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이라 볼 수 있는 까만 지붕의 집은, 그 집 사람들의 성향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띈다기보다는 구석에 깊숙이 박힌, 산길에 뒤덮인 어드메에 자리하고 있어 쉬이 방문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마을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집도, 영향력도 큰 가문이었다.

'황' 가. 황가네는 몇 세대에 걸쳐 가문을 이룬 만큼 영향력이 작을 수가 없었다. 그 덕에 황가와 연을 맺으려 들어오는 혼처만 해도 큰 저택을 두르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가문의 영향력도 영향력이었지만, 곧 가문을 물려받을 황가의 도련님의 용모가 뛰어나다는 말이 많아 온 마을 처자들의 관심이 황가네에 쏠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 많은 혼처 중 고심하고 고심하다 고른 곳은, 황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견주어볼 수는 있는 이가네였다. 그 집의 여식이 다른 가문의 여식보다 성품이며, 용모며 뭐 하나 빠지지 않아 깊은 고민 끝에 고른 곳이었다.

그러나 황가네 후계자인 민현은 그 혼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의견이라고는 단 한 톨도 들어가지 않은 혼인은 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혼인을 하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결국 답답한 마음을 참을 수 없던 민현은 반항이라도 하듯 방에 콕 틀어박혀 밥도, 물도 모두 거부한 채로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도련님, 도련니임. 문 좀 열어보세요."

"……."

"자꾸 이러실 겁니까? 주인어른께서 걱정하고 계십니다. 도련니임!"


애달피 울리는 목소리가 방안에 닿았는지 끼익-. 기름칠하지 않은 소리가 울리며 열린 문 속엔, 영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민현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왜 불도 켜지 않고 계세요."

"종현아."

"예, 도련님."

"현아."

"…예."

"나는 이 혼인이 하기 싫다."

"큰일 날 말씀 마십시오. 주인어른께서 어찌나 고대하고 계신데요."


빼꼼 열린 문의 틈을 더 벌려낸 민현이 자신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얼굴을 보곤 더욱이 묘한 얼굴을 해 보였다. 현아, 넌 내가 혼인을 했으면 좋겠니? 의중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종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정말 결혼하길 바라?"

"네. 저는 도련님이 행복하길 바라요."


거짓말. 담담한 종현의 말에 민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나가."

"……."

"지금은 보기 싫다."


방금까지 거짓말로 나를 울게 할 땐 언제고, 왜 자신이 더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한참을 어물거리던 종현이 뭐라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마냥 입을 달싹이다가는 이내 작은 치아로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럼, 쉬십시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가려던 종현의 몸이 순식간에 잡아당겨 졌다. 으읍…. 작은 소리와 함께 틀어막혀진 입술은 부드러운 살덩이가 뜨겁게 비벼지며 축축하게 적셔졌다. 모든 숨을 빼앗기라도 할 듯 집요하게 달라붙던 숨결이 떨어지고 나서야 거센 숨을 몰아쉬던 종현은 자신의 입술 만큼이나 축축해진 민현의 입술을 다급히 닦아주었다.


"나는,"

"……."

"나는 널 놓치고 싶지 않다, 현아."

"……."

"다시 한 번 물어보마. 너는, 내가 결혼하길 바라니?"

"……."


네. 행복하실 거예요, 분명. 자신의 말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민현을 눈에 담던 종현이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것을 느끼곤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렸다. 저와 함께할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실 거예요 도련님. 속으로 삼겨낸 말이 울컥 울음처럼 치솟을 것 같아 뜨끈한 감촉이 남아있는 입술을 훑어낸 종현은 들썩이는 민현의 등을 두드리며 아이같이 부벼지는 머리칼을 살살 쓸어내렸다.


*


민현은 기억을 할 수 있는 그 시절부터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 또래의 친구가 없는 종현을 위해 시간을 할애해주었고, 그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밖에서 배워온 것들을 차근히 알려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글자를 새겨넣는 손길이, 그것을 하나하나 읽어주는 목소리가 좋아서 민현을 보필해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다른 의미로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현아, 기다렸니?"


항상 돌아올 때면 문 앞에 서 있는 종현의 머리를 헝클이며 웃어오는 얼굴이 참 다정하고 따뜻했다. 기다렸냐며 묻는 목소리조차 마음을 달궈 똑같이 미소로 대답하면, 민현은 그보다 더 큰 웃음을 띠우며 종현의 손을 끌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것을 알려주마. 앞서가는 뒷모습을 보며 남몰래 미소 짓던 종현은 다정한 제 도련님의 뒤를 따르며 간질거리는 손끝을 굽혔다 폈다.

종현은, 품어서는 안 될 마음을 품기 시작해버려 그 마음은 영원히 민현에게 들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적어도 민현에게 혼처가 들어오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매일같이 하루가 멀다하고 밀려드는 혼처에 불안한 것은 민현 뿐이 아니었다. 이러다 제 도련님이 다른 이와 혼인을 하시면 어쩌지, 그러다가 영영 얼굴조차 보지 못하면…. 종현의 불안은 나날이 깊어졌고, 수많은 혼처 중 민현과 혼인할 상대는 점점 추려지는 것 같았다.

저만큼이나 혼인을 기피하는 민현의 모습에 은연중 안심하던 종현은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곤 마음을 접어내려 노력했다. 기대하지 말자. 네 처지를 생각해야지. 도련님과 하인이라니. 자신은 그렇다 치고 자신의 마음 하나 때문에 민현까지 손가락질받을 걸 생각하자면 가만히 있다가도 울음이 왈칵 치솟아, 줄줄 새는 마음을 여미고, 또 여며내는 종현이었다.


언젠가부터 종현의 움직임을 따라 민현의 시선이 따라왔다. 고개를 홱 돌리면, 따라 돌아가는 고개.

현아. 민현의 부름에 예, 도련님. 하고 쪼르르 달려가면, 그냥 한 번 불러봤다. 하는 시답잖은 대답.

도련님. 오늘은 무얼 하셨나요? 조곤조곤 대답해주던 민현의 귀가 불에 타듯 화르르 붉어질 때.


종현은 이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이 전부 겪었던 것이었으니. 도련님이, 나를? 벅찬 마음도 잠시 금세 현실을 깨달은 심장은 쿵쿵거리던 울림을 잠재우며 싸늘하게 식어갔다. 나는, 욕심내선 안 된다. 나는, 바라서는 안 됐다. 그저 그가 제대로 된 배필을 만나 행복한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


제 어깨에 무게를 실은 민현의 어깨가 옅게 떨리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된 대처도 하지 못한 종현은 그저 묵묵히, 그의 들썩임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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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장면은,,, 정력왕이 되는 날에 가져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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