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꿈을 꾸었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키즈 카페에서 태권도복을 입은 정국이 촐랑촐랑 뛰어노는 모습이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민은 동그란 동그라미가 귀여워서 웃었던 것도 같다. 저렇게 해맑게 뛰어놀다가도 왜 지민과 눈만 마주치면 울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꿈속에서도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정국의 얼굴이었다. 정국이 지민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국의 상체가 지민이 누워 있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꼭 자는 모습을 근처에서 지켜봤던 것처럼.


생각보다 일찍 깬 지민이 쳐다보자 당황한 정국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잠에서 깨는 기색도 없이 저렇게 눈만 먼저 뜰 줄은 몰랐다. 


“정국아...”

“네.”


정국이 대답하며 다시 지민을 봤다. 지민은 나른해 보였다. 그럴 만도 했던 게 아직 까무룩 기절한 지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저번 주에는 거의 하루 종일 했는데 이번에는 삽입 섹스는 한 번밖에 못 했다. 몇 번 사정한 지민이 잠들 듯이 기절했기 때문이었다. 정국의 사정과 동시에 또 사정한 후 쓰러진 지민 때문에 정국은 당장 업고 병원으로 뛰어야 하나 생각했었다. 다행히 새근새근 숨 쉬는 지민을 보곤 잠든 것 같아서 씻겨 재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지난주에 한 번 겪었기 때문에 급성으로 왔어도 지독하지는 않은 듯했다. 반면 한창 달아올랐던 정국은 허무하게 멈춰야 해서 괴로웠다. 지민의 페로몬으로 미친 듯이 흥분한 몸을 식히는 것이 꽤 힘들었다. 제 러트사이클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나 네 꿈 꿨는데...”


눈을 뜨긴 했어도 지민은 아직 기운이 없어 보였고 몽롱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니었다면 지금 이 상황을 창피해하며 쿨하게 굴려고 노력했을 것이었다. 순순하게 꿈을 꿨다고 말한 지민이 꿈속 동그라미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난 네가 태권도 선수가 될 줄 알았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정국이 표정을 굳혔다. 도복을 벗은 지도 2년이 됐다. 체육교육과 강의 중에 태권도가 있어서 언젠가는 다시 도복을 입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선수 생활은 그만두었다. 꿈에서 도복 입은 제 모습이라도 본 건지 꽤 뜬금없는 말을 꺼내는 지민을 보며 정국은 살짝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래......”


두서없는 말을 하던 지민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다시 꿈속으로 빠져 버린 지민을 보며 정국은 오히려 지금 자신이 꿈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혹시 지민이 뭔가를 기억해 낸 걸까 하는 기대감도 살짝 들었다. 선수 시절을 회상하던 정국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때문에 못 했는데. 과거를 떠올리던 정국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블루밍 타임 7




지민은 정국과 갈비탕 한 그릇씩을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어김없이 월요일 아침에 함께 병원을 다녀온 후 밥을 먹으러 식당에 왔다. 물론 오늘 아침에도 지민은 혼자 병원에 가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정국이 지민보다 먼저 지민의 차 키를 집어 들었고 운전까지 했다. 병원에 같이 올라가 진료실까지 따라 들어온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형질 재검사까지 제멋대로 신청해 버렸다. 전정국이 말이다.


지민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국은 갈비를 뜯고 있었다. 지민을 신경 쓰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경 쓰기 때문에 그냥 먼저 먹은 것이었다. 지민은 어차피 제 몫으로 시켜 놓은 음식은 늦어도 다 먹긴 했다. 오히려 먹으라고 보채면 몸 관리 신경 쓰느라 깨작거리는 것 같아서 정국이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다. 다만 식기 전에 먹었으면 싶은 마음에 정국은 갈비를 뜯으면서도 눈은 지민을 향해 있었다.


“넌 왜 나한테 묻지도 않고 거기서 형질 재검사한다고 그래?”

“의사 선생님도 권하셨잖아요.”

“네가 나보다 먼저 대답했잖아.”

“뭐... 한번 해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주말에 힛싸 또 오면 어떡하려고.”

“미쳤어......”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지민이 몸을 떨었다. 조금 이른 점심을 같이 먹게 되었다는 것 빼고는 지난주 월요일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오늘은 병원을 일찍 갔더니 기다림이 짧아서 시간이 남았다. 


지민이 어제를 떠올렸다. 저번 히트사이클은 일요일에 터졌는데 이번엔 토요일이어서 병원에 가기 전까지 하루가 더 있었다. 지민은 어제 방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정국이 끼니마다 죽을 챙겨 줬지만 입맛이 없어서 그마저도 잘 먹지 않았다.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병원을 갈 때도 돌아올 때도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지민이 입을 다물자 정국도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게 동그라미 나름대로 저를 존중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지민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민은 어른인 자신이 더 먼저 편하게 말을 걸어 줘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실천이 잘 안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도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내자고 말하는 게 너무 쪽팔렸다. 아무리 오메가라 어쩔 수 없다지만 스스로 정국을 먼저 갈구했으니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오늘도 사과부터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서로 동의하에 한 일을 또 사과하는 것도 맞는 것 같진 않았다. 사고를 쳐놓고 사과한다는 것 자체도 염치없는 일 같기도 했다.


결론은 조만간 병원을 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조금 귀찮았다. 우성인지 열성인지는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드라마틱하게 베타가 되어 버렸다거나, 또는 알파로 발현하셨습니다 같은 일이 아니라면 어차피 오메가인 것은 똑같으니 말이다. 우성 오메가가 되면 더 귀찮아질 일투성이였다.


“어차피 예약한 거 그냥 밥부터 먹어요. 다 식겠네.”


식어 가는 갈비탕과 하얀 쌀밥을 보다 못한 정국이 그러자 지민이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금세 또 눈을 샐쭉하게 뜨고는 예민하게 굴었다.


“우성이든 열성이든 그게 너한테 중요해?”

“다른 건 몰라도, 검사해서 우성이면 우성 오메가용 억제제를 처방받아야죠.”

“너한테 중요하냐고, 이 우성 알파야.”

“나한테 중요한 건 아니죠.”

“그래. 근데..”

“형한테 중요한 거잖아요. 형 몸인데, 형이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왜 그런 표정이에요?”

“몰라.”

“나한테 중요할 줄 알았어요?”

“아니.”


황급히 대답한 지민이 밥을 퍼먹었다. 중요하지 않다는 말에 왠지 이상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사실 정국에게 중요한 것은 지민의 형질이 아니라 지민이 더는 아프지 않은 것이었다. 정국의 시선이 가느다란 지민의 손목에 잠시 머물렀다. 다른 곳을 쳐다보지는 못하고 수저를 움직이는 손목만 드문드문 바라봤다.


식사 후 운전대를 잡은 것은 지민이었다. 시계를 본 지민은 정국을 바로 학교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내려 줄게. 지민이 그러자 정국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지난주와 달리 어제 하루 더 쉬어서 그런지 지민의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지민을 굳이 집에 데려다주지 않고 학교로 바로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출발하려던 지민이 힐끔 정국을 쳐다봤다. 검은색 라이더재킷을 입은 정국은 오늘따라 동그란 느낌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았다. 찢어진 블랙진 같은 건 안 입을 줄 알았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의 색으로 통일한 채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지난주에도 꽤 차려입은 느낌이 났던 것 같다. 그땐 정국의 패션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평소 등교할 때와는 확실히 다르긴 했다. 지민은 병원에 갈 때마다 일부러 추레하게 꾸미고 가던 편이라 오늘도 헐렁한 후드 점퍼를 입었다. 지민과 달리 도리어 정국은 조금 더 꾸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시선 많이 끌겠다.”

“누가요?”

“네가.”


지민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성 알파로 알려져 학교에서도 이미 유명인인 정국이었고, 무용과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 많다는 후문을 지민은 들은 적이 있었다. 정국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쳐다보자 지민이 부연 설명을 했다.


“그냥.. 오늘 좀 멋있다는 소리야.”

“형 눈에요?”

“아니. 나 말고 여학생들한테 멋있어 보이겠다고. 너 인기 많대.”


지민이 전에 너 유명해졌다고도 했고 정국 본인도 아주 모를 수는 없는 사실이었다. 교정을 지나다닐 때마다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게 왜 저와 지민의 사이에서 오가야 할 대화인 건지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를 왜 해요.”


전에는 섹스한 다음 날 미안하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하자더니, 오늘은 여학생에게 멋있어 보이겠다고 말하는 지민의 속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정국이 아는 지민이라면 별다른 의도 없이 그냥 속마음 그대로 말한 것이 분명했다.


“인기 많으면 좋은 거 아니야? 우성 알파에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지국대 들어왔으니 공부도 잘했을 거고. 그 정도면 고등학교 때도 인기 많았을 것 같은데.”


정국의 예상대로 칭찬이랍시고 말한 거였다. 순간 지민의 눈에 멋있어 보였던 줄 착각하고 일 초 만에 형 눈이냐고 맞받아쳤던 정국은 무안해졌다. 왠지 지민은 정국이 뭘 입든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집에서도, 지난주 병원에서도 그랬다. 정확히는 모른다기보다 관심이 없는 게 맞는 듯했다. 정국이 뭘 입었는지는 지민에게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라는 뜻도 되었다. 철저하게 다시 선을 긋는 지민의 행동에 정국은 기분이 나빠졌다. 웬만한 건 기분 나빠하는 것도 귀찮아서 안 하는 정국이지만 지민의 반응에는 늘 기분이 땅속까지 처박혔다. 


지민이 정국의 눈치를 봤다. 뭔가 말실수한 기분이었다. 물론 지민의 눈에도 오늘 정국은 충분히 멋있었지만 그렇다고 감탄하지는 않았다. 잘생긴 건 맞는데 워낙 어릴 때부터 봐왔던 터라 동그라미의 잔상이 강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당연히 잘생기고 멋있어 보일 테니 예시를 들어준 것뿐인데 정국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지민이 어색하게 차를 출발했다.


정국은 창가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딘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지민은 운전하며 가끔 정국을 힐끔거렸다. 드러난 옆얼굴이 전보다 훨씬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문득 지민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을 떠올려 버렸다. 섹스할 때 보았던 정국의 표정이었다. 약간은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던 우성 알파. 그런 얼굴이 정국에게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었다.


지민이 핸들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첫 관계 때는 정신없어서 미처 정국을 볼 겨를이 없었지만 두 번째 때는 의식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때 지민은 조금 두근거렸던 것 같다.


페로몬 때문일 거야. 페로몬 때문에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지민은 애써 그 기억을 지우려 애를 썼다. 우습게도 두 번의 관계를 갖고 나니 굳이 아무 일 없었던 척하자는 말조차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지민은 알아서 없었던 일로 굴고 있는 저 자신이, 또는 정국이 조금은 우습다고 생각했다. 물론 정말 웃음이 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형.”

“어, 어어? 응.”


히트사이클 때 봤던 정국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가 지레 찔린 지민이 살짝 과하게 반응했다. 지민을 향해 고개를 돌린 정국이 그날과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말했다.


“꿈꿨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그저께.”

“아.. 응.”


섹스 후 널브러지듯이 잠들었다가 잠깐 깼었다. 그때 정국이 침대 맡에 앉아 있었던 것을 지민도 기억했다.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그거 무슨 꿈이었어요? 혹시..”

“혹시?”

“아니에요.”

“왜 말을 하다가 말아. 궁금하게.”

“아니 갑자기 형이... 태권도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래서 뭐 관련된 꿈이라도 꿨나 싶었어요.”

“아.”


지민이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짧게 단어가 되지 못한 말을 내뱉자 정국은 조금 기대했다. 역시 말을 꺼내 보기 잘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지민이 그날 꾼 꿈에 관해 이야기했다.


“네가 태권도복을 입고 있었어.”

“그래서요?”

“열심히..”

“열심히요?”


지민은 제 말에 정국이 이렇게 열렬하게 대꾸하는 것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고 느꼈다. 사실 성인이 된 정국은 지민에게 대답을 잘하는 편이었는데 약간 툭툭 던지는 경향이 있었다. 지민이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날 꿈속에서 정국은 태권도복을 입고 키즈 카페에서 뛰어놀았다.


“엄마 키즈 카페에서 미끄럼틀 타고 아이스크림 먹던데?”

“...그게 다예요?”

“응. 완전 아기였어.”

“키즈 카페 갈 때는 완전 아기는 아니었잖아요. 여섯 살이나 일곱 살 땐데.”


정국은 그 당시면 아기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안타깝게도 지민의 눈에는 그저 아기일 뿐이었다. 실망한 정국이 시무룩해졌다. 다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지민은 대학교 근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 내려도 괜찮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다분히 조심하는 눈치여서 정국은 괜찮다고 했다.


정국을 내려주고 집으로 향하면서 지민이 사이드미러를 봤다. 정국이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꼭 그때와 같았다. 처음 서울에 온 정국을 집 앞에 내려주고 학교로 가던 날 말이다. 그땐 설핏 보고 말았는데 오늘은 지민의 시선도 사이드미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형질 재검사를 하던 날도 정국과 같이 갔다. 정국이 자신의 공강 시간에 맞추어 검사 시간을 평일 오후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재검사 자체를 정국이 하겠다고 했으니 예약까지 정국의 스케줄에 맞췄다. 지민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날 병원에서 얼결에 동의해 버렸기에 별수 없었다. 결과는 사흘 후에 나온다고 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지민은 집에서 쉬었다. 정국은 그사이 잠깐 학교에 다녀왔다. 돌아온 정국을 본 지민이 거실 소파에 누워서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정국은 작게 고개를 까닥였다. 인사인지 알았다는 뜻인지 모호했지만 어쨌든 반응을 보인 것이기는 했다.


정국이 욕실에 들어간 후 지민은 괜히 목을 뒤로 젖혀서 닫힌 문을 바라봤다. 정국과 같이 맞은 두 번째 히트사이클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신기하게도 첫 번째로 겪었던 날 이후보다 둘 사이의 회복이 빨랐다. 그러니까 아무 일 없었던 척하기 위해 이런저런 어색함을 숨기는 과정이 전보다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게 적응해 간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더 뻔뻔해진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전보다 불편함을 빠르게 회복했다.


씻고 나온 정국이 복슬복슬한 머리 위에 흰 수건을 얹고 비척비척 걸어왔다. 지민이 무심코 다리를 세워서 앉을 공간을 만들어 줬다. 지민이 비워 준 공간에 걸터앉은 정국이 배달 앱을 켜면서 물었다.


“오늘은 뭐 시켜요?”

“세꼬시에 소주 한잔할래?”

“세꼬시요?”

“응. 매운탕도 같이 시켜.”

“형 원래 해물 안 먹었잖아요.”


의아한 정국의 눈이 더 동그랗게 변해 있었다. 한편으로는 원래 잘 알고 있는 지식을 전달하듯 당당한 표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민은 오히려 제 과거를 돌아봐야만 했다. 회나 해산물 종류를 좋아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지금도 안 먹는 해물이 많지만 요즘은 입맛이 변하면서 먹게 된 것들이었다.


“이젠 먹어.”

“어른 입맛 다 됐네요.”

“원래 어른이었어.”


지민이 살짝 턱을 치켜들었다. 네네. 정국이 성의 없이 대답하고는 지민이 말한 것들을 시켰다. 주문한 후 휴대폰을 내려놓은 정국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다리를 접어서 웅크리고 누워 있던 지민이 조금씩 다리를 펴며 물었다.


“학교생활은 어때?”

“아 무슨 엄마예요? 그런 거나 묻고. 뭐 그냥 그래요.”


무슨 엄마 같은 질문이냐고 정국이 잠깐 쏘아붙였다. 저에게 묻고 싶은 게 꼭 어른이 꼬마를 볼 때 하는 질문 같은 것밖에 없나 싶었다. 그래도 답은 해줬다. 대학교는 재밌지도 않고 재미없지도 않았다. 첫 주에는 조금 정신없었고 이제 3주 차에 접어들면서 편해졌다. 극우성 알파라 체대에서 겪을 법한 군기도 전혀 못 느꼈다. 상당히 편한 학교생활이었다.


지민은 제 질문이 고루한 건가 싶었지만 할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아홉 살 어린 정국이 대학에 잘 다니고 있는지 궁금한 건 당연한 거였다. 필요한 점이 있다면 도와주는 것이 형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무 살이 느끼기에는 좀 완고한 간섭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다리를 쭉 뻗어서 정국의 허벅지 위에 얹은 지민이 윗몸 일으키기 하듯이 일어나 앉았다. 순식간에 제 옆으로 얼굴을 들이밀은 지민 때문에 놀란 정국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럼 나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지민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무료하게 있느라 꽤 지루했는데 정국이 와서 조금 즐거워졌다. 정국은 고개도 못 돌리고 앞만 보면서 얼굴의 솜털을 뜯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야기도 하고 싶고 사실은......


“형은 연애 많이 해봤어요?”


지민의 웃음이 터졌다. 다소 뜬금없는 질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깔깔 웃으면서 정국의 어깨에 얼굴을 박은 지민이 계속 웃었다. 저한테는 엄마 같은 질문하지 말라더니 저는 꼭 사춘기 소년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런 건 정말 사춘기 소년이나 궁금해할 질문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지민이 고개를 들면서 답했다.


“두 번. 너는?”

“한 번이요.”

“우와아..! 오메가였어?”

“아니요. 베타였어요.”

“나도 베타하고만 연애해 봤어. 그래서 알파랑 자.. 헉.”


알파와는 처음 자봤다고 말할 뻔했던 지민이 지금 눈앞의 알파가 누구인지 상기했다. 너무 편해져서 실언까지 해버렸다. 당황한 건 정국도 마찬가지였다. 정국이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지민의 종아리가 정국의 허벅지 위에 올라와 있었다. 안 그래도 정국은 대화하면서 내내 신경 쓰였다. 페로몬을 푼 것도 아닌데 지민의 몸이 닿아 있는 곳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자.. 뭐요.”

“뭐, 뭐긴 뭐야. 알파하고는 연애해 본 적 없다고.”


지민이 정국의 몸 위에 얹어 놓았던 다리를 접으며 바로 앉았다. 갑자기 찾아올 적막이 끔찍해 지민은 TV를 켰다. 괜히 리모컨으로 이런저런 영화를 뒤적이고 있는데 배달 음식이 도착했다. 정국이 음식을 받는 동안 지민이 일부러 영화 하나를 골라서 틀었다. 그러면 더는 어색한 수다를 떨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비 오나 봐요.”


조금 젖어 있는 비닐봉지의 물기를 닦으며 정국이 그러자 지민이 베란다 쪽을 쳐다봤다. 동그란 물방울들이 가늘게 맺혀 있었다. 봄비였다.









예정되었던 검사 결과 날짜보다 하루 일찍 병원의 전화를 받았다. 결과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는 것이었다. 강의 직전에 연락받은 지민은 수업을 마치고 바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필 정국이 듣는 실용 무용의 이해여서 지민은 수업하러 가자마자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정국은 흥미 없는 척 구석에 있었지만 그래도 늘 맨 앞에 섰다. 이따금 지민이 슬쩍 보면 타고난 기본기가 좋은지 곧잘 따라 했다. 확실히 몸을 잘 쓰는 것 같았다. 운동도 잘하고 섹스도 잘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지민이 약간 삐끗했다.


아. 그저 얇은 발목이 잠깐 휘청한 것뿐이었다. 접질린 것도 아니고, 넘어지거나 주저앉지도 않았다. 학생들 앞에서 그랬다면 상당히 부끄러워질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어느새 정국의 몸이 몇 발짝이나 앞으로 나가 있는 것을 본 상만이 작게 말했다. 왜 그래? 가뜩이나 상만은 정국 때문에 매주 앞줄에서 수업받느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있었다. 그런데 정국이 당장 교수에게 뛰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제 앞까지 나와 있기에 이상하게 여긴 것이었다. 상만이 작게 말했다 해도 가까워서 지민의 귀에도 약간 들렸다. 지민이 쳐다보자 놀란 정국이 뒷걸음질을 쳤다.


지민은 강의가 끝난 후 과사무실에 들렀다가 바로 병원으로 갔다. 예정대로였다면 내일 아침에 정국과 같이 갔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었다. 병원에 혼자 가는 게 맞는 일이었고 그동안 같이 다닌 게 특이했던 거였다.


진료실로 들어오라는 소리에 일어서던 지민이 문득 옆을 봤다. 최근엔 계속 정국과 같이 왔던 터라 혼자 들어가는 게 살짝 낯설었다. 늘 혼자 왔던 병원인데 신기했다. 저를 꽤 관심 있게 쳐다보는 알파가 많아서 불편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바로 온 터라 평소 병원에 올 때와 옷차림이 달랐다. 몸에 딱 맞는 카디건과 검정 슬랙스를 입은 지민이 알파들의 시선을 받으며 진료실로 걸어갔다.


막상 의사를 보자 지민은 조금 떨렸다. 솔직히 지민은 우성이 되었을 확률보다 다른 병이라도 있을까 봐 걱정했다. 형질이 변하는 사례는 극구 드물다고 들어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만에 하나 변했을 가능성도 있는 터라 긴장되기는 했다.


“박지민 씨.”

“네.”

“우성으로 발현 중이시네요. 축하합니다.”


축하받고 싶지 않은데요...... 지민은 절망스러웠다. 사회에서 우성과 열성의 차이는 컸기에 의사는 단순히 축하의 말을 건넨 것뿐이었다. 지민도 그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발현한 지 9년이나 지나서 제 형질이 또 달라진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저는 이미 열성으로 발현했을 때 끝난 줄 알았는데요.. 아직 발현 중이라는 건가요?”

“네. 지금은 아직 열성이에요. 여기 보시면 이 수치가 높게 나왔는데.. 이게 점차 높아지면 우성이 되는 거거든요. 아마 우성 오메가로 발현이 끝나면 지금처럼 불규칙한 힛싸나 약이 안 듣는 현상은 사라질 거예요.”

“아... 선생님. 저는 발현 중이라는 말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보통은 첫 사이클이 오면 발현한 것으로 치잖아요? 사실은 첫 발현 전까지도 우리 몸은 계속 변화하고 발현 중인 거예요. 보통은 1차 판정으로 끝인데 박지민 씨 같은 경우는 열성에서 다시 우성으로 발현을 겪고 있는 거구요. 조금 진행이 느린 것 같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정국과 같이 오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정국이 정신없는 저 대신 의사의 말을 자세히 듣고 기억해 줬을 테니 말이다. 오메가로 살아왔기에 아주 모르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혼란으로 머리가 멍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지금 열성에서 우성으로 변하고 계신 거예요. 가급적이면 빨리 발현하시는 게 좋겠죠? 안 그러면 힛싸 주기가 불규칙해서 일상생활하시기 힘드실 겁니다.”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건가요? 아, 혹시 촉진제 같은 게 있어요?”


촉진 주사나 약이라도 있는 모양이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무구하게 묻는 지민을 보던 의사가 헛기침하더니 말했다.


“지금 쓸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촉진제는 알파입니다.”

“네?”

“힛싸가 아니라도 알파와 성관계를 자주 가지세요. 우성 알파일수록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우성 오메가로 빨리 발현하는 데 도움을 줄 겁니다.”

“아, 아니.. 알파랑요? 그것밖에 방법이 없나요?”

“네. 형질이 변한 사례를 보면 보통 주변에 극우성이 있는 경우가 많아요. 박지민 씨도 최근 극우성 알파와 같이 내원하셨잖아요. 그리고 부모님 두 분 다 우성이시네요? 어쩌면 원래 우성이었는데 발현 계기가 없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주기적으로 검사 받도록 합시다.”


의사가 할 말이 다 끝났다는 듯 마무리 멘트를 던졌다. 마치 최근 늘 같이 오던 극우성 알파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는 투였다. 그야 의사가 보기에는 두 사람이 연인 관계 같아 보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올 때마다 지민에게 제 페로몬을 잔뜩 묻혀둔 데다 지민보다 더 적극적으로 검사하겠다던 우성 알파는 소유욕이 굉장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진료실을 나온 지민은 멍했다. 간호사가 지민을 데리고 가서 우성 오메가로 발현했을 시의 주의사항을 이것저것 알려 줬다. 오래전 열성 오메가로 발현하며 들었던 내용과 비슷했다. 하도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스무 살 때로 돌아간 심정이었다.


“근데 늘 같이 오시던 알파분은 오늘 안 오셨네요?”


정국을 기억하는 간호사의 말에 지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짧은 기간에 세 번이나 왔으니 자주 온 것이긴 한데, 환자가 한둘도 아니고 굳이 기억한다는 것이 조금 놀랍기도 했다. 그 정도로 정국이 간호사의 뇌리에 남았다는 소리였다. 그만큼 매력적으로 비쳤다는 것 같아서 지민은 기분이 묘했다. 뭐 의사와 간호사 모두 왠지 정국을 지민의 반려쯤으로 생각하고 홀로 온 지민을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병원을 나오며 착잡해진 지민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말이지 미쳤다. 앞으로 히트사이클이 정상적인 주기로 자리 잡으려면 얼른 우성 오메가로 완전히 발현해야 했다. 그걸 도와주는 것이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빨리 발현하지 않으면 그 미친 것 같은 히트사이클이 언제 어디서 또 터질지 몰랐다. 그건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결론은 어서 우성 오메가로 완전히 발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우성 알파와 섹스해야 했다. 제 근처의 우성 알파는 정국뿐이었고 심지어 극우성이었다. 그렇다고 맨정신에 정국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차 문을 열고 올라탄 지민이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혹시 또 히트사이클의 전조인가 싶어서 불안해졌다. 공교롭게도 내일이 또 주말이었다. 매주 주말마다 찾아왔던 것을 감안하면 미리 억제제를 먹어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집에 가자마자 지난주에 받아온 약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지민이 시동을 걸었다. 운전에 집중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무리 급해도 그런 부탁을 어떻게 하냐. 잠시라도 정국에게 도와달라고 해볼까 생각했던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차라리 센터에 의뢰하거나 조건에 맞는 알파를 만나서 섹스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아직 그런 원나잇 개념의 섹스를 해본 적은 없지만, 알파나 오메가는 사이클 기간에 그런 일도 빈번하다고 하니 차라리 그게 마음 편하지 싶었다. 진지하게 그것도 고려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민의 차가 지하를 빠져나왔다. 출구 주차요금소에서 영수증을 보여 주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건물 앞 택시에서 정국이 내리는 게 보였다. 어? 놀란 지민이 부르려고 했지만 정국은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병원에 왜 온 건지도 모르겠고 부를 타이밍을 놓쳐서 잡지도 못했다. 전화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지민은 그제야 자신이 주차장 출구에 어중간하게 멈춰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기계적으로 출발한 차가 도로에 진입했다. 얼떨결에 운전하고 있었지만 지민은 조금 전 봤던 정국의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근처에 지민의 차가 있는 것도 못 볼 정도로 정국은 꽤 다급해 보였다.


여러모로 자꾸 생각나게 한다니까. 지민이 핸들을 꺾으며 유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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