 나재민이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걱정이 덜어졌다. 지금처럼.



“이제 선물 볼까?”



아 잊고 있었다. 선물을 가져오자며 나재민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나도 몰래 선물을 꺼내왔다.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선물을 품에 안고 기다릴 때 방 문이 열렸다. 뭘 산 건지 상자가 동그랗고 조금 컸다.


누구 먼저 볼래? 질문에 내가 먼저 주겠다 했다. 원래 선물은 나중에 봐야 더 좋은 법이다. 나재민은 눈썹을 들썩이며 선물을 받아서 들었다. 이게 뭘까~ 선물을 뜯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보는 사람도 괜히 긴장됐다. 좋아해야 할 텐데.


나는 웃고 있는데 사람들이 왜 웃지 않냐고 물어보는 순간들이 있다. 지금의 나재민이 그런 기분일까. 분명 웃고 있는데 마냥 기뻐 보이는 웃음은 아니었다. 눈치를 살폈다. 별로야? 나재민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좋아서 그래. 말하는 얼굴과 이질적이다.



“만년필은 뭐야?”

“아, 그거. 너 맨날 바래지고 싶어서 연필로 글 쓰잖아. 근데 일기 쓸 때 나랑 있었던 날은 만년필로 써 달라고……. 우리 기억은 안 바래졌으면 좋겠어서.”

“아 진짜 미치겠다.”



만년필 포장을 뜯어서 어리둥절하던 나재민은 이유를 듣고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가며 웃었다. 어쩌면 좋지, 너를. 그렇게 웃기지도 않은 것 같은데 한껏 웃었다. 오늘 당장 만년필로 써야겠다, 네 말 하나하나. 만년필을 소중하게 케이스에 담아 테이블 위에 올려둔 나재민은 이제 자기가 선물을 주겠다며 눈 감고 손을 펼치라 했다. 뭘 주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눈 뜨면 안 돼~ 혹시나 볼까 봐 눈앞에 손을 휙휙 젓는 게 느껴졌다. 안 봐. 눈가에 주름이 잡히게 더 세게 감았다. 대체 뭘 주려고. ……어.


눈을 번쩍 떴다. 아직 뜨면 안 되는데. 그 말도 들리지 않았다. 손가락을 에워싸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에 눈을 안 뜰 수가 없었다. 나재민이 잡고 있는 왼손 약지에는 못 보던 은색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이거…… 뭐야?”

“메리 크리스마스.”



멋쩍게 웃으며 자기 손도 들어 올렸다. 나재민의 왼손 약지에도 똑같은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나재민이 이 반지를 어떻게 샀는지, 언제부터 생각했던 건지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멍하니 손만 봤다. 이 작고 반짝거리는 거에 홀린 사람처럼 빨려 들어갈 듯이 쳐다봤다.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들 리가 없잖아.



“하나 더 있어.”



내려둔 상자에서 뭔가를 더 꺼냈다. 반지 때문에 정신 차릴 새도 없는데 하나 더 있다는 말에 적절한 반응을 해주지 못했다. 손에 들린 건 조금 길쭉한 거 같기도 하고 동그란 거 같기도 한 모양의 포장된 선물이었다. 뜯어봐. 웃으며 내게 선물을 건네는 걸 받아 들었다.


예술가는 감성이 풍부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봤지만, 이렇게 풍부한 사람은 나재민뿐일 거다. 포장지 속에는 스노우볼이 하나 들어있었다. 눈 내리는 풍경 보는 걸 좋아하는 나를 생각해서 산 것 같았다. 반지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놀랐는데 예상치도 못한 스노우볼의 등장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생각도 못 했는데……. 진짜 고마워 재민아.”

“안에 잘 봐봐.”



검지로 스노우볼을 톡톡 쳤다. 나재민의 손길에 깔려 있던 눈송이들이 춤을 췄다. 안? 스노우볼을 들어 눈앞에 갖다 대 안에 있는 장식을 봤다.


이건 반칙이다. 이러는 게 어딨어. 참으려 했던 눈물이 팡 터져 나왔다. 스노우볼 안에는 학교 운동장에 앉아 내리는 눈을 보던 고등학생 때의 우리가 조각물로 담겨있었다. 여전히 나재민은 그때처럼 갈색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실소가 터졌다. 눈물과 웃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재민을 안았다. 나재민은 여전히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한 얼굴로 순순히 안겼다. 나 숨 막혀. 장난스러운 말을 잊지 않고. 어쩌면 장난이 아니라 진짜 숨이 막혔을지도 모른다. 나재민을 붙들어 꽉 안았다. 이런 너의 부재를 내가 어떻게 견뎠었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나 이대로 계속 안고 있을 거야?”

“킁…….”

“내 얼굴 봐봐.”



안고 있던 걸 풀어 어깨를 잡은 나재민은 제 얼굴을 보게 했다. 으이구 감동받았어~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준 뒤 나재민은 살짝 머뭇거리다가 입을 맞췄다. 입가에 덜 닦인 눈물 때문에 짠맛이 났다. 나재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파에 기대 있는 내 허리가 아프지 않게 단단히 잡고는 더 깊게 파고들었다. 다른 의미로 숨이 벅찼다. 잠시만. 나재민은 한 번도 힘으로 누른 적이 없다. 어깨를 잡고 살짝 밀어내자 또 순순히 밀려났다. 숨을 고르는 걸 확인한 나재민은 다시 입을 맞춰왔다. TV는 이미 다른 영화가 자동 재생되고 있었다. 주인공들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나재민은 나를 안았다.



-Merry Christmas!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극 중 사람들의 크리스마스 인사를 들으며 함께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재민은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길 빌었다. 아까 펜과 노트를 선물 받았을 때 그만 왈칵 울어버릴 뻔했다. 저를 생각해 주는 마음에 눈물이 날 뻔했고, 이제 너의 눈을 보고선 글을 쓰지 못하는 일 때문에 또 눈물이 날 뻔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냐고 물었던 책의 구절이 생각났다. 재민은 단언컨대 장담할 수 있었다. 이미 나는 그 애를 위해 모든 걸 포기했어. 슬픈 이야기지만 글을 포기한 재민에게 더 이상 포기하겠다고 선언할 만한 건 남아있지 않았다. 글이 그의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또 다른 소중한 게 생겼다. 내가 글을 포기한 이유.


반지를 산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글을 포기하고 그녀의 행복을 택한 만큼, 영원을 약속하고 싶었다. 문득 고등학생 때 그 스탠드에서 네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너와 영원을 함께 만들어 갈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간지러워 웃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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