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두 사람은 열심히, 신나게 놀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털어버리려고 술도 거의 의무적으로 마셨다. 마시다 마시다 딱 기분 좋을 때 술이 떨어져서 둘이서 헬렐레 낄낄거리며 편의점 술 코너를 쓸어왔다. 다현이 주헌은 안주를 만들었으니 자신은 술 제조 솜씨를 뽐내보겠다며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내일 먹을 것도 사고 편의점 봉투 그득하게 술을 쓸어왔다.
냉장고에 반찬 좀 채워주려고 사온 재료인데 다현이 안주 만들어달라고 접시를 들고 항의하는 바람에 주헌은 다시 프라이팬을 들고 반찬이 아닌 안주를 만들었다. 그 사이 다현은 상에 컵이란 컵은 다 세워놓고 술을 말았다. 그 옆에 아직 내용물이 든 캔이며 병이 수북했다. 주헌이 속재료가 간단한 파전 몇 장을 들고 오자 상 앞에 앉아 무릎을 안고 기다리던 다현이 그를 올려다보며 헤헤 웃었다. 주헌은 슬그머니 열이 오르는 얼굴을 돌리며 술로 찰랑이는 컵 몇 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접시를 상에 올렸다. 그리고 컵마다 가득한 각기 다른 술을 보고 기겁했다.

"야, 이게 다 뭐야?"
"흐헤헤."
"어휴, 조다현 진짜…… 너 취했지?"
"응."

어린애처럼 꾸벅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다현을 보고 안 취했다며 화내는 반응을 기대했던 주헌은 조금 당황했다. 그리고 두근거렸다.

"내가 취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어?"
"어, 어떻게 되는데."
"존.나 솔직해져."

그래서 회식 때는 장난감이 되거나 요주인물이 되지. 하고 다현은 다시 히히 웃었다. 다현은 자기 앞에 있는 머그잔을 들어 이게 뭐냐며언~ 하다가 머그잔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한 모금 꿀꺽 마시더니 활짝 웃으며 술 이름을 외치고는 주헌에게 쭉 내밀었다.

"마싯써."

주헌은 홀린 듯이 컵을 받아 마셨다. 음료수와 술을 섞었는지 맛이 달달했다. 자기도 모르게 한 모금 더 마시려다 코 뒤로 느껴지는 진한 알코올 향에 도로 입을 뗐다. 그리고 다른 잔을 마시려는 다현의 손을 잡아 말렸다.

"그만 마셔. 너 취했잖아."
"으음…… 아냐. 더 취해야 될 것 같아."
"그만, 잠깐만. 네가 만든 거 다 마실 순 없지만, 한 잔씩 맛은 볼 테니까. 조다현, 넌 그만 마셔."
"맛을 봐야 뭔지 가르쳐주지이. 그리고 내가 더 취해야겠다고."
"안 된다니까. 너 많이 취했어."

컵을 입으로 옮기려는 다현의 손을 붙잡고 밀리고 당기고를 반복하던 주헌이 기어코 다현의 손에서 컵을 떼어냈다. 불만스럽게 그 모습을 보던 다현이 다른 잔을 쥐려는 걸 보고 주헌이 얼른 다현의 빈손을 잡았다.

"왜. 왜 더 취하려는 건데."

주정뱅이가 무슨 멀쩡한 대답을 하랴, 반쯤 포기하고 물은 말에 다현은 입을 우물거렸다.

"물어보려고……."
"뭘 물어보려고?"

아까까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던 얼굴이 스르르 아래를 향하고 주헌에게 잡힌 손과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왜…… 는……."
"뭐라고?"

고개가 살짝 들리고 다현이 힐끔 주헌을 쳐다봤다. 술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촉촉한 눈은 겁에 질려있었다.

"왜…… 안 왔는지…… 물어보려고……."

주헌도 모르게 다현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다현은 자유로워진 손으로 주섬주섬 제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다.

"……그거 물어보는데 왜 술이 필요하고, 왜…… 왜 그렇게 겁을 내……?"

내 무엇이 너를 그렇게 겁나게 해?
다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꾸역꾸역 토하듯이 말했다.

"난… 나대기나 하는, 쪼다 새끼니까……."
"……."

주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 찌질한 녀석들이 다현을 조다현이라 이름 대신 부른 욕설이 지금, 다현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그 말로 불릴 때마다 네가 시들어가는 게 눈으로 보였는데. 그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너는 왜 너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지.
다현이 눈치를 봤다.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목구멍이 꽉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도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봐……."

무서워서.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전처럼 인연을 끊으려 해도, 몇년만에 느껴보는 감정에 녹을 대로 녹아서. 그것도 가족이라고 없으니까 외롭고, 생각나고, 보고 싶고. 동생이 보낸 메일에 휴일을 쏟아 부어 답장을 쓰고도 발송 취소 버튼을 누르며 궁상을 떨고. 아주 가끔 너무 힘들고 무서울 때, 핸드폰 화면 너머 열한 자리 숫자를 너라 생각하고 위로받던 날들. 언젠가 네가 너무 보고 싶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 번호 주인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울고 무서웠는지. 그래도 앨범 속 사진처럼 감히 버릴 수 없어 고이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지금껏 잘 버티고 익숙해진 줄 알았다.
유주헌을 다시 만나게 되며 알게 된 것은 조다현이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조다현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쪼다인 채, 쪼다인 자신이 싫어 스스로를 속이고 나이만 먹었다. 자신은 가게 손님의 감정을 보듬는 존재도 아니었다. 엄마의 쓰레기통이 사람들의 쓰레기통이 됐을 뿐.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은 변함없이 주헌을 좋아했다. 이기적이게도 자기 때문에 주헌이 상처를 받더라도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죽은 친구 대신이든 트라우마 대신이든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남의 감정으로 가득 찬 이 몸에 다시 내 감정을 채우고 싶다. 잊고 싶어도 괴로워도 스스로 피운 감정은 그것밖에 없어서.

"무서워서……."
"내가 널 그렇게 생각할 리 없잖아!!"

깜짝 놀랄 만큼 큰 목소리였다. 주헌은 화났지만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다현의 양팔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내가 널 그렇게 생각할 리 없잖아."

자신의 팔을 붙들고 뚫어져라 눈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하는 주헌을 보고 다현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넌. 넌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조다현. 다현아. 네가 연락 끊고 없어졌을 때 내가 얼마나 좌절하고 걱정한 줄 알아?"

주헌의 표정에서 분노가 사라지고 슬픔만 남았다. 주헌이 울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다현은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묘한 기분을 느꼈다.

"병원에서 내가 너한테 했던 말 기억나?"

잊을 리 없다.

"내가 너 좋아한다고……. 그리고 넌 연락 끊고 사라졌고."

주헌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나 아직도 너 좋아해."

주헌의 뺨에 기어코 눈물자국이 생겼다. 다현은 멍하니 눈으로 눈물자국을 훑었다.

"네 전화 받고 너무나 오고 싶었어. 그런데 그랬다가 내 감정 들키면 어떡하나. 내 감정 알고 네가 또 내 앞에서 사라지면 어떡하나. 걱정됐어."

그래서 도망쳤어. 집 앞까지 왔다가 도망쳤어.

"또 사라질 거야?"

이번에는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거냐며 눈물을 흘리는 주헌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몰랐다. 설마 자신이 떠나서 주헌이 상처받을 줄은 몰랐다. 오직 주헌 때문에 떠난 것은 아니었다. 다현은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껏 자신이 받은 상처만 생각해왔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순간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주헌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이 뒤늦게 머리를 때렸다.

다현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주헌의 뺨을 닦아주었다. 다현의 손과 주헌의 뺨에 눈물이 문질러졌다. 갑작스러운 다현의 행동에 주헌은 눈만 동그랗게 떴다. 다현은 두 손으로 주헌의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닦아줬다.

"안 사라질게. 미안해. 그 일이 너를 상처 입힐지 몰랐어."

다현은 코로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 이야기 좀 해야겠다."

다현과 주헌은 나란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말하고 들었다. 다현은 어느 누구에게 해본 적 없는 이야기를 하느라 조금 고생했다. 가정과 학교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부모님에 대한 감정, 다혜에 대한 감정, 자살 시도한 이유, 떠나기로 마음먹기까지의 과정……. 주헌과 있었던 일은 뺐다.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나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주헌의 얼굴은 붉어졌다 창백해졌다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주헌은 꾹 참고 다현의 말을 들었다.

"절대로 너 때문에 떠난 거 아니야. 미리 말 못한 건 미안해. 하지만 가족과 완전히 연락을 끊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
"한 마디만 해주지 그랬어……."
"편지라도 쓸 걸 그랬나 봐."

심각한 분위기를 날려버리려고 우스갯소리로 말한 건데 주헌은 고개를 저었다.

"너 그렇게 힘들다고,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해주지 그랬어. 그럼, 그럼 아줌마하고도 나 혼자 따로 만나거나, 어머니끼리 뵙게 하거나…."
"이미 다 지나갔어."

다현은 자책하는 주헌을 달랬다.

"알겠어? 유주헌. 저런 상황에 빠져있던 내 앞에 네가 나타났어. 대체 어느 누가 널 싫어하겠어?"

조금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너도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주헌이 다시 눈물을 쏟아 다현은 그를 달래느라 한동안 애를 먹었다.


"택시비 많이 나올 텐데."
"그래도 가야지."
"자고 가도 돼."
"집에 가서 이불 좀 걷어찰 예정이라……."

다현이 소리 없이 웃자 주헌은 붉어진 얼굴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한바탕 눈물 쇼 뒤에 두 사람은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머리를 쥐어뜯다 열심히 청소도 하고 반찬도 만들고 설거지도 했다. 술은 병에 든 것만 남기고 다 버렸다. 아까워하는 다현 옆에 주헌이 눈을 부라리며 서있어서 어디 숨길 수도 없었다.

"술 마시지 마."
"안 마셔!"
"반찬 식으면 냉장고에 넣고."
"알았다니까!"

넓지도 않은 집, 현관까지 배웅하는데 뭐 이리 말이 많은지.

"짜식, 부끄러워하기는."
"대학병원 안과 교수 특진 받아야겠네. 눈이 어떻게 되신 듯."
"부끄러워하기는~."

이놈이 자꾸 이러네. 그래. 오늘 아주 부끄러움의 끝장을 보자.
다현은 문을 열고 막 나간 주헌의 팔을 붙잡았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조용히 입 모양으로 왜? 하고 물어보는 주헌을 보는데 다현은 부끄러워서 벌써부터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현은 오른손으로 현관문을 붙잡고 왼팔로 주헌의 팔을 잡은 채 조용히 말했다.

"나 영상 찍힌 그 일."

주헌의 표정이 대번 굳었다. 다현은 안으로 들어오려는 주헌을 못 오게 막았다.

"네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아진 거야."
"……."
"네가 나를 위해 울어준 그때부터."

아무렇지 않아졌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놈이 부끄러워하는 꼴을 보려고 한 말인데 왜 부끄러움이 내 몫이 된 것 같지?

"그, 그렇다고. 잘 가라."

얼른 문을 닫으려는데 어둠속에서 주헌의 왼팔이 뻗어와 다현의 얼굴로 향했다. 주헌의 손끝은 다현의 이마를 톡 건드리고 부드럽게 타고 흘렀다. 주헌의 왼손이 다현의 오른 이마를 감쌌다. 그의 손가락에 감싸인 귀가 뜨거웠다. 주헌의 엄지손가락이 조심스레 흉터를 매만졌다. 직접 만질 때는 이상하기만 했는데 주헌이 만지니 아랫배가 간지러울 정도로 기분 좋았다.
주헌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다현의 흉터를 살살 쓸다 얼굴을 가까이 했다. 다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주헌의 왼손의 유도로 고개가 살짝 들리고, 다현의 이마에 주헌의 이마가 와 닿았다. 잠시 서로의 숨소리와 이마의 감촉과 체온을 느꼈다. 짧게 맞닿았던 이마가 떨어지며 서로의 코끝이 스쳤다.

"잘 자."
"응, 조심히 가."

두 사람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 이불 차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잔 두 사람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45)

샐러리맨과 카페 종업원. 사무직과 서비스직. 주 5일제와 월 8일 휴무제. 주말이 쉬는 날인 주헌과 주말이 제일 바쁜 다현은, 그날 이후로 여름이 될 때까지 카페에서 보는 게 고작이었다. 카페에 오는 것도 일주일에 많으면 세 번. 보통 두 번 꼴로 왔다. 바쁘면 못 오는 주도 있지만, 주헌은 그런 주 금요일마다 꾸역꾸역 눈에 다크써클을 달고 다현의 퇴근 시간에라도 얼굴 도장을 찍고 갔다.

"바빠도 쉬는 날은 딱 쉬게 해줘. 그게 제일 좋아."

꼴이 말이 아니라 다현의 성화에 그의 집에서 자고 일어난 토요일. 느즈막이 일어난 다현에게 아침을 해서 먹이고 서로 일에 대해 이야기하다 주헌이 한 말이었다. 그 뒤로 다현은 주말 휴무를 최대한 많이 잡기 위해 다른 직원들과 불꽃 튀는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평일 휴무를 자처하고 쉬는 날에도 불쑥 가게에 와서 일을 돕던 다현이 휴무일에 꼬박꼬박 쉬고 주말 휴무까지 집착하자 기특하게 여긴 직원들은 처음에는 주말 휴무를 하나, 두 개씩 더 주다 이제는 그런 거 없이 같이 피나게 싸웠다. 그래봤자 주말 휴무는 횟수가 정해져 있어서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로 싸운 거지만.
그리고 지금, 다음 달 휴무일을 정하고 창고를 나온 다현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유유히 창고 문을 밀어젖히고 나온 다현의 등 뒤로 패배한 자들이 창고 바닥을 굴러다녔다.

'주말 휴무 이틀 다 토요일로 잡았어……!'

이것 때문에 6일 연속으로 근무하는 주가 생기긴 했지만, 주헌과 카페가 아닌 곳에서 만날 생각에 자꾸만 입 꼬리가 올라갔다. 다현은 얼른 핸드폰을 꺼내 주헌에게 휴무 날짜를 찍어 보냈다. 깨끗하게 손을 씻고 바 앞에 서서 주문을 기다리다 기분 좋은 일 있느냐고 묻는 손님을 향해 다현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현을 본 지 나흘은 된 것 같다. 한동안 바쁘다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인 주헌은 달력을 들추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쉬고 싶다. 집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늦게까지 자다가 침대에 누워서 티비보고 배달음식 시켜먹고 졸리면 또 자고 그냥 푹 쉬고 싶었다.
그런데 뭔 놈의 약속이 이렇게 많은지. 적당히 쳐냈는데도 일정이 빽빽했다.

'평일에 얼굴 좀 내밀고…… 아, 이러면 다현이 얼굴 보기가 어려운데.'

정말 다음 달 안으로 꼭 만나야 하는 약속만 정리해보니 방콕힐링은 무슨, 회사에서보다 더 바쁘게 생겼다. 주헌은 달력을 부여잡고 속으로 울었다. 그래도 다음 달을 희생하면 다다음 달부터는 좀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으니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주헌은 열심히 머리 굴려 빼곡하게 채운 달력을 원위치에 돌려놓고 팀장님이 수고했다고 돌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쪼옥 빨았다.

'이런 거 말고 다현이가 만든 거 마시고 싶다.'

주헌은 이제 카페에 가도 주문하지 않는다. 카페에 가 다현의 앞에 앉으면 먼저 무언가를 마시고 싶다고 하지 않는 이상, 다현이 자기 임의로 음료를 만들어줬다. 윗층 카페 구역에서만 파는 음료도 몰래 만들어주곤 했는데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금요일, 주말에 한해서 가끔 도수가 낮은 술을 주기도 했다.
갈 때마다 무얼 만들어서 줄지 기대되기도 했고, 이전에 술만 내밀어줄 때와 달리 살짝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감상을 기다리는 모습이 귀여워 더 즐거웠다.

"맛있다."

그 한 마디에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면 배 아래가 간질거리고 귀가 뜨거워졌다. 정말 다현을 만나는 하루하루가 즐거워 미칠 것 같다. 못 보는 날은 애간장이 녹아 없어질 것 같다. 용케 안 미치고 회사를 다니는 자신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핸드폰 진동음에 무심하게 시선을 내렸던 주헌은 발신자가 다현임을 보고 얼른 빨대에서 입을 뗐다. 미리보기에 휴무일 정했어. 라는 말이 보였다. 뭐야, 정기보고였어? 약간 시무룩해졌지만, 주헌은 기쁘게 핸드폰 잠금을 풀고 형광펜 뚜껑을 열었다.
다현의 메시지를 눈으로 더듬으며 검정색으로 빼곡한 달력 위에 형광펜을 그었다. 희고 검은 달력이 드문드문 밝게 빛났다.

"아."

신나게 형광펜을 놀리던 주헌이 갑자기 손을 멈추더니 달력과 핸드폰을 번갈아 확인했다.

"하필이면 이 날."

하필이면 이 날. 다현이 쉬는 날에 이미 한 번 미룬 전적이 있는 약속을 잡았다. 유주헌, 이 멍청한 놈아. 하필이면 다현이가 쉬는 날에 이런 약속을 잡으면 어떡해! 주헌은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자신의 멍청함을 욕했다. 욕하면서도 참 자기가 중증이구나 싶었다.
주헌은 서랍에서 수정액을 꺼내들고 잠시 고민하다 달력 위 검은 글씨를 하얗게 지웠다. 그리고 충분히 말린 후, 그 위에 형광펜을 덧칠했다.
주헌은 퇴근길에 상대방에게 전화해 약속을 미뤄 달라 부탁하고, 욕먹고, 사과하고, 자기가 쏘겠다고 하고, 감사합니다 소리를 들은 뒤에야 귀에서 핸드폰을 뗐다. 전화하는 사이 벌써 도착했다.
이젠 익숙하고, 언제나 그리운 묵직한 철문을 열어 계단을 내려가 안으로 들어가면, 아래를 향한 시선을 들면 자신을 바라보는 다현과 눈이 마주친다. 자신이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면 다현도 웃음으로 대답한다. 이 과정이 너무나 좋다.
주헌은 얼굴을 익힌 직원들에게 목례로 인사하고 다현의 앞에 앉았다.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

아니, 라고 대답하려던 주헌은 도로 입을 다물고 생각하다 웃었다.

"아메리카노. 시원한 거."
"아메리카노? 알았어."

주헌은 카운터 구석에 있는 커피머신 앞에 서서 원두를 갈고 커피를 추출하는 다현의 옆모습을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좋다. 너무 좋아.'
"여기, 아메리카노."

다현이 건넨 아메리카노를 받아들고 컵을 든 손가락으로 빨대를 잡아 고정해 입으로 가져가자 다현이 살짝 긴장하는 게 보였다. 일일이 긴장하는 게 귀엽다.

'답은 정해져있는데.'
"……어때? 맛 괜찮아?"
"응. 맛있어."

정말 맛있다. 팀장이 사준 아메리카노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다현이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야, 나 주는 건데 뭘 그렇게 긴장해?"
"긴장은 무슨, 누가 긴장을 했다고 그래?"
"봐봐. 아까는 어깨가 이랬는데 지금은 어깨가 이렇잖아."

주헌이 과장스럽게 어깨를 홱 좁혔다가 축 늘어뜨리자 빽 소리를 지르려던 다현은 손님을 의식하고 웃으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은제 그래쓰."
"그랬는데? 그랬는데? 이야, 이 아메리카노 정말 맛있다."

주헌이 한 번 더 놀리고 얼른 말을 돌렸다. 다현은 아직 이를 좀 물고 있었지만, 맛있다는 말에 씩 웃었다.

"아, 휴무일 봤어. 토요일 두 번이나 잡았더라. 잘했네, 내 새끼~."
"놀리지 마세요, 손님. 어깨 좁아지기 싫으면."
"토, 토요일에 무슨 일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없어!"
"그럼 우리 토요일에 뭐할까?"
"내가 왜 황금 같은 주말에 너랑 뭘 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너와 나는 자랑스러운 솔로부대이기 때문이다."
"작전은 짜왔겠지."
"같이 짜면 안 되겠니."

두 사람은 뭐, 대충 이렇게 지내고 있었다.
전과 같은 이도 저도 아닌 생활. 친구라는 관계 위에서 다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현과 주헌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46)

어디 갈까? 뭐 먹을까? 영화 볼까? 밥 먹을래? 차 렌트해서 멀리 갈까?
다현의 일이 끝나는 토요일 새벽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어떻게 뭘 해야 알찬 휴일이 되는 걸까.
같이 하고 싶은 건 많았다. 여기도 가고 싶고 저기도 가고 싶고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고, 서로와 함께 하고 싶은 일, 보내고픈 시간은 너무나 많았다.
시간은 부족한데 욕심은 많아서 고집 부려 24시간을 꽉 채워 일정을 짰다. 주헌은 일요일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었지만, 다현은 일요일 저녁이 되면 또 바로 출근해야 했다.

"너 죽는 거 아니야?"

주헌이 걱정돼 말렸지만 다현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화요일에 휴무일 잡아놨어. 괜찮아."
"아냐, 죽을 것 같아."
"괜찮다고!"

악 소리를 지르며 심야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먹고 요 앞 어디에도 나갈 거라고 고집부리는 다현을 보며 주헌은 두 손을 들었다.

"휴가 때문에 더 오래 못 쉬었던 적도 있어. 날 얕보지 마라."
"아, 알았어…. 죄송합니다…."

다현은 큰 소리 쳤다. 금요일 밤,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온 주헌이 걱정돼서 한 번 더 물어봤을 때도 다현은 큰 소리를 쳤다. 카페와 같은 상권에 있는 영화관에 가서도, 팝콘과 음료수를 사면서도, 자리에 나란히 앉아 광고를 보면서도 다현은 앞으로의 일정을 되짚으며 다 돌 것이라 큰 소리 쳤고, 기대했고, 즐거워했다.

"이 영화 진짜 보고 싶었는데."

다현은 주헌의 오른편에 앉아 팝콘을 아작아작 먹으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주헌은 생각보다 많이 들뜬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고, 많이 기뻤다.
그래서 영화 시작한지 30분도 안 돼 꾸벅꾸벅 조는 다현을 보고 약간 당황했다.
늦은 시간이지만 상영관에는 두 사람 외에 다른 관객도 있었다. 주헌은 조심스레 왼손으로 다현의 어깨를 흔들었다. 살짝 놀라며 깬 다현에게 몸을 기울였다.

"피곤해?"
"으…… 초반이 생각보다 재미없어서 나도 모르게 졸았어."
"졸린 것 같은데. 영화는 다음에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영화는 초반부터 다이내믹해서 졸릴 틈이 없었지만, 주헌은 아무 말 않고 조용히 나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 말에 눈을 부비며 스크린을 보던 다현의 고개가 주헌을 향했다. 주헌이 몸을 기울이고 있던 탓에 둘의 얼굴이 제법 가까워졌다. 영화 장면에 따라 희게, 붉게 빛나는 얼굴을 서로 잠시 마주 보았다.

"싫어."
"그럴 줄 알았다."

잠 다 깼다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시 팝콘을 집어먹기에 주헌은 웃으며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자신과는 안 맞은 적이 더 많은 장르라 별 기대 않고 왔는데 막상 보니 생각보다 재미있어 눈을 뗄 수 없었다. 팝콘 먹는 것도 잊고 집중해서 보다 클라이맥스에 접어들 즈음이었다. 무언가가 오른쪽 어깨에 내려앉았다. 영화에 쏠린 집중이 어깨로 쏠렸다.
영화의 절정 장면이 단순한 빛과 소리의 뭉텅이가 되고, 눈보다 어깨가 더 예민한 감각기관이 된 것처럼 주헌은 신경은 온통 어깨에 내려앉은 무게에 쏠렸다. 주헌은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자기 어깨에 기댄 다현의 정수리가 보였다. 살짝 숙여 기대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 정수리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갈 데까지 간 것 같아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좋은 걸 어떡해.'

정수리만 봐도 좋은 걸 어떡해.
불편한 자세로 굳어버린 어깨의 통증까지 좋았다.

다현은 스탭롤이 다 올라가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관객이 다 빠져나가고 청소를 위해 직원이 들어오자 주헌은 하는 수 없이 다현의 몸을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으……?"
"잘 잤냐."
"으으……?"
"영화는 다음에 보자. 나도 다시 봐야할 것 같아."
"…너도 졸았어?"

그런 걸로 해두자는 주헌의 말에 다현은 제대로 꼬투리도 못 잡고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걷는 내내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고 돌리는 주헌에게 왜 그러느냐 묻지도 못했다.
비몽사몽간에 예정대로 편의점에 가서 술과 안주를 사서 나오니 주헌이 택시를 잡아다 놨다.

"웬 택시?"
"너 졸려서 안 돼. 그러고 못 걸어. 타."

다현의 입은 막상 걸으면 깰 수도 있지 않으냐며 투덜댔지만, 몸은 날름 택시에 탔다.

"히히, 편하게 가면 나야 좋지 뭐. 근데 진짜 미치겠네. 왜 이렇게 졸리지? 영화값만 날렸잖아."
"택시 안에서 잠깐 자."
"그래. 잠깐 자고 술 마실 땐 안 졸 거야. 뽕 뽑을 거야."

히히 웃고는 차갑고 딱딱한 차 문에 기대어 불 꺼지듯 잠드는 다현을 보고 주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쪽으로 가서 기대는 걸까. 친구들끼리도 곧잘 서로에게 기대서 자지 않나? 아닌가? 또 이런다. 유주헌, 또 이래. 다현과 관련되면 단순한 일도 복잡해지고 당연한 일도 의심하게 된다. 조다현은 유주헌의 상식과 당연을 뒤흔든다. 그것이 때로는 즐겁고, 행복하고, 무서웠다.

어디로 갈 거냐는 기사님의 물음에 주헌이 이쪽으로 가달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운행을 시작한다는 경쾌한 내비게이션 소리와 함께 택시가 출발했다.

딱딱한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반쯤 잠든 몽롱한 상태로 택시에 흔들리던 다현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택시가 생각보다 오래 달렸고 몸을 기댄 부분이 영 불편했다.

'이렇게 안 딱딱했던 것 같은데.'

다현은 계속 몸을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을 때 쯤, 주헌의 목소리에 잠을 깼다. 눈도 다 안 뜨고 알았다며 내린 다현은 익숙하게 늘 가던 방향으로 가려다 당황한 주헌의 손에 붙잡혔다.

"그 쪽 아니야. 이리 와. 잠 좀 깨 봐."
"……여기 어디야?"

잠 깼다. 홀라당 깼다. 익숙한 우리 동네 내 집은 어디 가고, 나는 왜 오피스텔촌에 서 있나. 다현이 고개를 홱홱 돌리며 당황하자 주헌이 계속 잡고 있던 손을 끌었다.

"우리 집."
"내 집 가기로 했잖아."
"너 우리 집에 가둬놓으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여전히 잡고 있는 손을 눈높이로 들어 흔들며 웃자 다현이 한 쪽 입 꼬리만 올리며 비웃었다.

"밥 꼬박꼬박 주고 IPTV만 달아줘. 일주일에 한 번은 치킨 사줘야 돼."
"아, 아뇨. 잠만 푹 자고 나가주세요."
"패기 없는 자로다. 근데 뭐야, 진짜 여기 왜 왔는데."
"우리 집으로 오면 안 되냐? 너희 집에서만 놀긴 뭣하잖아."

질문의 의도는 왜 가까운 자신의 집이 아니라 굳이 더 멀리 있는 네 집으로 온 거냐는 거였지만, 다현은 입을 다물었다. 주헌이 자취한다는 걸 듣고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다. 전부터 주헌의 집, 그의 방에서는 즐거운 일뿐이었으니까. 가고 싶어도 먼저 너희 집 가자! 하기도 뭣하고 입맛만 다시던 차에 잘 됐다 싶었다.
적당히 높은 층에서 내리니 삭막한 분위기의 복도가 길게 이어졌다. 두 사람은 조용하고 어두운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이 건물에 두 사람뿐인 것 같았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현관문을 굳게 닫고 벽을 더듬어 불을 켜자 형광등 불빛이 방을 비췄다.

"오……."

좁은 현관 복도를 지나니 제법 넓은 원룸이 나왔다. 벽에 붙은 더블 사이즈 침대를 빼도 세 명이 넉넉히 앉아서 놀만했다. 제법 사람 사는 느낌이 났다. 데스크톱 컴퓨터에 꽤 큼직한 TV도 있고. 맥주를 냉장고에 넣는 주헌을 뒤로 하고 방을 둘러보다 슬쩍 침대에 걸터앉았다.

"너 돈 많나 봐."
"집에서 원조 받은 거지. 다 빚이야 그거."

다현은 입을 열다가 도로 다물었다. 주헌은 붙박이장에 상체를 들이밀고 뒤적이느라 조금 어두워진 다현의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주헌은 한 번도 안 입은 새 속옷과 다현에게 맞을 만한 편한 옷을 건네고 욕실로 밀어넣었다. 방에 혼자 남고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주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도저히 열이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여 먼저 맥주 캔을 하나 땄다. 핑계 쯤은 되겠지.
홀로 무슨 망상을 했더라. 다현을 집에 데려오면 일단 침대에서 푹 재우고 싶었지. 항시 묘하게 피곤해보이는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랬다. 그 아무 것도 없는 집에서 옹송그리고 자지 못하게 침대에 던져놓고 싶었다. 그럼 고등학교 때처럼 침대를 굴러다니다 편하게 늘어져 스르르 잠들 테지. 자신은 그 옆에 누워 밤새 그동안 못본 만큼 그 얼굴,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눈으로 훑다 같이 잠들고. 느즈막히 일어나 아침부터 점심, 저녁, 야식, 사이사이 간식까지 제 손으로 해먹이고 싶었다. 3분 요리는 두 번 다시 입도 못 대게 자기가 해주는 요리 아니면 목으로 넘길 수 없도록.
주헌은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이정도로 취할 리는 없지만, 목구멍을 찌르는 탄산에 그나마 좀 망상을 털어냈다. 이런들 저런들 주헌은 망상에서조차 다현에게 험한 짓을 못했다.

'너 우리 집에 가둬놓으려고.'

현실로 이룰 리 없고, 이루어질 리도 없는 본심이었다.


1차 글러/BL(현대/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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