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을 폈다. 

나는 오늘 한 번 죽었다.

짧고 간결한 문장 하나를 적고, 나는 일기장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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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게 분명하다. '슬프구나' 싶을 때면 하늘에서 비가 내렸고, '행복하다' 싶을 때는 밤하늘조차 쾌청해서 저 멀리 떨어진 강 너머 동네까지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건 분명 조물주의 아주 작은 배려일지도 모른다. 슬픈 날은 빗소리에 숨어 마음껏 울어보라는 배려이자 행복한 날에는 어둠조차 아름다워 보이게 해주는 배려. 하늘은 분명 사람의 마음을 알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사람이 아니어서 이런 우중충한 기분임에도 하늘은 무서울 만큼 찬란하게 빛나서 내 살갗을 모조리 태워버릴 것 같이 작열했다. 강렬한 태양빛이 창틀을 헤집고 들어올 때면 속이 부산스러지는 것을 알고 있기에 직원들을 시켜 미리 커튼을 쳐두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헛구역질을 해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덕분에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보였다. 누가봐도 심각했고, 햇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호텔 안은 누군가의 진심을 아는 일은 무서운 일이랬던가. 나는 분명 그 진심을 알아차리는데 어리숙했던 것이 분명하다. 눈 앞에서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되려 울기 마련인데, 제 앞에서 울음은 커녕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자를 보고 있노라니 이는 명백한 사실이라 단정지을 수 있었다. 상처받은 것은 되려 제 쪽이었다. 지금까지 저를 좋아하여 제멋대로 구는 것에도 따라주는 것이라 생각했것만, 돌아오는 대답은 '데리고 다니기 좋아서'였다. 나는 그저 이 자에게 장식품이었던 모양이다. 치밀어 오르는 모멸감이 관자놀이를 강타하고 명치를 후벼팠다. 눈물이 날 만큼 아팠다.



-웃지 않았나요? 좋다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살다보면 반드시 좋을 때만 그 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닌 걸 알게 될 거예요.

-웃었던 건요?

-속내를 숨길 때는 웃는 얼굴이 잘 먹히거든.



 따귀 쯤이었던 말들은 주먹이 되었고, 주먹정도 되었던 말들은 총알이 됐다. 이후로는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몸에 꽂힌 채 온몸을 휘저어 구석구석을 파먹었다.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게, 이 자는 되려 자신이 더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곳저곳을 파먹혀 곧 죽어버릴 것 같은 이는 이 자가 아닌 나였다. 웃는 얼굴이 당연히 진심이라 생각하고 제 모든 것을 보여줬다. 옆에 두고 오래 지켜볼 수 있는 동족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자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부모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일터를 공개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족임에도 질타를 받을 수 있는 친인성향을 감춤없이 보여준 것 또한 이 자 앞에서가 처음이었다. 누군가와 이리 오래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내 옆을 내주고 싶은 이도, 이미 내 진심을 모두 준 이도. 나는 그 모든 처음을 주었는데.


환멸감이 가득한 얼굴이 표면 위에 드러났지만 숨기지 못했다. 우리는, 뱀파이어는 오래 살면 다들 이렇게 제 감정이 뭔지도 모른 채 상처만 주고 살아가게 되는 걸까. 새삼스럽게 삶이 무서워졌다. 눈물이 눈 안 가득 그렁 차올라서 흘러버릴 것 같은 것을 삼켜냈다. 본래 자신이 더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독설을 쏟아내는 이들의 말에는 진심이 그닥 담겨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저 말들이 거짓임은 40여 년을 살아오며, 누군가의 감정을 읽기보다 제 감정을 잃는 일에 더 익숙했던 내가 자주 지었던 표정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이유는 내가 상처받을 것임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거짓을 이어나가는 저 태도 때문이었다. 


이 자는 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음에도 마치 방관자처럼 그 옆에 서서 구경만 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이 상황에서도 마음을 숨기고 오로지 이성과 입술만 움직이고 있다. 여전히 마음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꽤나 미웠다. 나는 지금까지 보여줬던 그 달큰한 미소와 말들에 취해 이 삶 함뿍 그녀에게 담겨버려야지, 그렇게 생각했건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만이 그리던 백일몽이었던 모양이다.



-언제까지 그럴 거예요?

-아마, 아직 오래. 아주 오래.

-내가 기다려줄 것 같아요?

-그건 아가의 선택이니까.

-.. 진짜 너무하네.



지독하다. 이런 말을 들어놓고도 나는 분명 벗어나는 걸 포기하고 조금 더 지독히 얽히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선택하고 있다. 말 그대로 나에게 우리의 관계는 지독한 관계다. 벗어나고 싶어도 이제는 벗어나는 것조차 할 수 없고, 기다리는 것은 피가 말라서 때려치고 싶었다. 그럼에도 결국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나는 그녀의 손길을 탐하고 있고, 그 손길이 있어야만 안정할 수 있었다. 시선이 마음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자존감 또한 그들 사이를 아주 조금 비집고 들어가 있었기에 숨이 막혀왔다. 틈없이 밀집해있던 마음만큼이나 가까이서 대화를 주고 받던 그녀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 그리고 한 걸음 더. 잠시동안이겠지만, 나는 지금 당장은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아무런 말없이 떨어져버리면,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홀연히 사라져버릴 것 같아 그 이상으로는 아무런 예고 없이 멀어질 수 없었다. 추잡하게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결국 멋없이 멀어진 거리만큼 커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커진 목소리는 그만큼 불안하게 흔들렸다.



-너무한 거 본인도 알아서 지금 그러고 있는거죠? 근데 그게 더 나쁜 거 알아요?

-질렸으면 지금이라도 가면 돼요. 가도 뭐라 안해요.

-화나고 질려요. 언제까지 이럴 지 모른다는 게 정말 짜증나요. 밉고요.



흔들리는 목소리만큼 마음도, 눈물도. 후에 '홧김에'라는 변명을 덧붙여야만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말들이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려 했기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자꾸만 마음이 흘렀다. 제 옆에 지내던 그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 고해성사를 하는 이 앞에서 그것이 어떻게 거짓이냐며 제멋대로 판단하려는 주둥이가 거슬렸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조금 더 이야기한다면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버리는 이 머저리같은 마음도.



- ... 그러니까 당신도 마음대로 그만두지 마요.



덕분에 썩은 동아줄임을 알면서 스스로 다시 붙잡아버리는 이 상황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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