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1 장

떨 리 는 가 슴 

  

 

 여자는 생각보다 잘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화려한 밥상은 아니지만 따뜻한 쌀밥에 김치찌개, 계란말이 등 정성스러운 밥상이 마련되었더랬다. 뉴욕의 한가운데서 이렇게 한국식 정찬을 먹어본지도 참말 오랜만이었다.

앨리스는 김치 냄새라면 질겁을 했고 다들 뉴욕식의 화려한 식사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까. 집에선 마음놓고 식사조차 할 수 없던 그였다. 늘 식사자리에선 앨리스가 카랑카랑하게 제희에게 시비를 걸어왔고 때론 클로이의 사고나 혼자 먹어야 했던 날들도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의 식사는 점심 약속이라든가 중요한 만찬 회의에서 다 이루어졌었기 때문에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단 한번도 이렇게 편안하게 식사를 해 본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후계자로 키워지면서부터는 아예 위엄있게 밥을 먹는 법부터 배웠던 것 같다. 제희는 오늘따라 얌전하게 나원의 말을 들었다. 여자는 역시 솜씨가 좋았다. 의사로 내내 공부만 하기 바빴을 텐데 이런 반찬을 세심하게 준비해 주는 것이었다. 

확실히 자신의 망나니 동생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사람인 게 분명했다. 숟가락까지 세심히 준비하여 놔 준 나원은 빙긋 웃으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사실 배고팠거든요. 아무말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밥만 먹기로 해요. 누가 보면 플로렌스 그룹 회장님이 아니라 플로렌스 그룹 안에 있는 구두닦이 같아요. 너무 말랐잖아요. 다이어트 중이신 거예요? 나원은 조용히 입을 열었지만 다이어트 중이냐는 나원의 말에 제희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살 좀 찐 거 같아서.   

...그럼 다른 사람들이 욕해요. 좀 쪄도 될 거 같거든요?  

언제 이렇게 요리 할 줄 알았어. 내내 공부만 하는 범생 아니었나.  

그거야 사람 하기 나름이죠. 모르셨어요? 나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 아는 거.  

..공주병 증세도 있었나.  

어서 드세요. 찌개 식을라.  

.....

 

식사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제희는 정말로 맛있게 밥을 먹어서 나원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서로 이렇게 한가롭게 식사를 할 사이가 아니라는 것도, 그런 사이가 못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원의 부탁대로 제희는 어떤 심각하거나 진지한 말도 꺼내지 않았고 그것은 나원도 마찬가지였다. 나원은 제희가 천천히, 

그리고 즐겁게 밥을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신분 때문에, 가지고 있는 책임감의 무게라든가 태어났을 때부터 귀공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원하지 않아도 보스로, 회장님으로 키워졌을 어린 시절 때문에 이렇게 맘 놓고 말을 털 상대도 없었을 그였다. 엄격한 잣대로 아들을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아버지라기보다는 보스의 이미지가 강했던 스피노, 얼굴도 모른 채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야심과 욕심으로만 가득해 제희를 내내 구박했다던 새어머니 앨리스와 속만 썩이는 이복동생 클로이, 그리고 밟고 넘어서야 할 상대들이었던 이사진들, 어린 제희를 내내 긴장하면서 지켜봤을 조직원들. 콘도르파라는 거대한 존재들. 





그들을 이겨내기 위해 일부러 이를 악물고 달려왔을 그의 어린시절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김치를 쭉 찢어 남자의 숟가락 위에 올려준 나원은 빙긋 웃었다. 한인식당 아주머니 말씀이 이번에 김장이 잘 되었대요. 

요즈음 더 힘들고 외로울 그를 위해 해줄 것은 이런 것 밖에 없다는 것이 서글펐지만 제희는 나원이 생각없이 올려준 김치 한 조각을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처음이었다. 그의 편안한 웃음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도. 





식사가 끝나고 자정이 가까운 시각 때문에 비서 제스가 들어왔기 때문에 제희는 나원의 아파트를 나서야 했다. 비서를 먼저 들려 보내고 엘리베이터 앞에 선 제희는 돌아섰더랬다. 갈 수 있으니까 먼저 들어가지. 

아무래도 남들의 시선이 의식되는 모양이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물론 나원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될까봐 두려워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원은 일부러 내려가는 버튼을 눌러 주었다. 여긴 제 집이니까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면서요. 배웅하는 것도 제 맘이어요. 나원의 생고집에 제희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배웅하기 위해 같이 탔지만 소리없이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고 있었다. 여자에게는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었다. 예쁘고 세련된 옷을 입은 여자를 보면 무조건 선물부터 하고 싶었던 남자였고, 

요즘 유행한다던 목걸이나 악세서리만 봐도 자연스럽게 여자가 연상되었다. 아름다운 여자니까 어떤 것을 입거나 걸쳐도 다 예뻐보일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게 해주고 싶고 온갖 맛있는 음식이란 다 먹이고 싶고, 하고 싶은 공부만 하게 하면서 예쁜 옷이나 가방이나 구두란 것은 다 사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누구보다 그것은 여자가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어서는 내내 그들은 말이 없었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열렸고, 문이 열렸지만 제희도 나원도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아 다시 닫혀버렸더랬다. 엘리베이터가 딩딩 소리를 내자 정신을 차린 나원은 제희를 촉촉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제 가세요. 나원의 목소리가 조금 젖어든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을까? 그제서야 제희는 자신이 집으로 간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정략약혼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무조건 반대할 생각이었고, 

아버지께도 보류해 달라고. 지금은 결혼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해버렸으나 점차 생각이 변하고 있었다. 그래. 이게 내가 걷는 길이구나...촉촉히 젖은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던 여자가 생긋 웃었다. 잘 살게요. 






이젠 울지도 않고 무조건 잘 살게요. 남한테 바보처럼 당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 걱정 같은 건 하지 마세요. 정말 요즘 편하고 좋아요. 아무도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요. 예전의 하나원이 아니거든요. 괜찮다는 의미로 거수경례를 웃긴 동작으로 해보였지만 제희는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정말로 편안해 보이는 여자가 느껴져서였다. 

그리고 최고의 저녁을 대접받은 이후 이기도 했다. 정말 맛있는 저녁이었어. 되도록이면 감탄사나 느낌을 말하지 않는 남자라는 걸 알고 있는 나원이었다. 결국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나원이 먼저 내렸다. 제스가 많이 기다리겠네요. 멀지 않은 곳에 그의 리무진이 있을 터였다. 나원의 뒤에 서 있던 제희는 서늘한 눈을 했더랬다. 





정략약혼의 그림자가 자꾸만 남자의 주변을 배회했다. 독보적이고도 완전한 보스 체제인 모리오네파와는 달리 플로렌스 그룹과 연계되어 있는 콘도르파는 그렇지 못했다. 더 확실한 권력 양상을 위해 반드시 정략 약혼을 서둘러야 했다. 스피노가 다이아나와 클로이의 약혼을 허락한 것도 다이아나의 집안 때문이었다. 클로이도 다이아나 같은 사람을 얻었는데 큰 형인 너는 더 좋은 집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중론이었고 나쁜 뜻으로 해석하신 얘기가 아님을 잘 아는 제희였으나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던 그는 결국 자신이 걸어야 할 길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파트 입구 쪽으로 몸을 돌리던 나원은 멈추어 섰다. 


" !!!!!! "  

 

 돌아서는 여자의 어깨를 붙든 남자가 뒤에서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남자의 체온도 떨리고 있었다. 단 한번도....이때까지 한 번도 그러지 못했던 남자였더랬다. 그가 모종의 결심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나원이었다. 또 힘든 일을 하러 가시는군요. 눈물이 떨어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나원은 소리없이 눈물을 떨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요.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힘이 센 것도 아니고 이렇게 밖엔 위로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내가 가진 전부니까요. 나원의 말에 사랑하는 사람을 뒤에서 꼭 끌어안은 제희의 입에서도 목이 잔뜩 메인 목소리가 흘렀더랬다. 괜찮아. 아무것도 해줄 필요 없어. 

서로 정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었다. 제희는 한 곳에 매일 수 없는 사람이었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그림이었다. 이복동생의 파혼당한 전 약혼녀...정략약혼을 눈앞에 둔 플로렌스 그룹 총수..현실의 벽은 높고 지켜줄 힘은 너무나 약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미안해요...급기야 여자가 그런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제희는 포옹을 풀었고, 나원이 돌아보자 제희는 손에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 대답은 이거면 되겠지? "

 " .......... "


 어두운 엘리베이터 안이라 그런지 핸드폰 줄에 달린 야광 별이 더욱 도드라지게 빛나 보였다. 어둠 속에서 홀로 총천연색으로 물든 느낌이랄까. 남자의 손에 달려 왔다갔다 하던 별은 작지만 환한 빛을 내고 있었다. 

목이 메인 남자는 어느덧 결심이 선 얼굴이었다. 제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알 수 없지만 무엇인가 큰 결심이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이아나가 말하지 않았나. 클로이 때문에 그룹과 조직이 큰 위기에 처했고 미카엘 그린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그에게 닥친 위기가 한두개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클로이 때문에 그가 감당해야 할 짐이 더 늘어났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빗속에서 하염없이 앉아 있었던 거겠지. 무슨 결심을 했는진 모르지만 순간적인 그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여서 나원은 가슴이 미어졌더랬다. 



아무말도 하지 않아도 서로를 향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자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돌아본 나원을 말간 눈으로 쳐다보던 제희는 손을 뻗어 여자의 어깨를 안았다. 체온이 따뜻했다. 첫 포옹이었다. 안기자마자 나원은 제희가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미안해 하지 않도록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다 잘될 거예요.... 


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품에 쏙 들어온 나원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안던 제희의 눈이 벌겋게 젖어들었다. 그의 결심은 곧 슬픔과 절망으로 이어졌다. 처음 널 봤을 때부터 늘 이런 꿈을 꿨는데..정작 널 안은 내 심장은 폐허가 되버렸구나...눈을 감아내린 남자도 숨을 멈추었다. 슬픈 포옹이었다.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당신을 위해 그 사랑을 얼마나 표현하고 싶은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리무진이 출발했지만 제희의 맞은편에 앉은 제스는 계속 당황스러웠다. 제희가 어렸을 때부터 성심성의껏 충심으로 모셔온 보좌관이기도 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던지 표정 하나만으로 계획을 알아차리고 알아서 처리했던 사람이기도 했더랬다. 인상을 써도 그가 화를 내서 짓는 표정인지 아닌지도 알 수 있었다. 

눈이 벌개져서 차에 오른 제희는 내내 창가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제스는 그의 결심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럴 만한 위치에 계세요. 스피노 님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차가 멈추자 제희는 제스를 쳐다보았다. 저 서늘한 눈빛 아래로 자꾸만 물기가 어른거렸더랬다. 정략 약혼 때문에 그가 끝까지 망설이던 것을 제스는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제스에겐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네. 

제희는 쓸쓸하게 웃었으나 제스는 안타까운 마음이 되어 외쳤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스피노 님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반드시 정략결혼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거부할 만한 위치에 계시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제스의 말에 창가를 바라보던 제희는 비가 부슬부슬 오는 창문을 열었다. 그의 부드러운 손등 위로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졌다. 그 비를 보면서도 제희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눈에는 슬픈 눈물이 맺힌 채로. 





결심을 굳힌 얼굴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그애가 우산을 씌워 주더군. 제희의 말에 제스가 입을 다물었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남자의 손등으로 꽂혔다. 참 따뜻했어...회상하던 남자의 눈가는 이미 벌겋게 젖어들었더랬다.  


나 때문에 나원이가 다칠 거야.  

도련님.  

...미카엘 그린은 그애를 가만히 놔두려고 하지 않을 거야. 반드시, 복수를 하려 들 거야...  

도련님.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내 약점이 나원이라는 걸 만 천하에 공개할 순 없어.   

그건 바이올렛에게 너무 잔인한 일입니다.

  

 제스는 울음이 터지려 하고 있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인데.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그룹도, 재산도, 명예도, 조직의 수장까지 거머쥔 자신의 어린 도련님이건만 어째서 이렇게 무겁고 아파 보이는 건지. 왜, 다 가졌는데도 다 잃은 것처럼 보이는 건지. 제스의 안타까운 어조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등은 이미 촉촉한 빗줄기로 젖었으나 차가운 손에 주먹을 쥐었다가 핀 제희의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 금방 잊을 거야. 나원이는 반드시 행복해야만 하니까.." 

" .....! "

  " 그래도 욕심은 좀 나. 제스..." 


파랗게 얼어버린 손을 그제서야 거둔 제희는 거의 우는 눈을 하고 있는 제스를 돌아보았다.

 

" 다시 걜 바라볼 수만 있다면...그 어떤 고통도 먼지처럼 느껴질 것 같아.."  

" ....."  

" 너무 보고 싶다. 그래서 내가 너무 힘이 드는군...." 

 

 참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린 제스 대신에 힘없이 웃던 제희는 눈을 감아내렸다. 미카엘 그린의 복수, 그리고 끝나지 않을 앨리스와 클로이의 야망, 앞으로 책임져야 할 조직과 그룹. 그리고 온전히 지켜낼 수 없는 나원...

힘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 선택해야 할 길이었다. 위험한 자신의 신분은 반드시 나원의 위험을 야기시킨다, 가 제희가 내린 결론이었다. 지킬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뿐이었다. 울고 있는 제스를 돌아본 제희는 눈을 떴다. 결심이 어린 확고한 눈빛...

 

" 아버지께 전화해. "  

" 도련님! "  

" ....율리아노 플로렌스, 정략 결혼의 결심이 섰다고. "

 

 

 

 

 

 

  

 

 

 

*

 

그게 무슨 소리야!   

...방금 스피노 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지라.  

정략 약혼이라니!!! 그 상대가, 상대가 누구라고!!!!!!!!!!!!!!!!!!  

전 미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의 조카딸입니다. 현재 외무부성 외교관이고 아버지인 퍼시 하트는 국방부 장관을 지냈고 어머니 일레인 하트는 세계적인 보석 디자이너..외할아버지가 그 유명한 스위스 은행 재벌 제임스 조시입니다. 일레인 하트가 설립한 Tiffany&co 보석사와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스위스 은행모두가 외동딸에게 상속되기 때문에 따라서 율리아노 도련님께서는 국방부 장관의 사위이자 스위스 은행의 최후 상속자가 됩니다.   

이....비..빌어먹을 늙은이를...!!!!!!!  


 다이아나를 원치 않는데도 일부러 약혼시켰던 것은 다이아나의 재력과 상속이라는 조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피노가 율리아노의 짝으로 짜맞춘 약혼녀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스피노가 처음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 약혼녀 측에서 율리아노와 결혼하고 싶은 의사를 내비쳤고, 율리아노를 위해서 모든 전재산과 상속권을 넘길 의사가 있다고까지 얘기해 왔으며 약혼할 상대는 지성과 미모와 교양을 겸비한 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소문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모든 걸 다 가질 수가 있을까. 

자신의 아들은 넷째 손가락이 잘리고 왼쪽 팔이 마비된 채 불구의 삶으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거기다 변변한 의사조차 붙여주지 않고 금족령까지 내린데다가 클로이의 카드를 정지시켜 버리기까지 했고 다이아나는 절대 금전적 도움을 주지 않겠노라고 선언한 채 아예 여행을 떠나버린 참이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앨리스는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비명을 지르면서 발광을 했지만 이 분은 풀리지가 않았다. 





절대로 그냥 두지는 않겠어. 비서를 내보낸 앨리스는 핸드폰을 들었더랬다. 옆방에서는 클로이가 상처로 신음하고 있었고, 스피노로부터 제희의 약혼식을 사상 최대로 거대하게 준비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다음이었다. 

절대로 나 혼자 무너지지 않을 거야. 마이클 케인으로부터 받은 연락처가 어디 있을 텐데..핸드폰을 집어든 앨리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신호음이 가자 앨리스는 입술을 악물었다. 여기까지 나도 오고 싶지 않았어. 여기까지 내몬 게 네놈이라는 걸 명심해. 제희를 향한 분노로 번뜩이던 앨리스는 수화음이 흘러나오자 눈을 부릅떴다.

 

- 로렌스 퍼시입니다. 

" .....앨리스 플로렌스예요. 마이클 케인을 통해 대충 들어 아실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만 말하죠. "

- ......!  

" 정보를 빼주겠어요. 원하는 정보를 빼주는 대신 조건이 있어요. " 

- 어떤 조건이든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부인. 

" ......율리아노 플로렌스와 바이올렛 더글라스를 처리해 주세요. "

 

 

 

 

 

 

 

 

 

  

 자정이 가까올 무렵이 되어서야 찜질방에서 나온 유정과 아영의 수다는 그치지 않았다. 대부분 연애나 현실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언제 경제가 풀리냐, 부터 시작해 어디 쇼프로에 나온 모델이 몸매가 괜찮더라, 어디 튼실하고 건강한 애 없냐. 픽업해오자 등등. 그들은 누구보다 기호식품부터 시작해 죽이 잘 맞았다. 한참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지나면서 깔깔거리며 웃어대는데 무거운 그림자가 조금씩 드리워졌다.

 

" 여어...이거 오늘 쌍대박이군. " 

" ...! "  

" 아가씨들 오늘 2차 가시나? 우리도 좀 끼워 주지. "  

" .... " 

 

 불량배 서너명이 가죽 잠바에 구제 청바지를 입은 채로 슬슬 다가오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그 폭행범! 목욕 바구니를 손에 든 유정과 아영의 팔을 잡은 채 덜덜 떨던 유정은 상상으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상황을 생각했다. 이를 어쩌면 좋아. 하필이면 왜 이 골목으로 왔던가. 아예 스파에서 자고 올걸. 

두려움과 공포에 떨던 두 여자는 서로의 팔을 맞잡으며 덜덜 떨었고, 불량배들이 아예 아영과 유정을 둘러싸고 손을 어깨에 얹으면서 변삘적인 대사를 날렸지만 유정과 아영은 거의 패닉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유정은 자신의 허리에 남자의 손이 쓸어대자 악 소릴 지르면서 눈을 딱 감고 주먹을 휘둘렀다. 어찌어찌하여 유정의 주먹이 남자의 복부에 꽂히자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불량배가 떨어져 나갔고 유정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주먹을 쳐다보는데 다른 불량배가 아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듯 하더니 험악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뭐 해! 유정이 아영을 재촉하자 아영도 조직에서 배운 태권도 실력을 발휘, 발차기로 폭행범의 거시기를 단숨에 차주었다. 불량배가 떨어져 나가자 유정과 아영은 액션영화처럼 등을 맞대었다. 무협영화에서 보면 영화처럼 샤샤샥, 이렇게 되던데. 대한민국 미혼여성 만세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불량배들이 하나 둘씩 다가서며 무어라 쌍욕을 해대자 유정은 비장한 각오로 입술을 깨물었고 선예는 태권도 동작들을 생각하면서 다같이 몸을 날렸다.  


..크리스티나 퍼시 양 보호자 되십니까? 여기 뉴욕경찰서입니다. 


 오늘은 당직이 있는 날이라 마지막 마무리까지 하고 로펌에서 나서던 길에 우진은 잘 잡지 않는 택시까지 잡아가며 따따블을 외쳤다. 경찰서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졌다. 자정이 훨씬 넘은 경찰서 안은 북적였고 붐볐다. 담배를 피고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건달부터 시작해 무슨 무슨 파 공식 지정 무늬라며 용 배때기만한 문신을 몸 전체로 휘감고 형형색색의 공포오라를 발산중인 깍두기 세모꼴 머리스타일의 어깨형님들을 비롯, 각양각색의 범죄자며 규율을 어겼는지 어쨌는지 팬티보다 조금 더 큰 듯한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망사 스타킹을 신은 채 껌을 질겅질겅 씹어대던 언니들도 있었다. 우진은 경찰서에 들어서서 형사님들 앞에서 컴퓨터가 있는 테이블 앞에 고개를 수 그린 두 미혼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치고박고 싸운 것처럼 광년 머리의 부스스함을 고수하고 있었고, 겉옷은 던져버렸는지 매우 거친 형상들이었다. 

누가 알면 어디 레슬링 데뷔하고 돌아온 사람 같군. 아니, 여성들의 방황과 도발을 그린 '델마와 루이스'던가. 유정과 아영은 험악한 범죄자들 사이에서 꼼짝없이 두 다리를 얌전하게 모으고 앉아 어찌할 줄 몰라했다. 우진은 이를 드드득 갈며 유정과 아영 사이로 나타났고 유정과 아영은 우진을 보자마자 얼싸안고 환호를 내질러야 했다. 살았다! 

  

" 크리스티나 퍼시 양 보호자 되십니까? " 

 

 유정이 우진의 연락처를 댄 모양인데 남자는 깔끔하고 완벽한 옷차림의 우진을 보더니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방금 유정과 아영의 신상명세서를 훑은 모양이었고 형사는 입에 문 담배를 내려놓고 머리를 한번 긁적였다.  

 

" 신상명세서에 브라운대 법대생과 스탠포드 출신 여기자라고 나오는군요. 맞아요? "  

" ....." 

" 아니, 알만한 사람이. 그리고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사람이 그래, 그것도 겁없이 여자들이. 저 놈들이 작정하고 덤벼들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예 ?"   

" 우리가 이겼잖아요. " 

 

아영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고 우진은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형사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말 한번 잘한다며 궁시렁거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저기 널부러진 철창 속을 가리켰다. 막 수감된 범죄자들이 들어가는 곳이었고 우진의 시선이 철창 속으로 향했다. 널부러지다 못해 어디 동태가 트럭 밑에 압사하기라도 했는지 옷은 온통 너덜너덜에 보기만 해도 처참한 흔적의 세 사내가 널부러져 있었다. 거의 기절한 모양새였다. 분명히 저건 극심한 교통사고거나 조폭들끼리 조직 싸움에 연루된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형사가 우진의 말에 찬물을 끼얹었다.

 

" 이 두 아가씨가 방금 치뤄낸 전투요. "  

" ..예에! " 

" 솔직히 말해봐요. 명문대는 뻥이고 이 두사람, 특전 공수부대 출신이죠? 아니면 CIA 첩보원이던가. " 

 

 그렇지 않다면 저 참사를 해치울 수가 없다며 형사는 열을 올렸다. 불량배들은 이미 기절하기 일보 직전 아영의 레이저빔에 가까운 포스 가득한 눈빛을 받고는 차라리 돈을 내겠으니 까불지 않고 조용히 감옥에서 썩겠다 진술서까지 쓴 상태였고 그 중 가장 코피가 많이 터진 사내는 유정에게 당한 주먹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듯 유정만 시야에서 치워준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형사의 바짓가랭이를 잡고 늘어졌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두 여자는 이때까지 치한에게 당한 여성들의 역사를 다시 쓰면서 경찰서를 나왔다. 벌써 새벽 해가 뜰 무렵이었고, 우진은 조용히 두 여자를 해장국집으로 안내했다. 술도 안 마셨는데 무슨 해장국이냐 유정이 투덜대었지만 우진은 그래도 경찰서까지 들락거리고 세 치한을 때려눕힌 국민의 영웅인데 해장국 정도는 기본 아니겠느냐고 너스레를 떨었고 분명히 몸을 함부로 한 유정에 대한 원망이 섞여 있었다. 



해장국이 나오는 내내 우진은 이를 바드득 갈며 유정을 잡아 잡술 듯이 눈에서 레이저빔을 발사했다. 주문이 끝나고 아영은 자리에 앉았지만 우진의 포악해 보이는 눈빛 덕에 더욱 고개를 수그릴 수 밖에 없었다. 이 변호사님 댑따 무섭다.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우진은 다다다다 속사포처럼 유정을 공격해 들어갔다.  

 

" 잘-한다, 잘 해! 왜? 효도르랑 붙어 신인왕 타이틀에 나가지 그랬냐? 챔피언이 은퇴를 할 게 아니라 문유정 네가 데뷔를 할 걸 그랬지. 안 그러냐. "  

" ...잘못했어. 그래서 찍소리도 않고 가만 있잖어. "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덤빌 걸 보고 덤벼야지. 그놈들이 양아치인 척 하는 동네 건달들이었기에 망정이지 진짜 문신 그린 형님들이었으면 너 뼈도 못추렸어. 정말로 여자로서 위험했을 수도 있단 말야. 그냥 냅다 튈 일이지 무슨 깡이라고 덤벼!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겼음 어쩔 뻔 했어. "  

" ..."

 

 무어라 반박하려던 유정은 아영의 손을 잡아끌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입을 꾹 다물었다. 우진의 말은 백이면 백 모두 옳은 말이었다. 결국 해장국이 나와 세 사람 사이의 냉기류는 잠시 멎었고, 뜨끈한 해장국이 나오자 유정은 마침 배가 고팠는지 팔을 걷어 부치고 숟가락을 드는데 시퍼런 멍자국이 팔에 있었다. 

그걸 발견한 우진은 냅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유정의 손을 붙들었다. 부들부들...삽시간에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이 느껴져 아영도 팔을 잡힌 유정도 좌불안석이었다. 냅다 일어난 우진 덕분에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집중되자 아영도 안그래도 쪽이 팔리는지 머리를 숙여야 했다. 내일 대문짝만하게 나겠네 진짜. 어휴..쪽팔려서 진짜 고갤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아영도 마찬가지였고, 아예 광고를 할 모양인지 우진은 멍이 잔뜩 든 유정을 붙잡고 고함을 내질렀다. 문유정! 

 

" 왜..또 왜애...제발 좀 앉자. 별 거 아냐.."  

" 별 게 아닌데 북두칠성처럼 커다란 멍이 들어! "  

" 아니..그냥 주먹질 할 때 좀. "  

" 니가 김두한이야! 도대체 주먹질을 하길 왜 해! 니가 그렇게 자신이 있어! "  

" ..아니 난, 그 상황에서 그냥.."  

" 입 다물어! 한마디만 더 해. 동해 앞바다에 그냥 던져버릴 줄 알아. 무슨 기집애가 이렇게 힘이 세. 무슨 여자가 겁이 없어. 거기가 어떤 데라고, 그 놈이 어떤 놈들인줄 알고 냅다 겁없이 주먹을 들이대. 남자랑 여잔 다른 거 몰라? 나중에 그놈들이 보복이라도 하면 어떻게 할 건데. 너 당분간 외출 금지고, 찜질방도 가지 마. 베스도 당분간 유정이 만나는 거 금지야. 전화로만 통화해. "  

" 야! 너 너무한 거 아니야. 니가 시엄마야 내 할아버지야. 왜 사사건건 사생활 간섭을. "  

"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해. 베스 알아들었죠? 전화로만 통화하고 유정이 바깥으로 불러내지 마. "

  

 유정은 기가 막혀서 숟가락을 내팽개치며 연신 흥분이었다. 왜 남의 자유까지 박탈하냐고. 차별이다 뭐다 끓어오르던 유정은 엄한 아영까지 붙들어 가며 넌 왜 가만있냐며 방방 뛰었지만 정작 호기심이 이는 쪽은 우진이었다. 유정에 비해 엄청나게 반발하고 반응하는 그. 거기다 유정의 상처난 팔을 보는데 그대로 튀어오른 우진을 본 아영은 직감했다. 이런 미묘한 반응과 심리를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았다. 경찰서에서의 난동으로 인해 우진과 유정만 방방뛰며 해장국집을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티격태격이었지만 아영은 빙그레 떠오르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참을 잘 걷나 싶더니 여자가 삐끗 하더니 악 하고 주저앉았다. 발목을 삔 모양이었다. 

아영을 먼저 아파트로 돌려보낸 우진이었다. 으이그. 우진이 돌아서서 다가가자 유정은 입술을 비죽 내밀면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괜찮거든?! 우진에게 쿠사리 맞은 일이 아직까지 분이 안 풀린 듯 우진의 손길을 거부해댔고, 우진은 발목이 부어오른 유정을 보더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발목에도 멍이 들어 있었다. 






내 이 개자식들을...입술을 깨문 우진은 울상이 된 유정을 보다 못해 아예 강제로 업었다. 이우진, 이거 안 놔! 내가 애야? 걸을 수 있단 말야! 유정은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자 쪽팔려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악..최악..

최아아악! 그러나 유정은 금세 파란만장한 밤을 보낸 덕분인지 따뜻한 우진의 등에 기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도착한 우진은 완전히 넋을 놓고 자는 유정을 업고 열쇠를 꽂았다. 간신히 운동화를 벗겨내긴 했는데 멍이 든 데다가 발목이 삔 그녀의 작은 발은 뚱뚱하니 부어 있었다. 팔에 멍이들고, 






심각한 상처는 아니라지만 예민한 그녀로서는 발목을 무리한 듯 인대도 늘어난 것 같았다. 이 미련곰탱이! 낮은 굽의 구두를 신는데도 내내 걸음이 비뚤어 발목을 자주 삐는 그녀였다. 오늘이 토요일인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자주 가는 한의원에 예약해야겠다 생각하며 지친 유정의 이불을 덮어준 우진은 잘 쓰지 않는 검은색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는 불을 끄고 아파트를 나섰다. 자정 무렵의 뉴욕경찰서를 찾은 우진은 소나무 등걸에 기대 서 있다가 얼굴에 상처투성이인 세 명의 불량배가 경찰서를 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에게로 서서히 다가섰다. 폭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는 이유로 사회봉사명령과 비싼 벌금을 물게 되었다는 게 형사의 말이었다. 

다가선 우진은 히히덕거리며 웃고 나오는 세 사람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뭐야, 뭐야. 안 비켜..? 불량배들이 모자를 깊게 눌러써 작은 얼굴이 더욱 조막만해져 표정도 채 보이지 않는 우진을 보자마자 급짜증이었다. 





그러나 우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무심하고 시크한 자세 그대로 이단 옆차기를 돌려 두 사내의 복부를 걷어 찼다. 몇번이고 아영에 의해 복부를 걷어차인 그들은 그대로 나동그라졌고, 좀 덩치가 있어보이는 한 사내가 이 미친XX..해대며 욕을 하면서 우진에게 덤벼들자 아예 우진은 그를 밀어붙여 업어치기를 해서 바닥에 쓰러뜨렸다. 다가서는 세 명을 단숨에 제압해버린 우진이 주먹을 우두둑 꺾자 세 명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형님! 하는 멘트를 날려야 했다. 우진은 표정이 보이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 니들의 첫번째 잘못은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거다. "  

" ..... "  

" 두번째 잘못은 그 건드린 '사람'이 다름아닌 내 여자였다는 거고. "  

" !!!!! " 

 

 우진은 덜덜 떨고 있는 사내들을 지나쳐 다시는 내 여잘 건드리지 말라는 멋진 멘트를 날려주었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얼마나 험악하게 손을 잡혔으면 팔이 멍이 들었으며, 주먹질 하다가 맞았을 수도 있었다. 얼마나 그 상황에서 놀랬으면 요새 뜸하던 발목이 금세 늘어나나 그래. 땀을 훔쳐내며 경찰서를 돌아 나오던 우진은 속상한 듯 이를 악물었다. 나쁜 만두 같으니. 

 

 

 

 

 

 

 

 

 

 

 

**

 딩동...딩동....! 

 

 새벽 무렵이었다.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켠 유정은 머리가 비죽비죽 새집이 된 채 침실에서 뛰쳐나와야만 했다. 나간다고, 나간다니까!!! 당연히 우진일 것이었다. 다리를 절뚝이면서 문을 열던 유정은 하품을 있는대로 했다. 이 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내일 병원 같이 가기로 했, 문을 연 유정의 눈 앞에는 검정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보냈나요? 입술이 떨리는 것과는 무관하게 유정은 자존심이 상한 채 입술을 깨물었고 검정 양복의 사내들이 말없이 다가서자 유정은 한 걸음 정도 뒷걸음질쳤다. 난 죄 지은 거 없어. 잘못한 건 내가 아니야. 정정당당하게 허락받겠어.

 

" 함부로 내 몸에 손대지 마. 내 아버지껜 내가 직접 가겠어요. 직접 내가 갈거라고 전해. 끌려 들어가는 자존심 상하는 짓 같은 거 하고 싶지 않고요. 강제로 끌고 갈 생각인가요? " 


 도도하게 돌아선 유정은 사내들이 무색할 만큼 당당하게 행동했다. 결국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절대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로렌스의 당부가 있기 때문도 있었다. 결국 대담한 유정의 한 마디 덕분에 사내들은 사흘의 기한만 줄 수 있다는 경고의 메세지만 남기고 아파트를 나서야 했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유정은 팔짱을 꼈다. 아버지의 반격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일부러 몰래 숨어살고 있는데도 경호원들을 보내 벌써 동태를 파악한 아버지라니. 도대체 왜 그렇게 그이를 반대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진이 천애고아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반대할 것이 없는데. 우진이 아버지가 그토록 잡고 싶어하는 미카엘 그린의 고문변호사라는 걸 알 리 없는 유정의 갈등은 깊어만 갔다. 

  

 

 

 

 


 며칠 동안 일이 너무 바쁘다 보니 아영을 챙기지 못했던 탓도 있었기에 학교 근처에서 스포츠 카 안에 있던 율은 10초에 한번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강 율 성질 많이 죽었다 진짜. 입술을 깨문 율은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얼굴을 붉히며 가던 여자들의 시선이 꽂혀도 내내 인상만 찌푸렸다. 수업 끝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함흥차사야. 리무진 갖고 오지 마요. 소문 나요. 나 진짜 평범하게 학교 생활 하고 싶은 사람이예요. 아영이 한 말이었다. 어디서 명령이야.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여자는 아마 세상에 진아영 하나 뿐일 것이었다.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율의 입가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거기다 자기가 까칠하다느니, 왕자병이 어떻다느니. 그러나 남자 존심도 있고 아영의 근사한 애인이 되어보이고 싶었다. 율은 입술이 타고 마음이 급했다. 





발을 동동 굴러 보았지만 이 꽤나 까칠한 아가씨는 내내 도도하게만 구셨다. 결국 학교 앞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마침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오는 아영을 붙잡을 수 있었다. 아영은 율과 율의 스포츠카를 보면서 적잖이 당황한 눈치면서도 애써 그 태연한 눈웃음으로 여긴 왠일이냐는 시선을 주었다. 저 눈웃음..투명한 시선도, 

예쁘장한 것 보다 사랑스럽고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동그란 눈동자는 율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아영의 눈웃음을 보는데 좀 속상했던 기분이 단숨에 날라가 버렸더랬다. 제법 쌀쌀해진 뉴욕의 거리에서 율은 동사할 지경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멋낸다고 휴고 보스 같은 건 입고 오지 말걸. 추워 죽겠어 진짜. 밝게 웃으면서 스포츠카로 온 아영은 빙긋 웃으면서 차문을 열어주었다. 다리도 튼튼한데 우리 걸어요. 영화 표 예매했어요.    




 도대체 왜 이렇게 넘어뜨리기가 힘든 거야. 뭐 잘났다고 이렇게까지 튕기는 거냐고. 율은 궁시렁거리면서 아영의 옆모습을 봤다가 다시 고개를 홱 돌렸다. 결국 그는 주차를 시키고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제길할..

너무 예쁘잖아! 얼굴을 안 봐야 돼. 얼굴을..성격은 완전 까칠인데 얼굴은 완전 영화배우니..얼굴을 안 봐야 돼. 얼굴을..그러면서도 율은 힐끔거리듯 뽀얀 강아지 같은 아영의 옆모습을 보는데 그대로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저 얼굴로, 저렇게 눈웃음을 해가면서 부드럽게 말해주면 얼마나 예쁘냐고. 어느새 영화관까지 다다른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줄까지 서서 기다려야 되는 거냐며 물어 보려다가 율은 참고 덜덜 떨었다. 아영은 따뜻하니 가을용 니트를 입고 머플러까지 했다지만 율은 멋지게 잘 보이기 위해 여름용 휴고 보스 정장을 입어 살 안으로 추위가 에이는 느낌이었다. 강 율 미쳤지. 그놈의 가오가 뭐라고! 






기분이 좋은 탓인지 공포영화 매니아인 아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공포영화를 채택한 율의 세심함에 놀랄 뿐이었다. 공포영화를 좋아하는지 몰랐는걸. 무슨 이유인지 율의 표정도 밝아 보였고 두 사람은 주말의 연인들 틈에 휩싸여 극장 안으로 향했다. 꿋꿋이 오늘 공포영화가 가져다 줄 사랑스런 스킨쉽을 기대한 율은 어둠 속의 극장 안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예고편과 CF가 끝나고 제목을 알리는 영화가 음산한 분위기와 함께 쓰여졌다. 스킨쉽을 기대하며 화면을 응시하던 율은 헉! 하는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피...피로 쓰여진 폰트가 극장 안을 지배했고 율은 가까스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재..재수없게 왜 피로 글씨를 쓰고 그래. 그러나 악몽은 그것이 시작이었다.

 

" ...어휴. 저기서 스너프 필름을 쓰면 어떻게 하나. 저거 봐, 저거 봐. 귀신 다 티나잖아. 분장 하고는. "

  

 속삭이며 아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때 공포물도 분석한 적 있는 그녀라 공포영화가 익숙했다. 즐기면서 보는, 호러영화 매니아였다. 그러나 아영과는 달리 율은 숨도 멈추어야 했다. 가슴을 쓸어내릴라 치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공포와 귀신들로 인해 율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연애를 안 하니 극장에 갈 일도 잘 없고 일에 치여살다 보니 영화를 안 본게 대다수였다. 그냥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 정도일 거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숨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비명들에 휩쓸려 같이 소리지르고 싶은 심정을 억눌렀다. 무엇보다도 아영은 아예 웃거나 진지하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포 영화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자. 참아야지...이것만 끝나면 되는...

  

" 헉! " 

 

 율의 나지막한 비명에 놀란 아영은 돌아보면서 자신의 손을 붙들면서 덜덜 떠는 율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 놀랬어요? 걱정 마요. 저거 다 가짜 피야. "  

" 가...가가가짜..."  

" 그럼요. 저기 저 귀신도 다 인형으로 만든 건데 뭘. "  

" 그...그..하하하..그렇...그러....흡! " 

 

 보스 괜찮냐며 물어대야 했던 아영은 율의 이마에 흥건히 고여있는 땀을 보고서야 웃음을 참기 힘들어졌다. 나 원..그가 왜 공포영화를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면서도 은근히 모른체 했던 그녀였는데 이렇게 호러영화에 약할 줄이야. 정말이지 간신히 아영의 손에 의지해 엔딩 직전까지도 율은 부들부들 떨었다. 

이우진 다 죽었어. 호러영화가 뭐 어째! 결국 율은 덩치에 비해 엄청난 겁을 자랑할 수 밖에 없었고, 엔딩신이 끝나자마자 극장을 나서야 했는데 크레딧이 내려가는 내내 들려오는 공포의 기괴한 배경음 때문에 몇번이고 발을 헛디디는 수모를 겪었으며 영화관을 나서서도 얼굴이 벌개져서 공포에 눌린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율은 그야말로 이우진을 저주할 수 밖에 없었다는 후문이었다. 땀에 홀딱 젖은 얼굴을 보던 아영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율의 이마를 닦아 내려 주었다. 여전히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율의 주먹에 힘줄이 돋았고 아영은 얼어 붙은 율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면서 웃었다.

 

" 이젠 집에 가요 보스. "  

" ...언제까지 보스라고 부를 건데? "  

" 그럼 보스를 보스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요? "  

" ...니가 내 휘하에 있는 조직원이냐? 보스라고 부르게. 일 대 일이라며. "  

" ....... "  

" 호칭 바꿔. "  


율이 눈을 부릅뜨자 곰곰히 생각하던 아영은 싱긋 웃었다. 

 

" 알았어 율아. "  

" 야! "  

" ...호칭 바꾸라면서요. 보스로 다시 할까요? "  

" ..................! "  


 할 말이 태산 같았지만 성질을 꾹꾹 누르고 있는 율을 쳐다보던 아영은 팔짱을 낀 손을 풀고 악수하듯 손을 내밀었다. 영문을 모르는 율은 아영을 쳐다보았으나 웃음을 짓던 여자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엄숙한 목소리가 되어 입을 열었다. 

 

세 가지 약속을 해 줘요.  

.....?  

일. 나를 위해선 어떤 무모한 짓도 하지 않을 것. 

.......!  

이. 앞으로 살인을 하지 않을 것.  


아영의 진지한 눈빛과 말에 율은 입을 다물었다. 이건 보스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해요. 순간 레오의 일이 떠올랐고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번째는 뭐지? 율의 물음에 아영은 부드럽게 웃었더랬다.

 

" ...삼. 꼭 내 앞에서는 웃을 것. "  

" ............."  

 

 집에 돌아가겠다던 아영을 애써 로스톤 저택까지 데려온 율은 급한 회의가 있어서 30분만 기다리라고 말한 참이었다. 회의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회의가 끝났을 때쯤엔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조직원들의 눈초리 때문이 아니라 아영을 펜트하우스를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데려다 줄 작정으로 방에 들어선 율은 슬리퍼를 신고 연한 핑크빛이 감도는 아영의 방문 앞에 섰다. 에이프런을 두른 메이드가 율을 보더니 아영에게 말하려고 다가가자, 율은 괜찮다며 쉿 하는 포즈와 함께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었다. 


조용히 하라는, 메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 밑으로 사라지자 율은 조용히 문을 살짝 열었다. 좋은 향기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특별히 주문한 실크 침대 옆 흔들의자에서 아영은 졸고 있었다. 하얀...수채화 속 투명한 그림처럼. 책을 읽던 중이었나. 취미도 그녀답다. 한올 한올..섬세하게 틀어 올려진 머리카락은 흔들의자에 앉아 졸기 때문인지 몇 가닥이 흰 목선을 타고 내려와 어깨 주변에 머물렀다. 책을 거의 다 읽어가는 중인 것 같았다. 율은 옆의 담요를 들어 책을 조용히 아영의 손에서 치우고 담요를 아영의 목까지 덮어 주었다.


「 ........」

 

 목까지 덮어준 율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 여자를 만났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흔들의자 바로 옆은 거대한 로스톤 저택정원과 분수대가 보이는 테라스였다. 그리고 흔들의자 뒤는 벽이었는데 율은 아영의 바로 뒤의 벽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림자까지..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 있어? 

 

 테라스의 창을 통해 나른한 저녁 노을이 들이비치고 있는 실내 구석 구석, 정원사가 틀어놓았을 법한 재즈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본디 음악하곤 담 쌓은 그라 무슨 노랜지도 몰랐지만 여자의 잠자는 얼굴을 닮았다고 여겼다. 키스는 하지 않는다, 그건 철칙이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쌔근 쌔근..

아기 토끼처럼 숨소리를 고르게 내며 잠이 든 그녀에게서...여자에게서. 아주 약간, 한 쪽으로 쏠려 있는 여자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한 상태였다. 고르지 못한 숨소리, 율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껴야 했다. 따뜻한 체온이 여자 주변을 맴돌고 있는데 율은 정작 눈도 손도 정지 상태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사지가 마비된 것 같은 경직감과 전신을 훑어내리는 고요함이 감돌았다. 마치,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인양 점점 아영의 얼굴을 찾아가고 있었다.


네가 소리내어, 물 소리처럼 찰랑찰랑, 거리며 다가오던 날이었어.. 

 

율의 손이 자리를 옮겨 여자의 고개 뒤 벽을 짚었다. 처음에 곧게 뻗어있던 율의 얼굴이 이윽고 천천히 각도를 더해 굽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기울어진 해가 여자의 고운 그림자를 한웅큼 앗아갔을 때, 

더 두리뭉실해진 그것의 잔여는 더해진 다른 하나와 함께, 한 곳의 지점에서 정확하고도 조심스럽게 맞닿아 있었다. 율은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체리 향기가 났다. 여자에게서...여자의 붓꽃 향기가 아닌, 따뜻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입술은 늘 건조하고 차갑다고 생각했는데..노을이 완전히 져버릴 때까지 율은 입술을 벌린 채 벽을 더듬었다. 그들의, 첫 키스였다. 

 

..그림자까지 아름다운 여자라고? 이제, 넌, 내 안의 유일한 <여자>가 되는 거야..사랑한다. 아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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