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폭우는 내 삶의 터전을 바꿔 놓았다. 그날따라 하늘의 채도가 낮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급해서 화장실 잠깐 들른 사이에 비가 쏟아지면서 오작교가 그렇게 빨리 철수할 줄을 예상이나 했겠나. 직녀 공주님도 참 무심하시다. 어떻게 시녀 한 명 저편에 툭 남겨두고 휙 떠나시나. 혹여나 발병이 걸리시지는 않으셨는지 걱정된다.

얼떨결에 머물게 된 견우 도련님네 고을도 어느덧 익숙해졌다. 과부 박 씨 댁에서 하숙을 하고, 고을 관아에 임시 청소 도우미로 채용돼 당장의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됐는데, 의외로 이곳에 빨리 적응하는 내 스스로가 신기했고, 그렇게 정착시켜준 인심 좋은 고을 사람들이 고마웠고, 어쩌면 천성이 왕실 시중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주5일 근무에 저녁과 주말이 보장된 삶은 작년까지보다 금전적으로 빠듯하긴 하지만 시간적으로 매우 여유로워졌다.

하지만 여유는 중독되면 따분하다. ‘계집애가 어디 집구석에나 처박혀 뒹굴고 있냐, 밖에 좀 싸돌아다녀보라’는 하숙집 주인장의 묘하게 계몽적인 발언에 못 이겨 고을 구석구석을 산책하러 다니는 게 어느새 취미가 됐다. 고을에는 내 또래가 거의 없는데, 그나마 동네 서당 다니는 애들이 시비 걸어오고 대충 대꾸해주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 아이들을 제외하면 웬만한 일손들은 상당수 고령화 되어있다.

“있었지, 니 정도 나이 되는 차암하고 똑 부러진 애들이.”

관아 배식 담당 아주머니가 말했다.

“한 아는 여서 일하다 전번 나으리한티 자알 보여서 그네 첫째 아드님한티 시집 갔고, 다른 한 아는……”

주위를 둘러보시더니, 나보고 귀를 가까이 대라고 손짓했다.

“그 나으리하고 눈 맞은 게 들통나서 나가 뒤져삐따.”

연초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슬슬 익숙해질 즈음이었다.


여기 마을 바깥 숲은 깊다. 그 속을 몇 번 헤집으면서 길을 잃은 적도 많은데, 보통 까마귀 소리가 들리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면 웬만해선 다시 마을로 나갈 수 있었다.

헤집다 보면 그 깊은 끝자락에 자리잡은 호수에 다다르게 된다. 처음으로 그곳을 보게 된 날은 노을이 반사된 수면이 반짝이며 주위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여 그것이 매우 숭고하게 느껴졌고, 이윽고 별빛이 총총히 박히기 시작했을 때야 비로소 내가 미아가 됐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감동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까마귀 소리가 대수냐. 온갖 짐승들 기어 나오는 소리가 고요를 뒤흔드는데.

그러던 중이었다. 건너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재빨리 근처에 있는 아름드리 뒤에 숨었다. 한쪽 눈을 빼꼼 꺼내어 살펴보니, 유난히 밝은 달빛 덕분에 그것이 사람임을 알아챘다. 다부진 남자가 발가벗고 있었던 것이다. 땀에 젖은 구릿빛 피부가 과장된 근육을 따라 쩍쩍 갈라졌고, 얼굴선은 날렵하고, 어딘가 고독해보였다. 정말 단순히 달빛이 밝은 걸로는 설명키 힘들만큼 그 이의 모습은 선명하고, 숨막히게,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목욕을 감상하며 나는 그가 바로 견우 도련님임을 알았고―물론 매년 직녀 공주님과 동행하면서 이미 여러 번 그를 보아왔기 때문에 보자마자 알 수야 있었지만 이것은 그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가뜩이나 혼란하던 마음은 추스르기가 힘들어질 정도였다.

그 강한 자극에 매료됐다는 걸 알아채자, 그쪽 별에 두 번 다시 못 돌아간다는 걸 확신했다. 확신이 들자, 호수로 걸어 나갈 수 있었다. 미역 감다 물에서 머리만 빼꼼 올린 그의 시야에 내 모습이 들어오고, 그쪽 시간만 툭 떼어놓은 듯 얼어버린 표정에 나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길을 잃어서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기집아가 뭘 머엉하니 헤벌레에 실실거리고 자빠졌노?”

열 살도 안 먹은 서당 둘째 가는 막내 사내애는 싸가지가 더럽게 없다.

“야야, 저건 필시 남자 문제여.”

서당 셋째 막내도 싸가지 현황은 마찬가지고, 얘는 눈치까지 빠르다.

“여기 남자가 우리 말고 어딨노? 슬마, 나한테 반한기가? 기분 나쁜디…….

“야이 씨발 이 대갈빡에 피도 안 마른 게 지 혼자 기분 개잡치는 상상하고 쪼개놓고 어디 남한테 지랄이노, 줘도 안 처묵는다 이 꼬맹이 새끼야.”

사투리가 이리 술술 나오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기서 남자라고 해봐야 저어이 견 머시기 말고 없잖나? 몬가? 맞나?”

얘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 그냥 내 수비력이 딸리는 건가.

“야, 우리 남자 대 남자로, 까놓고 털어놓제.”

서당 서열 뒤에서 둘째가 내 어깨를 붙들고 말했다.

“어까지 갔노?”


꼬맹이들 스스로는 환상을 싸돌아다니는 존재지만, 그들의 원기에 부딪힐 때 나름 강하게 감싸고 있던 낭만이 무력화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과연 내가 지금 휴가까지 내고 홀홀단신 먼 길을 떠나는 게 옳은 선택인지 갑작스레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저 계획하던 날의 설렘이 조금 엷어져서 그런 걸 거야, 라며 자신을 다잡고 발길을 재촉했다.

점심 휴식 때 사또 나으리 사무실에서 슬쩍한 자료에 따르면 오작교 건설업체는 산중턱에 있었다. 막상 산행길 입구에 서니 과연 여자 홀몸으로 안전히 오를 수 있을지 불안이 앞섰다. 그러던 찰나, 까마귀 한 마리가 입구 앞 나무 둥지에서 날아와 발 앞에 나앉더니, 날개를 펴 정중하게 길을 안내했다.

“여기 관리인이세요?”

“당직입니다.”

대답을 기대하진 않아서 놀랐다.

“초면에 무작정 찾아뵙게 되어서 걱정 많이 했는데,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까악까악하는 울음소리와는 또 다른 선비다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뜸을 좀 들이더니 또 말했다.

“초면은 아닙니다.”

“어머, 저 아세요? 제가 공주님을 모신 건 딱 한 번 뿐인데……”

“사실 좀더 빨리 찾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만약 맹수나 강도가 들이닥쳤을 때 고작 까마귀 한 마리가 뭘 할 수 있겠냐마는, 말벗이 있는 것만으로 든든한 산행길이었다.


“견우 도련님이시죠?”

목욕하는 한창 웬 여자가 나타나 길을 잃었다는 거리 춘화극에서나 들을 법한 얄팍한 대사를 친 그날 밤. 나는 그가 내 정체를 아는지 궁금했다.

“저 기억하세요?”

도련님이 고개를 젓자 서운한 감정이 북받쳤다. 그는 이미 물에서 올라와 옷을 갈아입었다. 갈아입는 도중에 우리는 서로 뒤돌아보기로 했는데, 그의 각이 지고 윤곽이 뚜렷한 등짝을 감상하다가 중간에 시선이 마주치는 바람에 분위기는 훨씬 어색해졌다. 좋은 감상 한 걸로 서운함을 없애기로 했지만, 오히려 그 감상 대상자가 나와 멀리 있다는 걸 확인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그의 인도를 받아 숲에 덩그러니 놓인 오두막에 머물렀다. 방을 아담하게 비추는 촛불이 어찌나 밝게 느껴지던지.


“아, 그래서 어디까지 갔냐고!”

“새끼, 말버릇 보소. 내가 왜 고걸 사방팔방 알려야카노! 애초에 견 머시기 도련님하고 만났다고 말도 안 했다카이!”

“도련님이라 부르는 데서 이미 따악 그림 그려진다 아이가.”

“씨이발 동네방네 소문 다 나서 내 나가 뒤지게 될 때 느그들 꼬옥 끌어안고 자유낙하 할 끼다.”

그렇게 받아치자 꼬맹이들 표정이 굳어졌다. 오호라, 이 마을의 맹점이렷다.

내가 있던 곳의 족쇄는 법에 구속된 것이었다면, 고을에 젊은이가 우리 밖에 없는 이곳의 족쇄는 좀더 은근하고, 운명적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채울 것인가, 아니면 그저 사유의 문제인가. 이 두근거림을 시장바닥 이야기에 빗대어 해석하기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역시 난 왕실 시중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왕실은 어째서 나를 죽어라 찾아다니지 않는 걸까. 죽어라 찾아다닐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런 것인가. 어쩌면 그럴 기력조차 없는 것일까.


“이야기는 많이 전해 들었어요. 장거리 연애라니 무척 힘드시겠어요.”

오두막에서 나눈 대화다. 그때 그가 뭐라 답했더라. 아무 대답도 안 했었나.

“정말 이렇게 만나 뵈어서 영광이고, 오랜만에 이렇게 또래를 만나니까 너무 설레는 거 있죠.”

그러자 자기 나이가 훨씬 많을 거라고 얘기했나. 에이, 그 정도 밖에 안 나는 게 어디예요, 하고 내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마 직녀 공주님을 만나셨을 때 도련님 감정이 지금의 제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조금 더 과감하게 그의 가슴팍을 향해 손과 무릎을 짚고 한 발짝 한 발짝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아마 지금의 당신도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확신이 들거든요…….”

왼손으론 그의 어깨를 붙잡고 오른손으론 내 가슴에 손을 넣어 뒤적였다. 몸 좋은 근육질 사내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게 심장에 와닿았다. 나무용 도끼는 창고에 넣는 걸 확인했다. 장도리는 집 밖 아궁이에 있다. 나는 가슴에서 단도를 꺼내 그의 가슴팍에 갖다댔다.

“당신이 알고 올린 거잖아요, 다리.”

그가 힘으로 덤벼들지 않는 이유는, 유난히 많은 까마귀 울음소리를 눈치챘기 때문일지라.


“그 날은 기상 악화 관계로 어쩔 수 없이 긴급히 철수해야 했던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는 게 저희 공식 입장입니다만, 사실 그것은 고의였습니다.”

등산로 가운데 놓여있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쉬고 있을 때 당직 까마귀가 말했다.

“왜죠?”

“당신이 해우소에 가려고 이쪽으로 넘어왔기 때문이죠.”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

“임금님께서 당신을 유배 보내라는 명을 내리시기도 하셨고, 마침 절호의 기회라 그랬습니다.”

이해가 더 안 간다.

“매해 저희 건설 자금은 왕실에서 나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왕실의 입김이 강합니다.”

“그러면 그걸 어째서 제게 말씀하시는 거죠?”

당직 까마귀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결심한 듯 말했다.

“왕실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왕실의 지방 부흥 계획 일환으로 고령화 되어 가는 시골에 생산 가능 인력으로서 나를 말없이 보냈다고 추정해보자. 어쩐지 자유로 위장한 운명적인 족쇄다 싶었다. 여기에 직녀 공주님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왕실로서도 직녀 공주님께 견우 도련님을 단념시킬만한 젊은 여자 하나를 보내면, 젊은이 하나 없는 고을에서 그가 1년동안 즐길 바람 상대로는 충분할 뿐더러, 1년에 한 번 있는 그 행사를 위한 인건비도 아낄 수 있겠고. 견우 도련님의 입장에서, 직녀 공주님을 만났을 때 그 사랑의 감정이란 같은 또래의 이성을 봄으로서 생겨난 충동이 아니었을까.

파악한 이 전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효율 중심의 지령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쪼잔하고, 멋없고, 마초적이다.

그저 과도한 피해망상일 뿐일까?


그 다음 날, 나는 숲 더 깊숙이 감추인 절벽에 찾아가 짧게 묵념한 뒤 거기 걸터앉았다. 아래는 끝이 안 보이는 나락이었다.

그가 필요로 한 건 공주님이었지만 원한 건 그녀의 정체성이 아니었다. 왕실 역시 공주님을 보내고 싶지 않다. 이해 관계가 들어맞는 쪼잔한 거래. 기왕 내가 화폐가 되었으니, 체계를 흔들 기회가 자꾸만 엿보인다.


“왕실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당직은 속삭였고, 나는 주위를 둘러본 뒤, 미소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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